사순절에 새기는 바울의 복음! (롬 1:1-7)
우리는 지금 사순절 중간에 와 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보내는 기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로 연관됩니다. 이 기간은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 고난에 동참하려는 신앙적 결단은 매우 귀한 일이며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 교만을 꺾고 겸손한 믿음을 가짐으로 고난을 통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부터 주일을 뺀 40일을 지키는 절기로 성경에 40은 광야의 40일 간의 예수의 금식, 시내 산에서의 40일간의 모세의 사건, 무덤 속에 40시간 동안 계신 예수님 부활에서 승천까지의 40일로 나옵니다. 40은 고난과 갱신의 상징적 기간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갈2:20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그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 ◀제목 소개!▶
사도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칠 무렵 고린도라는 도시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 로마서입니다.
바울은 로마에는 한번도 가본 일이 없지만 로마를 그토록 가보기를 원했던 것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복음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방문하고 싶어서 로마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사실 로마서는 16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구원의 도리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위대한 책입니다.
'슈페너'라는 성경학자는 '성경을 하나의 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보석'에 해당한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서는 장수로는 16장, 절수로는 433절로 그리 분량이 많진 않습니다. 그러나 4세기 어거스틴은 롬13:13-14절의 말씀을 통해서 타락한 생활을 버리고 회개함으로 기독교에서 사도 바울 다음가는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16세기 독일의 마틴 루터는 롬1: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잃어버린 기독교를 개혁하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존 번연은 핍박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로마서를 묵상하다가 환상을 보고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18세기 영국의 요한 웨슬레는 자기 열심을 가지고 살다가 완전한 실패를 경험했을 때 루터가 쓴 로마서 강해 서론을 읽고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고 영국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조오지 워싱턴'이 로마서를 읽고 큰 은혜를 받아 그 말씀 위에 미국을 건설 할 수 있었습니다. /아멘!/
로마서의 전체의 총 주제는 17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이 말씀 속에 '의인이 되는 길, 곧 어떻게 하면 의인이 되느냐?' 의인이 되는 길을 가장 강조하여 기록한 책이 바로 로마서입니다. /할/
1. 바울은 복음을 위해 '종'으로 '사도'로 택함을 입었습니다(1).
바울은 자신을 두 가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다른 하나는 사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①여기 종이란 고백은 매우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그게 뭐 대단한 말인가?'라며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종이란 헬라어로 '노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지금은 노예가 없으니 노예가 얼마나 천한 신분인가를 우리는 실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로마인구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6천만 이상이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노예는 오늘날 공장의 기계나 다를 바 없는 생산수단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 이런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고 합니다. '노예하고 당나귀는 똑 같은데, 노예는 말을 할 줄 알고, 당나귀는 말을 하지 못한다.'
⑴그 당시 노예는 세 가지 유형으로 생겨났습니다. '전쟁에서 포로가 될 때와 부채를 갚지 못할 때와 나면서부터 노예가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다만 주인이 불쌍히 여겨 해방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값을 주고 다시 해방시켜 주는 방법 외에는 노예에서 풀려날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본래의 이름은 사울 '큰 자, 위대한 자'란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새사람이 된 사울은 그의 이름을 바울 '작은 자'로 바꿨습니다. /할/
⑵종이란 고백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그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당시 종의 특징은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인을 위하여 살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인의 뜻대로 사는 자이며, 자신의 소유권이 없으며 모든 소유는 주인의 것입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이런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6절에서도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고, 14:8절에서는 자신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할/
▶프랑스의 나폴레옹의 군대가 모스크바를 점령했을 때 일입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직접 전선을 시찰했는데 농부 한 사람이 밭에서 태연하게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피난을 했는데 그대는 왜 가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자 그 농부는 '아니 내 나라, 내 농토에서 일하는데 무엇이 겁이 납니까?'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나폴레옹은 탄식을 하며 '이 사람의 신분을 보장해 주라'고 지시합니다.
그러자 부하 한 사람이 벌겋게 달군 쇠로 그 팔목에 N자를 새겨주었습니다. 농부가 '이것이 무슨 표냐?'고 묻자, '네가 나폴레옹 페하의 소속이 되었다는 표식'이라고 하자, 그는 옆에 있는 도끼를 가지고 자신의 손목을 사정없이 내리치면서 큰 소리로 '나는 침략자 나폴레옹의 소속이 아니다. 러시아 황제의 소속이다'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이런 소속감이 중요합니다. /믿/ 우리는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나의 주인이십니다.
⑶우리는 적어도 세 가지는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눅9:23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나는 주인이 아닙니다. 송두리째 주인의식을 포기해야 합니다. 생명도, 시간도, 재산도, 자식도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믿어집니까?/
㈁제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가야 합니다.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에게 있는 것은 전부 네 것이 아니다'라는 의식입니다. 십자가는 죽임입니다. 죽은 자가 무엇을 가지고 갑니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나를 따르라!'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한 마디로 주인의식, 생존권, 소유권을 포기하라는 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예수의 것, 주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종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믿어집니까?/
⑷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전6: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고 롬14: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할/
얼마나 철저한 종의 선서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한 사람도 우리 가운데 들어 있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억지로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이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던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바치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⑸종은 신구약 성경에 영광스러운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출33:11절에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가리켜 수종자'라고 했고, 민12:8절에 '여호와께서 모세를 가리켜 종'이라고 하셨고, 삼상3:9절에서 사무엘이 기도하면서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또 시인은 시116:16절에서 '나는 주의 종이니이다. 고난과 사망에서 건지신 주를 찬양'한다고 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이사야, 다니엘, 다윗은 모두 왕, 제사장, 선지자였으나 다같이 '주의 종'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종으로 충성했습니다.
⑹종의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종은 자신의 소유가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육신, 건강, 재산, 명예, 지위, 자녀 등 이 세상 우주 만물이 다 주의 것입니다.
㈁종은 자유와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범사를 주인의 뜻에 따라서 행하는 자입니다. 마8:9절에서 백부장의 고백을 들어보자!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우리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하셨습니다. /할/
㈂종은 충성하다 죽는 것입니다. 고전4: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내가 무슨 직책을 받았느냐? 내가 할 일을 얼마나 받았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받은 것으로 얼마나 충성하느냐가 문제입니다.
⑺종의 모든 생활은 주인이 책임져 주십니다. 예전 양반 집 머슴들에게 주인은 때마다 더운밥을 꼭 해 먹이고, 명절 땐 새 옷 사 입히고, 또 쇠경(년봉)을 줍니다. 주인은 종이 행한 대로 진실하게 보상해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25:14-30절은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게 충성했더니 남긴 대로 자신들이 도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잔치에 참여 받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른 종은 한 달란트 마저 빼앗기고, 밖으로 쫓겨 이를 갈며 슬피 우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갈1: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종,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종, 우리 모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한국 초대 교회사를 보면, 전북 남원에 어느 교인은 한 집안의 하인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조상들의 무덤을 지키며 제사하는 산지기 일을 하면서, 논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어 신앙이 좋아지자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부가 의논을 하고 문중의 어른을 찾아가 '예수님을 믿고 보니 제사행위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일임을 알았습니다. 논과 집을 내어놓겠습니다' 어른은 노발대발,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 길로 산에 올라가 움막을 치고 살아가면서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찬송을 하면서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5년 후 집과 논 8마지기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보라! 사람의 종이 되었을 때는 자유도 없고 재물도 없었지만, 주님의 종이 되니 자유도 얻고 재물도 얻었다'고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초대교회 신앙인의 모습을 교회사에 소개했습니다. /할/
②사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 '사도'(아포스톨로스)라는 단어는 파견된 사람이나 보내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도는 한 나라를 대표해서 다른 나라에 보내진 대표자요, 대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했습니다. 사도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파견을 받은 전권대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 당시 12제자를 말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다른 여러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즉 저와 여러분들이 됩니다. /아멘!/
바울이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결단이요, 자신의 헌신이요,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부르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이 '부르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택적 교리를 말합니다. 이 부르심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르심, 소명이라는 것은 신앙생활에 능력을 부어주며, 생기에 넘치고,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할 때 바로 그것은 능력입니다. /할/
여기 사도란 '부르심을 받은 자'란 뜻으로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소명'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이 소명의식, 즉 부르심을 받았다는 확실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할/
'받아' 여기서 받았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가 없었음을 전재로 한 말입니다. 자신이 사도가 되고 싶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자신이 목사가 되고 싶어서 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전에는 직업순위 상위로 랭크된 일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직업으로 택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죽이려고 체포 하로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습니다. /할/
③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종이다', 동시에 '나는 사도다' 이것은 다 부르심의 역사요, 선택의 역사요, 하나님의 강권적이고 주도적인 역사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씀과 '택정함을 입었다'는 말씀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⑴왜 그를 불러 주셨고, 택정해 주셨는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할/
⑵여기 '하나님의 복음'이란 '하나님에게서 온 복음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머리로 만든 철학적인 설화도 아니고, 실험을 거듭해서 만들어낸 과학적인 발명품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로써 온 복음이란 말입니다. /믿/
복음이란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란 말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식은 오늘은 기쁘다가 내일은 슬픔과 탄식으로 바뀌는 소식을 종종 듣게 됩니다.
▶중국 고사에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에서 야생마를 잡아 왔을 때 그 마을 사람들이 횡재했다고 했으나, 그 사람 아들이 그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 때문에 그 집이 망했다고 합니다. 그 아들 다리는 치료했으나 절었습니다.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들은 다리 때문에 군대를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말 때문에 아들이 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군대 잡혀간 그 동네 아들들은 모두 전쟁의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판단은 상황 속에서, 환경 속에서 그때마다 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도 기쁜 소식이고, 병석에 누워있는 사람에게도 기쁜 소식이요, 쫄 닥 망한 사람에게도 복된 소식입니다. /믿/
'하나님 안에서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할/ 바울은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택정함을 입었다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택정'이란 말은 '갈라놓다, 구별되다'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천국 인으로 갈라놓고,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죄인 속에서 의인으로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영 벌받아야 할 자리에서 영생을 얻은 자로 구별했다는 것입니다.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으로 구별해 놓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선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선 대통령이 자신을 부르기만 해도 영광이라고 난리 법석을 떠는데, 하물며 창조주 되시며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았으니 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권사로, 집사로, 성도로 택해 주셨습니다. /할/ 얼마나 감사합니까? 소명감에 불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2. 바울이 전한 복음은?
①하나님이 선지자들로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2).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이 알든지 적게 알든지 내가 아는 복음을 확신 있게 말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합니다. 이 단어만이라도 두 눈에 힘을 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아멘!/
본 로마서에서도 복음에 관하여 기록된 내용이 약 60회 가량 나옵니다.
⑴이 복음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죄에 빠진 인류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급한 것은 먹는 것과 입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건져내는 것입니다. 죄에 빠져 죽어 가는 인생들을 먼저 건져낸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과 사귀면서 살게 해 주셨는데, 그만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을 반역함으로 죄 속에 빠져 하나님과의 사귐이 단절되어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의식주문제보다 정치나 문화보다 죄와 사망의 문제입니다. /믿/ 그렇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류의 근본문제가 되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롬8:2)을 말합니다.
⑵바울은 이 기독교 복음에 대하여 고전15:1-4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정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복음이 없습니다. 예수가 없이는 어떠한 교파나 교단, 어떠한 철학에도 복음은 없습니다. 이 복음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석가처럼 도를 통해서, 자시의 수양을 통해서, 혹은 공자처럼 공부를 많이 해서 위인이 된 것이 아니며, 오직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편에서 일방적으로 택하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지자를 통하여 그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예언대로 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4천년 전부터 여인의 후손으로(창3:15), 유다 지파에서(창49:10), 처녀가 잉태하여 구주가 나실 것을 분명히 예언하고 있습니다(사7:14). 미5:2절에 보면 장소는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마1:21절에 예수란 이름까지 예언했습니다.
또 시22:1-3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대해 미리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치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마27:46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시22:18절에서는 '원수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 뽑고,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 당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5: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내가 증거 하는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방하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옛적부터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서는 것은 옛적부터 내려온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게 될 때 가장 확실할 것입니다.
요즘 이단들이 너무 극성을 떨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성경 말씀대로가 아니고 자신을 따르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설을 믿으라고 합니다. 성경의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몇 절 뽑아서 성경을 왜곡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박태선이는 자기가 자칭 '예수다, 감람나무다'라고 했지만 죽었고, 문선명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실패한 것이고, 자기의 피를 받아야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하면서 피 갈음의 교리를 통일교 원리 강론으로 만들어 성경을 왜곡하고, 많은 사람들을 꾀어 돈과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망하고 무너지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요즘사람들은 복음을 육신적인 것으로 바꿔서 기복신앙을 부르짖습니다. 돈 벌고, 출세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들어주시는 하나님으로 미신화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엄격히 말해서 복음이 아닙니다. 사실 예수를 잘 믿으면 재물도, 출세도, 성공도,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의 진수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신앙생활을 잘 하면 하나님이 보너스로 주시는 축복입니다.
⑶그럼 복음이 무엇입니까? 요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습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믿/
②다윗의 혈통에서 오신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으로 오셨습니다(3-4).
'이 아들로 말하면' 이 아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사신 것,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는' 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킵니다. 요1: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왜 육신을 입고 오셨을까요? 인간의 죄 값을 담당하시려고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 때문에 죄 없는 사람이 그 죄를 대신해서 죽어줘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원죄를 안고 태어났기 때문에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삼하7:16절에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의 혈통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던 그 메시아를 말합니다.
마1: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 예수의 세계라' 예수 그리스도의 양부인 요셉은 다윗의 혈통이며, 또 그 모친 마리아도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적인 혈통은 다윗의 혈통입니다. 그리고 막10:47절에서 소경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이여!' 부른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 예언 된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 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3-4절에서 두 가지 대조가 나오는데 하나는 '다윗의 아들'과 4절에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시라는 점을 가리킨 것이고, 다음으로 3절에서 '육신으로는' 인성과 4절에 '성결의 영을 따라'는 신성으로 부활 이전의 사역과 부활 이후의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부활 이전에는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담당하셨다면 부활 이후에는 만유의 주로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예수님의 부활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사망 권세를 이길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
이 땅에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습니다. 힘이 센 장군들, 권력을 쥔 황제로도, 부자로도, 영웅들도 수 없이 왔다 갔지만, 그 어떤 사람 한 사람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만이 첫 부활의 열매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본문에서 복음의 완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석가도, 공자도, 마호메트도 모두 자신의 구원의 도리를 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원의 도리만이 확실하고 유일한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죽음에서 다시 사신, 그러니까 부활로써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을 믿는 것은 헛것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위대하고 능력이 있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부활 때문입니다. /믿/
롬6: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단정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죄로 인하여 부활하지 못합니다. 공자도, 석가도, 박태선도, 마호메트도 사후에 다시 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죄인도 아니요, 더러운 영이 아닌 성결의 영이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세상의 구주이심을 사실적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확실한 복음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불의한 것과 추한 것, 우리의 모든 육체의 연약함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는 날, 우리의 모든 죄, 연약, 추함, 인간의 모든 질고와 아픔, 괴롬이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들은 새로운 성결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예수님께서 마16:4절에서 요나의 표적을 중요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있다가 살아서 다시 나온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표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 밖에 다른 표적을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십자가와 부활이 가장 큰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 확신을 가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으나 그것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게 하는 보조적인 표적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표적을 아무리 많이 보여주어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독교가 위대한 것은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수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예수의 이름이 갖는 귀한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은 재벌의 이름이, 어느 학자의 이름이, 배우의 이름이, 그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의 이름이 큰 의미가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위력을 가진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할/
초대교회 때, 제일 위대했던 이름은 로마 황제의 이름이 아닙니다. 행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불쌍히 여겨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명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것을 본 군중들이 솔로몬 행각에 모였을 때, 베드로는 이 기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알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능력 있게 증거 하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신을 했습니다. /할/
초대교회의 사도 베드로가 가장 크게 사용한 무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할/ 행4: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석가도 있고, 공자도 있습니다. 우리 큰집은 원불교를 믿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큰누나가 저한테 말합니다. '어느 종교나 진리는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답답한 소리입니다. 여러분! 어찌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진리가 같습니까? 무지한 사람들이 몰라서 지껄이는 소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천하의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준 바가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생명 그 자체입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일반종교는 자연종교입니다 만은, 우리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 생명의 종교입니다. 이 부분을 확실히 믿으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행4:29-30절에 보면, 초대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났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적의 역사는 오늘도 계속됩니다(히13:8). /믿/ 막16:18절에서 예수 이름으로 뱀을 집어낸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우리는 뱀 같이 무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사업을 시작할 때 뱀 같은 사람 하나 잘못 들어오면 회사가 망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으면 뱀은 집어 낼 수 있습니다.
또 막16:18절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삶의 도처에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때 예수의 이름으로 독을 뽑아내십시오. 또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에게 손을 언은즉 나음을 입으리라!'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입니다. /할/
3. 우리 모두 그 이름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5).
교회 직분은 누구로 말미암아 받은 것입니까?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로 말미암아,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준 직분의 귀중함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세상의 직분도 귀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직분을 나타내고, 자랑하고, 뽐냅니다. 또 그 자리를 차지(유지)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은 세상 적인 직분보다 더 귀합니다. 세상의 직분은 올라가다가도 떨어지고 죽어버리면 말짱 꽝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직분은 하늘나라에 가서도 상급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경동교회에서 집사 안수식이 있던 날입니다. 안수 받은 집사 부인이 교회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를 '너희는 모를 거다. 집사 직분이 도지사보다, 국회의원보다 높단다. 왜냐하면 집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직분을 주셨습니까? '그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오직 예수, 오직 주님을 위하여, 오직 교회를 위하여 일하라고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믿/
①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입니다(6).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너희도 이방인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방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들을 우리 주님이 불러 주셨습니다. 누구의 것으로 불러주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렇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입니다. /믿어집니까?/
벧전1:19절에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우리 몸이 주님의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 몸의 주인이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몸을 마음대로 죄짓게 하면 안 됩니다. 주인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먼저 주께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요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18:20절에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고, 마23:37절에서는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우리도 품어주시겠다'고 했으며 시17:8절에서는 '나를 눈동자 같이 지켜주신다'고 했고, 마10:30절에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니 얼마나 우리를 향하신 관심이 큰지 모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6:39절 하반절에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②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 속에 사는 자입니다(7).
⑴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잡니다. 어떤 사랑을 입었습니까? 요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십자가에 내어준 사랑입니다.
롬5: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할/
⑵아무나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만이 될 수 있습니다. /할/ 또한 성도란 '거룩한 이름'이란 뜻이고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교회를 성전 즉 '거룩한 집'이란 말입니다. 세상에 속한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집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민 중에서 우리를 따로 선택하여 거룩한 무리고 선택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성도라고 합니다. 또한 성도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 바쳐진 자'란 뜻도 있습니다. /아멘!/ 그렇다면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베드로 사도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찌어다'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멘!/
사랑하는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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