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요 3:1-8)

by 【고동엽】 2022. 2. 10.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요 3:1-8)

 

어느 날, 한 예쁜 집사님이 누군가를 전도했습니다. 그때 전도 받던 여자가 말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예뻐요?' 그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예뻐져요. 저도 원래는 얼굴이 기미로 뒤덮였는데 예수 믿고 기미가 다 빠졌어요.' 그 말에 이 여자가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외박을 하는 바람난 남편 때문에 자신의 얼굴에 기미가 그칠 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예수 믿으면 예뻐진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처음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배드리면서 자기 생애 처음으로 마음껏 울었습니다. 그날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늘 남편을 증오하며 살다가 얼굴까지 망가진 자신의 비참한 삶을 회개하고 그 날 그녀는 다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지금처럼 살지 않겠다. 남편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고 예수 믿고 살겠다.'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예배에 열심히 참석했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얼굴의 기미가 벗겨졌습니다.
그 후 한 달만에 바람난 남편이 옷을 갈아입으려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즉시 욕설이 나갔습니다. '당신 왜 들어왔어! 여기가 세탁소야!' 그런데 그 날은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그동안 잘 있었어요? 어서 오세요' 남편은 10년 만에 들어본 아내의 친절한 말에 너무 압도될 정도로 놀랐습니다. 그런데 말뿐만 아니라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음식을 얼마나 정중하게 주는지 정말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성령께서 이분을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그 날밤 남편은 자면서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사람이 죽기 직전에는 저렇게 침착해지는 경우가 있다는데 오늘 저녁 자살하려고 하나? 오늘 자살하면 내가 덤터기를 다 쓸 텐데 큰일났네' 남편은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걱정하며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다행히 그 날 저녁에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그가 집을 나서는데 또 아내가 밝고 편한 얼굴로 90도 각도로 인사하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어디에 있든지 편하게 있다가 오세요' 그 인사를 듣고 집에서 나왔는데 '편하게 있다가 오라!'고 하니까 더 편하지 않았습니다.
직장에 가서도 걱정이 되고,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이제 자살하려고 마지막 인사를 한 건가?' 그리고 12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어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까 미움은 다 사라지고 미안함만 생겼습니다. 겁도 나고 일손도 잡히지 않아서 오후에 집에 와 봤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여전히 밝은 모습으로 맞았습니다. '여보! 왜 지금 이 시간에 오세요' 그런 아내의 모습이 너무 이상해서 남편이 둘러대며 말했습니다. '뭐 좀 찾으러 왔소. 그런데 당신 요즘 무슨 좋은 일 있소?' 그러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예, 한 가지 아주 좋은 일이 생겼어요. 제가 요새 좋은 분을 만나고 있어요.'
그 말을 듣고 남편의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남자들은 자기는 바람 내도 아내가 바람 내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남편이 정색을 하자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떳떳해요. 혹시 시간이 있으면 오늘 저녁 그분 만나는데 함께 갈래요?' 그래서 그 날 저녁 10년 만에 함께 외출해서 수요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나오면서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이제 당신도 예수 믿으세요. 저도 최선을 다할게요.'
그때 아내의 모습을 보니까 너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마음도 달라졌습니다. '내가 이렇게 교양적이고 착한 부인을 놔두고 어디로 가나?' 그때부터 그 남편은 더 이상 외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후에 직장에서 가정문제로 고민하는 한 부하 직원을 보고 말하기를 '자네 부인 교회 다니나?' '안 다니는데요' '빨리 교회로 보내!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돼!' /할/
여러분! 교회 다닌다고 다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 받고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면 새로운 인격자가 됩니다. /할/ 오늘 거듭남의 이야기입니다. ◀제목 소개!▶

 

영국의 유명한 '죠지 흿트필드' 목사님이 오늘 이 본문으로 본 교회에서 300번 정도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설교가 지루하게 느껴진 성도 한 명이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같은 설교를 자꾸만 하십니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거듭나기 위해서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대화의 말씀이 열한 번 나타나고 있는데 그 중에 첫번째 대화가 본문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에 사용되어 있는 말은 단순한 것 같으나 신학사상은 극히 심오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예수님과의 대화는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몇 일 남지 않은 시기에 대화 이여서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또 사석에서 만났던 사람들 주에서 가장 저명한 인사에 해당될 만큼 신분이 높은 그런 사람입니다. /할/


①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인가?
니고데모는 대단한 명문가 출신입니다. 그는 최고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유대나라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 70명의 공회의원 가운데서도 특별히 인품이 뛰어나고 발언권 또한 막강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현실과 안일하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문제와 부딪쳐 사건을 해결해 나가려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공회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결같이 증오와 질시와 감정을 가지고 그 어떤 꼬투리라도 잡아서 예수님을 비판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동료 공회원들과 무분별하게 어울리지 않고 예수에 대해 독자적으로 어떤 결론을 얻어보고자 스스로 노력했던 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니고데모가 야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 당시 작은 나사렛 마을에서 천한 목수 일을 하던 시골 청년에게 니고데모와 같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직접 찾아온다는 것은 대단한 뉴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체가 있고 학력 수준이 높을수록 자기 체면을 더 내세우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지체 높은 니고데모가 낮고 천한 나사렛 목수출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습니다. 또한 대단한 겸손이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무슨 연고로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②그의 관심은 어디에 있었는가?
2절에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의 첫 인사말에서 우리는 그의 주된 관심이 오로지 표적과 이적에 쏠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가 기대한 것보다 전혀 뜻밖에 대답을 하십니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이 말씀에 니고데모는 대단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반문을 했습니다. 4절에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니고데모는 대단히 심각해졌습니다. 그의 머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같은 말씀을 반복할 뿐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5-7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예수님은 '거듭나야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 이 두 가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대화 소통이 되지 않은 것을 매우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안은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육적으로만 생각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영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와 불신자의 갭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 사이에 이와 같은 매울 수 없는 갭이 작용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겉으로 보기에는 결점이 없는 완벽한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살피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흔히 있는 자연인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사람의 표준에서는 니고데모가 합격자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표준에서는 분명히 불합격자입니다. /할/


③그럼 어떤 점이 예수님의 안목에 빗나가는 문제였을까요?
자기의 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니고데모는 자기 의를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교 전통을 이어받은 명문 집안에서 성장하고 머리도 좋았습니다. 또 안식일을 반드시 지키고 십일조를 분별해서 바칠 뿐 아니라 며칠에 한번 씩 반드시 금식을 하는 등 구약 성경에 기록된 율법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철저한 신앙의 노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바리새인 교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은근히 자기 신앙을 자부하고 있는 사람으로 자기 의에 도취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신앙이 최고야! 누가 내 신앙을 따라 올 수 있을까?' 하는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점이 예수님의 보시기에 결격 사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표준과 사람이 보는 표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니고데모의 후예가 되어서 그를 따라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 같은 양심적인 사람이 어디 있어? 나만큼만 양심적으로 살라고 그래, 나 정도만 하나님께 감사생활 하는 자도 없어' 이런 은근한 자부심을 가지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이 자기 의에 도취된 사람입니다. 예수님 믿는 가정에 태어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착각입니다. 자기 의를 들고 나오는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을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봅시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보십시다. 고전1:27-29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세상 적으로 볼 때 배운 사람, 똑똑한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을 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련하고 약한 자를 택하십니다. 그러한 자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혜롭게 하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세상 적으로 지혜 있는 자들이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아멘!/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위에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되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적으로 뛰어나지 못하고 약할지라도 낙심하고 좌절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 문제는 우리가 '주님의 능력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할/
▶유명한 철학자요, 변증학자며 캠브리지 대학교수인 '루이스' 박사는 오랫동안 예수님 문제로 진통을 겪은 사람이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어릴 때부터 주일학교에 다니며 주님에 대하여 귀가 아프게 들었지만 머리가 커지고 자의식이 생기면서부터 기독교에 대해서 회의를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를 떠나 몇 십 년 동안 세상에서 제 마음대로 생활을 했답니다.
게다가 세상의 학문에 심취하여 교만하게 예수님을 멋대로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후련하지도 않았고, 늘 갈등과 회의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 대한 문제 때문에 수년 동안 진통하고 고심했었는데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할/
어느 날 산책길에서 그는 우연히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찬송가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교회를 향하여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18세쯤 보이는 소아마비에 걸린 소녀가 얼굴에는 환한 웃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드랍니다.
순간 루이스 박사의 가슴속에 그래 맞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살아나셔서 나를 하나님 앞에 인도하는 구세주가 아닌가?' 이 사실이 막 깨달아지면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자신의 교만과 거만과 오만이 드러나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실컷 울고 난 뒤 얼마나 기쁨이 밀려오는지 그 아침에 그 소녀와 손을 잡고 둥실, 두둥실 춤을 추며 새로운 자아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할/ 그 뒤 루이스 박사는 세상 학문을 뒤로 미루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시키며 가르치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멘!/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잘못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는 그 예수가 자기의 생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자기의 지식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임을 확실히 믿고 입술로 시인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에 깊은 뜻은 무엇입니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중심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묻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여기 '거듭난다'는 말은 '위에서 난다, 위에서 처음부터'라는 뜻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영적인 체험'을 말합니다.
이적과 표적만을 좋아하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이 가르치신 진리의 핵심을 두 글자로 '중생'입니다. 중생은 '우리 속 사람을 새롭게 만드는 창조작업'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담의 후손이었고, 부모로부터 태어난 사람의 후손이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 깊은 곳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 드디어 하나님의 자녀로 탈바꿈을 하는 작업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중생 또는 거듭난다'고 말을 합니다.
'거듭나는' 일은 너무나 신비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머니 뱃속의 아이가 '모태에서 자기가 어떻게 태어났는가'를 모르듯이 중생은 하나님의 손에서 신비롭게 태어나는 부분입니다.
이 중생의 경험은 어떤 분은 갑자기 오기도 하고 어떤 분은 천천히 거듭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아멘!/
▶중생의 단계가 여러 가지이나 근본적인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⑴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⑵가슴을 치며 통회 자복하는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⑶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결국 중생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 와서 회개하며 주님을 우리 생활 가운데 모시는 삶을 말합니다. /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거듭남도 믿음의 역사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거듭남에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멘!/


▶거듭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⑴죄 사함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죄 사함을 받고 용서받은 의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피에 의지하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⑵신분의 변화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우리는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⑶개종이 거듭남은 아닙니다. 개종이란 종교를 바꾸는 것입니다. 불교를 기독교로 바꾸었다고 하여서 거듭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으로 가는 길이지 거듭남 자체는 아닙니다.
⑷변화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난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렇다면 거듭났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가요? 유명한 세계적인 전도자 'T. L. 오스본'목사님은 '한 사람이 거듭났다거나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때에는 새로운 영적 생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1: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아멘!/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무엇인가? 씨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본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씨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닭은 꼬끼옥 거리고 고양이는 야옹거리며 개는 멍멍 하면서 짖어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배웠나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닭에게는 닭의 씨가 있고, 고양이에게는 고양이 씨가 있고, 개에게는 태어나서부터 개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와 말을 유심히 본 적이 있습니까? 소는 앉았다가 일어설 때에 뒷다리부터 일어섭니다. 그런데 말은 앉았다가 일어설 때에 앞다리부터 일어섭니다. 누가 가르쳐 주었나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습니다. 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소의 씨가 들어 있습니다.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씨가 들어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순간 하나님의 씨가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성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게 됩니다. /할/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받기 전까지는 죄를 짓지만 하나님의 씨를 받은 다음부터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상태요, 이것이 거룩의 상태입니다.'
달걀이 한 번 태어나서는, 보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살아 움직이는 닭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은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두 번 태어난다'는 뜻이고,'새로 태어난다'고도 합니다. /할/


⑤성령이 우리에게 거듭남에 작업을 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만 기울이면 됩니다. 태어날 아기가 뱃속에서 자꾸 발악을 하면 엄마의 생명까지 위험합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열리면서 '그렇구나' 하고 깨닫고 고개를 끄덕끄덕 해지면 벌써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서 곗돈 생각, 집안걱정, 세상 걱정하는 사람은 아직도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입니다.
'어거스틴'은 유명한 신학자요, 철학자입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풍미하던 수사학과 웅변술에도 아주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그가 어디를 가든지 여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보니까 자연히 사생활이 문란해졌습니다.
그런 그가 30살 때에 하나님 앞에 완전히 굴복하고 나서 거듭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길을 가는데 예전 방탕하던 시절에 사귀던 여인이 어거스틴을 알아보고 그를 붙잡고 유혹을 합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나는 옛날에 어거스틴이 아니요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된 사람'이라며 한마디로 거절했다고 합니다. /할/
거듭난 사람은 행동으로 증명됩니다. 변화는 중생을 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사람이 변화되지 아니하면 아무리 제도를 뜯어고쳐도 아무리 헌법을 열 번 스무 번 개정해도 아무리 수술을 많이 해도 이 사회는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기 전에는 이 사회는 변화되지 못합니다. 속 사람이 변화하지 아니하면 행동이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결심해도 얼마 지나면 또 옛 습성으로 돌아갑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영원한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믿/할/
▶오래 전에 대구에 있는 서현교회의 정주만 장로님의 간증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장로님은 모태 신앙 인이요, 장로까지 되었으니 굉장히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한약방 골목에서 약초 재료 상을 해서 아주 땅땅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육체의 마비 증세가 오더니 어느 한날부터 출입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병원, 저 병원, 이 약, 저 약을 다 써봤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산도 다 탕진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이 장로님에게 한 가지 신앙의 양심이 있었던지 이왕 죽을 바에는 하나님께 매달려 보기나 하자는 생각이 들어서 자식들에게 깊은 산 속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답니다. '만약 죽으면 장사지내라'고 유언을 남기고, 산 속에서 하루 이틀 삼일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그래도 장로가 아닙니까?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하면서 한참을 기도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오더랍니다. '정 장로야,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고 물더랍니다.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정 장로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고 자기의 욕심만 위해서 일한 것뿐이랍니다.
그래서 '한번만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하고 매달렸더니 하나님이 깨끗하게 치료해 주셔서 그곳에서 걸어나와서 열심히 벌어서 동양에서 제일 좋은 돌로 교회를 짓기를 소원하고 서현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물질에 축복을 많이 받아서 하나님의 선한 일에 많은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중생한 사람은 시23편의 말씀대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고백처럼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믿/

 

⑥'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는 서울 대학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 완비되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성령의 나라이기에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결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비자를 받지 않고는 미국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비자는 성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기 위해서는 물로 씻어야 합니다. 구약에서 씻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출30:20절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여기서 회막은 지금의 성전, 즉 교회를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씻지 않고 회막에 들어가면 즉시 죽었습니다. 또 엡5:26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죄를 씻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보혈로 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은 어떤 능력이 있습니까? 히4:12절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보혈의 능력으로 죄 씻음을 받습니다. 엡1: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보혈의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줍니다.
히9: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계1:5절에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엡5:26절에서는 말씀으로 비유했고, 벧전3:21절에서 세례로 표현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물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일까요?
⑴물은 생명입니다. 우리 몸의 90%가 물입니다. 우리 몸에서 물이 제거되면 말할 것도 없이 죽음입니다. 밥을 먹지 않고 40일을 견딜 수 있으나 물을 마시지 않으면 7일 견디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금식을 하더라도 반드시 물은 마셔야 합니다. 모세의 첫 기적은 물이 피가 되는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첫 기적은 물이 포도주가 되게 하는 기적이었습니다. 물은 모든 존재의 기초입니다. '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은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⑵물은 씻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로 그릇을 씻습니다. 더러운 옷도 물로 빨래를 합니다. 집안 청소도, 차도 물로 닦아 냅니다. 성막의 물두멍도 씻는 역할을 합니다. 정결케 하는 역할을 물이 합니다. 홍수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강을 대청소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지를 한번 말끔히 씻어내는 것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바다로 보냅니다. 바닷물은 짭니다. 소금이 들어 있습니다. 소금은 온갖 독소를 죽이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자연의 사이클은 오묘막측합니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겠습니까? 비가 온 뒤에 물은 땅속으로 스며듭니다. 20일 정도 지나면 땅으로 정수되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음료수가 되어 돌아옵니다. 물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가 사회를 청소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할/
⑶물의 특징은 '융화'입니다. 물은 결코 싸우지 않습니다. 흘러가다가 막히면 싸우지 않고 기다립니다. 돌이 있으면 싸우지 않고 피해 갑니다. 다른 물과 만나면 자연히 합쳐 하나가 되어 흐릅니다. 더러운 물이 흘러들어 와도 싫어하지 않고 같이 말없이 섞이어 흐릅니다. 바다까지만 가면 됩니다.
바닷물이 정화시켜 줄 때까지 기다립니다. 고귀한 인격입니다. 결코 다투지 않습니다.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처럼 융화력이 좋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잘 난 척 하지 않습니다.
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은 물처럼 누구와도 융화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⑷물은 겸손합니다. 물은 질서를 따라 흘러갑니다. 결코 거스르는 법이 없습니다. 물은 질서입니다. 자연입니다. 순종입니다. 겸손입니다. /할/
▶옛날 인도에 아주 겸손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었지만 늘 누구에게나 머리를 잘 숙여 온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하 중에 한 명은 권위가 없다며 늘 불평하면서 '폐하! 사람의 신체 중에 머리가 가장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머리는 왕이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아무에게나 머리를 숙이시면 신하나 백성들이 도리어 불편합니다. 삼가 해 주시옵소서' 그러자 임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며칠이지나 왕은 그 신하를 불렀습니다. 미리 준비하여 둔 고양이 해골과 말 해골과 사람의 해골을 건네주면서 이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세 개의 해골을 궁 밖으로 가지고 나가 팔아 오시오' 신하는 세 머리를 가지고 나가 팔기 시작합니다. 고양이 해골이 제일 먼저 팔렸습니다. 그것을 달아 놓으면 쥐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말 해골이 팔렸습니다. 그 것을 달아 놓으면 병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 해골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해골을 팔러 다니는 신하를 냉대하고, 심지어 미친 사람 취급을 하자 기진맥진하여 돌아온 신하에게 임금이 말했습니다.
'며칠 전 당신은 내게 사람 머리가 가장 귀중하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나 결국은 고양이 머리나 말머리보다 못 한것 아니요? 사람의 머리가 귀한 것은 해골이 귀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들어 있는 생각과 꿈 그리고 지식이 귀한 것 아니요? 이제 체면만 세우지 말고 남에게 머리를 숙이시오'
이런 충고를 받은 신하는 왕 앞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물은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이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은 물과 같이 겸손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교만한 사람이 겸손하여 지는 것이 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아멘!/
⑸물은 고체, 액체, 기체로 신분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결국은 '물'이라는 사실입니다. 기체도 결국은 물이고, 고체도 결국은 물입니다. 물은 물론 물입니다. 물은 자기의 신분을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는지 성도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때는 사탄이 될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 시작하여 사탄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크리스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아무리 상황이 바뀌어도 기본은 바뀌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⑹물은 능력입니다. 물의 힘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물이 무서우냐? 불이 무서우냐? 이에 대한 대답은 물이 불보다 더 무섭다는 결론입니다. 불나고 나면 재라도 남지만 물이 휩쓸고 지난 자리에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물은 강력한 터빈을 돌려서 전기를 만들어 냅니다. 산도 옮길 수도 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물이 바위에 구멍을 냅니다. 물이 바위보다 강합니다. 물은 능력입니다. 물은 힘의 능력이 있지만 능력의 근원은 끈기입니다. 나일강은 수천 년 흐르고 있습니다. 한강은 역사이래 지금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물은 끈기입니다. 끈기는 힘입니다. 거듭남의 근본이 이런 물과 같아야 합니다. /믿/할/


▶성령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런 말이 나오게 된 것일까요?
성령님은 어떤 분이라고 한 마디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문도에게 성령께서 임하신 사건을 보면 성령께서 임하실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였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바람의 종류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좋지 않은 것을 설명할 때 바람을 사용합니다. 기혼자가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과 이성적인 교제를 하면 바람났다고 말합니다. 주부가 살림에 관심이 없이 춤만 추로 다니면 춤바람 났다고 말합니다.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고 망상에 사로잡혀서 사는 사람에게는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망하면 시련의 바람이 분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말한 그런 바람은 많이 불면 나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성령님을 바람으로 묘사할 때는 그렇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바람은 불면 불수록 좋은 바람입니다.

 

▶바람 같은 성령은?
⑴성령님은 어디든지 계십니다.
지구상에 바람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바람은 있습니다.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아프리카에 가도 바람은 있습니다. 바람은 교회에도 있고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고 학교에도 있습니다.
바람이 어디든지 있는 것처럼 성령님도 어디든지 계십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성령님이 여기 계신다'라는 신앙으로 행하십시오.
임재 의식이 충만하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헬라의 알렉산더는 헬라,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입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잠자리에 눕기만 하면 코를 골며 잠을 자곤 했습니다. 어느 날 신하가 물기를 '대왕은 어떻게 그런 위험 속에서도 그처럼 편하게 마음놓고 깊은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파르메니온 장군이 있기 때문이다'였습니다. 파르메니온 장군은 알렉산더의 수행명장이었습니다.
시4:8절에서 다윗은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파르메니온 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지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므로 평안할 수 있습니다.
⑵성령님은 자신의 임의대로 모든 것을 하십니다. 8절에서 '바람이 임의대로 분다'고 말합니다. 임의대로 라는 말은 '마음대로 혹은 의지하는 바를 따라서'입니다. 바람의 방향을 사람이 조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선풍기 바람 같은 작은 바람은 방향을 조정할 수 있지만 태풍처럼 큰바람의 방향을 인간이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을 바람으로 묘사한 것은 성령님께서는 인간에 의해서 조정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임의대로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때보면 생각지 않았던 방법으로 역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돛단배는 돛을 바람에 맡기고 바람을 타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성령의 바람을 타는 돛단배와 같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기고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따라 사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항구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⑶성령님은 보이지 않지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바람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는 있습니다.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바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인간처럼 몸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영으로 존재하십니다. 영이신 성령님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통해서 성령님을 체험하고 성령님의 하시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를 볼 수 없지만 감전이나 전등의 빛 혹은 기계가 돌아가는 것들을 통해서 전기를 체험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을 체험하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그분을 인격적으로 믿고 인정해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기도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보십시오. 성령을 볼 수는 없지만 그분이 일하시는 것을 보며 그분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⑷성령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역시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성령 없이 영혼의 생명을 소유하거나 유지할 수 없습니다.
창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지만 마네킹처럼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어 살아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생기는 하나님의 숨, 곧 성령님을 말합니다.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의 문자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숨 바람'입니다. 마네킹처럼 죽은 것 같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숨 바람이 들어가니 살아나게 된 것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성령님을 받으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⑸성령님은 능력이 충만하십니다. 바람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부산 태종대에 가면 촛대바위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사라호 태풍이 올라올 때 바람에 바위가 부서진 것입니다. 바람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성경은 바람의 능력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거듭나고 변화되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슥4:6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것들을 성령은 가능하도록 해주십니다. 막1:8절에 세례요한이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세례주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DL 무디는 본래 시카고 거리에서 구두수선하며 구두 닦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성령을 달라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어떻게 강하게 역사 하시는지 그의 한 평 남짓한 가게에서 성령이 너무나도 강하게 역사하셔서 일곱 바퀴를 떼굴떼굴 구르며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으니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자원하여 교회학교 교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학교의 무디 반은 날마다 늘어났지만 다른 반은 침체였습니다. 다른 교사들이 시기가 나서 그의 학벌을 문제삼았습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사람이 교회학교 교사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의했습니다.
무디는 교회에서 쫓겨나서 거리 골목에서 교회학교를 계속했습니다. 무디 교회학교는 50명 100명 200명으로 자꾸 늘어났지만 교회 안에 교회학교는 겨우 10명 남짓했습니다. 무디는 학생들을 다시 데려오는 조건으로 교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사명을 감당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 후에 그는 백만 명을 전도하여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성령의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