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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을 주라! (행 3:1-10)

by 【고동엽】 2022. 2. 10.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을 주라! (행 3:1-10)

 

인간은 그 근원에 있어서 상호관계의 존재요, 서로 대화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만남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훌륭한 인격을 배울 수 있고, 사기꾼을 만나면 인격이 파괴됩니다. 운동을 하는 선수들은 훌륭한 감독과 코치를 만남으로 큰 영향을 받습니다.
창세기에 가인과 아벨의 만남은 질투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만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가롯유다의 만남은 배신과 가책의 만남입니다. 산다는 것은 만나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끼리 만나서 문화를 이루며 산천과 초목이 만나 대자연을 이룹니다. 만남이 없이는 역사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한 가정도 만남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남으로 이루는 것이 가정입니다.
종교도 만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와 절대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부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로 만나지고 친구의 관계는 우정이며 주님과의 관계는 믿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할/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갈2:20절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고, 또 히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으며, 6절에서는 '반듯이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롬4:17절에서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아멘!/
▶사도행전은 예수님 부활 이후에 이루어진 행적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의 내용들을 보면 부활의 증거들과 부활을 통해서 얻은 능력들의 결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기독교 역사의 한 분기점입니다. 주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가장 많은 변화를 경험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변화 받은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예수 부활이전의 베드로는 용렬하고 시행착오를 수없이 겪는 모습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 부활 후 엄청난 변화를 받습니다. 본문을 보면 변화를 받은 베드로가 성전에 나아가 전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구걸하는 거지 앉은뱅이를 향하여 '내게 금과 은은 없으되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말합니다. 예전의 베드로 모습이 아닙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다', 전도자는 금과 은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때 그 삶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이름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현장에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때 그 삶에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동반하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이름으로 살아가며 복을 빌며 사역하여야 합니다. 어느 군목이 소위로부터 심방을 요청 받았습니다. 이제 갓 결혼하여 부임해 온 소위입니다. 그 군목은 심방을 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복을 빌고 큰 군인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잊었습니다.
30년이 지난 어느 날 그 목사님은 제대한 후에 어느 부대를 방문했습니다. 그 부대의 부대장은 3성장군인 중장이었습니다. '제가 30년 전에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를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해 준 것은 잊었으나 그 군인은 이미 큰 군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앙의 삶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교회부흥도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전도도 내 이름이 아닌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집니다. /할/아멘!/ ◀제목 소개!▶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자기 것을 주면서 사는 부자가 있고, 남의 것을 얻어먹고 사는 거지도 있습니다. 또 자기의 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으려는 부자도 있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강도가 있습니다.
물론 많이 가졌다고 부자는 아닙니다. 또 가진 것이 없다고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가진 것이 많은데 일생동안 남에게 베풀 것이 없는 가지고도 가난한 자가 있는가 하면 가난하게 살면서도 많은 것을 주고 간 부자도 있습니다. /할/
오늘 본문은 거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 변화가 없고 정체되어 지치고 짜증날 때 이런 표현을 씁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로 다람쥐가 채를 타고 달리듯이 달리고 또 달려 보지만 언제나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로 인해서 지치고 의욕을 상실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마치 덧에 걸린 짐승처럼 삶에 묶여서 운명인양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심정은 참담하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앉은뱅이 걸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다리를 쓸 수 없었습니다. 그럼으로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공간이동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늘날처럼 휠체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사람들이 들것을 만들어 옮겨 주어야만 갈곳을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 거지의 나이가 40세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그 거지가 오늘 본문의 기적의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기도하기 위하여 지나가는데 미문 앞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한푼만 줍소' 하고 구걸을 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자 걷고 뛰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기적은 베드로가 맨 처음으로 행했던 기적입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죄악의 결과로 비뚤어진 인간의 마음과 육체에 참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도 이 권능을 주시겠다고 약속했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그 권능을 받아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권능을 주신 줄 믿습니다. /아멘!/

 

①그런데 보니까 그 권능이 어디서 왔습니까? 기도하는 자에게 옵니다(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유대인들의 제 구시는 지금의 오후 3시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정해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제3시는 오전 9시, 제 6시는 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9시는 오후 3시입니다.
제 9시에는 공적 예배가 드려지는 시간의 시작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므로 성전 미문 앞에는 거지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고넬로도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했다고 행10: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니엘도 자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면서까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문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단6:10절에 기록했습니다. 다윗은 시55:17절에서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기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할/
성도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다는 것은 아주 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세 번씩은 못한다 할지라도 하루 한번은 꼭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벽기도회가 제일로 귀한 시간 같습니다. 예수님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막1:35절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의 능력이 어디서 나왔는가 봤더니 기도를 통해서 얻어진 능력이었습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의 역사도 기도를 통해서 옵니다. 하나님의 비밀도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은 믿음의 분량이 장성해집니다. /아멘!/
사실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보고 요9:2절에 보면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당시 그들은 감히 '병든 사람을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이런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베드로는 앉은뱅이 된 자를 보고 엉뚱한 관심을 갖는 대신에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를 동정하며 그의 병을 고쳐주어야겠다는 믿음의 확신이 왔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믿음의 분량이 자라고 하나님의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오게 됩니다. /믿/
한 때 예수님의 제자들이 귀신을 좇아내지 못하고 망신당하고 나서 예수님께 '우리는 왜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 수많은 이적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홍해가 육지 같이 갈라지며 반석에서 생수가 터지는 기적도 기도하는 모세를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빌립보 감옥에 지진이 일어나고 옥터가 열리는 기적도 기도하는 바울과 실라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기도하던 에스더 때문에 부림절의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하는 엘리야 때문에 3년 6개월 오지 않던 비가 이스라엘 땅에 내렸습니다. /할/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믿/아멘!/
기도의 사람 베드로와 요한은 호흡이 잘 맞는 동역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을 당시 갈릴리에서 함께 고기를 잡던 동업자였으며 그 후에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도 늘 함께 행동을 했습니다.
마17장에 보면,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갈 때도 동행하였고, 주님 십자가 사건 후 무덤을 찾아갔을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동행했으며 오늘 본문에서도 함께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콤비가 잘 맡는 동역자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호흡이 맞는 사람과 전도하고 봉사하면 더욱 더 신앙이 깊어갑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신앙이 좋은 분들과 대화하며 함께 기도할 때 응답 받고 축복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아멘!/

 

②하나님의 능력은 성전 예배를 통해서 옵니다.
'성전에 올라갈새' 세상에는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으로 가느냐에 따라 인생 목적지가 달라집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운명을 바꾸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왜 성전중심이 이토록 중요합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전중심으로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곳이요, 예배드리는 처소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예배자로 살아야 됩니다. 또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성도는 예배를 생명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할/

 

③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와 미문이 나옵니다. 앉은뱅이를 어떤 사람인가?(2).
이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는 자요, 인간의 힘으로나 생각으로는 걸어가는 것이 불가능한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성전 안에 들어가서 좀 더 크고 영원하고 생명적인 것을 구하려 하지 않고 병신된 육신을 위하여 썩은 양식을 얻기 위해 성전 미문에 걸터앉아 몇 푼씩 구걸하는 자입니다. 이 얼마나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인가? 그는 육신 적으로도 가련하지만 심령은 더욱 가련한 사람입니다.
그가 만일 성전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수이신 예수님을 만났다면 영원히 굶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전에 오기만 했지 성전 밖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전 밖과 안은 큰 차이입니다. 생명과 사망의 차이요 축복과 저주의 차입니다. /믿/
이 앉은뱅이는 당시 고린도 산 청동으로 만든 아름다운 문 앞에 앉아 있었지만 말할 수 없이 더럽고 비참한 존재였으며 그는 영원하지도 못한 물질만 요구하고 있는 자입니다. ▶3절에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또한 4-5절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한 것을 보면 그 사람 머리에는 구걸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근본문제를 상실했거나 포기한 인간입니다. 즉 꿈과 이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현실은 냉혹합니다. 스스로 서고 걷는 자활 능력이 있는 사람도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절망적이고 아무리 곤고함에 처했다 할지라도 인간의 근본적인 소망을 상실해 버리면 결코 망해버립니다. 꿈과 비전은 꼭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아무리 우리의 현실이 어둡고 깜깜하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주님의 어린양으로 보호받고 사는 존귀한 자입니다. 시30:5절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할/


▶앉은뱅이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그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입니다. 행4:22를 보면 그 사람의 나이가 40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40이 되도록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것이 운명이려니, 팔자이려니 하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걷고 뛰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운명도 팔자도 새롭게 만듭니다. /믿/
⑵사람들이 메어다가 내려놓고 다시 메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한발작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가고 싶을 때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축복 중에서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건강 주신 것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힐/
⑶생계는 구걸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구걸해서 산다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⑷이 앉은뱅이는 구걸하지만 장소 선택을 참 잘했습니다. 그가 앉아 구걸하던 미문은 고린도 산 구리도 만들고 그 위에 금과 은으로 덮어 씌었기 때문에 일명 '황금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장소를 잘 선택했다는 것은 황금문 곁을 선택했기 때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성전 문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장소 선택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본문의 앉은뱅이는 빌어먹어도 성전 문에서 빌어먹다가 예상 밖에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⑸사람을 잘 만났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숱한 사람이 그 문을 드나들었습니다. 유대인은 제3시, 제6시, 9시 등 세 시간 간격으로 기도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대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앉은뱅이에게 경우에 따라 동정하는 마음으로 몇 푼의 돈을 주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그는 제 9시 기도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으로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만난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예수의 능력이 있는 자들입니다. /할/ 그 날 그 만남이 그의 운명과 인생을 뒤바꾸어 버렸습니다.
만남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훌륭한 인격을 배울 수 있고, 사기꾼을 만나면 인격이 파괴됩니다. 산다는 것은 만나는 것입니다. 만남이 없이는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한 가정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종교도 만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와 절대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의 앉은뱅이도 베드로와 요한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사람을 잘 만나는 것 복입니다. 여자 잘 만나 성공한 남자가 있는가 하면 남자 잘 만나 호강하는 여자도 있습니다. 여자 잘못 만나 인생을 망친 남자도 있는가 하면 남자 잘 못 만나 한평생을 좌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여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앉은뱅이가 만난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초대교회 최고지도자입니다. 그는 기도의 종이었고, 능력의 사도였습니다. 그의 한번 설교에 3천명이 가슴을 치며 '어찌할 꼬!' 통곡하며 회개했으며, 그의 그림자만 덮어도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능력의 종을 만났기 때문에 40년의 한을 풀고 걷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잘 만나는 복을 받으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할/

 

④하나님의 능력은 주의 종을 주목하여 바라볼 때 일어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바라보다가 '우리를 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보라고 한 것은 소망을 가지라는 뜻이며 우리가 좋은 것을 너에게 줄 것이니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선물은 가난한 자에게, 원하는 자나 목마른 자에게, 그리고 사모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입니다. 또 우리를 보라는 말은 나를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눈을 맞추자는 이야기입니다.
눈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해서 눈과 눈이 서로 마주칠 때 서로 사람의 감정이 통하게 됩니다. 여러분 눈동자를 보면 압니다. 사랑하는 눈동자가 다르고 미워하는 눈동자가 다르고 의심하는 눈동자가 다릅니다.
'우리를 보라'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이 불 신앙의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쳐다볼 때 베드로의 눈에서 뛰어 나오는 신앙의 힘이 죽 하나님의 능력이 그 눈 속으로 들어갈 줄 믿습니다. 절망의 사람이 소망으로 가득 찬 베드로의 눈동자에게 소망을 받습니다. 눈과 눈이 합치는 순간 그 때 벌써 기적이 싹트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⑤베드로가 그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할/ 베드로가 이 앉은뱅이에게 준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슬슬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두 사도의 마음 속에는 놀라운 확신의 샘이 솟아올랐습니다. 성령께서 예수의 성호를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어도 예수가 있지 않은가? 풍랑도 잔잔케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며 문둥병을 깨끗케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의 주님이 내게 있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에게 주님이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 능력 주실 줄 믿습니다. /믿/ 베드로와 요한은 '그렇다, 예수님을 주자, 주님의 권능을 주자, 주님의 권능으로 저를 일으켜 세우자!'
두 사도의 마음 속에는 사랑과 믿음의 확신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이 앉은뱅이에게 필요한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발목에 힘을 얻어 일어서는 것이 더 절감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불을 붙이십시오, 믿음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지금도 기적은 일어나고 역사는 나타납니다. /할/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이런 앉은뱅이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이 땅에 많은 앉은뱅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바쁘다는 핑계로 문제를 건성으로 보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또는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안타까운 사랑의 심정이 메말라 있습니다.
또 가진 것이 없다는 핑계로 발뺌을 하기가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으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을 보고 비웃고, 조소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불붙는 사람과 믿음을 가지고 그 앉은뱅이를 주시해 봤습니다. 하나님은 안타깝게 하나님의 법을 찾고 길을 찾는 자에게 방법을 알려주시고 문제의 핵심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는 어떠한 방법으로나 어떠한 길이라도 통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일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에 아무런 능력과 권세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지금도 예수의 이름에는 위대한 능력과 권세가 따르며 그 이름을 믿을 때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할/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세례를 베풀었으며 병자들을 고쳤고 죄사함을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역사할 때 귀신이 소리치며 떠났고,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권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권세는 죄를 멸하는 권세요,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무너뜨리고 성령님과 교통하는 권세요, 저주를 속량하는 권세요, 사망 권세를 무너뜨리는 권세입니다. 이 귀한 권세가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믿/
예수님의 이름은 교회가 가진 것 중에 가장 귀한 재산입니다. 교회 안에 화려한 장식이 있어서 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있기에 귀한 것입니다.
롬8:9절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몇 푼의 돈으로 인간사회를 구해보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교회가 진정 이 세상에 던져줄 가장 귀한 선물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현세의 것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십시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안에 성공이 있고, 그 안에 소망이 분명히 있습니다. /할/
▶인도 선교사로서 세계선교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스탠리 존스'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그의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런 그가 89세 때에 그만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몸을 거동하지도 못하면서 선교현장을 떠나지 않으려고 고집하고 있을 때 그를 강제로 인도하여 미국 보스턴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스탠리는 치료를 받으면서 자신의 병실에 들어오는 모든 의사들에게 매번 부탁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세요.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 여러 번 거듭해서 부탁하자 그를 치료하러 들어오는 의사들마다 그에게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 그러면 스탠리는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아멘!'
간호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똑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간호사도 치료 도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야 걸어라' 역시 그는 즉시 대답했습니다. '아멘!' 놀랍게도 그는 6개월만에 병상을 막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90세의 나이에 또다시 인도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예수의 이름의 권능과 권세를 믿는 믿음이 기적을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의 권능을 믿지 않는 사람은 결단코 이런 은혜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극한 상황에 직면하더라고 환경과 처지를 탓하지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나타날 권세를 믿고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반드시 승리와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을 때 능력이 생깁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걷는 걸음은 누구의 이름으로 걷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음을 얻어 그 믿음으로 살고 그 믿음을 후손들에게 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강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에는 소망이 있고 또한 그 이름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를 약속 받게 됩니다. 요14:13절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할/

 

⑥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줄까요?
⑴받은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준다는 것은 '거저 받았으니 저져 준다는 것이요, 은혜로 받았고, 은혜로 준다'는 것입니다. /할/
많은 사람들이 나는 받은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받음으로 살았고, 은혜로 여기까지 산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기를 거저 주시고, 햇살을 거저 주십니다. 비와 이슬을 저져 주셔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곧 생명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보편적인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로 멸망 받아야 할 인류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죗값으로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피 흘려 죽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있었기에 우리 모두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 영원한 영생복락의 자리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엡2: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롬8: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는 하나님 앞에 독생자 외아들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선물을 거저 받았기에 우리도 거저 주어야 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 지구상에서 찬란한 영광을 받은 사람은 그만치 역사에 많이 주고 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⑵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사실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의 뒤를 3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베드로는 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얻을 것만 생각했습니다. 마19:27절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얻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을 받고 난 뒤부터 그는 주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아멘!/
예수를 믿고 이 이름으로 줄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주십시다. 사랑을 주십시다. 이웃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복음을 주십시오, 없는 사람 구제하십시오, 또 선교하십시오, 눅6: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주는 자가 복을 받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어나게 한 것도 예수의 이름 때문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 예수의 이름으로 그는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의 삶은 참 단순한 삶입니다. '내게 금과 은은 없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여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회심의 역사도 치유의 역사도 동반합니다.
원래 복음은 이렇게 단순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라.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구원의 방법은 이렇게 간단합니다.
전도도 '예수 믿으세요,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가 가장 좋은 전도 법입니다.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어야 합니다.
⑶주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믿음의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 응답의 확신, 기적의 확신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사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고난의 가치에 대한 확신입니다. 골1: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성령의 역사에는 은사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은사는 받은 것이요, 열매는 주는 것입니다. 은사는 노력으로 받습니다. 기도로 받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인격적인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성숙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우리 모두 은사를 받고 열매를 맺읍시다. /믿/

 

⑦예수의 이름의 능력은 '확신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주면서 7절에 보면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준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가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의심 없이 불구자를 일으켰습니다. 기도한 자가 확신이 없으면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은 확신입니다. 자신감입니다. 담대함입니다. 신앙의 확신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자신감 없는 사람은 절망적이고 부정적인 태도와 말을 하지만, 자신감 있는 사람은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과 태도를 보입니다. /할/
베드로와 요한은 돈 한푼 없었으나 앉은뱅이에게 소리쳤습니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보라, 우리가 가진 것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을 당신에게 줍니다.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시오'라고 당당하게 소리쳤습니다. 막11:24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할/
▶또 앉은뱅이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앉은뱅이는 순종했습니다. 순종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드디어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일어서게 됩니다. 여러분, 발과 발목이 힘을 얻는다는 것은 믿음의 성장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히12:12-13절에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할/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신앙이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서 걷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행여나 오늘 이 자리에 걷지 못한 자가 있다면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걸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넘어지는 것을 겁내는 어린이는 절대로 서서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어다니는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걸음마를 시작하면 아무리 넘어져도 절대로 기어다니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는 기쁨, 걷는 기쁨, 달리는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절대로 기어다니지 않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서 걷고 달리는 신앙,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처럼 우리의 신앙이 벌떡 일어나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은 일어납니다. 본문의 기적은 ⑴즉시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 약을 쓴 것이 아닙니다. '걸어라'는 말씀 한마디로 즉시 일어나 걸었습니다.
⑵그 기적은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명백하고 완전하고 확실한 기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어떠한 길이라도 통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잡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⑧이제 앉은뱅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8절을 보면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앉은뱅이가 일어나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9-10절에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성전에서 그 사람이 그렇게 뛰며 기쁨에 넘쳐 찬송하는 것을 모든 백성이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아침까지 업혀 다녔으나 이제 걸고 뛰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보고 심히 기이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기이히 여깁니다. 이제 그는 구걸하는 입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는 입술로 변했습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기적은 살아있습니다. 히13:8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면 자랄수록 좀 더 깊은 지성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 그는 구걸하는 입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이 되었습니다. 오늘 앉은뱅이가 났고, 걷게 된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폭적인 은혜입니다. 발목과 힘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곳은 완전한 구원이며 육체의 완전한 치유입니다.
행4:22절에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 여 세나 되었더라' 40년 간의 수모와 능욕 속에서 슬픔과 탄식 속에서 그는 큰 소망의 빛을 얻었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너무 감격해서 성전에 들어가 걷고, 뛰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모든 백성이 그가 미문 가에 구걸하던 사람인줄 알고 심히 놀라며 기이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이 앉은뱅이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육신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할/

그가 처음 걸어 간 곳은 성전 안입니다. 그는 이제 성전 밖의 사람이 아닙니다. 성전 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입술도 이제 돈 달라는 입술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변화된 입술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사람을 쳐다보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건인가?/할/
여러분, 예수의 이름의 권세는 이 시간도 일어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슬픔에서 일어납니다. 실패에서도 일어납니다. 질병에서도 일어납니다. 먼저 우리의 신앙만 일어서기만 하면 오늘도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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