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너무너무 거룩한 말씀을 날마다 가르쳐야 되고 전해야 되는
참 어떻게 보면 부담스런 위치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질그릇에 이 보배를 담았다고 했는데,
아니 좀 금 그릇에다가 담았으면, 이 금 그릇도 행복할 것 아니에요.
그런데 질그릇에 이것을 담았으니, 질그릇은 참 너무 힘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가 참 기를 펴고 살 수 없는 처지에서
우리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만큼 거룩한 말씀을 가르치고
입에 담고 날마다 이야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우리를 그만큼 믿어주고 존중해주고, 또 모든 면에서 따라야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많은 오늘 평신도의 마음속에 있는 설교자에 대한,
목회자에 대한 이미지는 어떻게 각인이 되어 있느냐,
열심히 가르치면서 자기는 잘 안 지키는 사람.
남은 거룩하게 훈계할 줄 알면서 자기는 잘 훈계는 못하는 사람.
자 이런 식으로 각인이 되니까, 이제는 막 기도 많이 한 목사다.
그것 가지고 그 인격이 신뢰를 못 받습니다.
늘 성경책 들고 다닌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설교 잘한다고 누가 신뢰해주나요.
이제는 모두가 한 수 깎아 내려서 사역자들을 평가하고 봅니다.
여러분 이 말이 거짓말인지/참말인지, 여러분들에게 가까이 와서
‘존경합니다’ 말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세요.
그들의 내면에 진심이 있는가요?
교회 안에는 불행하게도 은혜 받은 아첨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아첨하는 말에 너무 많이 흔들립니다.
그 아첨에 넘어가다 보니, 오늘 우리의 인격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존중을 못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우리 사역자에게 있어서 인격이 이만큼 위기를 맞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능력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습니다. 능력 있는 목회자, 능력 있는 설교자,
이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아서,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눈이 빛납니다.
그러나 인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별로 관심이 없어요.
교회 부흥에 대한 어떤 방법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구름떼와 같이 모입니다.
그러나 인격에 대한 어떤 것을 강조하면, 다 눈을 감고 졸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큰 병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 합시다.
강단에 세워놓으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감동을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울렸다, 웃겼다, 마음대로 하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이 부흥사의 은사를 받은 분들이 아닙니까.
능력은 있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은혜를 끼치는지는 모르겠어요.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의 상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는 일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인격이에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설교를 못해서가 아니에요.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해서가 아니에요.
그들의 인격 문제는, 바로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의 인격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거울이에요.
이런 면에서 너무 너무 심각한데, 오늘 이 심각성을 우리가 오히려 느끼지 못하고
목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그 영혼이 찌들어지지 아니하며
그 영성이 위축되지 아니하며, 그 마음에 기쁨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긍지를 가지면서 평생을 살았을까, 그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저에게 관심사였어요.
◑사도바울에게서 해답을 발견하다
▲그런데 오늘 읽은 이 본문이 정말로 저에게 주는 굉장한 해답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설교의 주제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기 내면에 있는 인간적인 고민, 질그릇으로서의 약점,
인격적으로서의 불완전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저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에게 자기 눈을 평생 고정시켜놓고
오직 그 분을 닮은데 정신을 집중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닮는다는 것이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분을 닮으려고 전력투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바울이 이런 말까지 했잖아요.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내가 아니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상한 말을 할 정도로
그는 주님을 완전히 자기의 눈에 가득 차도록 놓고 한 평생을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결이었어요. 자기의 인격의 불완전성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어요.
자기 내면에 들어오는 모든 모순과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었어요.
저는 지금까지 사역자로서 일을 하면서, 누구 한 사람보고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입 밖에 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내 자식들을 보고도, ‘나를 본받으라!’는 말을 한 마디 못했어요.
내 아내보고도.. 감히 어떻게 그런 말을 하겠어요.
제자훈련을 지금까지 수 백 명, 수 천 명을 시켰지만
제가 ‘여러분, 저를 보고 따르세요. 저를 본받으세요.’ 감히 그 말을 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고 했어요.
▲우리는 사역자로서, 우리 자신의 고민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참 우리 사역자로 하여금, 정말 기가 죽을 수밖에 없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어요.
‘예수처럼 되라. 작은 예수가 되어라.’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교역자에게만 요구하신 것이 아니에요.
믿는 사람에게 다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표준이에요.
맥스 루카도 같은 사람.. 여러분 책 읽어 보셨잖아요.
그의 책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이, 이 수준(아버지처럼 온전)이라고 한다면
그들보다도 한 걸음 더 앞서야 하는 사역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인격의 수준, 삶의 수준이 어느 정도이겠느냐.. 라는 것을
정말 우리가 고민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나름대로의 몸부림이 “없이”
우리가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메마른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교역자들에게 요구하는 인격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가를 늘 염두해 두세요.
교인들 자신이 주님을 닮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마당인데
교역자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있을 것 아니에요.
자기와 똑같아 가지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잖아요.
이것이 저로 하여금 자주 번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목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완벽주의에서 오는 어떤 병적인 사고가 아니에요.
성경적인 뿌리를 가지고 자신을 검증할 때,
피할 수 없는 질문이고, 고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들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적어도 자기들보다는 나아야된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해요.
여러분, 이 표준을 낮추지 맙시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낮추지 맙시다.
절대 포기하지 맙시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이 칭찬하시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집요하게 고집스럽게 주님만을 응시하고 본받으려고 하는 이 자세가
결국 우리 사역에 영광이 되고, 능력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능력을 우리가 갖고 있는 이상, 어떤 문제도 겁나는 것이 없어요.
세상이 아무리 악해져도 겁날 것 없어요.
세상이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구름떼와 같이 일어난다고 해서
우리가 위축될 필요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앞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해결된 상황이에요. 천 년 전에도 세상은 여전히 악했어요.
2천 년 전에도 세상은 여전히 음란했어요. 똑같아요.
우리는 뭐 금방 세상이 악해지고 잘못된 것처럼, 호들갑 떨 것 없어요.
세상은 언제나 똑같았어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세상이 얼마나 악하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손에 쓰임을 받는 우리가, 어느 정도 수준이냐가 문제에요.
우리 모두가 표준을 낮추지 말고, 오직 주님을 푯대로 삼고
그분만을 향해서 닮아가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목회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능력이 임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 모두가 서로 쳐다볼 때마다
서로 자랑스러운 동역자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모였을 때는 뜨겁습니다.
기도할 때도 뜨겁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도 아멘으로
정말 모든 사람들이 감동을 받을 만큼 그 분위기는 화려합니다.
그러나 일단 문을 열고 나가면 너무나도 처참합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 교역자들의 특징이에요. 또한 교인들의 특징이에요.
문 열고 나가면 사람이 달라져요.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오늘 날 한국 교회가 부흥회가 없어서 이 꼴이 되어갑니까.
수련회가 없어서 이 꼴이 되어갑니까. 기도 안 해서 이 꼴이 되어갑니까.
더 솔직하게 얘기해서, 기도를 안 해서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실추된 우리의 인격을 회복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라고 하는 그 표준을
다시 한 번 정확하게 확인하고
힘이 들어도, 십자가를 져도, 자기 부인을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그런 고달픈 삶을 살아도
그 분을 닮아가려고 하는 몸부림, 이것만큼은 포기하지 맙시다.
이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지 못하게 하는
우리 마음 속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이 우상을 불태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을
우리가 다시 한 번 회복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성령의 바람이 불고,
진리의 말씀이 이 땅을 새롭게 하는,
영광스럽고 거룩한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는 간절함이
우리 가슴 안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와 같은 부흥을 막는 어떤 악의 요소가, 내 인격에 있습니까.
내 숨은 삶에 있습니까. 내 교회 안에 있습니까. 주여 가르쳐주옵소서.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면, 주님 앞에 회개하고 바로 서겠습니다.
하는 내면의 결단, 숨은 결단이 우리 속에 있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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