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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인물 십보라

by 【고동엽】 2022. 1. 31.

제50인물 십보라

 

출 4;24-25
성경에서 아주 이상한 사건 하나를 대하게 됩니다.
모세와 그의 아내 십보라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40살에 민족 혁명을 일으키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애급인을 죽인 것이 탄로가 났습니다. 모세는 이제 현상붙은 사나이가 되었습니다.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찾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이드로의 딸 십보라와 그 곳에서 결혼하였습니다. 어느 덧 40년의 세월의 덧없이 흘렀습니다. 이제 이마에는 주름살이 밭고랑처럼 파여있었습니다. 흰 머리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인생의 종말을 고하는 순간입니다. 인생을 정리하여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가시떨기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 4;19)

그래서 모세는 장인 이드로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생존하였는지 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20)

사실은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셨는 데 이드로에게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다는 말을 모세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드로는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랬다고 하면 갑자기 미쳤느냐고 물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드로는 모세 심정을 이해하여 주었습니다. 40년만에 고향을 찾겠다고 하는 데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드로가 말했습니다.

<평안히 가라>(20)

단 한 마디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아내 십보라와 아들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애급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40년만에 동족을 찾는 흥분이 모세 마음속에 용솟음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를 죽이려고 찾던 이들이 다 죽었을 가?>
<내 동족들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 가?>
<내 친척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 가?>
<나를 물에서 건져 길러 준 양모 공주도 늙어서 죽었을 가?>
모세의 손에는 양치던 지팡이를 그대로 들려져 있었습니다. 이제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이 때 벌어졌습니다. 해석하기 힘들고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길을 가던 모세는 어느 숙소에서 하루 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죽이려고 하였는 지 성경은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천사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목을 누르려고 하였는 지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서 떨어 뜨리려고 하였는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24)

그 때 십보라가 이상한 행동을 하였습니다.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25)

그랬더니 모세를 죽이려던 천사가 떠나고 모세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려주신 이유가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면서 피남편이라고 말하니까 하나님이 살려 주셨습니다. 정말 이상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참으로 귀중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모세가 아니라 십보라입니다. 모세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십보라만 무엇인가 하였습니다. 십보라를 훈련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 사건속에 들어 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으로의 변화
지금 모세는 애급 여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길렀다면 아들에게 낳은 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순간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분명히 미디안 사람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자녀들은 다 할례를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그 가족은 모두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0-14)

할례란 히브리어로 <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물>이라는 말은 <주위를 둥글게 베어내다>라는 뜻입니다. 남성의 성기 귀두 표피를 둘러 싸고 있는 피부를 둥글게 베어낸다는 의미에서 할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왜 하나님은 할례를 하라고 하셨을 가요? 여기에 대하여 학자들마다 의견들이 많습니다.
1. 구별설
카리쉬(Kalisch)는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을 주변 국가들로부터 구별시키려고 하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2. 성결설
칼빈(Calvin)은 죄로부터 구별하려고 하시는 성결의 의미가 있다고 성결론을 주장하였습니다.
3. 탈출설
어거스틴(Augustine)은 아담으로부터 흘러 오는 죄를 벗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탈출설을 주장하였습니다.
4. 결단설
이전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새 피조물로 거듭난 삶을 살겠다는 의미가 있다고 결단설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축복을 약속하여 주시면서 할례 하나를 요구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할례믿음>을 요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할례 믿음이란 어떤 믿음일까요?

(1) 피 믿음
할례를 하려면 피를 흘리게 됩니다.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습니다(히9;22)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피흘리고 죽으셨기에 이제는 할례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피가 필요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십자가의 피를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짐승 피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가서 한 달 지낼 때 대속죄일이 있었습니다. 랍비가 회당앞에 서있습니다. 그 옆에는 추럭에 닭들이 수 백마리 실려져 있습니다. 가족별로 랍비에게 와서 헌금통에 헌금을 합니다. 그러면 한 마리를 꺼내 듭니다. 온 가족이 죄를 전가시키는 안수를 합니다. 랍비는 닭을 가족 머리위에서 돌립니다. 그리고 목을 자릅니다. 피가 흐릅니다. 그 피를 땅에 뿌리고 옆에 있는 통에 넣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 가족의 일년 동안에 지은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예식을 해마다 거행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할례는 피믿음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매튜 헨리는 말하고 있습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는 피입니다. 석가모니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피를 흘리고 죽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예수님의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석가모니의 죽음을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잔치집에 갔다가 돼지고기 잘 못 먹고 체하여 죽었습니다. 그 것이 자랑일 수 없습니다. 그의 무덤속에는 그의 사리가 간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있습니다.
피는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고난이요 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원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2) 변치 않는 믿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 17;13-14)

할례믿음은 영원한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변치 말아야 합니다. 몸에 표시한 것이기에 죽기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몸에 문신을 하거나 몸을 베어 상처를 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문신을 하거나 몸에 이상한 표시를 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위하여 너희는 살을 베지 말며 몸에 무늬를 놓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28)

살을 베면 안 됩니다. 문신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할례를 하면서 몸을 베어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몸에 표징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몸에 사귀어 놓고 영원히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할례믿음입니다. 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19세기 독일의 단막극>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돈 불>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부요한 가정에 계모로 들어간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모가 얼마나 착했든지 전실의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가정에는 행복의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을 뜨자마자 그 화목한 가정은 전쟁터로 바꾸어졌습니다. 재산 상속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계모는 ‘내 몫을 챙겨야 되겠다’ 고 말했습니다. 큰 아들은 내가 장남이 재산을 자기가 상속받아야 원칙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웃음은 사라지고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시신을 건너방에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한 자녀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싸우지? 어제까지는 화목하게 살았잖아. 화목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지 무엇 때문에 이러지? 돈 때문에 그래? 그러면 돈을 버려야지.>
그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래. 돈을 다 버리자. 그리고 우리 화목하게 살자.>
그들은 금고에 있던 돈을 다 꺼내서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니까 딸이 불을 쬐면서 <아. 돈불이 따뜻하다.> 하고 말했습니다. 불을 쬐면서 서로 얼굴을 보니까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습니다.
오늘날 돈 불을 쬐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돈 때문에 냉랭해지고, 원수되고, 돈 잃어버리고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얼굴에 화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돈 때문에 의리가 상하고 옛 사랑을 버린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돌 불을 피워야 할 친구, 돈 불을 피워야 할 가정, 돈불을 피워야 할 친구가 얼마나 많습니까?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변하고, 믿음이 변질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무엇으로도 변하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할례로 몸에 상처를 새기고 영원히 변치 말아야 할 것이 할례 믿음입니다.

(3) 연합 믿음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창 17;10-13)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에서 돈 주고 사온 종들까지 집안에 있는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자에게까지 할례를 받으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머리이기에 남자가 할례를 받으면 여자는 자동적으로 남자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이기에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난 사람들, 돈주고 사온 종들까지 다 할례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두가 할례로 하나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두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지금은 십자가의 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할례를 받지 아니 하여도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다고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1-14)

할례 믿음은 연합 믿음을 의미합니다.

(4) 은밀한 믿음
할례는 은밀한 곳에 표시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자기와 하나님만 아는 비밀입니다.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떠벌릴 필요가 없습니다. 일대일의 관계입니다. 누가 보여 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나사이만 진실하고 되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무엇이라 하든지 하나님앞에서 진실되이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1968년 북한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자녀들이 모두 월남하고 혼자 남은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반동분자로 찍히게 되었습니다. 사상이 불순하다고 체포되어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으로 전전긍긍하면서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고역이었습니다. 차라리 죽였으면 좋겠는 데 죽이지 않고 고생만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수용소를 옮겨갈 때마다 이상하게도 소중히 들고 다니는 방석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본 감시원이 그 방석을 찢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거기에서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하나는 성경책이고 하나는 태극기였습니다. 은밀하게 간직하며 자기 신앙을 기르던 두 가지였습니다.
격노한 정치 간부는 군중을 모아 놓고 불을 피웠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성경책과 태극기를 불에 던지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때 그 노인은 조용히 그리고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간부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성경과 태극기를 저 불속에 던져라.>
그러나 그 노인은 역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당당하였습니다. 마침내 이 노인은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과 태극기를 품에 안고 외쳤습니다.
<하나님! 이 조국에 평화를...>
그는 은밀하게 감추어 가지고 신앙생활하던 성경과 태극기를 품에 안고 목이 잘렸습니다. 붉은 피가 하늘로 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렬하게 순교하였습니다. 그는 누가 무어라고 하여도 싱싱한 믿음을 은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남이 볼 수 없고, 남에게 보일 수도 없는 할례입니다. 누가 보자고 할 수도 없는 할례입니다. 할례 믿음은 자기만이 간직한 은밀한 믿음입니다.

(5) 예배 믿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창 17;12)

갓난 아이를 할례할 수 없습니다. 고통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중에 장성하여 하라고 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8일 정도면 그 정도의 고통은 이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8일만에 할례를 거행하면 최소 안식일 한번은 지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예배를 한번은 참석한 후에 할례를 거행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8일만에 할례를 행하셨습니다.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눅2;21-24)

그래서 이스라엘 회당에 가면 할례탕이 지금도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8일째 데리고 오면 할례탕에 세 번 넣었다 뺀 후에 할례를 거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같이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러 가는 길이니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어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할 때에 십보라가 아들 할례를 거행하자 살려 주셨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일을 할터이니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2. 영적 체험으로의 변화
우리는 이런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제까지 미디안 이드로의 집에서 미디안 사람을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십보라가 시집살이를 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더부살이를 하고 살았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문화에 젖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세가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 가
야 한다고 나섰습니다. 평안함이 깨지고 안정이 흩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십보라가 시집을 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숙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십보라가 불평하였을 것입니다. 부부 싸움이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십보라는 예민한 여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남편 모세를 죽이려고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십보라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천사와 마주치는 영적 체험을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십보라는 지금 영적 체험을 깊게 하는 중이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사람으로 살아 왔던 어제와 달리 이제는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변화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들 할례를 재빨리 하였습니다. 날카로운 차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취도 하지 않고 아들 살을 잘랐습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살점을 모세 앞에 던졌습니다. 대담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그 순간 하나님이 남편 모세의 생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십보라는 남편 모세를 따라 애급으로 들어갈 때 불평 불만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 체험을 한 후에는 두 말 하지 않고 따라 갔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체험은 십보라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평화스러운 고향을 떠나 전투하는 곳으로 가는 데 동의하였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손에서 죽어 가려는 모세 앞에 아들 양피를 던졌습니다. 피 덩어리를 던진 것입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이제 할례받은 백성으로 나는 들어 간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나도 할례의 백성이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영적 체험은 인생을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3. 사명으로의 변화.
이 사건은 십보라를 사명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입니다. 사실 모세는 40살에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였습니다. 포기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시떨기 앞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다시 사명을 주셨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모세는 시내산 가시떨기 앞에서 자기를 하나님께 굴복시켰습니다. 자기를 하나님앞에서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수신(修身)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애급으로 가는 길거리 숙소에서 제가(齊家)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애급으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면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가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딤전 3;2, 4-5,12)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가정부터 평안하여야 합니다.
모세는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고, 가정을 하나님께 굴복시키고, 나라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십보라가 모세의 길을 방해하였으면 모세는 죽었을 것입니다.
사명은 생명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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