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예정론과 숙명론(1)/김규욱 목사
* 기독교 예정론이 숙명론인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 예정론이 이방 종교의 숙명론과 유사한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서 기독교 예정론과 숙명론은 그 성격이나 의미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이것을 밝혀가기 위해서 먼저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과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1.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과 성격숙명론이란 인간의 생사화복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냉혹한 필연적인 법칙으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거의 대부분의 종교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숙명론적이다.
또한 뚜렷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숙명론적 사고 방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널리 펴져 있고, 사람들의 의식 속에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자유를 그렇게도 희구하는 인간의 심성 깊은 곳에 자유와는 정면 충돌하는 숙명론적 사고 방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야말로 타락한 인간의 모순되고 적나라한 모습을 해부해 가는 흥미진진한 탐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을 살펴보기로 한다.숙명론의 발생적 기원--인간의 심리적 도피인간은 출생사건부터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으며,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반해서, 혹은 불가항력적 사건에 의하여 심각한 불행과 참담한 정황을 겪기도 한다.
또한 어김없이 죽음이 찾아옴을 감지하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겐 더욱 죽음에의 공포가 닥치고 만다.
이러한 인간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예측 불허의 불안한 삶의 정황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심리적 안전장치를 강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숙명론이라는 것이다.
삶의 본질적 속성인 고통, 불행, 죽음 등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에 그것에 대한 항거나 저항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며, 다만 숙명을 자신에게 주어진 몫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신에게 큰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왜 그 불행이 생겼는지 생각하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한다든가,
그 불행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고려해 본다든가,
또한 그 불행으로 말미암아 예견되는 참담한 미래,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이미 현존하는 불행한 현실을 더욱 괴로움으로 몰아가는 무의미한 시도라는 것이다.
이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식은 닥쳐진 불행이 숙명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체념적으로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왜 그러한 일이 일어 났는 가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질문도 원천적으로 봉쇄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래야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훌륭한 심리적 도피 장치인가!
이러한 심리적 이유에 의해 대부분의 이방 종교는 숙명론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되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 마호멧교의 숙명론, 유교의 천명사상 등이 모두 이를 증언한다.더욱 놀라운 것은 인간 이성의 자율성과 인간의 역사 변혁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철학사상 가운데서도 숙명론적 경향의 사고방식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동양철학의 최고의 고전인 주역이 바로 운명론적인 점을 치는 책이었고, 서양 희랍사상의 대전제인 모이라(moira)라고 하는 운명관은 모든 희랍 비극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스피노자, 니체의 운명에의 사랑(amor fati), 야스퍼스의 한계 상황, 하이데거의 던져진 존재, 칼 막스로 대변되는 역사결정주의(historicism) 등은 모두 그 뉘앙스나 의미에 있어서 약간씩의 차이를 갖고 있으나 궁극적으로 숙명론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의 모순그러나 그야말로 숙명적으로 자유를 희구하고 자기 실현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는 체념적 숙명론을 일관되게 그리고 철저하게 유지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냉혹한 숙명론 옆에 선택적 인간의지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동양에서는 주역 점에서 보여지는 운명론처럼 자신의 운명이 마음먹기에 따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고, 서양에서는 니체의 용어대로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라고 함으로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선택적 자유의지를 주장하였다.이처럼 사실상 모든 인간의 철학체계는 양립 불가능한 모순인 숙명론과 자유의지론, 이 양자의 기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자유의지와 숙명론간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논문, 손봉호,“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는가?”(손봉호,1978 참조)
이것은 이방 종교와 철학의 자기 모순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실례가 되며, 또한 숙명론이 안고 있는 위험을 밝혀 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숙명론은 그 이론의 출발에서부터 인간의지의 무력성과 무의미성을 전제하는데 그것을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어 붙이면 결국 허무주의에 이르고 만다.
그래서 인간은 차마 이 숙명론을 삶의 모든 부분에 철저하고도 일관성 있게 적용시키고 살 수는 없었다.만약 그렇게 되면 인간들이 그렇게도 갈구하는 자유, 책임, 존엄과 같은 것들이 환상적이고 공허한 것이 되며 궁극적으로 허무주의에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들어 낸 이론이 전술했던 자유의지론(doctrine of free will)이다.
살아가면서 성취하는 일들, 인간적으로 행복한 일들이 생겨나면 그것을 숙명에 귀착시키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원초적 자기 영화본능이자 죄성이다. 문화적 업적과 성취, 인간적 행복, 훌륭한 예술작품, 과학적 발명, 역사적 유산 등은 모두 인간 자신의 의지의 산물과 자랑물로 간주한다.이처럼 인간은 양립 불가능한 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을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각각 적용시켜 믿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잘되면 제 탓이고 못되면 운명(조상)탓이다’. 이 얼마나 간교한 철학의 자기 기만적 이론인가!이처럼 모든 철학은 숙명론과 자유의지론의 모순된 역학관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고대에 갈수록 숙명론이 강하고 현대에 올수록 자유의지론이 득세한다.
숙명론은 문화적 허무주의를, 자유의지론은 문화적 제국주의 위험성을 각각 내포한다.
인간 이성과 의지의 선함을 믿었던 18세기 서양 계몽주의와 진보사관은 자신의 문화를 가장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야만스러운 아프리카나 아시아에 서양의 세련된 문화를 퍼트려야 한다는 구실을 내걸고 그 곳으로 쳐들어가 경제의 수탈, 정치의 억압, 사회의 차별을 오만스럽게 저지런 문화적 제국주의를 실현시켰다.
그러나 20세기초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지의 선함을 믿는 낙관적 자유의지론은 그것이 자기 기만임을 깨닫고 다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다시 동양 고대의 운명론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 운명론이 가지는 위험성을 왜 모르는가?
운명론은 반드시 음성적인 허무주의와 퇴폐, 그리고 방종을 갖고 오게 되어있다.이 양극단이 가져오는 딜레마를 벗어날 길이 없는가?
철학적으로는 없다.
왜냐하면 철학은 숙명론으로 이 양자의 모순 속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숙명론의 발생적 기원과 성격을 요약해 보면, 숙명론이란 인간이 자신의 고통, 불행, 죽음 등과 같은 실존적이며 심각한 문제를 대처해 나가는 심리적 안전장치일 뿐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형이상학적 맹목적 신념일 뿐이다.
숙명론이 인간에게 일시적으로 가상적인 심리적 위로를 주는 듯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허무주의와 도덕적 타락의 원천이 되고 만다.2. 예정론과 숙명론의 근본적 차이점앞 절의 논의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자기 보호 장치인 이방 종교의 숙명론은 기독교 예정론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신학자와 설교가들은 기독교 예정을 숙명론과 동일시하여 숙명론이 가진 위험성을 예정론에 귀속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절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기독교 예정론과 이방 종교적 숙명론을 첨예하게 대비시키고 그 차이를 밝혀 보고자 한다.1) 주관자의 문제첫째, 기독교 예정론은 예정의 주체이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반면, 숙명론은 그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을 차단시키는 냉혹한 법칙내지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기독교의 하나님은 영원 자존하셔서 그의 계획과 뜻 또한 영원하다.
따라서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모든 언약성취사적 사건과 아울러 전 포괄적 역사 진행까지 그의 뜻대로 즉 창세 전 그의 작정과 예정대로 진행된다.
그것은 불변하며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영원부터 계획되었으며 역사 과정에서 어김없이 진행된다.
결국 인간구원과 멸망에 관한 예정론이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절대 주권적 속성의 논리적 귀결로서 너무도 자명한 성경적 진리이다.
그러나 숙명론이란 역사의 절대적 주관자를 인정치 않는 인간 철학의 가상적 논리이며 그 정당성의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혹은 근거 자체에 대한 물음을 원천봉쇄하는 허구적인 이론일 뿐이다.2) 삶의 과정의 의미둘째, 기독교 예정론은 역사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 예정대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사건과 그 사건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제반 섭리가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시적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에 숙명론은 어떤 사건의 발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허무주의적 성격을 띤다.예정론을 믿는 성도는 구원이 이미 창세 전에 계획되었고 그 구원이 나에게 적용되기까지의 나의 삶의 모든 주변 상황이 총체적으로 그리고 합목적적으로 경영되어 간다고 믿는다.
따라서 성도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예수를 믿고 나중에 천국에 가기까지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전폭 의지하는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연단의 과정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적 섭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한 의미있는 섭리적 사건을 깨닫는 성도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의 어떠한 역경과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변의 상황을 감사와 평강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이기적인 나태와 방종에서 깨어나 보다 값있고 진지한 역사적 삶을 형성해 갈 수 있는 신앙적 힘을 얻게 된다.그러나 숙명론은 인간의 불행과 죽음의 문제를 대처하는 소극적인 심리적 안전장치로써 위로를 주는 듯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발생되는 사건에 대한 의미있는 해석의 길을 차단시킴으로써 삶의 과정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하여 결국 역사의식을 박탈함으로 나태와 방종을 가져 오게 하는 허무주의적 경향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3) 삶의 목적셋째, 기독교 예정론은 예정의 분명한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과 그 결과로 말미암은 성도의 찬미가 있는 반면에 숙명론은 주관자와 과정적 의미가 없기에 그 목적 또한 부재한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성도를 구원시키기로 예정한신 것은 오직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며, 결국은 그의 영광을 성도에게 드러냄으로 은혜의 영광을 성도로 하여금 찬미케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의 구원은 자신의 선행과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과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선물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은혜의 복음이며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 예정의 목적이시다.
반면에 숙명론은 주관자가 없기에 숙명의 과정적 의미도 궁극적 목적도 없다.
숙명론의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불안한 인간이 자신의 심리적 안정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그 목적도 허구적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지는 듯하나 본질적으로 달성될 수 없다.4) 인간 성장의 문제 넷째, 기독교 예정론은 인간의 타락과 죄까지도 하나님의 깊은 경륜 안에 있으며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랑치 못하게 함이며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게 되는 교육적 의도가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정론을 믿는 성도는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거나 핑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연약한 자신을 정직하게 발견하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기도의 삶, 즉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만을 날이 갈수록 의지하게 되는 신앙의 성숙을 맛보게 된다.
요컨대 기독교 예정론은 인간의 죄와 허물을 합리화시키거나 은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예정의 본질이란 사랑이 배제된 이방 종교의 냉혹한 법칙이 아니라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은혜의 예정을 신실되게 지키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예정의 본질을 깨달으면 결코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키지 않게 되며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기 허물의 인정이란 용서와 사랑 앞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불변하신 사랑 앞에서의 자기 인정은 진정한 신앙 성숙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그러나 이방 종교의 숙명론은 이와 같은 인간의 성숙을 함축하는 기독교 예정론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그것은 세상 만사가 인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어난, 그리고 그 이유와 의미를 알 수 없는 비인격적 법칙일 따름이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불가항력적인 불행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도피 장치 혹은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자기 합리화의 논리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이런 비인격적 합리화의 논리 속에는 인간의 죄와 허물에 대한 자기 반성과 성찰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간구하는 기도가 자리 잡을 수 없다.
따라서 숙명론의 논리에 의해서는 참된 인간의 성숙을 보장할 수 없다.이상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 예정론은 발생론적 기원이나 그 성격에 있어서 허무주의적이며 인간의 자기 합리화의 논리인 숙명론과 본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성경적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결코 기독교 예정론은 숙명론과 동일시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숙명론이 가진 위험성 - 즉 역사의식의 박탈로 인한 나태와 방종 - 을 기독교 예정론에 귀속시키는 오류는 반드시 타개되어야 한다.
* 기독교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
흔히오해하고있는것처럼과연기독교예정론을믿으면역사의식을상실하고현실의삶에서나태와방종을갖고오게되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러한 오해는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과 동일시 할 때 따라 나오는 귀결이다.
이 장에서는 기독교 예정론이 성도로 하여금 역사의식을 박탈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게 하는 모체가 됨을 성경적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역사의식 태동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 보고 난 후 예정론과 역사의식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한다.
1. 역사의식태동의역사적기원
20세기의 저명한 역사 철학자 콜링우드(Collingwood)의 날카로운 지적에 의하면, 서양 세계에서의 역사의식은 실상 그리스·로마시대가 아니라 기독교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4∼5세기에 이르러 서양의 역사관은 기독교 사상의 혁명적 영향을 받아 혁신되었다고 한다.(R. G. Collingwood, The Idea of History, 1946, p. 46)
그것은 바로 어거스틴이 최초로 시간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사색을 시작하고, 시간의 태초와 종말을 의식하는 역사 신학적 사고가 생겨날 무렵이다.
그 이전에는 사실 상 역사 혹은 시간에 대한 사색이 적극적이지 않았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서 사색한다는 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에 대한 사색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간이란 모든 것을 변하게 하고 썩게 하고 죽게 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플루타르크는 ‘시간은인류의원수이며모든것을부패시킨다’ 라고말했다.
기원전 5세기 인물인 서양철학의 대부격인 플라톤은 변화하는 ‘시간의 세계’ 를 타락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참된 인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그리하여 변화하는 역사 안에서 철학의 본질적인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플라톤 뿐만 아니라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헤르도토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역사의식은 현재나 과거가 천편일률적으로 영원히 순환하는 것으로서 역사는 마치 꽃이 피고 지는 반복적 흥망성쇠의 기록으로 볼 뿐 어떤 의미가 깃든 것으로 의식하지 않았다.
이것을 콜링우드는 희랍사상의 반역사적 경향(anti-historical tendency) 이라고 지적했다.(앞의 책, pp. 20∼21)
그러나기독교의복음진리가희랍세계에전파되기시작하면서드디어변화하는시간의의미를긍정적으로볼수있게하는진정한의미의역사의식이생겨나기시작했다.
왜냐하면 기독교 진리는 내세의 세계가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시간세계에 대한 새로운 혁명적인 관념을 갖게 하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려 간다는 것이 이제 절망적이며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소망적이며 긍정적인 것으로 역전되며 죽음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소망적 과정이었다.
이 뿐 아니라 철학자 칼 뢰비트(K. Löwith)가 잘 지적한 것처럼 기독교 사관만이 역사과정의 중심점(그리스도 사건)을 정해 놓고 있다.
그리하여 비로소 그 점을 기점으로 한 이전(과거)와 이후(미래) 즉 현재, 과거, 미래라는 역사의 관념이 탄생할 수 있다(K. Löwith, Meaning in history, 1949, p. 182)는 것이다.
역사를보는관점인사관들이여러가지있지만크게둘로나누어보면하나는직선적사관(linear view of history)이고다른하나는순환적사관(circular view of history)이다.
엄격하게 이야기해서 기독교 사관과 그것의 영향을 받은 사관 이외에는 전부 순환적 사관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순환적 사관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왜냐하면 똑같은 혹은 유사한 사건이 언젠가 또 다시 반복되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역사의 진보라든가, 역사를 통한 반성의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
단지 지금의 삶이 완전한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다시 반복 재생된다고 믿고자 하는 근거없는 신념일 뿐이며 시간의 영구한 연속에 자신을 심리적으로 맡겨 버리면 나약하고 허황된 사고와 행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반면에기독교에서만이직선적역사관을말하고있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계셔서 역사의 시작인 태초로부터 과정 그리고 종말에 이르는 모든 역사적 사건을 합목적적인 의미를 가지고 직선적으로 진행시킨다.
이러한 기독교 사관에서라야 과거, 현재, 미래라는 명확한 직선적인 시간(역사) 개념이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시점에 서 있는 신앙인은 과거의 사건을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연단하고 성숙시키려는 섭리로 감사히 받아들이며, 현재의 삶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나님 나라의 의의 도구로서의 사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미래의 삶 역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장중에 맡기고 소망가운데 바라 본다.
이러한직선적역사의식의원형은예수님오시기전의구약시대성도에게서도명확히발견되어진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다윗왕조 이후의 백성들은 그들의 가나안에서의 삶이 과거 그 열조와 맹세하사 약속대로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과거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현재의 삶의 문제 역시도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더 나아가 그들이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배반할 때 예언자들이 나타나 책망하고 예언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재 율법을 범하며 그 결과 바벨론에서 포로로 사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약속대로 70년이 차면 회복될 것을 바라 보았다.
이는 더 나아가 장차 미래에 메시야가 오셔서 영원한 왕국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자신들이 현재 율법을 범하며 바벨론에서의 포로로 사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선지자와의 약속대로 장차 하나님께서 예언한 약속대로 메시야를 통해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미래의 소망 중에 살아가는 진정한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원형적역사의식은예수님안에서총체적으로성취되었다.
예수님이야 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러 오시되 그 분은 과거 구약의 언약을 자신의 온몸을 통해 성취하고 계시는 분이요 더 나아가 성령을 통해 미래의 역사를 빚어 가실 것을 잘 알고 계셨고 마침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실 것을 예언적으로 언약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언약 성취의 역사적 의식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의식하고 계셨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지는 역사의식은 바울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립되었다.
바울의 모든 글은 구약의 언약과 예언을 근거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차매 모든 일이 이루어지며 미래 역시 하나님의 언약적 뜻에 의해 진행됨을 믿었다.
그것이 신약 성경안에 구체화 된 것이다.
구약 성도의 메시야 대망이 신약성도에게 와서는 메시야 재림 소망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성경 안에 드러나 있는 언약에 근거하는 역사의식은 예수님 오신 후 4~5세기 무렵 어거스틴에게 와서 보다 확실하게 구체화 되어진 것으로 보아 틀림없다.
지금까지의주장을요약해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직선적사관에의한역사의식이라는것자체가역사의주관자가존재하지않는순환적역사관에서는생겨날수없으며, 시간의흐름을긍정적으로볼수있는기독교사관에서만태동될수있다는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19세기 서구라파의 진보주의 사관이나 마르크스주의 사관 등의 미래 지향적 직선적 사관은 모두 기독교 문화권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기독교 사관의 철학적 변형물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문화권 밖의 동양 세계에서는 도무지 직선적 사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2. 기독교예정론과역사의식의관계 - 로마서와에베소서를중심으로 -
위에서잠깐언급한대로기독교교회사에있어서최초로역사에대한언급을한신학자는어거스틴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한 예정을 강렬하게 주장하면서 동시에 역사 혹은 시간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긍적적인 사색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는 예정론과 역사의식 양자간에 모종의 긴밀한 관련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도대체 예정론과 역사 의식 이 양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서 이 글에서는 어떤 신학자나 역사 철학자의 논의를 빌리지 않고 오직 성경의 논리에 근거하여 논증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양자의 관계를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는 로마서와 에베소서를 중심으로 밝혀 보도록 하겠다.
로마서는우리에게칭의의복음을통해하나님의의(義)의영광을드러내는기독교의가장기본적인진리가담겨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義)로 오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간은 의롭다함을 받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인데 이 믿음이 인간편에서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의 기쁘신 뜻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됨을 확실히 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이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달음박질함으로가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고 못박는다.
더 나아가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세우심이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려는 것이며 그런즉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또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도 하심을 명백히 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대해 반문하는 인간을 향해 바울은 지음을 받은 진흙덩어리 같은 인간이 지은 자에게 왜 그렇게 했느냐고 질문할 권한조차 없음을 말했다.
그런 반문 자체가 이미 자신이 자신의 존재에 근본적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는 피조물이요 또한 무엇이든지 창조주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인정치 않으려는 죄의 근성에서 나온 그릇된 질문임을 말하는 것이다.(롬 9장)
이런주장을한뒤바울은하나님의의(義)의실현, 즉그리스도의오심은우연한역사적사건이아니라는것을언급한다.
즉 그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언약에 근거한 하나님의 계획의 실현이라는 것이다.(롬9장 후반부)
여기에서 우리는 기독교 예정론의 성경적 근거를 확인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사건은 구약의 언약의 성취인데 이때 구약의 언약은 다시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다름 아닌 창세전의 영원하신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기초한다.
이 글은 예정론을 주로 신약을 근거로 전개했으나 실제 구약의 언약 역시 예정을 근거로 전개됨을 알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G.H.Clark의 저서 Predestination의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예정이 구약에도 편재된 교리(pervasive doctrine)임을 분명히 했다. (p205)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이미 전제되고 있으며 이 내용은 에베소서에 가면 명백하게 드러난다.
바울은로마서 11장까지에서이런하나님의주권적예정에의한믿음으로말미암는구원을논한후 11장마지막부분에서그오묘한구원의섭리를찬양한다음 12장에서성도의생활을권면하면서부지런하여게으르지말고열심을품고주를섬기라고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정론과 성도의 실제적 신앙과의 관련성을 확인 할 수 있다.
앞절에서 밝힌대로 기독교 예정의 목적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바 은혜의 영광을 깨닫게 하려는데 있다.
이를 깨달은 성도는 바울이 했던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된다.
이때의 찬양과 감사는 반드시 성도로 하여금 이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있는 삶의 모습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예정은 성도의 참된 열심있는 삶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예정론을 배운뒤 모든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열심도 없어지고 나태하게 된다는 것은 예정론을 로마서에서 처럼 성도의 참된 열심을 가져오는 성경적 은혜의 원천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유사하게 보이는 이방종교의 숙명론의 방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에베소서의 증거를 통해 좀더 상세히 확인해 보기로 하자.
에베소서는사도바울의옥중서신으로서에베소에있는성도들에게이땅의교회란어떻게해서이루어진것이며, 그교회는어떻게성장하며, 또한어떻게교회의생활을해가는것이올바른가를가르쳐주는체계적이고도장엄한교회론에관한서신이다.
바울은 1장에 간단한 인사말을 한 뒤 1장 3~13절에 이르기까지 곧 바로 교회의 영원한 기초를 설명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말한다.
그 내용 중 첫번째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이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성도로 하여금 거저 주시는 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엡 1:3~6)
그 다음 7~10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죄사함도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11~14절에서는 이 예정을 따라 약속의 성령이 오셔서 성도를 인치시고 기업의 보증이 되게 하셨다고 했다.
이러한삼위일체하나님의장엄한사역의내용은서신의중·후반부에전개되어갈교회의성장과윤리부분의기초가된다.
즉 현재의 교회의 성장과 생활은 이미 창세 전 하나님의 예정을 따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져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정의 시점이 역사 내적인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영원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듯 그의 계획과 예정 또한 영원하다.
영원한 것이기에 불변적이며 그 계획은 역사 내에 실현될 때 한치의 착오없이 이루어질 성실한 계획이다.
따라서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역사 안에서의 어떤 계기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그 구원의 계획은 창세 전이며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 즉 예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구원의 실현은 영원한 경륜의 때가 찬(카이로스적) 실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너무도 명백한 성경이 증거하는 기독교 예정론의 진수이며 기독교로 하여금 기독교 되게 하는 핵심적 성경진리이다.
이것의 부인은 구원의 문제에 인간의 계획과 선행과 공로를 내세우고자 하는 자고한 인간철학의 장난이거나 영원한 하나님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는다.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구원론과 교회론은 장엄하고도 영원한 예정론으로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을 말하지 않는 구원과 교회에 대한 언급은 뿌리 잘린 나무의 가지와 열매의 시한부 생명을 말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구원의 즐거움과 교회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근본 뿌리인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말미암은 예정에 돌리지 않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런데사도바울은놀랍게도이영원하고도장엄한예정론을말하고나서 4장 17절이하에서성도의아름다운삶의모습을권면하는과정에서 5장 15절에 “때가악하므로세월을아끼라”는권고를한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 세월이란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의미하며 그것을 아끼라는 말은 어리석게 낭비하지 말고 주어진 시간을 지혜롭게 살아 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바로 15절 앞부분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세월을 아낄 수 있는 것, 즉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지혜를 가질 때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의 지혜는 어떻게 해서 생기는 것일까?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인간적인 슬기로움이나 영리함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서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에베소서 앞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해 갖고 계셨던 창세 전의 은혜로운 예정의 경륜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논의를요약해본다면다음과같다.
구원은 하나님의 창세 전 예정을 따라 은혜의 선물로 거저 주어진 것이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이다.
그 지혜는 성도로 하여금 구원의 즐거움을 갖게 하고 비록 삶의 여건이 어려울지라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하여 성도는 지금까지 자신의 정욕을 위해 세월을 낭비해 왔던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교회와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역사적 사명의식에 불타는 아름다운 삶을 점차 지향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말하는 예정론과 성도가 갖게 되는 역사의식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올바른 성경적 예정론을 깨닫고 난 후 삶에 방종과 나태가 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단지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으로 오해하여 가르치거나 배울 때 생겨나는 일이다.
오히려 기독교 예정론만이 영원한 천국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주는 근본 원천이 되기에 성도로 하여금 현재의 역사적 삶에 대한 성실한 삶의 근거가 되며 또한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는 신앙적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현재의 삶이 어떠한 고난에 있을지라도 영원한 예정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확신은 현실을 박차고 일어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철두 철미 확신했던 바울의 실제의 삶은 이를 너무도 웅변적으로 증거한다.
바울은 그토록 무수한 삶의 역경과 고비를 거쳐 갔으나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믿었기에 세상은 바울을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상 바울처럼 역사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은 찾아 보기 드문 것이다.
여기서우리는중요한한가지사실을짚고지나갈필요가있다.
바울에게서 영원과 역사 (시간)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즉 이분법적으로 분리된다는 것은 영원(내세)을 택하면 역사에 소홀하게 되고 역사에 관심을 두면 영원을 놓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역사는 영원안에 일원론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영원한 은혜의 예정을 깨달을 수록 역사 현실에서 참된 열심이 솟아나는 것이다.
바울에게 역사 현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배우고 발견하고 그의 뜻을 이루어 가는 교육적 실천적 현장인 것이다.
지금까지의논의를통해우리는기독교인의역사의식이란인간이역사의주인이되어역사의흐름을자기중심적으로파악하려는왜곡된철학적역사의식과는전혀그성격을달리함을알수있다.
기독교적 역사의식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경륜, 그리고 그 경륜대로 역사의 현장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지금의 역사에 맡겨주신 아름다운 주의 뜻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지혜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신앙적 역사의식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예정론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세월을 아낄 줄 아는 신앙적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없다.
기독교 예정론은 올바른 신앙적 역사의식이 생겨날 수 있는 모체이자 원천이 된다.
Ⅳ. 성경적역사의식의정립
지금까지우리는성도가성경대로예정론을믿게되면올바른역사의식을갖게되며, 따라서이세상에서도피적이고위축된삶을살아가는것이아니라가장도전적이고적극적인삶을살아갈수있다는것을확인하였다.
그러나 오늘 날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한편으로는 도피주의적 신비주의 신앙에 빠져 탈역사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가 마치 역사만을 위한 종교인 것 같이 착각한 나머지 기독교에서 영원한 예정과 천국을 제거하여 기독교를 평면화, 역사화시켜 버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여기서는 이러한 양극화된 두 부류의 잘못된 역사의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 우리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잘못된 역사 의식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나아가서 성경대로 가져야 할 기독교인의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1. 신비주의적탈역사의식비판
신비주의적신앙지도자들은자충족한문자적성경계시보다는현재의신비주의적인잘못된계시와체험을더욱중요시함으로말씀에의한인격적신앙성숙이아닌비정상적인체험과갑작스런변화그리고신비스런황홀경을강조하게된다.
성도는 그러한 체험과 황홀경 속에서 현실적 삶의 어려움을 일시적으로 마취시켜 잠시 위로를 받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마취의 효과는 점차 현실에 대한 신앙적 감각을 무디게 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해 가는 데 심각한 장애를 가져 온다.
약 20~30년 전부터 한국교회에 불어닥친 오순절 운동과 그와 유사한 신비주의적 운동은 성도로 하여금 역사적 현실을 하나님이 주신 신앙 성숙의 교육적 무대로서 긍정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에 의해 현실의 삶을 죄악시하고 속된 것으로 보아 기피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신앙 공동체라는 미명 아래 자기 폐쇄적이며 위축된 삶을 영위하고, 소위 속세를 떠난 수도원 운동, 불건전한 은사운동 등으로 말미암아 세상 속에서의 정상적인 삶을 경원시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 신앙운동에 현실 도피적이며 탈역사주의적 태도이다.
이러한신비주의운동의해독성은일반적으로인식된것보다훨씬심각하다.
한번 신비주의적 신앙에 접하게 되면 점차 자신의 체험을 절대화시키며 영적 엘리트 의식을 갖게 된다.
그것은 곧바로 보통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양상을 띠게 되고 더 나아가 역사 현실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탈역사적인 태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고도의 신앙수준인 영적 황홀경의 세계에 있다고 착각하며 현실을 직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건과 건강으로 열심히 땀흘려 수고하고 노력하려는 신앙적 의지를 갖기보다는, 기도가 자기 욕구나 자기 소원을 채워주는 만능의 도구인 줄로 착각하고, 반신앙적인 이방 종교의 주문같은 기도로 삶을 영위한다.
이쯤 되면 현실 감각을 상실한 일종의 정신적 장애자 내지 몽상가인 셈이다.
결국성도가극단적신비주의운동에빠져버리게되면역사적사명의식을상실한채자신의영적황홀경의유지에급급한나머지현실감각을상실하고이기적신앙양태에몰입해들어가는심각한결과에이르게된다.
이런 신비주의적 신앙 양태는 세상의 학문이나 문화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거나 비판할 수 있는 변혁적이고 일원론적인 사고 방식에 의한 세계관이나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
최근 이원론적 신앙 문제를 의식하고 기독교 세계관의 일원론적 성격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진정한 세계관의 정립은 개혁 신학이 주창해온 하나님 절대 주권과 그에 따르는 예정의 문제가 정립될 때 가능하다고 본다.
일반적인 수준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이해로서는 제임스 사이어(김헌수 역)가 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이 좋은 길잡이가 된다.
2. 해방신학적역사의식비판
해방신학자(사회복음주의를표방하는자유주의신학자들도포함)들은성경의말씀이영원한하나님의계시의말씀이아니라단지역사적정황에서쓰여진역사적문서(historical document)로간주한다.
그리하여 기독교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구속주가 아니라 단지 그 시대의 억눌린 민중의 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도덕적 실천가로서의 역사적 인물로 간주될 뿐이다.
해방 신학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나 천국이 비과학적 신화에 불과한 무의미한 사실들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지금의 역사 현실 뿐이며 이 시대의 정치·경제적인 구조적 죄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역사적 실천 뿐이다.
남미의 대표적인 해방신학자인 구티에레즈는 출애굽 사건을 장차 그리스도의 유월절 어린 양의 피흘리는 사건으로 말미암은 죄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사건으로 취급한다.(구티에레즈, 1977, p200)
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 지배를 언급하지만 그것의 의미는 성경적이 아니라 다분히 신은 역사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이신론적(理神論的) 신관(Deism)을 견지한다.
그리하여하나님은창조후피조물로부터멀리떠나계시고이제는역사가인간의자율적의지에의해진행되고변혁된다고믿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19세기 철학자 칼 막스의 유명한 발언인 “철학은 지금까지 세계를 해석만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철학이 세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라는 말은 매우 매력있게 들린다.
칼 막스의 철학체계 안에는 하나님이나 그의 주권적 역사섭리가 존재치 않기 때문에 역사의 궁극적 동인은 물질적 하부 구조에 영향을 받는 인간에게 있다고 보았다.
즉 역사변혁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철저한 반성경적 인본주의 역사철학을 주창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인본주의 역사철학이 오늘 날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서는 의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기본 신조가 되어있다.
신학이라는미명아래철저한인본주의역사철학이은폐되어있다.
신은 이제 역사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기력한 허수아비일 뿐, 실제 역사의 변혁주체는 맑시즘으로 무장된 인간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역사의식은 하나님의 역사주관을 믿는 신앙적 역사의식이 아니라 인간의지의 자율적 역사변혁 능력을 믿는 철학적 역사의식이다.
3. 성경적역사의식의정립을위하여
지금까지우리는양극화되어있는두부류의잘못된역사의식을비판적으로분석해보았다.
두 부류의 공통된 오류는 바로 기독교의 본질인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내세의 소망을 상실하기 때문에 발생된 논리적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예정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섭리에 의한 직선적 역사관을 믿지 않을 때에는 모든 역사의식이 시간 내의 한 부분을 절대화 내지 영원화하여 균형을 상실하고 만다.
신비주의자들은 현실을 절대화하고 해방신학자들은 미래를 절대화한다.
신비주의자들은영원한천국의소망을바탕으로현실을극복해가는확신을지니지못한채, 인도의신비주의명상가들처럼현재의황홀경에자신을몰입시킴으로써현실을신비화내지환상화시켜버린다.
그 결과 올바른 역사적 현실감각을 상실하고 나아가서 부닥쳐 오는 현실의 어려움을 도피해 가는 탈역사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반면, 해방신학자들은내세의영원한천국소망을부정해버리고단순히평면적미래에소망을두고역사자체에만의미를부여하는시간내적역사철학을갖고있다.
헤겔 철학 이후 서양 철학은 초월이 모두 내재화 되었다.
이 철학의 영향 속에 전개된 자유주의 신학은 철저히 내재 신학으로서 이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역사 현실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고자하는 철저히 인본주의적 성격을 띤다.
그래서그들은다가올미래를미화하여영원화시켜유토피아로그려낸다.
미래의 주관적 환상에 비추어 볼 때 오늘의 현실의 모습은 참담하게만 느껴지며 따라서 그들의 사고와 행위는 매우 현실 부정적이며 과격하다.
그러나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유토피아는 현재의 불만을 심리적으로 보상해 주고 현재의 자기 모순을 은폐시켜 주는 자기 기만적 장치일 뿐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19세기에 꿈꾸었던 구시대적 철학적 낭만일 뿐이다.
문제는이런두부류의오류는영원한하나님의예정과천국의소망이확고하게될때까지는여전히우리자신이빠져들어갈수있는함정이된다는것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과 천국을 믿으면서도 육신의 소욕이 남아 있기에 현재의 안락하고 안일한 삶에 자신을 무비판적으로 맡겨 버리는 신비주의자들의 탈역사주의적이며 이원론적인 행습을 할 때가 허다하다.
또한 때때로 우리는 삶 속에서 천국의 소망은 까마득히 잊어 버린 채 역사의 주체가 마치 자기 자신인 줄 착각하여 자신의 뜻과 고집대로 일을 성취함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본주의적 역사철학 사고 방식에 사로잡힐 때가 무수히 많다.
육신의 정욕이 남아 있는 한 이기적이며 자기 영광적인 역사의식의 위험성이 우리 자신 안에 항상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들은 올바른 성경적 예정론과 순수한 복음진리에 의해 부단히 잘못된 철학적 역사의식을 쳐 복종시켜야 한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과 절대주권적 섭리에 의해 이루어져 가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의 무대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의 도구로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역사적 사명의식을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명의식은 복음진리로 성숙해 가는 성도에게 맺혀지는 구체적인 아름다운 열매이다.
예정론에근거한복음진리에의해진정한역사의식을갖게된성도는역사무대에서도피하거나미래의환상에빠져과격한행동을하지않는다.
오로지 주어진 역사 현실을 자신의 신앙적 성숙의 무대로서 감사하게 받아들임과 동시에 주를 위한 가장 적극적이고 생동감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예정론을 진정으로 깨달은 성도에게 결코 나태하고 안일한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바울 처럼 살든지 죽든지 역사 현실에서 가장 치열한 복음적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Ⅴ. 결론
오늘날, 신학자에게나성도들에게널리퍼져있는예정론에대한오해는깊고도심각하다.
특히 기독교 예정론을 철학적 숙명론과 동일시하여 예정론을 수납하게 되면 역사적 사명의식이 박탈되고 나태와 안일한 삶에 빠진다는 비판은 그 비판의 화살을 엉뚱한데 겨냥하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 글은 오히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인 구원의 예정을 믿을 때라야 성도는 이 시대를 살아 가는 역사적 삶에 무궁한 원천적 힘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했다.
기독교는이방종교처럼인간의욕구와필요에의해서생겨난인본주의적종교가아니다.
기독교는 오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정하신 예정을 따라 이루어진 유일한 신본주의적 종교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도 영원한 예정의 결과이며 그 예정에 기초하여 구약은 예수님이 역사 안에 오실 것이 언약했고 그 언약은 하나님 여호와의 신실하신 속성대로 성취됨으로써 구원이 이루어 졌다.
그것을 통해 역사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계시하였다.
그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며, 십자가 사건이다.
이러한영원한예정과역사안에이루신구원의확증을깨달은성도는참으로삶에역사적사명을느끼게된다.
진리를 깨닫기 전 육신의 정욕을 좇아 세월을 낭비하며 살아 가던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이 이제는 성령의 소욕에 의해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으로 전회하게 된다.
말씀에 의해 예수의 형상이 자라감에 따라 성도의 역사적 삶은 점점 무게를 더해 가며 먹든지 마시든지,그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며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이웃의 짐을 지고자 하는 아름다운 수고와 자기 희생의 삶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한국의기독교는양극화된잘못된두부류의신앙운동에의해심히오염되어가고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에서 영원한 예정과 영원한 천국을 제거하고 기독교를 평면적 역사 차원에서만 취급하여 이 땅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유주의 신학와 그 유파인 해방신학이 탁류처럼 몰려 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의 신비화라는 미명 아래 현재의 잘못된 영적 황홀경 속에 빠진 채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의식을 망각하는 무속적인 신비주의자들의 탈역사적인 잘못된 신앙의 흐름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전자는 기독교에서 영원을 제거시켰고 후자는 역사를 제거시켰다.
이 양극단의 잘못된 흐름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올바른 신앙의 위상을 찾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바른 기독교 예정론의 성경적 정립과 이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의식의 확립과 전파는 오늘날 위기에 처한 한국 기독교의 최대의 과제가 될 것이다.
“또내게말씀하시되이루었도다. 나는알파와오메가요, 처음이요나중이라. 내가생명수샘물로목마른자에게값없이주리니이기는자는이것들을유업으로얻으리라. 나는저의하나님이되고그는내아들이되리라”(계 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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