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 (요 17:1-5)
여러분, 한번 사는 인생입니다. 너무 짧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도 많고 또 해야 할 일도 많지만 결국은 다 하고 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놓지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될까요?
하나님은 어떻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일까요?
제가 군목으로 있을 때 보면 군인들은 어려운 경쟁을 뚫고 진급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고 생각하고, 진급에서 누락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다. 고 몹씨 부끄러워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몸에 중한 질병이 있는데, 교인들에게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아프다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까 염려해서 라고 합니다.
학생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고 불합격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다고 부끄러워 교회에도 못 나오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성공하는 것일까요? 실패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것일까요?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확한 대답을 우리가 얻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거의 완벽한 기도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된 유일한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는 기록은 많은데,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셨는지에 대해서 요한복음 17장 처럼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는 기도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에 제일 첫 번째 나오는 부분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얼핏 듣기에는 우리가 늘 하던 기도와 비슷해 보입니다. 나를 영화롭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영광 받으소서.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성공하게 해주시고 합격하게 해 주시고, 이번 일이 잘 되게 해 주셔서 사람들로부터 높힘을 받고 사람들이 부러워하게 해주셔서 하나님 영광 받으소서. 이렇게 읽어지기도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앞에 하신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말씀을 보면 정반대 입니다. 이 때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고난과 치욕과 죽음을 당하셔야 할 때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17장의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고 1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였던 가룟유다에게 배신을 당하시고 로마 병정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는 일을 자신이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십자가가 영광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요한복음 17장까지 읽었다면 오늘은 이해하고 가셔야 됩니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에게 이해되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영생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이 영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영생을 그저 오래 사는 것이라고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이 귀하고 좋은 것이라는 느낌이 안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계속 살면 지겹지 않을까? 이런 방정맞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실제로 삶 자체가 쉽지 않은 분이 많습니다. 특히 연세 많으신 분 중에는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소원인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죽지 않고 계속 산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이라고 여겨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되지 않으니까 영생에 대해 별로 갈급함도 감동도 없는 것입니다.
3절에서 예수님께서 영생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밝혀 주셨습니다. 영생이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도 압니다. 그러나 정말 아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안다고 하는 말은 직접 만난다, 그리고 교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 사이에 부부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이라고 하는 것을 그저 지식으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3절에 말씀하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관계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십니까?
이사야는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전에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혼비백산, 기절초풍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영광이 있다는 것을 전에 들은 적은 있지만 그가 보고 난 다음에는 자기가 그 전에는 알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네 아비 친척 본토를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할 때, 가족도 고향도 버리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향 친적 아비 집 생활의 근거지를 다 떠나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떠날 수 있는 아브람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는 결코 그런 순종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광 중에 아는 사람은 그 생애 자체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5절에서 예수님께는 창세 전부터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가지고 오셨기에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진 예수님을 통해서도 사람들은 권세를 느꼈습니다.
[기도로 매일 기적을 체험한 사람] 존하이드 선교사는 1904년 인도 부흥을 시작하는 시알코트 부흥회 위하여 하루 종일 기도하던 중, 신비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체험을 합니다. 그의 간증 중에 인상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하늘을 떠나심으로써 죄로 가득한 세상에 들어와 인간이 되신 일에 대하여 본 것입니다. 그 동안 십자가 사건만 고난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성육신 사건도 그에 못지 않은 고난이었으며 얼마나 큰 희생인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지 않으셨다 하더라도 그 분의 성육신 자체가 무한한 희생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존하이드는 예수님이 개 처럼 되신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인도의 거리에 해매고 다니는 개. 떠돌아 다니며 사람들에게 구박받고 발에 채이고 돌에 맞는 개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존하이드 선교사의 얼굴은 눈물 범벅이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돼지가 된다면 어떤 심정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성육신은 그 보다 더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실 때, 자주 한적한 산에 올라 기도하신 심정을 알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맑은 공기를 쐬셔야 하시지 않으셨을까!
예수님은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영광을 다 숨길 수는 없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가리워진 영광의 그림자만 보고도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왜? 예수님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영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잠깐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너무나 충격을 받아 제 정신이 아니었고 그 산에서 영원히 살고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영광 중에 아는 것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믿는다 하여도 영광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아직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도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신앙 생활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 이렇게 들어서 아는 정도의 믿음은 우리를 계속 은혜를 구하고 기도 응답을 받는 것 밖에 모릅니다. 여전히 불평 불만도 많고 의심도 많고 불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왜? 순종이 어려우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나면 달라집니다.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으실 줄은 몰랐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게 사실일까? 나는 믿어지지 않아.
그러나 막상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요 21:12)고 했습니다.
인도의 성자 선다싱의 부모님은 독실한 시크교도이었습니다. 선다 싱은 철저히 시크교식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선교사들이 싫어서 선교사 학교에 돌맹이를 던지던 사람입니다.
하루는 친구들을 불러 놓고 자기 집에서 성경을 불태우며 만약 기독교의 신이 참 하나님이라면 성경을 불태우는 내가 당장 벌을 받을 것이라. 고 장담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경을 불태운 후 학교에 가지 못하고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입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만나 달라는 것입니다. 죽기로 결심하고 기도하던 셋째 날 새벽 5시 그는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환한 광채 속에서 어떤 이가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는 바울처럼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십자가에 못 박힌 나의 두 손과 발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아라. 내가 이처럼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은 것은 너를 지극히 사랑하여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선다싱은 고꾸라지면서 소리쳤습니다. 오, 나의 구주 예수님. 여태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부정하고 잘못된 우상만 섬겨 살았던 저의 큰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제부터 저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만을 위하여 살게 하옵소서. 그가 변하여 맨 발의 전도자 인도의 성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 고백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 더러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라고 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은 사람이 아닙니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2-4)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나면 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바로 믿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나타난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것이 보여야 진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골고다만 바라 보아서는 결코 십자가의 영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골고다에서는 고난이고 수치고 죽음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골고다의 예수님의 십자가만 보아서는 결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영의 눈이 뜨고 온 우주와 영계를 보아야 합니다. 온 우주에 되어지는 영적인 놀라운 사건을 보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날 온 인류를 사로잡고 있었던 죄의 권세가 꺽어졌습니다. 온 우주에 천지가 뒤흔들리는 엄청난 충격이 임했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마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꺽어졌습니다. 지옥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사람들이 영혼을 사로잡고 영원한 멸망 속에 들어가던 사람들의 영혼을 내어놓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타락한 이후로 닫혀졌던 천국 문이 활짝 열려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이 얼마나 엄청난 장관입니까? 보이십니까? 얼마나 엄청난 영광입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찬양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이들이 계속하여 속죄함을 받고 영생을 얻고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매 시간마다 아니 매 초마다 온 지구 상에서 구원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온 지구 상에서 지금도 일어나는 수없는 구원의 사건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인생의 전환의 역사, 영원한 멸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엄청난 변화의 기적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영광에 매어 사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영광을 알지 못하여 세상 영광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6-30절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이 노아 시대, 소돔과 고모라 시대처럼 살 것을 걱정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는 먹고 마시고 집 사고 땅 사고 자식 낳아 기르고 그들을 시집 장가 보내는 것 이상을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의 영광 밖에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업, 자녀, 좀 더 큰 집, 좀 더 큰 차, 좀 더 좋은 가구!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마차에 탄 부자 로 이것을 비유했습니다. 부자는 불켜진 마차 안에 앉아 있고, 마부는 차가운 바깥 바람을 쐬며 말을 몰고 있습니다. 부자는 불빛 때문에 바깥에 펼쳐진 하늘의 영광, 별들의 전경. 마부가 놓질래야 놓칠 수 없는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의 불빛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 을 보십니까?
여러분은 소중한 것을 잃으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돈, 명예, 자녀나 가족, 건강, 이런 것들을 잃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습니까? 다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임재가 사라졌을 때, 은혜의 감격이 사라졌을 때, 어떻습니까?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식을 잃었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까? 돈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 안타까웠습니까? 잠도 오지 않고 밥맛도 없습니까?
좀 답답하지만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면 오늘 주의 영광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은혜의 끝자락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은 어디 두고 사시는지 아시지요? 패물이나 집 문서, 땅 문서, 통장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어디에 두었는지 다 압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잘 모르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 여러분에게 소중한 분이 아니십니다. 아직 은혜의 맛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죽고 하나님 앞에 가서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임하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에 나가면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존재가 사람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속에 나타난 영광은 나이아가라 폭포나 설악산 단풍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오히려 사람이 무섭고 겁이 납니다. 이유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회복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죄는 사해졌고 옛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부흥회 때, 많은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람이 우는데 왜 기쁩니까? 회개를 통하여 죄의 권세가 벗겨지고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이 드러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를 영화롭게 하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원합니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살게 될 때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본래의 모습, 창조의 원형을 드러나게 합니다.
남편이 남편의 자리로 돌아오고 아내가 아내의 자리로 돌아오고 부모가 부모의 자리로 자녀들이 자녀들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대학에 합격하고 사업에 성공하고 진급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무엇이 되겠습니까?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내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다시 거듭난 생애를 살게 될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라 하실 때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그 십자가를 내가 끝까지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위하여 살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었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하라고 하신 일 있었죠? 제가 그 일을 열심히 감당하다가 왔습니다." 보고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우리나라 개신교 역사에 가장 존경받는 목사님이 주기철 목사님 입니다. 그렇다고 그 분이 세상에 있는 동안 뭔가 자랑할 만한 업적을 남겼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옥에 갇혀 모진 고문으로 인해 순교를 당했다는 것 외에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한국 교회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 같은 순교자들이 곁에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를 포기하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자녀들 조차 한 동안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이리저리 잘도 피해 잘 사는데, 왜 아버지만 미련하게 고집부리다가 고생하고 일찍 죽어 우리를 이렇게 고생하게 하느냐 말입니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 교회의 영광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길을 끝까지 갔기 때문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죽는 것이 자신이 갈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일경을 피하여 공동 묘지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기도 중에 깨달았습니다. 지금은 숨어 살 때가 아니라 죽을 때이구나! 그리고 다시 교회로 돌아와 [일사각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붙들려 간 것입니다.
지금 어느 목사님이 주기철 목사님 처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계십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할 때 그것이 십자가 지는 길이라도 끝까지 순종해 나갈 때 여기서도 계속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희생할 일, 속상할 일, 답답한 일, 싸울 일이 있을 때, 미워죽겠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고 하나님께 물으셔야 합니다. 지금,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깨우쳐 주시면 예수님 처럼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이 다하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원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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