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톨스토이는 그의 참회록에서 어리석은 인간에 대하여 이런 동양의 우화로 풍자하고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광야 길을 걷다가 갑자기 맹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맹수를 피하여 도망치던 그 나그네는 살 길을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한 우물이 있어서 우물 구덩이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가 살려고 우물 속으로 들어가서 우물 밑바닥을 보았을 때 큰 용이 나그네를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질겁을 했습니다. 위를 쳐다보니 맹수가 자기를 집어삼킬 듯 노리고 있고 밑은 큰 용이 입을 벌리고 있는 아슬아슬한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나그네가 ‘이제 나는 죽었다.’ 하고 체념하려는 순간 눈을 들어 옆을 보니까 마침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가지가 우물 있는 데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그네는 나무 가지를 든든히 붙들었습니다. 그는 나무 가지를 의지하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힘은 자꾸만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은 쥐가 나무 밑둥을 갉아먹는 소리였는데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무 가지가 끊어지면 용의 밥이 된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쥐들이 나무 밑둥을 갉아먹는 날 나는 떨어져 죽는다.’ 이런 아슬아슬한 위기 속에서 눈을 들고 나뭇잎을 봤을 때 벌이 꿀을 만들어 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위기에 처한 것도 잊은채 꿀을 혀로 핥아먹고 있었습니다. 흰 쥐와 검은 쥐는 계속해서 나무 밑둥을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이 나그네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단 꿀만 빨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우화를 인용하면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어리석은 것, 나도 어리석었지 이 세상 향락에 취하고, 이 세상 욕심에 취하고, 죽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생각없이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노라.”
우리는 모두 다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날마다 흰 쥐와 검은 쥐가 마지막 의존하고 있는 생명의 줄기를 갉아먹듯이 흰쥐와 같은 밝은 낮과 검은 쥐와 같은 캄캄한 밤이 내 생명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날 그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나, 그날 그날 무슨 취미로 사나’ 여기에 도취해서 인생을 끝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사는 단계를 1년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고, 계절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는 날은 매일 매일 사는 것입니다. 낮은 사는 것과 같고 밤은 죽는 것과 같아서 살고 죽는 것이 매일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의 나날에 대하여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인생은 세 가지를 알아야 지혜롭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내가 얼마나 살다 갈 것인가 연한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날은 얼마이며 내가 남은 날은 얼마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살고 있다.’라고 생각하고 죽음으로 가는 사람이 있고, ‘나는 날마다 죽는다.’ 생각하고 영원히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날마다 산다는 것만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은채 끝내버립니다. 우리는 날마다 산다고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날마다 죽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갖고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다시 죽음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과 죽는 것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세계는 삶의 세계이면서 죽음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날 때 내가 산다고 생각할 때는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음에서 본다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어느 편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의 세계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날마다 사는 것이 죽는 것이요, 어떤 면에서 바쁘게 산다는 것, 이것은 죽음의 세계를 향해서 바삐 서두르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것입니다. 바뻐도 무엇 때문에 바쁜지를 알고 바빠야 합니다. 공연히 바쁘게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사는 것이 하루살이입니다. 하루살이가 물었습니다. “하루살이야 뭐가 그리 바쁘니?” “나도 몰라” “모르는데 왜 바쁘게 도니?” “저것이 바쁘게 도니까 나도 돈다.”
많은 사람들이 바빠야 할 이유를 모르고 다른 사람이 바쁘게 서두르니까 나도 서두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살아도 사는 것을 알고 죽어도 죽는 것을 알고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이천년 역사에서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역사 속에서도 이런 위대한 말을 한 분은 사도 바울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위대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자기 사랑하는 형제들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나의 자랑인 성도들, 내가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부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얻고, 있는 형제들에게 말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이 왜 이 말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음의 위기를 맞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어느 한 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는 죽음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친히 자기의 모든 죽음의 위기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옥에 가두는 것은 죽으라고 가두는 것입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면 39대인데 이것을 다섯 번 맞았으면 195대를 맞은 것입니다. 돌로 치면 죽는 것입니다. 일 주야를 바다 가운데서 헤매는데 이것도 죽는 것입니다. 여러번 여행하면서 강을 건널 때 빠져 죽을 뻔 했으며, 강도가 그를 추격해서 죽을뻔 했으며, 동족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고 광야 길을 걸어가면서 추위에 떨고 배고파 굶주려 죽을 뻔 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죽는 현장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날마다 죽는다고 말할 때는 병들어 죽거나, 절망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에 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담대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부활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죽음이 도전해 와도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고전 15:29-30)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이 말은 당시에 죽은 자들을 위해서 산 자들이 대신 세례를 받아주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구원의 상징적 표시로 조상이 믿지 않고 죽었을 때 대신 세례를 받아서 그들을 살려주는 의식이 카톨릭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것이 아니라 ‘만일 죽은 자들이 부활이 없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겠느냐’는 말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연합해서 죽고 연합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연합하고 부활을 연합하는 것인데 만약에 내가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부활 생명에 대한 약속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겠느냐 이것은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냐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세례를 예수와 함께 받으므로 부활 생명에 대한 승리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이런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내가 에베소에 있는 악한 자들과 함께 싸워 복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이지 내가 먹고 살려고 싸우는 것 아니다. 직업 현장에서, 생활 현장에서 남과 피가 터지도록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데 부활 생명에 대한 보장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는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말입니까? 이 말은 다른말로 말하면 ‘부활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날마다 나를 죽여서 주께 제물로 드린다. 주님이 아니었다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겠는가 영광스러운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었기에 나의 생명을 주님께 제물로 드린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딤후 4:6)
자기 죽는 순간을 주님 앞에 제물로 다 부어드리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내가 죽는다.’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을 주께 제물로 바친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친다.’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헬라어로 ‘테테르스타이’라는 말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뜻을 죽음으로 이루듯이 자기는 자기 생명을 주님께 하나의 제물로 드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날마다 죽노라’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또 하나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은 ‘내 육신의 정욕과 인간의 욕심과 세상적인 모든 것이 날마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날마다 죽지 않고는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바울은 잘 알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말씀에서 ‘나’라는 말이 여섯 번 나오고 ‘산다’는 말이 네 번 나옵니다. 내가 사는 것이 별세 신앙의 기본 원리입니다. 예수 안에서 어떻게 사는 것인가? 신앙은 살자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야 됩니다. 내가 살려면 내가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날마다 죽자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얻을 복이 하나 있습니다. 그 복이 바로 날마다 내가 죽는 복입니다. 돈 벌어서 복을 받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서 아무개 뭐 되었다.’ 이것도 세상 사람들이 다 받는 복입니다. 예수 믿고 받는 복은 내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이 세상 사람들이 못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는 것은 날마다 사는 선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와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안사는 것이 편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안살면 그것은 곧 죽는 것이고, 망하는 것이고,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의로워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행복해집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영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은 만큼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아이들도 자기 게으름이나, 자기 감정이 죽어야 학교에서 삽니다. 직장도 자기 사적인 감정이 죽어야 직장생활 잘 할 수 있지 죽지 않고는 직장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가정생활도 부부가 서로 자기를 죽여야 함께 살지 서로 안죽이려고 하면 뜻이 안맞아서 남편이 가출하든지 부인이 도망가든지 합니다. 서로 죽여야 함께 삽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려면 자기를 죽여야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생을 사는 것은 날마다 자기를 죽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6). 옛 사람이 죽고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새로운 내가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과거에 대하여 죽은 자요, 욕심에 대하여 죽은 자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죽은 자로 고백을 하고 예수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 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 있느냐? ‘나는 나의 죽음을 통해서 날마다 주께로 간다.’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후 5:8)
많은 분들이 천당에 대하여 환상적으로 그리워하면서 실제로는 천당가려는 마음이 적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세상에서 믿고 죽어서는 천당 안가려고 합니다. 천당 간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천당 안가려고 합니다. 억지로 죽는 죽음은 비참한 것입니다. 천당도 기쁘게 가야지 죽었으니까 천당 가서는 안됩니다.
저는 열 여덟살 때 폐결핵으로 살 소망이 없었습니다. 도저히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결심하고 죽으려고 생각하니까 억울한 생각이 들어서 며칠이고 통곡을 했습니다. 이 세상을 두고 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억울하고 너무 너무 슬퍼서 울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 혼자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을 마음이 없는데 죽으려고 하니까 죽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려고 하는데 병드니까 억울한 것입니다. 부자로 살려는데 가난하게 사니까 억울한 것입니다. 올라가려고 하는데 못올라가니까 억울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죽으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음이 와도 억울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죽음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되며, 이해가 있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라고 할 때 나는 날마다 죽음이 준비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고 죽음이 닥쳐왔을 때 기쁘게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저희 신학대학의 학장이셨던 김정준 박사님이 마산 폐결핵 요양소에 있을 때 한 분이 박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죽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그는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씻음을 받은 감격의 눈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내 모든 이 세상 시름을 없이 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취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거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승리자의 노래입니다.
어느 날인가 한 할머니가 늙는 것을 탄식했습니다. 그 이유는 늙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다 싫어해도 한 분은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은 할머니를 좋아하십니다. 세상 떠나 영원히 살려고 주께로 올테니까요.”
저는 가끔 한신교회 새가족을 환영하면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한신교회에 오셨나요?” 그러면 “오다가다 들렀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고, “가까워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고, “목사님이 좋아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좋아서 왔다고 대답하면 제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주님께서 “어떻게 왔나” 할 때 “죽어서 갈데가 없어서 왔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인지 “친구가 천국이 좋다고 지옥가지 말고 천국에 가자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인지 “주님을 사모해서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주님 좋아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인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다. 우리는 천국에 가되 예수님이 좋아서 가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립2세는 지혜로운 종을 두어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종은 아침마다 일어나서 왕의 문앞에 서서 “폐하여, 평안하십니까? 폐하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 이런 유언을 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관을 짜되 양쪽에 구멍을 뚫어 손을 밖으로 내밀 수 있게 짜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빈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라”
그는 참으로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자기 죽음을 알았고 빈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안죽을 것처럼 사는데 문제가 있고, 탐욕이 있고, 인간의 악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드리고 싶은 충동, 열정,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 그리고 주님을 사랑해서 무엇인가 하고 싶은 간절한 염원, 이런 것들이 내가 날마다 죽는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솟는 것이지 날마다 살아야 되겠다는 사람은 살 일만 생각해서 돈을 모아야 하고, 집을 사야 하고 살아야 하니까 계속 땅에 쌓다가 죽어버리니까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채 빼앗기고 마는 것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내가 천국에 갈 때 주님이 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은 유대인의 돌에 맞아 죽으면서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우러러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이 들었습니다.
이 모습을 바울이 보았습니다. 아, 위대한 그리스도인, 날마다 스데반은 자기 죽음을 선언하고 살았으며, 죽으면서도 성령이 충만했고,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습니다.
주께로 가는 날 우리 주님이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주님, 저 한신교회에서 아무개가 온답니다.” “아무개가 온다고? 오기는 오는구만” 그러실 것인가, “주님, 아무개가 온답니다.” 할 때 주님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내 사랑하는 종이 온다. 천군 천사가 함께 맞이하라” 하고 서서 기다리실 것인가, 보기 싫은 사람이 오면 오든 말든 상관하지 아니하고 “모른다고 해라” 하실 것인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살면서 날마다 세상을 보았습니다.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 눈을 감는 것입니다. ‘더 이상 세상을 보지 않는다. 나는 예수를 본다. 하늘을 본다.’ 이제 우리의 눈이 세상을 보다가 눈동자가 흐려졌습니다. 하늘을 봐야 눈이 열립니다.
모든 성도들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 생명을 주께 제물로 드린다. 내 정과 욕심을 날마다 죽인다. 나는 날마다 주께로 간다.’ 이 고백, 이 승리, 이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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