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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복음 5:14-16

by 【고동엽】 2022. 1. 3.

너희는 세상의 빛/마태복음 5:14-16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세기 1 3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을 먼저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빛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으므로 생명이 있습니다. 만약에 빛이 없어지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태양이 빛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 빛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만약에 태양의 빛이 사라지면 순간 전 지구는 냉동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공중에 나는 새나, 땅 위에 있는 모든 동물이나, 물속에 있는 모든 해물에 이르기까지 한 존재도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빛은 곧 생명입니다.

두 번째로 빛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우리는 날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모든 것을 구별하면서 우리 눈으로 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캄캄한 밤이 오면 일할 수가 없습니다. 활동할 수도 없습니다. 걸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빛이 있으므로 우리는 일하고 이 자연의 아름다움도, 우리의 얼굴도 보며 삽니다.

창세기 1장 마지막절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하신 것은 빛을 만드신 이후의 얘기입니다.

빛은 우리의 생명이며,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4)

하나님께서 빛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빛을 성경은 곧 예수님을 가리켜서 나는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대의 찬사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복 가운데 최고의 복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찬사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소금같은 존재, 그리고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빛과 같은 존재,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흔히 복 하면 내가 이 땅에서 받고 누리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참 복은 자기 존재에 영광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내 존재가 세상 어느 곳에 가든지 소금같은 존재가 되고 내가 어느 곳에 가든지 어두움에 있는 자들을 빛으로 비추어준다는 사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영광이며,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소금과 빛은 서로 대조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금은 땅에 있습니다. 그러나 빛은 하늘에 있습니다. 소금은 감추어져야 하고 빛은 드러나야 합니다. 소금은 낮아져야 하고 빛은 높아져야 합니다. 소금은 세상과 더불어 타협하면서 들어가는 것이며 빛은 어느 것과도 타협함이 없이 구별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면서 나아갑니다.

왜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 어떤 때는 내가 낮아지고 겸손하게 살아서 세상 사람들 속에서 전혀 흔적없이 그 속에 들어가서 그 역사를 바꾸는 존재로서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빛이 된다는 것은 구별되어 신성한 자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인 됨을 만방에 공개하면서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빛의 역할

 

첫째, 빛은 어두움을 밝히는 것입니다.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빛이 들어오면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빛은 사실대로 알려줍니다. 흰 것은 희게, 검은 것은 검게 보여줍니다. 더럽고 깨끗한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좋고 나쁜 것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3:20)

빛이 오면 어두움속에 있는 모든 정체를 밝힙니다. 어두움을 폭로합니다. 모든 것이 탄로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은 빛을 싫어하고 악한 자는 선한 자를 싫어합니다. 불의하고 악한 어두운 세상에 참 진리의 빛이 비췰 때 빛이 싫어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빛을 향해서 나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3:21)

이제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두움에 있는 자들이 빛으로 나아오게 해야 합니다.

둘째, 빛은 인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항구에 가면 등대가 있기 때문에 어두움을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를 보고 항구로 귀항을 합니다. 가로등이 있어 빛을 보고 차가 달립니다. 믿는 자는 양심의 안내를 해주어야 됩니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서 세상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해 주어야 됩니다. 이 세상은 선을 위해서 용기있게 인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세상은 용기있는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잘못되고 도덕이 타락하고 윤리가 무너지고 모든 세상이 악해질 때 그리스도인들은 정의와 양심으로, 빛으로 저들을 이끌어 인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빛은 경고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빛은 종종 앞에 있는 위험을 알려주는 신호를 합니다. 바다에 가면 위험한 암초 위에 신호등을 세워서 배가 피해가도록 만들어줍니다. 마치 위험한 곳에 빛을 보여서 위험을 피하도록 만들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빛을 비췸으로 말미암아 악한 자들의 멸망을 보여주고 불의한 자들의 양심을 비춰주면서 이것은 곧 멸망이라고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어떤 장님이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반대편에서 나그네가 걸어오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등불을 들고 오는 사람이 소경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그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소경인데 무엇 때문에 등불을 들고 다닙니까?” 그때 소경이 대답하기를 내가 걷고 있는 것을 알려주므로 다른 사람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등불을 들고 다닙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등불을 들고 세상 사람들을 비취면서 그들이 경고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빛은 드러나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14-15)

유대인의 집은 작은 창문 하나만 있어서 집안이 비교적 어두운 편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전기불이 없었기 때문에 깊은 접시 모양의 그릇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담아서 불을 켰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성냥이 없었기 때문에 불이 한번 꺼지면 다시 켜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저들이 외출할 때는 화재가 나거나 불이 꺼질 염려가 있기 그것을 내려서 흙으로 만든 말이라고 하는 그릇 위에 얹어놓고 나갑니다.

불을 켜서 말 아래 감추지 아니하고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곧 빛은 드러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만방에 공개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숨은 제자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면 제자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제자면 숨을 수가 없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회사에서 10년동안 신자인지 아무도 몰랐다면 이 사람은 참 신자가 아닙니다. 신앙이 좀 약해서 바르게 살지 못하더라도 세상에 공개하십시오. 옛날에 어떤 사람은 성경 들고 교회에 가는 것이 창피하다고 성경을 신문지에 싸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10:32-33). 세상에 가서 떳떳하게 예수 믿는 사람임을 증거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면에서 행동이 사람들 앞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상점에서 물건을 살 때 물건 값을 깎는다든지, 음식 점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하대한다든지 하면 안됩니다. 또 직장에서 일할 때도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 다워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신자다운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곳에 교통 경찰이 있었는데 미국에 관광을 간 교인이 이 근처에 어느 곳에 교회가 있습니까?” 하니까 교통 경찰이 저 어느 골목에 가면 교회가 있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보니까 교통 경찰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도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왜 가까운 교회를 두고 먼 곳으로 가라고 했느냐?”라고 물으니까 교통 순경이 하는 말이 나는 잘 모르지만 그 교회 교인들이 얼굴이 밝고 나에게 친절히 인사하는 것을 보니 그곳 교회가 좋은 것 같이 보였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사에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받아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칭찬을 받아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맛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축복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우리가 하고,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 복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스런 빛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리스도의 빛은 결국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게 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영광은 착한 행실로 칭찬을 듣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맛입니다.

예수 믿는 자의 축복은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추석에 고향에 가면 친척과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에서 풍겨지는 은은한 빛이 있어야 합니다. 똑같은 아들이지만 믿는 아들은 달라야 됩니다. 그래서 효자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빛입니다. 빛은 앞을 멀리 비춰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나 세상의 소망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역사의 소망입니다. 때로는 교회가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 비난도 받지만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세상의 빛이요, 소망입니다. 어두움이 빛을 찾듯이 언제나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찾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 해도 기독교인 가운데는 착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 빛이겠습니까? 어둡고 답답한 마음을 밝게 해 주는 것이 빛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마음이 밝아지고 생각이 밝아지고 희망을 갖게 되고 창조적인 생각을 갖게 되면 빛을 본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예수님 빛이 있고 우리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 빛은 본질적인 빛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부터 받아서 반사하는 빛입니다. 내 속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주시면 받아서 비추는 빛입니다. 내가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관계에서 빛입니다. 세상을 향해서 비추어 주라는 빛이지 내 자신이 빛은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은 본질적인 빛이 아니라 세상을 비추어주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이 빛은 내 속에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양과 같고 우리는 달과 같습니다. 달은 빛은 있지만 태양빛과는 다릅니다. 태양빛은 생명이 있고, 살리는 빛입니다. 그러나 달빛은 어둠을 비추고 안내하는 역할을 하지만 달빛은 생명이 없습니다. 달빛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달빛으로 과일을 익히지 못합니다. 달은 빛은 비추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햇빛만이 농사를 짓습니다. 우리를 살려줍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살리는 빛입니다. 생명입니다. 참 빛입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받아서 세상을 비춰줄 뿐이지 내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달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초생달이 있고, 반달이 있고, 보름달이 있습니다. 초승달은 달의 한쪽 구석이 조금 빛을 비추는데 초저녁에 반짝 비추다가 사라져버립니다. 반달은 반쪽이 빛을 비추는데 초저녁부터 밤중쯤 비추다가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보름달은 달 전체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훤하게 비췹니다. 달의 모습이 조금도 변함이 없이 지구를 다 비추어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조금 받으면 초생달 신자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반쯤 받으면 반달 신자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을 온전히 받으면 보름달 신자가 됩니다.

초승달 신자는 교회에 와서 찬송 부를 때만 조금 빛이 있는 것 같다가 나가면 다 꺼져버립니다. 믿는 사람인지 안믿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들 때는 신자 같은데 안들면 불신자 같습니다. 반달 신자는 반절쯤 은혜가 들어가서 어떻게 보면 신자 같은데 어떻게 보면 신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수시로 이동합니다. 보름달 신자는 언제나 은혜가 충만합니다. 태양으로부터 받은 빛이 전혀 가리우지 않고 그대로 비추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가려서 그림자가 내리면 반달이요, 다 가리고 한쪽 구석만 비추면 초승달이 됩니다. 우리의 심령속에 땅에 있는 것,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다 예수 안에서 은혜로 사라져버릴 때 보름달 신자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기 위해 참 빛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빛을 받아야겠습니다. 달이 지구의 그림자를 떠나면 빛을 받듯이 우리는 이 세상의 정욕이나 욕심을 버리고 주께로 얼굴을 향하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빛으로 다른 사람에게 비추일 수 있는 빛이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서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세상 어느 곳에 가든지 항상 어두움을 비춰주는 보름달같이 그 밝은 빛으로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주며, 저들의 인생을 밝게 하며, 어두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며, 저들에게 언제나 꿈을 주고 만날 때마다 무엇인가 새로운 삶의 의욕을 일으켜주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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