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신앙 넘치는 축복/말라기 3:10-12
만약에 “형제는 무슨 복을 많이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얼마 전에 기자가 나에게 “목사님, 목사님은 무슨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기에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복을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자가 “수십년 기자생활을 했지만 이런 대답은 처음 들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개는 어떤 복도 넘치는 복이 없습니다.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않나 보라’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못 가질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을 아무리 가져도 넣지 못하는 은행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주어도 그만 갖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모자라는 것이 돈입니다.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않나 보라’고 했는데 쌓을 곳이 없도록 받아본 사람이 있습니까? 창고가 모자라지 금고 속에 못 넣은 사람이 있습니까 항상 모자랍니다.
넘친다는 말은 남에게 줄 수 있는 복을 말합니다. 남에게 줄 수 있는 복만이 넘치는 것입니다. 많든 적든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은 넘치는 것이고 못주는 사람은 모자라는 것입니다. 모자라서 못주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람은 남에게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축복은 영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옹달샘 물은 겨우 바가지로 퍼서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넘치는 물은 입만 대면 먹을 수 있습니다.
넘치는 복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넘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않나 보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붓지 않나 보라는 말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우리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면 뭐가 그렇게 넘치는 것이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가 넘칩니다.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에게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치는 사람만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그렇지 않으면 십일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침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오고 안바침으로 사랑이 안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 오고 있는데 내가 고백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안오는 것이고 내가 고백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넘치고 있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온전해지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말씀을 연구해서 온전해지고, 기도를 통해서 온전해지고, 날마다 나 자신이 주의 은혜를 입고 온전해집니다. 그런데 그 온전한 신앙은 물질로 시험을 합니다. 물질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 안됩니다.
교회에 오면 가장 거부감을 갖는 것이 헌금하라는 말을 할 때입니다. ‘회개하라’고 말하면 ‘아, 죄 많으니까 회개해야지’ 그럽니다.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이 말도 거부감이 안생깁니다. ‘기도해야지’ 그럽니다. ‘열심히 전도합시다.’ 이 말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바칩시다.’ 그러면 거부감을 갖습니다.
제가 어느날 집에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중푠가?” “나 중표네.” “나야?” “나가 누군데?” “동창 있잖아” “아, 아무개? 알겠어. 웬일이야 오랜만이네.” “자네가 목사라면서? 꽤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네.” “괜찮아” “자네가 몇대 목사 중에 하나라면서?”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되어도 보통은 돼” 그러면서 얘기를 하는데 “나도 한때는 괜찮았어 그런데 IMF에 부도가 나가지고 쫄당 망했네. 그래서 등산이나 다니고 있는데 아내가 자꾸 교회에 가자고 해서 교회에 갔네. 그런데 목사가 헌금을 하라고 목청 높여서 설교를 하기에 내가 그날로 돌아섰네. 세상도 돈 때문에 열받치는데 교회까지 헌금하라고 하니 교회 가겠나? 하나님이 무슨 돈을 그렇게 좋아하나 사람이 돈 좋아한다는 말은 있지만 하나님이 돈을 좋아한다니 그런 하나님을 내가 어떻게 믿겠나. 그래서 그만 두었네. 자네도 목산데 돈 좋아하나?” “좋아하구 말구. 목사는 돈을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헌금을 좋아하신다네.” “헌금과 돈이 다른가?” “돈은 돈이고 헌금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라네. 자네가 낙심된 것 같은데 낙심하지 말고 또 한번 가봐 그날은 헌금 얘기 안할거야 어떻게 꼭 그날 갔네.”
제가 이 분을 최근에 만났는데 그래요. “이 목사님, 예수 믿고 보니까 제가 바쳐야겠습디다. 내가 진작 많이 바칠걸... 이제 열심히 바치고 사네.” 그래요.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바르게 살고 온전해 지려면 세 가지 관계를 잘 맺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의 계명이 4개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사람과의 관계의 계명은 3개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물질과의 관계의 계명은 3개입니다. ‘거짓말 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하나님은 위로 섬기고, 인간은 옆으로 섬기고, 물질은 지배해야 합니다. 물질이 나를 섬기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교훈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물질은 얼마나 무서운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인간이 다 약해집니다. 늙으면 시력도 약해지고, 정욕도 떨어지고, 세상의 명예도 귀찮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죽을 때까지 꼭 쥐고 있는 것이 돈입니다. 돈 싫다고 하면서 죽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돈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주님을 찾지만 실제로는 물질이 그 중심의 주인이 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유명한 소크라테스는 “부자가 그 재산을 어떻게 쓰느냐가 판명되기 전까지는 그를 칭찬해서는 안된다. 부자의 손에서 그 물질을 다 잃어버린 후에라야 그 인격이 평가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돈 버는데는 용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바치는데는 용감한 사람이 드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해 쓰여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헤링톤 리스라는 분은 “문명인의 가장 민감한 부분은 그들의 호주머니이며 설교자는 청중들의 호주머니를 건드리는 설교를 할 때 가장 격렬한 갈등이 시작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청중의 비위를 맞추려면 전혀 헌금 얘기를 해서는 안됩니다.
천주교는 침례를 물속에서 받는데 달러를 많이 가지고 있던 한 성도가 침례를 받게 되었는데 돈까지 물 속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신부님, 잠깐 기다리시죠. 호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꺼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신부님이 하는 말이 “형제여, 가만히 두시오. 이번에 당신의 지갑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호주머니가 세례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다스리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호주머니를 다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호주머니를 예수님께 맡기지 못하고 ‘호주머니는 내가 맡고 그저 마음 한구석만 주님이 맡으시죠.’ 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자기 수입의 10/1입니다.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는 십일조를 바칠 때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고 합니다. 안믿자니 지옥이 무섭고 믿자니 바쳐야겠고, 안받치면 걸립니다. ‘어쩌다가 내가 친구 따라왔나 그때 거절했으면 될 것을...’ 이제 안믿으면 지옥 간다는 얘기는 들었죠, 안믿는다고 돌아설 수는 없고 믿자니 십일조가 가로막고 고민입니다. 그런데 십일조는 돈이 아니고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둡니다. 나는 주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데 아내에게 돈을 주지 않는 것은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돈을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서 그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10/1을 바치면 지혜가 옵니다. 그런데 10/1일을 안바치면 지혜가 안옵니다. 그래서 오다가다 바겐세일 하는데 가서 바가지 쓰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은 하나님 앞에 먼저 드려질 때 지혜가 와서 나머지 돈도 가치있게 쓰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신앙고백이면서 찬송입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이 붙잡혔다는 얘기를 듣고 집에서 기른 군사 318명을 거느리고 가서 빼앗긴 재물과 조카 롯의 가족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와서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하고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할 때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
미국의 뉴저지에 한 교회가 있었는데 여전도 회장이 부자입니다. 3에이카의 대지에 잔디밭이 있고, 풀장이 있는 으리으리한 집을 가진 사람인데 이 회장이 이런 광고를 해달라고 목사님에게 부탁했습니다. “목사님, 폐품을 모아서 주의 선교사업을 위해서 쓰려고 하니까 광고를 좀 해 주시죠.” 그날 아침 목사님은 이런 광고를 했습니다. “본 교회 여전도 회장님께서 이 시간 폐품을 모집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회장을 위해서 폐품 수집을 시작하겠습니다. 각 교인 가정에 버려둔 폐품을 전부 수집해서 교회에 가져오시면 교회에서는 그것을 팔아서 부인 회장의 생활비와 용돈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들은 여전도 회장이 얼굴이 빨개가지고 예배가 끝나자 마자 목사님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목사님, 저를 거지로 알았습니까 제가 언제 폐품 팔아서 먹고 산다고 했습니까?”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놀라지 마시오. 당신은 예수님보다 부자입니다. 예수님을 폐품이나 쓰레기같은 것 주워다가 예수님께 드리려고 했으니 예수님을 거지로 알았습니까” 그때 여전도 회장이 무릎을 꿇고 “오 주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소서.” 하고 회개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신앙고백이 어떻게 되어지는가 상상해 보십시오. 항상 폐품을 모아드리는 것처럼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 이것으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고백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인데 나이 드신 자매님들 10여명이 고구마 밭을 메고 있어요. 제가 가방을 들고 심방을 가다가 고구마 밭을 메는 자매님들 속에 들어갔습니다. “자매님, 좀 쉬시죠.” 하고는 호미를 제가 받아서 고구마 밭 풀을 뽑으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목사가 자기 밭을 메준 것이 고마워서 자매님이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이 날마다 새벽기도에 나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 너무 은혜가 커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제가 심방을 가면 이 분은 벌써 동네 산등성이에서 제가 오는 것을 보고 마당에 나와서 절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자매님, 다음부터 이렇게 하면 나는 교주가 됩니다. 절대로 마당에 나와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나같은 죄인을 예수 믿고 천당 가게 했으니까 너무 너무 감사해서 그럽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이 한달동안 교회에 안나와요. 그래서 제가 심방을 갔습니다. 구역장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몸살이 나서 누워 있다는 것입니다. 가서 기도를 해주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몸살이 났습니까?” “제가 그동안 젊어서는 남편 덕으로 잘 살았고 이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용돈도 없는데 제가 예수를 믿으면서 느낀 것이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날마다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으니까 일꾼으로 가서 추수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안하던 일을 하니까 몸살이 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고 싶어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자매님 머리에 손을 얹고 “주여, 눈물을 쏟더니 이제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몸살까지 주님께 드립니다. 주여 받으시옵소서.” 하고 기도했더니 “목사님 살아났습니다.” 하고 벌떡 일어나요. “자매님이 몸살이 난 것은 하나님 앞에 순교자의 영성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니 기뻐하시오.” 했더니 몸살이 나갔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바치기는 바치는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단계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단계는 믿는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교회에 나오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받고 구원을 받는 믿음을 얻습니다. 또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또 우리는 천국이 있는 것을 믿으며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과 모든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런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날마다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에서 헌신이 일어나게 됩니다. 믿음만 가지고 일생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깊어가면 깊어갈수록 ‘아, 내가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크지’ 이런 감동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마음도, 몸도, 물질도 드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단계가 넘어가면 이런 경지로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은 가질 수 없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지만 하나님은 어떻게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은 스스로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통해서 행복을 얻습니다. 하나님도 외로운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교제함으로 거기에서 행복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신랑이 되기를 원했다는 말은 깊은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자비하십니다. 긍휼이 많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들에게 베풀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신랑으로 고백되기를 그토록 원했던 것은 인간들을 통해서 행복을 함께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 하면서 처음에는 믿고 결혼을 합니다. 또 남편을 사랑하므로 말미암아 최선을 다해서 살림도 하고 가정을 돌봅니다. 그러나 한가지가 더 있습니다. 이 ‘남편이 나 때문에 행복해야지’ 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또 ‘아내가 나 때문에 행복해야지’ 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만남의 신비입니다. 믿음으로, 사랑으로, 행복의 깊은 경지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의 단계에서 사랑의 단계에서 높은 행복한 경지에 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행복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은혜를 입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넘치도록 주노니 그 마음을 땅의 어느 곳에 쌓을 수 있겠나 종이에 기록할 수 있겠나 집에 담을 수 있겠나 ‘넘치도록 붓지 않나 보라’ 이 말은 ‘내 마음을 네게 주노라’ 이것입니다. 물질도 아니요, 눈에 보이는 영광도 아니요, 세상의 자랑도 아닙니다. ‘이 마음을 네게 주노니 이 마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받으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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