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사랑 주님사랑
느헤미야 2:1-10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아오
리이까 ....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내일은 6·25 기념일입니다. 금년으로 57주년을 맞았습니다. 반세기가 넘었는데도 이 6·25의 후유증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남북 이산가족들의 상봉 모습을 보면 참 우리민족도 불행한 민족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산가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심정을 리얼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얼마나 상처가 크면 만나는 자리에서, 헤어지는 자리에서 혼절까지 하겠습니까. 우리민족은 그런 역사의 불운을 겪고 이 나라를 지금까지 이끌어 왔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를 이렇게 이끌어 오고 건강한 나라로 만들게 된 데는 감사해야 할 분들이 있습니다.
희생자들에 감사
우리나라 역사가운데 가장 처절한 역사는 일제로부터 압박받은 36년간의 역사일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것만 보아도 그 때가 얼마나 고난스러웠던 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선조들이 많은 회유를 받았고 협박을 받으며 시달렸습니다. 그때 그 회유에 넘어간 사람들도 있고 아예 앞잡이 역할을 한 사람들도 있고 그때 고문으로 희생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끝까지 고난을 극복하고 지조를 지킨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민족이 또 한 번 그런 고난의 역사를 만난 것은 6·25 사변입니다. 6·25로 인해서도 520만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고 1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런데 6·25는 반세기 전에 끝났지만 오늘까지도 그 상처들이 치유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산가족 상봉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직도 우리나라는 전쟁 중에 있구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어느 때나 위기와 수난의 때에 희생자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알고 보면 그 희생자들 때문에 그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하고 건강한 나라가 된 것은 그렇게 위기의 때, 수난의 때, 전환기의 때에 수난당하고 희생당한 선조,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지난번 워싱턴에 들렸을 때 어디를 가보고 싶으냐고 묻기에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 보자고 했습니다. 수년전에 가 보았는데 다시 가 보고 싶었습니다. 가서 보니까 한쪽은 6·25때 한국전에서 사망한 미국 병사들의 묘역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묘비에는 “한국전에서 사망“이라는 글자들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 묘비들을 보니까 순간 가슴이 뭉클해 왔습니다. 저 죄 없는 젊은이들이 이 땅에 와서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얼마나 한편 마음 죄송하고 미안하고 송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반미운동을 펼치고 미 대사관 앞에서 미군 물러가라고 시위하고 미전향자들에게 민주인사라고 포상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분노할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6·25때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국 참전용사들이 얼마나 오해하고 있을까 생각하고 재향군인회에서 미국 참전용사회에 사절단을 보냈다고 합니다. 미국에 가서 먼저 원호병원을 찾아갔는데 그곳에 한국전에서 부상당한 병사 중에 56년간 병원에 입원해 있는 병사들이 아직도 병상에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국 상황에 대해서 사죄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80세가 넘는 부상병이 대답하기를 “오늘 한국이 발전해서 행복하고 보람을 느낀다, 절대로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합니다. 이 나라를 그렇게 해서 구해낸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솔직해야 합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잘해서 이 나라가 지금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된 것이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이렇게 튼튼한 나라가 된 것은 우리 선배들과 우리 부모 세대들이 그 어려울 때 희생당하고 아픔을 당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사회가 너무 착각하고 있습니다. 엊그제 통계를 보니까 오늘 초중고 아이들이 6·25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 33,5%나 되었습니다. 또 21.5%는 6·25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전쟁이었다고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37,8%의 학생들은 6·25가 조선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31.9%는 6·25를 부모를 통해서, 가족들을 통해서 들어 알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참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역사교육을 이렇게 소홀히 해도 되는 것입니까.
지난 6월10일은 민주항쟁이 일어 난지 20돌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1987년 6월 10일 날 직선제 헌법 개정 요구를 무시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다음에 노태우를 체육관 대통령으로 뽑으려 할 때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1987년 1월에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했습니다. 이를 항의하고 데모하는 과정에서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체류 탄에 맞아 또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6월10일 날 마침내 시청 앞에서 국민대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연세대학에서 모인 인파가 아현동을 따라 충정로 길을 걸어 시청 앞으로 인파의 물결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날 때문에 6·29 직선제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저는 6월 10일 날 모든 젊은이들이 시청 앞으로 몰려갈 때 아현교회에 있을 때인데 창문으로 그 인파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저는 고민했습니다. “나도 저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저 대열에 끼어 개헌을 외쳐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날 저는 고민으로 그냥 끝내버렸습니다. 저는 오늘까지 그 6월 10일 날 창문 너머로 인파를 구경만 하고 그냥 고민만 하고 서 있었던 것을 아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나만의 일이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서 그렇게 부끄러운 자리에 있었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렇게 행동했던 사람들 때문에 오늘 이 땅이 이렇게 발전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자유사회를 이루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나라를 오늘을 이루도록 헌신하고 수고하고 희생한 분들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무슨 일을 이루기까지는 희생자들이 있습니다.
기업인들에 감사
오늘 우리사회가 기업인들이나 재벌들에게 부정적인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부자 중에도 노력해서 이룬 청부(淸富) 즉 깨끗한 부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나쁜 짓해서 부자 된 오부(汚富) 즉 더러운 부자들도 있습니다. 무조건 부자라고 해서 다 나쁘게 바라보면 안 됩니다. 이 땅에는 참 훌륭한 청부들이 많습니다. 왜 그들을 나쁘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우리는 그런 재벌들, 부자들을 존경해야 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의 부자들에게도 남들이 모르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석꾼은 만 가지 근심이 있고 천석꾼은 천 가지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의 고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욕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오늘 같은 무역대국으로 발전하게 된 것에는 이 땅에 일반인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재벌들, 부자들의 노력과 큰 생각 그리고 큰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대한민국이 정주영 같은 기업인을 가지게 된 것도 축복이었습니다. 그 분은 하늘이 낸 인물입니다. 그분은 분명 한국을 위해서 태어난 인재였고 인물이었고 위인이었습니다. 그분은 50여 년 전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가 만든 배가 오대양 넓은 바다를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자동차가 세계 육대주의 넓은 땅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런데 그 꿈은 그의 손에 의해서 50년 만에 이루어져서 우리가 만든 배와 자동차가 세계의 넓은 바다와 땅을 누비고 다니고 있습니다. 현재 저 넓은 오대양을 누비고 다니는 배들 중 3척 중 한척이 우리나라에서 만든 배라고 합니다. 그 한사람의 원대한 꿈이 50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보통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정주영이라는 한사람은 그런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잠자지 않고 땀을 흘렸던 결과가 그렇게 나타났습니다.
또 김우중이라는 분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높은 빌딩을 짓겠다고 경쟁에 임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의 어느 회사 사장이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인데 그 작은 나라가 어떻게 미국도 자신 없어 하는 큰 빌딩을 짓겠다고 그러느냐”고 힐난했다고 합니다. 그때 김우중이 지지 않고 대답하기를 “미국은 하루 8시간씩 일하기 때문에 해낼 수가 없다, 그러나 한국은 하루 24시간씩 일하기 때문에 해낼 수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나라가 오늘 이렇게 발전하게 된 것은 이 땅에 그런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런 사람들을 재벌이라고 부자라고 시행착오를 조금 저질렀다고 함부로 비난하고 욕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을 넓은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남들이 누굴 욕한다고 생각 없이 욕하고 남들이 생각 없이 비난한다고 따라서 비난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인정할 일은 인정하고 나의 잘못됨과 무능함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나라를 위해서 수고한 분들, 먼저 땀 흘린 분들, 세계에 나가서 불모지와 같은 곳에서 땀 흘리며 길을 개척한 분들에게 마음 깊이 감사하고 싶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나라가 그런 개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이 대한민국이 이렇게 성장한 일에 상 받아야 할 공로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하고 눈물 흘려 기도하고 땀 흘려 수고해야 합니다.
프랑스 종교철학자 르낭이라는 사람은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으로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라고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은 현재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이 함께 존재하는 영적인 가족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합니다. 우리들이 기껏 이 땅에 생존해 보아야 80년, 90년, 길어야 100년간 머물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우리는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나라와 민족은 사라지지 말고 영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속에서 내 자손과 내 이웃과 내 민족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희생하고 생명을 바친 사람들이 위대한 것입니다.
서구문명국들을 보면 국가의 중요 인사들이나 지도자들 그리고 귀족들은 달리 지도자이고 귀족이 아닙니다. 그 지도자들이나 귀족들은 말만 귀족이고 지도자가 아니고 나라에 부름이 있을 때 자식들을 군에 내 보내는 일이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식들을 전쟁에 내 보내는 것을 기꺼이 앞 다퉈 내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자식이 전사라도 하게 되면 그 희생을 대대로 가문 최대의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우리 집안 몇 대조가 정승을 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지만 서구의 귀족들은 우리집안의 자식이, 형이, 아버지가 전쟁에 나가 전사했다는 것을 가문의 최고의 영광으로 자랑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책임져야 할 때 책임을 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나라는 영원하고 든든하고 선진국의 대열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정신과 책임감이 부족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들로부터. 사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시민들까지 이 의무를 기꺼이 지려 고를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짐을 모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기득권은 누리려고 하고 더 잘 살려하고 안전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런 이론이 있기에 이 나라는 때마다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삶
본문은 느헤미야의 애국 애족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있는 말씀입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포로로 잡혀서 술 맡은 관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포로 신분이었지만 왕궁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자신 한 사람의 일신의 생활이었다면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국소식에 굶주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고국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벽이 훼파되고 불타고 허물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백성들이 모두 탄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리고 고난 받는 동포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때 아닥사스다 왕은 수심이 가득한 느헤미야의 얼굴을 보고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느헤미야는 고국소식을 전하면서 나에게 고국을 다녀오도록 허락하시면 내 민족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돌아오겠다고 간청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왕의 허락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절망한 동포들을 격려하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갑니다. 느헤미야는 참 좋은 의식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진정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고국 소식을 듣고 금식하며 눈물 흘렸고 절망에 빠진 민족을 위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지도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 느헤미야의 모습을 보고 아닥사스다왕이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왜 내 나라에는 저런 지도자가 없을까, 왜 내 곁에는 저런 충신이 없을까 하고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저마다 이기주의적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마다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때 느헤미야 같은 지도자들이 생각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신앙도 의식도 지닌 지도자가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 지도자들이 있어야 이 나라가 든든히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그 역할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이 땅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려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느헤미야처럼 몇 가지 책임감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사랑을 품으면 언어, 생각, 표현에 사랑이 그대로 표현되어 나타나듯이 내 마음속에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내 민족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스스로가 책임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방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고국이 자라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만 있으면 고국생각을 합니다. 그러다가 지금 고국이 수난당하고 백성이 절망가운데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순간적으로 금식하며 나라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런 모습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득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던지, 다른 나라에서 살던지 내 나라가 든든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이고 은혜이고 평안이고 축복입니다.
또 책임 있는 삶입니다. 이 삶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이 책임 있는 삶에 반대되는 삶이 이기주의입니다. 원래 우리나라 민족은 인정 많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좀 살게 되니까 그 좋던 인정, 이웃개념을 다 잃고 말았습니다. 오늘 지독한 이기주의가 이 나라를 망치고 있습니다. 이 이기주의는 서로가 망하는 생활 태도입니다. 남극의 한겨울 기온은 영하 6,70도가 보통입니다. 1968년도 8월에는 영하 88도까지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생물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동물, 생명체들은 날씨가 추워지면 따뜻한 곳으로 이동하는데 펭귄은 반대로 더 추운 곳으로 이동하여 그 추운 곳에서 촘촘히 서로 몸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으로 가혹한 추위를 하나로 뭉쳐서 겨울을 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체온을 나눔으로 상대방의 체온을 내 것으로 만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신, 내용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의식 있는 삶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읽고 기도하고 주일 지키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의식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참다운 지도자가 된 것은 의식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포로생활이기는 했지만 그는 입신한 사람입니다. 왕궁에서 호의호식했습니다. 얼마든지 평안하고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이야 망하든지 말든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오늘 느헤미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 같은 사람이 없었더라면 오늘 예루살렘도 존재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느헤미야 같은 의식 있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이런 의식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모르드개, 에스더, 에스라, 아모스가 모두 그런 지도자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라가 건강하고 든든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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