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영성으로의 회복 (4)
행 4:32-35
믿는 무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
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
나도 없더라.
사람은 평소 무슨 생각 무슨 관심을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말과 행동과 삶의 내용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마음에 무슨 생각과 무슨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살고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행동과 삶의 내용이 만들어지고 말과 대화의 내용이 결정됩니다.
신앙인은 마음에 성령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이. 관심이, 삶이, 대화의 내용이 신앙의 내용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삶이 만들어집니다. 로마서 8: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에는 언제나 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 영이 내 안에 임하셔서 영을 조화 있게 몸을 균형 있게 지성에 임하서서 옳게 판단하고 생각하게 하시며 관계를 건강하게 이루어 주십니다. 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신비한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1. 감정의 다스림
32절을 보면 “무리가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데 누구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욕망은 뭐니 뭐니 해도 소유욕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이 소유욕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다면 감정이나 욕망이 다스려진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지극히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사람은 감정에 의해서 살기도 하고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사람은 내적으로 과거 즉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 그 상처들은 무서운 기억으로 마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억 중에는 좋은 기억 즉 추억도 있지만 좋지 못한 기억도 있습니다. 그 기억들이 살아가는 동안 효과적으로 풀지 않으면 마음에 그대로 간직되어진 채 억압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한(恨)이라고 말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이 많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우리문화가 풀이 문화입니다. 그것을 풀지 않으면 나를 억압합니다. 사람들이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술을 마십니다. 술로 문제를 풀어보려고 합니다. 또 술을 마신 다음날은 해장국을 먹습니다. 속을 풀기 위해서 입니다.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오래 사는 것은 이 푸는 방법의 차이 때문입니다. 남자는 속상할 때 술로 풀려고 합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실상은 더 꼬입니다. 속이 더 망가집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속상할 때 수다로 풉니다. 그때 긴장이 풀리고 응어리가 풀리고 맺힌 한을 풀어집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남성보다 더 오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은 한의 민족입니다. 그래서 매사를 풀려고 합니다. 화풀이, 원풀이, 살풀이, 심지어는 죽은 사람의 원한까지 풀어주어야 산 사람이 평안하다고 믿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문제를 이런 방법에 의해서 풀어가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성령이 그 마음에 임하셔서 이렇게 눌린 감정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내게 임하시면 내 안에서 내적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성령은 내 안에 있는 모든 욕망, 소유욕, 자기 비하, 완벽주의, 자기파괴, 열등감, 죄책감, 신경질, 조급증, 숨겨진 분노, 좌절감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나 자신을 사랑하게 하고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나의 좁은 인간성을 넓어지게 만드십니다. 그 결과 내 마음속에서 내적 자신감을 충천하게 하고 믿음을 회복하게 하고 기대와 소망을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 오늘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한마음 한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 이익적이기 때문에 나누고 포기하고 마음을 하나로 합해지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일인데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는 이 내적 감정의 치유가 중요합니다. 성령이 풀고 녹이고 해소시키게 합니다. 그 결과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의 자아를 성숙하게 하고 인격을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봉사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나누게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한마음으로 나누고 물건을 통용하고 자기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니까 먼저 물질과 경제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청지기 정신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물질을 사용하게 됩니다. 재물을 베풀고 나누게 됩니다. 이것은 그만큼 사회성이 성숙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회복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매사에 유익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고 조화를 이루게 하고 협동하게 하십니다.
2. 창조성
34절을 보면 “밭과 집을 팔아 ...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물질의 시대입니다. 오늘은 물질이 우상입니다. 오늘은 물질이 최고의 가치를 이룬 시대입니다. 물질이 권위를 낳습니다. 힘을 낳습니다. 인격을 낳습니다. 존경을 낳습니다. 그래서 물질이 우상입니다. 물질을 위해서 생명을 버리고 몸을 팔고 돈을 벌기 위해서 강도짓을 하고 돈 때문에 부모 자식 형제간에 원수가 되고 물질 때문에 형제를. 부모를, 아내와 남편을, 이웃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물질은 생명보다 훨씬 더 위대한 힘을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에 대해서 우상처럼 집착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그 소중한 물질을 땅을 팔아 전도를 위해서 사도들 앞에 통째로 내 놓는 모습이 나옵니다. 무엇엔가 크게 변화 받지 못하면 이런 결단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36절을 보면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 후 바나바는 그 유명한 바나바가 되고 나중에는 바울의 선교 파트너가 되어 제 2의 사도라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물질을 내 놓았습니다. 바나바가 진실한 마음으로 내 놓았다는 것은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사람들 흉내를 내려다가 큰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죽임을 당합니다. 신앙의 삶은 흉내 내는 삶이 아닙니다. 큰 결단을 내리는 일은 더구나 흉내 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니까 이런 능력과 결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창조하게 하시는 능력 때문입니다. 성령은 창조하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그 변화의 동기가 31절에 나와 있습니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해졌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생명보다 귀한 물질을 제자들 앞에 내어 놓고 제자들은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창조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곳 마다 이와 같은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분명 성령이 임하시는 곳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엊그제 저에게 의사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선교를 가기 위해서 병원을 문 닫고 가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 의사 부부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아프리카 사람들을 바라볼 때 성령께서 불쌍하게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이 사람들에게 전도하라고 메시지를 자꾸만 주시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돈을 많이 벌어 선교비를 보내면 되지 않겠나 하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다시 음성이 들려오기를 “돈보다 네가 가라”고 하시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마침내 병원 문을 닫고 아프리카로 가서 병원을 개설하고 의술을 가르치고 그들을 치료하기로 결단하고 아프리카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프리카로 간다고 결심한 그 의사의 얼굴을 보니까 얼마나 평안하고 행복해 보였는지 모릅니다. 오늘 모두 자기 이익에 집착하고 좀 더 좋은 조건을 따라 미련 없이 옮겨 다니는 세태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위대한 결단이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의 전환입니까. 여러분, 아프리카 여행을 조심하십시오. 또 병원 문 닫고 가라는 명령하시면 어찌하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시듯 “네 아들을 바치라” 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령은 창조의 영이십니다. 회복의 영이십니다. 주님을 깊이 알면 나의 일생, 나의 삶을 창조적인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시고 사역하게 하시고 창조하게 하십니다.
지난주간에 연변을 거쳐서 평양에 들어갔다가 왔습니다. 연변에는 15년 전에 한국의 기독교가 과학기술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 대학에 중국의 공산당 자녀들이 입학을 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대학에 재학하는 학생들이 졸업할 때는 80%가 기독교인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변화 시키는 분들이 그 학교의 교수진들입니다. 그 교수들은 한결 같이 무보수 자원봉사자들입니다. 이 분들이 지금 성령의 창조역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환경을 따라 철새처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옮겨 다니는 이 시대에 비추어 보면 자신이 돈을 들여 자원으로 봉사하는 분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지구상에서 이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신비한 것은 평양에서 그와 똑같은 과학기술대학교를 평양에 세워달라고 요청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년 봄에 개교할 목표로 평양 근교에 33만평의 땅에 대학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북한당국에서 이 대학설립을 위해서 미련 없이 땅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공산당 자녀들이 입학할 것이고 또 졸업 때에는 80%의 자녀들이 기독교인으로 변화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칠 교수진이 또한 무보수 자원봉사자들로 채워질 예정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20여년이 지난 후에 평양은 어떤 모습으로 바뀌리라고 상상하십니까. 이것이 현재 평양 땅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창조의 역사입니다.
요엘서를 보면 “너희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영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성령은 바울에게 “너는 이제 로마에 가서 전하여야 하리라“고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인데 결국 로마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 성령이 베드로로 하여금 능력 있는 전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도마로 하여금 인도에 가서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마태로 하여금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성령은 오늘도 선교사들을 세계로 내 보내서 선고하게 하고 계십니다. 모두 성령이 아니면 흉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령은 반드시 이렇게 모두를 버리고 멀리 나가서 전도만 하도록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을 능력 있게, 생동감 있게, 감동이 있게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꿈을 주시고 비전을 주시기도 합니다. 때로 아이디어를 주셔서 생동감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문제 해결의 능력을 주셔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불의와 부정에 동참하지 않게도 하십니다. 또 창조적 생각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게도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일이 즐겁고 성취감을 느끼게도 하시고 무슨 일이든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로 여기며 살게 하시고 주님의 창조사역에 동참하는 정신을 가지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일터에서 주님의 도구로 활동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모두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때 어느 날 갑자기 돈다발을 쏟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때 돈 버는 지혜를 주시고 기회를 주시고 유익한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좋은 여건을 조성해 주십니다.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는 방법도 어느 날 갑자기 기적같이 나타나셔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조용히 기다리게 하시고 훈련하기도 하십니다. 요셉이 가는 길을 기적같이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이 처한 암울한 환경을 그대로 놓고 그에게 좋은 옥졸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보디발의 아내처럼 악한 사람도 만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그 과정에서 연단을 받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연단과 기다림이 형통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처한 열악한 환경을 일시에 바꾸어 천국으로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지만 그런 기적 같은 방법을 기대한다면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형통의 방법입니다. 성령은 오늘 우리의 곁에서 그렇게 이루시고 도우시고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창조의 영이십니다. 회복의 영이십니다.
3. 말과 생각의 변화
본문을 보면 “한마음 한뜻”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누구도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변화하게 하십니다. 그중에서도 언어를 변화하게 하십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상처주고 깎아내리고 비난하던 언어들이 변화되어 따뜻한 언어로, 품는 언어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감싸고 치유하는 언어로, 회복시키고 세우는 언어로 바뀝니다. 그래서 비난하고 파괴하던 언어가 섬김의 언어로, 부드럽고 따뜻한 치유하는 언어로, 사랑의 언어로 바뀝니다. 말에 변화가 왔다는 것은 인격이 그만큼 회복되었다는 말입니다. 인격이 장애를 일으키면 가장 먼저 언어가 거칠어집니다. 말에 예의가, 고상함이, 따뜻함이, 그래서 치료가 나타나는 언어로 바뀝니다. 그 변화된 언어로 가는 곳 마다 전할 때 거기에 중보가, 치유가, 회복이, 불화가 조화로 바뀌게 됩니다.
사람이 믿음이 있다, 없다 하고 말하는 것은 언어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척도를 판단하고 깊이를 알 수 있는 것도 언어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셉 앞에 어느 날 형들이 나타났습니다. 형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요셉이 한마디 말을 합니다. “형들이 나를 팔았다고 두려워 마소서, 당신들이 나를 판 것이 아니고 당신들을 살리려고 하나님이 당신들을 통해 나를 먼저 애굽으로 보내셨소.” 이것이 믿음의 말이고 믿음의 판단이고 믿음이 주는 아주 건강한 사고입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나아갈 때 골리앗은 큰 창을 들고 왔습니다. 그때 다윗이 외쳤습니다. “너는 칼과 창을 들고 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간다.” 그 판단, 사고, 언어 한마디를 들어 보면 그의 믿음의 깊이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소선지서 중에 하박국서가 있습니다. 하박국은 그 시대 예언자였습니다. 그때 국가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불안해했습니다. 그때 하박국이 나서서 외쳤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셔서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열매가 없을 지라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지라도,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을 지라도, 우리에 양과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라“(3:17-18). 이것이 신앙의 고백이고 믿음의 고백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임하셔서 이런 창조의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성령에 힘입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성령께서 내 안에 임하시기 위해서 내 안을 정결하게 하고 내 그릇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때 성령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마땅히 할 일을 하도록 인도하시고 창조하시고 회복하시고 균형 잡힌 신앙의 삶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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