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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보혈을^ 홀리*
사도행전 1&卜 7— 이재철 목사
생명의 보혈을 흘려* 생명의 특징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생명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음직입니다. 어린아이일수록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명
은 S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것이기에, 반대로 죽음은 곧 멈중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할 것 없이
계속 움직이던 심장이 한 순간에 멎으면, 바로 그것이 죽음입니다.
심장이 멎으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쓰다듬어 주던 손,원하던 곳을 찾아다니던 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
하던 두뇌의 음직임 등. 몸 안팎의 모든 음직임이 모두 영영 멈추어 버립니다. 한 인간의 생명이 멈추어
버려도 살아 있는 이 세상은 계속 S추지 않고 음직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멎은 사람에게는 이 세상도 멈
추어 버립니다. 생명이 멎은 사람에게는, 살아 응직이는 이 세상과의 소통과 관계도 다 영영 몇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는 것이라고 해서. 생명의 움직임이 다 독같은 움직임인 것은 아님니다.
독사나 모기처럼, 생명의 움직임이 활발할수록 사람에게 해를 끼치듯이. 생명의 움직임이 왕성할수혹 다
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 생명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다른 사람의 생명을
이름게 북돋아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후자가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주심으로, 사람이 생령(生끓 살아 있는 넋
이라는 뜻. 생명을 이르는 말)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생기를 풍은 생명으르 창조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하
신 온갖 조목과 짐승들과 새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에덴동산은 모든 생명의 진원지이자 요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생명이 에
덴동산에만 멈추어 머물러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생명이 멈추면 그것은 곧 죽음이 됩니다. 그래서 하
나님께서는 창세기 2장 10절에 의하면, 에덴동산에서부터 강이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강이 에덴에서 틀
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성경 창세기 2장 10절 말씀
단 하나의 강이 아니라, 네개의 강이였습니다. 그 강 네개가 에덴동산에서부터 동서남북을 향해서 틀러
가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이 있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갖 아름다운 조
목이 있고,모든 종류의 짐승과 새둘이 있어, 하나님 보시기에 그 광경이 아름다웠다 할지라도,그 곳에
강이 없다면,그 모든 생명들이 어떻게 지탱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발현(務
顯)하게 하신 강들은, 곧 생명의 강들이였습니다.
첫번째 강의 이름은 비손으로 그 이름은 퍼지다는 뜻입니다. 두번째 강의 이름은 기른으르, 내봄는
다는 의미입니다. 세번째 강의 이름은 힛데걸로,오늘날 우리가 티그리스라 부르는 강이지만, 그 어원은
아직 밝허져 있지 않아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네번째 강의 이름은 유브라데스로, 숫구치다는 의미입니
다. 뜻이 밝적져 있는 세 강의 이름만 보더라도, 그 강들은 모두 생명을 퍼트리고,생명을 내쁨고, 생명이
솟구치는, 생명이 왕성한 생명의 강들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강들을 등서남북 사방으로 틀러가게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시작하게 하신 생명이, 온누리로 스며들게 하시기 위함이였습니다.
그 이후부터 이 세상의 모든 강들은 자기 사명과 책임을 지금까지 다 감당하고 있습니다. 응명이에 고인
물은 이내 썩어버립니다. 물의 호름이 명중과 동시에 죽은 물이 되는 탓입니다. 강을 가리켜서 '생명의 S
줄'이라 부르는 것은. 강은 밤이나 낮이나 쉬지 않고,계속 살아 움직이며 틀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강이, 단 한번이라도 교만하게 자기보다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려하는 법은 없습니다. 강은 언제나
경손하게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갑니다.
틀러가다가 자기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만나면, 호름을 멈추거나 그 장애물을 관통하려고 헛되게 애
쓰지 않습니다. 그 장애물을 돌아서 틀러갑니다. 그 결과 장애물 덕분에, 장애물 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생명의 혜택을 보게 됩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빚어내는 신비로운 생명의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구상에서 모든 인류의 둔명이 강과 더불어 시작한 것은,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멈추지 않고 계속 살아 흐르는 강이 신비로운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에덴동산인 우리 역시, 그 에덴동산에서부터 발현(發顯〉한 강들처럼I 이 황량한 세상을 생
명의 강으로 틀러가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일평생을 단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사도
바울은 쉬지 않고 계속 틀러가는 생명의 강이였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오늘날 터키
대류에서, 생명의 강으로 틀러갔습니다. 그가 이르는 곳메서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마시고,구원을 얻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다시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은,이번에는 에게해를 넘어서,유럽대륙으로
까지 틀러갔습니다. 유럽대륙에서 바울은 어느 한 곳을 응명이 삼아 마냥 고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바울은 어느 곳에서든 마냥 고일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품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에서무터 시작해서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를 거쳐서, 주님이
인도하시는데로 더 낮은 곳을 향해 계속 흐르다가, 거대한 타락의 도시 고린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거대한 타락의 도시 고린도에서 바울 롤르 생명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무척 힘겨운 일이였습니다.
더윽이 바울이 복음을 전한 회당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섞여 있었는데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이방인들과는 달리, 오히려 하나님의 선민임을 내세우는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심히 적대적이였습니
다. 바로 그때 아테네에서 해어졌던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니아에서 고린도로 내
려와 바울과 합류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영적으로 힘을 얻고 그 영론이 더욱 새을고 더은 강건하게 소생한 바울은. 자신에게 심히 적
대적인 고린도 유대인들에게,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만 그리스도이심을 더욱 밝히 힘써 증언하였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여 비방하였습니다. 우리말 '대적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안티탓
소마이'(antitassomai)는,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대오를 정렬하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이고,•비방하다•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블라스페메오'(blasfhmevw)는. 단순하게 비방하다, 욕설을 퍼붓다, 명예를 림I손하다
는 의미를 넘어서. 조직적인 형태의 대립과 저항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를 만난 바울이 영적으로 더욱 힘을 얻어서 예수님만 그리스도이심을 더욱 밝히 힘써 증
언하자,그러지않아도 바울에게 심히 적대적이였던 유대인들이 더욱. 조직적으로 바울을 괴롭히고 집요
하게 바울을 배척한 것이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어떤 반응을 브였었는지를 다음 말씀이 밝혀증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들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르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 성경 사도행전 18장 6절 말씀
바울은 자신을 더욱 조직적으로 괴롭히며. 집요하게 배척한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 옷을 털었습니다. 유
대인들은 이방 지역을 통과하게되면, 이방 지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옷과 발의 먼지를 떨어버린 뒤에, 유
대인들 지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방지역의 부정한 먼지를 묻힌 재로, 유대인 지역으토 들어가지 않겠다
는 일종의 성별의식이였습니다. 위 말씀에서 바울이 옷의 먼지를 털어버린것은, 그와 같은 유대인들의 성
별의식을 지키기위함이 아니 였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둘을 전도여행에 보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셨습니
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 성경 누가복음 9장 5절 말씀
그런 성, 그런 사람에게는 미련을 두지 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님의 그 말씀에 입각해
서 자기를 배척하는 유대인들 앞에서,자기 옷의 먼지를 털었습니다. ”이제 너희들에게는 더이상 미련을
갖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너희 피가 너희 머리르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
끗하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 고린도까지 찾아와서 너희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했는데도, 너희들이 그
생명의 복음을 거부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너희들의 책임이지, 복음을 전한 나 바울의
책임은 아니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강이 허허별판까지 애써 를러갔는데도, 그 별판에 사는 사람들이 강을 보고서도 물을
마시지 않아서 갈증으로 다 죽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클의 책임이지. 어떻게 그 허허별판까지 홀러들어간
강의 책임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 가리라고 자신의 말을 끝맺었습니다. 이제 앞
으로 다시는 유대인들은 상종치 않겠다는 말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복음에 우호적인 이방인둘에게 더 주
력하겠다는 의미였습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자신을 조직적으로 괴롭히고 집요하게 배척하는 유대인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만
난 바울이,그 장애물 앞에서 흐름을 멈추거나, 그 장애물을 관통하려 한것이 아니라, 그 장애들을 돌아서
흐르겠다고 선언한 것이였습니다. 유대인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바울이 돌아서 트른 결과가 어떠했는지
는 다음 말씀이 밝혀즙니다. 거기서 옮겨,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 성경 사도행전 18장 7절 말씀
유대인 회당에서 배척당하고. 옷의 먼지를 떨어버린 바울은. 회당 바로 옆에 있는 집인 디도 유스도라 하
는 사람의 집으토 들어갔습니다. 바울이 아무 연고도 없이 무턱대고 그 집으로 들어갔을리가 만무합니다.
회당에서 배척당한 바울이 바토 회당 옆집에 있는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은, 그 집주인인 디도 유스도가 바
울이 회당에서 배척당하는 것을 보고,자기 집으로 맞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디도 유스도라고 하는 이
름은 로마식 이름입니다.
즉 디도 유스도는 이방인인 로마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위 말씀은 그 이방인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경
외하는 디도 유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이방인이였던 디도 유스도는 유대교로 개종을 해서 회당을 다니면
서,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다니는 유대인 회당에 어느날,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 한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전해듣고서도, 하나님의 선민
임을 자처하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조직적으토 괴롭히고 끝내 집요하게 배척한 반면에, 이방인이였던 디
도 유스도는 유대인이 배척한 바울을 자기 집으로 맞아 들였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참된 신앙은 결코, 신앙의 연륜이나 직분, 신분이나 소유로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은 오직. 생명의 복음, 복응의 생명에 대한 바른 생명의 응답으로만 드러납니다. 회당에서 유대
인들에게 배척당한 바울이 회당 옆집인 디도 유스도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는것은. 잠시 그 집에 들러서
목을 죽이거나, 쉬어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회당에서 배척당한 바울이 그 집에 들어감으로서,디도 유스
도의 집이 고린도에서 주님을 위한 첫번째 교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동안에 회당을 복음의 거점으로 삼던 바울이 회당 대신에,디도 유스도의 집을 회집 장소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역사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여,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 성경 사도행전 18장 8절 말씀
유대법에 의하면, 유대인 성인남자 10명 이상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회당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럼으로 유대인 성인남자가 많이 있는 곳에는 복수의 회당도 세울 수 있었습니다. 고린드게는 유대인 성
인남자 거주자가 많았음으르, 복수의 거주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처음 설교를 했던 회당, 그 회당이
아닌 다른 회당의 회당장, 그리스보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온 혈즉과 함께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
스도인이 된 것이였습니다.
그리스보가 회당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유대인이였음을 뜻합니다. 회당장은, 자기에게 맡겨진 회당을
책임져야 할 뿐만 아니라. 회당장 사이계는 은연중에 알력과 경쟁이 있었응으로,한 회당의 회당장이 경
쟁 관계에 있는 다른 회당을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쉬운 일
이 아니였습니다.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이 저음 복음을 전하던 회당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배적하지 않아
서,바울이 계속 그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했더라면, 다른 회당 회당장인 그리스보는 영영 복음을 접할 기
회를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처음 복음을 전하던 회당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고, 개인집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복음
을 전하기 시작했기에, 그 집을 자유롭게 드나돌면서 바울의 설교를 듣던 다른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혈
족과 함께,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이였습니다. 그뿐이 아니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수많은 고린드 사람들도 주님을 믿어 세례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들이였습
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믿다•는 동사와 •세례받다•는 동사가 모두, 미완료형으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에
서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바울토부터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것이, 단 일회적 사건이 아니
라,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계속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고린도가 로마 제
국 내에서, 성적으로 가장 타락한 도시였음을 감안한다면| 그것은 참으토 놀라운 생명의 역사였습니다.
그 생명의 역사는 바울이 생명의 강으로 를렀기에 가능했던 일이였습니다. 수리아의 안디옥을 줄발한 바
울은,터키 대륙을 거쳐 유럽대륙의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영적으로 더 낮은 곳
을 향해 계속 홀러갔습니다. 고린도에서 자신의 설교를 듣고 심히 적대적이다 못해 끝내 조직적으로 자신
을 괴롬히고, 집요하게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바울은 그들과 똑같은 수법으로 그들과 맞
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 유대인들과 폭같은 수법으로,그들과 피를 튀기면서 싸워 그클을 제압해서 이겼더라도.
그것은 주님 앞에서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처절한 실패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프리한 유대인들
과 뒤엉켜서 유대인들의 수법으로 이전투구를 벌리는 것을 본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에,누구도 바울이 전
하는 복음을 믿으려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생명의 강이였기에,자신을 집요하게 괴름히고 배척하는 유대인 장애물을 돌아서 틀렀습니다.
그들을 돌아서 틀렀기에 회당 옆집 디도 유스도의 집이 고린도에서 첫번째 주님을 위한 교회가 되었고.
다른 회당의 회당장 그리스보가 그의 온 혈족이 주님을 영접할 수 있었고, 고린도의 수없이 많은 이방인
들이 주님을 믿어 세례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유럽대륙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도 바
울이 자신을 배척하는 유대인들을 돌아서 흘렀기에,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고린도까지 틀러가게 된 것
입니다. 1차 전도 여행때 유럽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아가서 그곳
회당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둘자, 바울을 시기한 회당 지도자들이 바울을 비방하면
서,더이상 회당에서 설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들과 싸우지 않고, 회당을 돌아서 비시디
아 안디옥 시내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그 덕분에,비시디아 안디옥의 수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
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이번에는,시내의 유력자들과 귀부인들을 선동해서,아예 바울을 비시
디아 안디옥에서 추방해버렸습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록을 돌아서 이고니온으로 틀러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이고니온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고니온의 유대인들도 바울을 배척하자, 바울은 이번에는 이고니온을 돌아
서 루스드라로 틀러 들어갔고. 그 결과 루스드라의 선천성 하반신 마비자가 영육간의 구원을 얻었을뿐만
아니라, 후에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던 디모데도 바로 그 루스드라에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강이 멈추지 않고 계속 호르는 것 자체가 생명의 신비입니다. 강이 장애물을 돌아서 흐르는 굽이굽이 마
다 마을이 생기고. 마을 사람들이 그 강둘로 생존하는 탓입니다. 같은 이치로,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강이 되어 흐른 것도, 생명의 기적이였습니다. 그가 장애물을 돌아서 호르는 굽이굽이마
다,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마시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바울 개인이 위대해서가 아니였습니다. 바울이 자기 생의 주인으로 모신 예수 그
리스도께서, 영원하고도 참된 생명의 강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드께서 생명의 강이 아니셨던들,
성자 하나님이신 그 분이, 비천한 인간의 음을 입으시고, 낮고 낮은 이땅으로 를러 내려오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강이 아니셨던들, 골고다 언덕 십자가 위에서 더러운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의 보혈을 틀려 내러주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강이 아니셨던들,
머나먼 이 한반도에서, 죽은 영론으로 허랑방탕하게 살아가던 저에게까지. 그 생명의 강줄기가 이르지도
못했을 것입!~ᅵ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시고도 참된 생명의 강이시기에, 그 분 안에서 그 분의
지류가 되어, 우리도 생명의 강으로 트르기만 하면, 우리가 아무리 보잘것 없는 존재라 할지라도, 우리 역
시 얼마든지 사도바울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시인 도정환 선생의 ‘강'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가장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간다. 가장 더러운 것을
싸안고 우리는 간다. 너희는 우리를 천하다 하겠느냐. 너희는 우리를 더럽다 하겠느냐. 우리가 지나간 어
느 기슭에 몰래 손을 씻는 사람들아. 언제나 당신들보다 낮은 곳을 택하여 우리는 호른다. - 도종환 시인
의 •강.
선한일을 하고서도 억울하게 모함받고 배척당할 때,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마십시다. 상대와 같이 불의한
방법을 써서 상대를 이기려 하지도 마십시다. 불의한 방법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복
불가능한 치명적인 패배일 뿐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도 억울하게 모함받고 배척당하는 것은, 그 장애물을
돌아서 틀러가라는 하나님의 교통신호입니다.
영원하고 참되신 생명의 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생의 주인으로 모시고,우리 모두 그분의 지류가
되어, 이 황량한 세상을 생명의 강으로 를러 가십시다. 장애물을 만나면. 그 장애물을 들아 더 낮은 곳으
로 틀러 가십시다. 우리가 가난하다고 해서. 생명의 강으로 흐르는 우리를 누가 천하다고 비웃을 수 있겠
습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우리가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틀러가다가 더러운 것을 싸안고 호르느라 우리가 더러워졌다 한들, 생명의 강으로 흐르는 우리를
이 세상 누가 더럽다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명의 강으로 틀러가는 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
신의 생명으로 정화시켜 주실테니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지류가 되어, 생명의 강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은 생명의 기적입니
다. 우리가 생명의 강으로 흐르는 한, 우리가 흐르는 굽이굽이마다 수많은 영른들이 씻기고 소생하는 생
명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지류가 되어 생명의 강으로 틀러가는 한, 우리 역시 이 시대
를 위한 바울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줄처: 이재철 목사‘디도 유스도라는 집에' 설교中에서
예수가종다오
글을 보시고 스크업 하시기 전에 그남 가지 마시고 엇글로 따듯한 소감으로 감사S 표하는 그리스도인미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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