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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그에게 있다 1 행20:7~12

by 【고동엽】 2022.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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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니’

 

바울이 드로아를 떠나기로 작정한 전날,

그러니까 바울이 드로아에 머문 7일간의 마지막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바울은 7일동안,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영접한 드로아의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주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복음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노예나 일꾼과 같은 하층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일년 내내 쉬는 날이 없었으므로

그들을 위해서 바울은, 그들의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 시간에

함께 모여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바울은, 이튿날이면 드로아를 떠날 계획이었으므로

그 예배는, 드로아의 형제자매들과 드리는 마지막 예배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의 강론은 한밤 중까지 이어졌습니다.

우리 말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이고,

‘밤 중’의 헬라어는 자정을 뜻합니다.

 

바울의 말씀 강론이 밤12시까지 계속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혼자 일방적으로 설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말 강론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디알레고마이’는 '토의하다. 토론하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을 처음 영접한 드로아의 형제 자매들이, 이튿날 떠나는 영적 스승 바울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드로아의 형제자매들과 이 땅에서 마지막 예배를 드리는 바울에게

그들에게 남겨주고픈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의 설교, 그리고 형제자매들과의 질의응답은

밤12시까지 자연스레 계속되었습니다.

 

▶8절 ‘우리가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바울과 드로아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주일예배를 드린 곳은

어느 가정집의 윗 다락이었습니다.

 

'윗 다락'은 헬라어로 가옥의 최상층부를 일컫습니다.

당시 가옥의 구조로, 3층 혹은 다락방이었습니다.

 

원래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갑니다. 게다가 지붕 밑의 다락방에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예배를 드리면서

평소보다 많은 등불을 켜 놓은 상태에서, 예배가 밤12시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다락방의 열기가, 얼마나 고조되었을 런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9절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당시 유두고는 흔한 노예의 이름이었으므로

본문의 유두고도 노예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유두고는 다락방의 창문에 걸터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의 노동에 시달린 심신의 피로가 극에 달해서

졸지 않으려고 신선한 공기가 흡입되는 창문에 걸터앉았습니다.

 

그러나 피로에 지친 유두고는 엄습하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의 설교, 그리고 형제자매들과의 질의응답이 자정까지 이어지자

깊은 잠에 빠진 유두고의 몸이 풀리면서, 그만 3층 창문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이 급히 뛰어내려가서 일으켜 보았지만,

이미 유두고는 죽어있었습니다.

 

'죽었느니라'의 헬라어 ‘네크로스’는 시체를 뜻하는 네퀴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땅바닥에서 떨어진 유두고가 벌써 시체로 변해있었던 것입니다.

 

▶10절,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바울도 유두고가 떨어진 곳으로 뛰어내려갔습니다.

바울은, 죽은 유두고의 시신 위에 엎드려서 시신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런 유두고의 죽음에 소리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단호하게 선포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을 두고, 3층에서 떨어진 유두고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것처럼 보였을뿐, 여전히 생명이 붙어있었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9절에서 ‘유두고가 죽었다’고 단정하여 기록한 사람은,

의사 누가였습니다.

누가는, 유두고가 3층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져 죽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유두고가 3층 창문에 걸터앉아 졸다가, 땅바닥으로 떨어지자,

현장에 있던 누가가 유두고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의 심장이 이미 멎어 시체가 되었다고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선포한 ‘생명’은

이미 끊어져버린 유두고의 육체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하루의 노동에 시달려, 피곤에 지친 몸으로 창문에 걸터 앉아

졸음과 싸우면서까지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던 노예 유두고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부어, 새롭게 세워주시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생명’은, 유두고의 육체의 죽음 너머에서 임하는

‘주님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소리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선포했고, 유두고는 정말 살아났습니다.

 

바울이 유두고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바울을 통해서

유두고에게 임했던 것이었습니다.

 

▶11절,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래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드로아의 형제자매들은, 주님께서 새롭게 살리신 유두고와 함께

다시 3층 다락방으로 올라가서 밤을 꼬박 새우면서, 주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자, 바울 일행은, 계획대로 드로아를 떠나갔습니다.

 

▶12절,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바울 일행이 떠난 뒤에도, 드로아 사람들은

주님께서 살리신 유두고를 통해서, 주님의 큰 위로와 격려를 입었습니다.

 

사람들이 유두고를 보는 것은, 곧 주님의 생명 그 생명의 능력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정리하면

 

삶에 지치고 피곤한 사람들이,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 유두고를 볼 때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주님의 생명이 역사하지 않았겠습니까.

 

바울은 일행과 함께, 드로아에서 7일동안 체류했습니다.

그리고 3층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주님께서 다시 살리신 그 생명의 역사는

마지막 날 즉 주일 밤에 일어났습니다.

 

만약 바울이 드로아에서 7일이 아니라, 6일, 혹은 5일만 머물렀다면

바울과 함께 자정까지 계속되었던 그 주일 밤 예배는 없었을 것이요,

유두고가 떨어져 죽는 일도,

주님께서 유두고를 다시 살리시는 일도.. 다 없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이 드로아에서 일어난 것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7일 동안 머물렀던 까닭이요,

 

수리아 안디옥으로 귀환 중인 바울이, 드로아에서 7일이나 머문 것은,

이틀 뱃길인 에게 해를, 닷새에 걸려 횡단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풍랑에 시달렸던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에게 해의 풍랑으로 겪은 고생은, 헛된 고생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생으로, 바울이 드로아에서 7일이나 (풍랑에 지친 심신을 쉬려고) 머문 덕분에

주일날 밤 예배에서, 죽은 유두고를, 주님이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고

 

바울이 드로아를 떠난 후에도, 드로아 사람들은

그 유두고를 볼 때마다, 주님의 큰 위로와 격려를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이 에게 해에서 풍랑에 휩싸였던 그 뱃길은

고생길이 아니라, 상상치 못한 생명의 열매를 드로아에서 거두게 하시기 위한

더없이 신비로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바울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소멸을 앞둔 인생 말년에 접어들었을망정

그는 결코 슬픈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로 쓰임 받는 바울,

그에게는 이미 육체의 생명을 뛰어넘어, 영원하신 주님의 생명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생으로, 누군가가 주님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입는 영원한 생명의 드라마는,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가 남긴 서신서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유두고’들을 살린 로제타 홀 ☞로제타 홀

 

 

 

요즘은, 영종도 인천공항에서 직항을 타면, 미국 서부까지는 11시간,

미국 동부는 14시간, 유럽까지는 12시간이면 도착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도 지긋지긋해서, 비행기에서 내린 뒤에도 한동안 온 몸이 쑤시곤 합니다.

 

그러나 직항이 없던 시절에는, 훨씬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제가 난생처음으로 외국여행을 시작한 것은, 1972년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서부까지 가는데는, 김포공항을 출발해서, 일본 하네다 공항과

하와이 호놀룰루 공항을 거쳐서, 미국 동부까지는 만 하루 이상이 걸렸습니다.

 

유럽으로 가려고 해도, 일본 하네다, 알레스카를 경유해서

족히 20시간 이상을 필요로 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직항 시대에, 그때를 되돌아보면

어떻게 그토록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다녔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러나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비한다면, 그 마저도 대단한 호사였습니다.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는 로제타 셔우드 홀 선교사(이하 로제타)는

1890~1933년까지 43년 동안 조선 땅에서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로제타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 평양기홀병원, 평양여성치료소였던 광혜여원

동대문부인병원의 설립과 활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평생 조선 여성을 사랑한 미국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동부에 살던 로제타가, 요즘처럼 14시간 만에

혹은 40년 전처럼, 만 하루 걸려 한국 땅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1890년 8월 21일 로제타가 25세의 나이로 부모와 작별하고,

고향인 뉴욕주 리버티를 떠나서, 뉴욕에서 기차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다음에,

그곳에서 배를 타고 호놀룰루, 요코하마, 부산, 제물포를 거쳐서,

한양(서울)에 도착한 것은, 그해 10월 14일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난지 만 54일만이었습니다.

 

기항지에서 몸을 추스르는 기간을 포함하여, 54일이라면 끔찍이도 긴 여행입니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5천 킬로의 기차여행이 수월하기만 했겠습니까.

 

샌프란시스코에서 제물포에 이르기까지 1만 킬로가 넘는 태평양의 배 여행은 쉬웠겠습니까.

좁은 선실의 불편함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저는 몇 해 전에 8박9일동안 크루즈 여행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순전히 관광 목적의 선박여행이었는데도, 창문도 없는 좁은 선실에

9일동안 갇혀 있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생을 125년 전, 뉴욕에서 54일 걸려

태평양을 건넌 로제타의 여행의 고생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만 54일만에 서울에 도착한 로제타는, 자신이 일할 여성전문병원인 보구여관에

여장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그 다음날부터 조선 여성을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2년 후 로제타는 서울에서 캐나다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해서,

아들 셔우드 홀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2년 만에, 남편은 발진티푸스로 순직해서, 이곳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당시 로제타의 나이는 29세였고, 그때 로제타는 임신 7개월이었습니다.

남편이 순직한 이듬해, 유복녀 딸 에디스 홀이 태어났지만,

그 딸도 3살 때 이질로 죽어 양화진 아버지 묘 곁에 묻혔습니다.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과 어린 딸을 이국/조선 땅에서 잃었지만,

로제타의 조선여성 사랑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로제타는 1933년, 68세로 선교사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조선 여성을 위해서, 자신의 평생을 아낌없이 내어주었습니다.

 

의사로서 단지 조선여성을 육체적 질병을 치료해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인으로서,

주님께서 가난과 무지에 시달리는 조선 여성들에게 부어주시기 원하시는

‘참 생명의 통로’(바울처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제타 자신이, 그 생명 속에 있었기에, 사랑하는 남편과 딸의 죽음도

그 생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 로제타로 인해서, 본문의 유두고처럼,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입은

조선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아직도 살아있는 로제타의 생명

 

▶로제타 선교사의 후손들이, 로제타의 일기와 유품들을

‘양화진 문화원’에 기증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5년9월17일, 로제타 탄생 150주년과 내한 125주년을 맞아,

로제타 홀 선교사의 후손들을 초청한 가운데,

오전에는 선교기념관에서 <로제타 홀 일기 제1권> 출판기념식이 있었고,

오후에는 양화진 홀에서 <로제타 홀 일기> 공개 특별전 개막식이 있었습니다. *관련기사

 

그것은 주님의 특별하신 섭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조선 여성들에게 주님의 생명을 부어주기 위해,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쳤던 로제타를 잊지 않으시고

 

그녀의 삶을, 역사의 조명 아래로 이끌어내셔서,

그녀가 사랑했던 조선 땅에서

그녀의 삶이 영원토록 기려지게 하셨습니다.

 

로제타는 하나님 나라에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육체는, 소멸했지만

그의 믿음과 정신은, 이곳 양화진에, 아니 한국과 세계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제타 홀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하기까지

54일 걸린 여행길도, 무의미하거나 헛된 고생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생의 여행길 역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신비로운 생명의 길이었습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유복녀로 낳은 딸마저도

조선 땅에서 잃은 그녀의 인생도, 결코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녀 또한 본문의 사도바울처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이 땅에서도, 영원히 살아있는 영원한 생명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마치는 말

생로병사의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고생과 슬픔의 연속일 뿐입니다.

 

아무리 지닌 것이 많아도, 하늘을 찌를 듯이 직책이 높아도

결국에는 흙으로 소멸되는 탓입니다.

 

흙으로 소멸되기 위해, 수고하고 땀흘리는 것보다

더 심한 헛고생이 있겠습니까.

 

이름 없는 작은 돌맹이도 의구한데, *의구 : 옛날과 변함이 없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단지 소멸하기 위해 수고한다면

그보다 더 슬픈 존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생명, 허무하게 소멸해버릴 육체의 생명을 뛰어넘어

주님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고생과 슬픔이, 주님의 생명 안에서는,

전혀 신비로운 생명의 역사로 승화됩니다.

주님의 생명 안에서는, 우리 모두, 바울과 로제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으로는, 소멸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주님의 생명은 죽음을 깨트리고 부활하신 영원한 생명이시오,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없이는 내가 산해진미를 먹어도 소멸을 향한 헛고생일 따름이요,

내가 아무리 지닌 것이 많다한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슬픈 존재일 뿐임을

이 시간에 주님의 말씀을 통해 통감하면서,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주님께서 이미 생명으로 내 속에 임해 계시고,

벌써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나를 품고 계셔서 고맙습니다.

 

내 육체의 생명이 멎은 후에도, 주님의 생명은 나를 떠나시지 않을 것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우리 모두 오직 그 생명 안에서, 그 생명을 위해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이 땅에서 우리의 수고와 고생이, 누군가를 위한 생명의 역사로 이어지게 해 주십시오.

우리를 통해 이 땅의 유두고들이 살아나게 해 주시고,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와 격려 속에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더 이상 소멸을 향한 슬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살고, 이 땅에서도 사는 바울과 로제타가 되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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