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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mr6KSSZL7-o
만약에 오늘 밤이 ‘그 날’이라면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그 날’이라면
여러분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만약 이 밤이, ‘그 밤’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세상을 떠나시겠습니까?
만약 오늘이 마지막 ‘그 날’이라면
여러분들은 어떤 심정으로 사람들과 작별하겠습니까?
그 날은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날입니다
그 날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 날은 하고 싶은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날입니다
그 날은 예고 없이 느닷없이 찾아옵니다
한 자로 죽을 사死 자를 파자하면 세 글자가 됩니다
한 일一, 저녁 밤을 가리키는 석夕, 비수 비匕 자가 됩니다
그 날은 한 밤 중의 비수처럼 날아옵니다
만약에 태양이 작열하는 대낮에 비수가 날아오면
비수를 보고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좌우사방이 캄캄한 밤에 비수가 날아오면
아무도 피하지 못합니다
‘그 날’은 비수처럼 날아옵니다
▲‘그 날’은 후회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날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입니다
한 교우님이 작년 연말에 홍콩에 다녀오시는 길에
비행기 속에서 바로 옆자리에 한 유대인 여인과 함께 동석하게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출발한 뒤에,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유대인이라는 말을 듣고 ‘당신도 회당에 나갑니까?’ 라고 교우님이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말하기를 자기는 나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아들이 한 명있는데
그 아들만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까닭에
매주 회당 모임에 열심히 참여시킨다고 했습니다
왜 당신은 나가지 않느냐고 하자
자기는 종교도, 신神도, 자기는 별 관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교우님이 자기 가방속에서 영어성경책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히9:27절을 영어로 읽어드렸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이 구절을 읽자마자
그 유대인 여자가, 이 교우님이 본문을 성경구절을 다 읽기도 전에
얼굴색을 변하며 버럭 화를 냈습니다
“심판 따위나 하는 하나님 이야기를 하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정의롭고 바른 삶을 살아도
모든 사람을 구별없이 심판하는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불의한 하나님이십니까!
그런 하나님은 알고 싶지 않으니까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 분은, 흔히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듯이
성경에 나오는 ‘심판’이라는 말을 ‘형벌’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우님이 평소에 교회에서 배운대로
그분에게 차근차근 설명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길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형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셈하심!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셈하십니다”
그리고 마25장 달란트 비유를 설명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셈하심 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정의롭고 바르고
바른 삶을 끊임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한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영원히 높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성도님의 말을 듣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유대인은 성도님을 향해서
자기 고개를 돌렸습니다
두 눈에는 눈물이 주루룩 흘러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이 교우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 동안에 근본적으로 알아야 될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약성경은 약 8,800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5,800개의 헬라어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히브리어 단어 8,800개, 헬라어 5,800개를 합치면
14,600개의 단어입니다
그 숱한 단어 가운데 성경에는
‘평등 equality’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난,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받은 모든 생명의 가치는
다 똑같습니다 평등합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온 삶의 결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결코 평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평등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는 하나님은
equality (평등) 가 아니라, equity 공평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뿌린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셈하시고
우리가 산 대로,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심판’을 말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교회에서 ‘하나님의 상 주심’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3가지 핵심을 일깨워줍니다
1) 이신칭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성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았으므로
지금부터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어졌기 때문에
그 신분에 걸맞는 수준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상 주심
반드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셈하시고
우리 삶의 결과에 대해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4복음서를 보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상을 받지 못하리라’
아버지의 상을 여러 번 언급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바로 그 상을 위해서
자기의 평생을 내 던지고
결국 참수형 마저도 감수했습니다
히11:6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자들은’
반드시 2가지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으라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쉽게 말합니까
그런데 프랑스의 군인이었다가
기독교(천주교)로 개종하고
사하라 사막에서 주님의 말씀을 삶으로 증언하다가
사하라 원주민에게 총에 맞고 순교한
샤를르 푸코는 <사하라의 불꽃>이란 책에서 이런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여러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샤를르 푸코는 이렇게 자답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내 곁에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금 내 일터에 하나님께서 계심을 믿는다면
어떻게 내 일터에서 불의를 저지를 수 있습니까?
내 상관 모르게 어떻게 악과 타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가 법과 정의를 짓밟을 수 있습니까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과 의義 와는 상반되는 삶을 거리낌없이 사는 것입니다
히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초등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숙제를 줍니다
너희들이 숙제를 잘 해 오면 선생님이 상으로 이 공책을 줄 게!
아이들이 그 상을 타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숙제합니까
그러나 그 아이들 머리가 커져보십시오
‘노트북 한 권 정도는 나도 살 수 있어’
그 상을 우습게 봅니다
내가 커지면 교사보다 커지면,
교사가 내 거는 상이 우습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의 상’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의 상 주심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께 올바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씀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상을 우습게 여깁니다
왜요?
내가 하나님과 같거나 하나님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내가 피조물이고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상을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
뿌린대로 거두시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처럼 설렁설렁 사는 사람과
주님의 도를 좇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사도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똑같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 하나님이 과연 공의의 하나님이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는가?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가?
궁극적으로 그 날이 왔을 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의 셈하심을 받고
하나님의 상 주심에 대한 믿음도, 소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날’, 그 하나님의 셈 하심!
그 평가를 믿을 때만
내가 포기할 것 포기할 수 있습니다
제 개인에게 물으신다면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의 셈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믿지 않는다면
저도 제가 살고 싶은 대로 살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의 셈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셈하심의 근거는
다른 사람의 삶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셈하심의 근거는
바로 내 자신의 삶입니다
그래서 무릇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나이가 얼마든지 상관없이
어느 날 밤 비수처럼 내게 날아올 그 날을 의식하면서
그 날을 준비하고, 내 자신을 매일매일 성찰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날, ‘바깥 어두운데’ (마8:12, 22:13, 25:30) 쫓겨나 이를 갈며 울지 않을 것이고
땅을 치면서 통곡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가 친형제처럼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잠비아에 계시는 조남설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원래 서울 KBS에서 근무하시다가
주님을 위해서 자기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스스로 사직한 뒤에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그리고 탄자니아를 거쳐서 지금 잠비아에서 사역하면서
자기 이름을 내세워서 사역하지 않고
아프리카에 간 이후로 지금까지
다른 선교사님을 뒤에서 돕는 선교사역을 소리 없이 하고 계십니다
그 분이 작년 말에 서울에 잠시 나왔다가
그 분이 나온 것을 안 KBS신우회가 그 분을 모셔서
설교를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교사님이 자신이 과거에 몸담았던
KBS를 찾아가서 신우회 회원들에게 설교한 뒤에
잠비아로 돌아가시면서
신우회 회원들에게 설교했던 설교문을 제게 주고 가셨습니다
그 분이 자기 설교문을 제게 주고 간 것은
자신이 이렇게 설교했노라고 내게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이 평소에 제 책을 읽고, 제 테이프를 들으면서
자기가 배우고 깨달았던 것을 묶어서 설교해서
저한테 ‘이렇게 제가 배워서 설교했습니다’라고 보여주기 위해서
자기 설교문을 제게 주신 것입니다
그 설교문 뒷부분을 지금 읽어드리겠습니다
<오늘 밤 내게 죽음이 임한다면
나는 그 죽음을 정말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소망이 없다면
죽음은 두렵고, 피하고 싶고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재수 없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하면
우리의 삶은 진지해 질 수밖에 없고
우리의 영혼은 더욱 맑아지기 마련입니다
이재철 목사의 설교에 의하면
지방에 있는 가톨릭 사제들을 위한 묘지 입구에는 이런 글이 씌여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
동료 사제의 시신을 메고
이 글을 눈으로, 마음으로 읽으며
그 공동묘지를 드나드는 사제들의 삶은
얼마나 진지해 지겠습니까!
또 터키의 공동묘지에는 이런 비문도 있다고 합니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
지나온 삶을, 앞으로 남은 삶을
얼마나 숙연하게 해 주는 글인지요!
우리가 서 있는 자리보다 더 중요한 자리는
우리가 머물렀던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는 남편과 아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죽음 이후의 삶을
공동묘지 너머의 삶을
얼마나 나누고 있습니까?
공동묘지를 넘어서지 못하는 믿음으로는
눈에 보이는 그 너머의 삶을 나눌 수는 없습니다
내일은 내 차례요, 그 다음 날은 너의 차례요
또 그 다음 날은 우리들 차례인데
무슨 욕심 낼 것이 그렇게도 많습니까!
왜 그렇게도 움켜질 것이 많습니까!
움켜잡으면 잡을수록 배고픔과 허무감만 더 커지는데도 말입니다
사람들 욕심에서 벗어나 속되지 않게 해 주는 분명한 것으로는
내세에 대한 소망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소망이 희미하다면
영적 오지 중의 오지인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평생 짝퉁 그리스도인으로
평생 불구자이면서도 아닌 것처럼
스스로 속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생명처럼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순간까지,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해 왔습니까?
복음에 주리고, 하나님의 의에 목말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재산은 지켰지만, 깨어진 가정은 얼마나 많습니까
건강은 지켰지만, 영적으로 중환자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노후대책은 철저하게 세웠는데, 영혼의 최종대책은 전무하지 않습니까
주일은 꼬박꼬박 지키면서 열심히 헌금도 했지만
삶속에서는 진리의 생명력이 없이
거짓된 기쁨으로, 거짓된 평안으로,
거짓된 감격으로, 무기력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잠깐 있다가 없어질 세속의 천박한 것들에는 목숨을 걸면서도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으로 사는 우리들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내려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때문에
내가 정말 희생한 적은 있었습니까?
포기와 희생은, 영원의 안경을 쓴 사람에게만 가능합니다
공동묘지 너머의 삶을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만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희생할 수 있습니다
이생과 세상을 넘어
죽음과 무덤을 넘어
그 너머에 있는 본향을 우리는 얼마나 고대하고 또 소망하고 있습니까?
지닌 것이 너무 많아
아직은 아닙니까?
누리는 것이 너무 많아
아직은 아닙니까?
벌려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
아직은 아닙니까?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은
예고도 없이 별안간 찾아오는데
그 날을 늦추거나 멈추게 할 재간을 지니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본향에 대한 소망과 기다림을 지닌 사람만
영생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사람만
언제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 보이는 세계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를 위해 살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 언제 어디서나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할 때 기꺼이 희생하는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7절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합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보다
더 큰 위로의 메시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심는 대로 거둔다는 이 말씀보다
더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심어왔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거두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은 각자 다 같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심장의 고동이 멎는 그 순간까지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그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의 자리에서
각자 믿음의 경주장에서
매일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기필코 승리하시어
남은 날이, 남은 삶이, 주님안에서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이 시간에는 우리 부부가 아프리카에서 평소 즐겨부르는
복음성가 가사 한 소절을 읽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하겠습니다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주시리 아멘!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 분처럼
‘그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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