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고다 위에 선 십자가
요한복음 19:17-22
예수님은 성경대로 나시고 성경대로 죽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나실 곳도 미리 성경이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신 것은 우연히 난 것이 아니고 수백년 전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실 것을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셨고 그대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성경이 예언해 주었습니다.
골고다는 해골(굴갈타)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입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갈보리 언덕이라는 말과 골고다 언덕이라는 말은 같은 뜻입니다.
이곳을 ‘골고다’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곳 지형이 두개골 형상과 같은 뾰족한 바위에서 지명의 유래가 있다고 말합니다. 두번째는 예로부터 죄수들의 사형 집행장으로 사용된 까닭에 해골들이 널려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해골들이 굴러 있는 무덤과 같다고 해서 골고다라고 불렀습니다. 세번째는 유대인의 전승에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아담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고 하는 오리겐의 주장에 따라서 ‘인류의 조상적부터 무덤이었던 곳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고다의 유래는 어느 것이 정확한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해골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세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골고다에 십자가가 세워지고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무덤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류의 죽은 해골들 위에 십자가가 서 있다는 것입니다.
골고다는 인간의 죽음이 있는 곳이요,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담긴 곳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죽으시러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죽음을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마지막 죽음까지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 골고다에 가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양쪽에 죄인들의 십자가 두 개가 서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위해서 양쪽에 강도의 십자가를 세웠지만 사실은 그 강도와 함께 죽으시려고 골고다로 가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신비한 비밀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17절)
해골이라는 곳으로 이끌려 갔다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여기는 ‘해골이라는 곳에 나오시니’라고 했습니다. ‘나온다’는 말은 자원해서 그곳으로 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인으로 끌려간 것입니다. 죽으러 간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로마의 백부장의 채찍에 맞으면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해골이라는 곳에 나오셨다’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가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강도의 곁에서 죽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인류와 함께 죽음을 같이 했고 죄인과 함께 죽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사랑은 함께 죽는 사랑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습니다. 장애자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습니다. 자기를 핍박하는 원수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과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함께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죽는 것은 주님만이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녀와 함께 죽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남편을 사랑해서 함께 죽는 아내도 있습니다. 나라를 사랑해서 나라가 망할 때 망하는 나라와 함께 자살한 애국자도 있습니다. 또 자기 짐승의 새끼들이 화염에 불타 둥지가 타오를 때 어미 새가 그 새끼들을 날개로 덮고 함께 죽는 모성애적 사건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들과 함께 죽는 사람은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서 함께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서 강도와 함께 죽은 것은 깊은 의미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사랑은 대신해서 죽는 사랑도 있지만 함께 죽었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인류의 죽음이 있는, 해골이 널려있는 골고다의 현장, 이는 인류의 심판의 현장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심판의 현장이며, 절망의 현장이며, 죽음의 현장인데 그 자리에 주님께서 모든 인류의 심판의 죽음을 친히 담당하기 위해서 골고다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즐거움에 함께 하고 예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을 보고 부요를 누리면서 영광에 참여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참여하거나 가난에 함께 참여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사람은 얼마나 적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가난과 함께 하시려고, 모든 질고와 함께 하시려고, 그리고 마지막 죽음까지도 함께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죽음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골고다의 메세지가 있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믿어왔습니다. 주님께서 나 때문에 고난을 받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골고다 현장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나는 죽음의 해골들과 함께 죽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고 나만 살겠다는 것은 이기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죽었고 나는 살았다’ 그렇게는 될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죽으려고 십자가에 죽으셨고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한가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너와 함께 죽었는데 너는 나와 함께 죽었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진실로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죽어다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해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골고다 오셨기 때문에 나도 예수님을 사랑해서 예수님과 함께 골고다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골고다에 오신 것처럼 나도 주님과 함께 골고다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볼 때 예수님이 죽는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도 거기에 매달려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골고다의 주님을 만나는 비밀입니다.
주님이 나의 최고의 사랑하는 대상으로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남녀가 결혼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다 부모를 떠나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서 하늘 아버지를 떠나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육신의 부모를 떠나야 되는데 육신의 부모가 누구입니까? 우리의 육신의 부모는 내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고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받은 육신입니다. 그리고 부모를 떠난다는 것은 죽는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죽으러 왔습니다. 그래서 둘이 함께 죽는 현장이 골고다입니다. 골고다에서 함께 죽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사랑해서 죽는데 나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죽는다는 말을 수십년 하지 않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허상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서 나도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 자리에서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존재로 같이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아니하면 예수님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함께 죽어야 함께 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골고다에 함께 죽습니다.
십자가가 어디에 꽂혀 있습니까 해골들 위에 꽂혀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죽은 해골들 속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골고다는 땅도 아니요, 동산도 아니요, 바위도 아니요, 어느 지역이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이어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심판받은 죽음의 현장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꽂으시고 그 피를 흘려서 우리에게 흘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고다에서 나의 죽음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요, 설교가였던 크롬마하는 고난받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거기’가 둘이 있다. 가봐야 하는 거기와 앞으로 가야 하는 거기다. 가봐야 하는 거기는 어둠과 피와 죽음의 골고다다. 가야 할 그 길은 빛과, 희락과, 평강과, 영광의 거기이다. 가봐야 할 거기는 시간과 역사의 현장이었고 가야 할 그곳은 영원한 천국의 처소다. 거기 골고다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골고다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은 사람은 하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다. 골고다에 달리셨던 그리스도가 하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오늘 우리는 자신의 골고다 위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골고다는 2천년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한 지형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가 어느 의미에서 골고다입니다. 이 지구는 무덤의 현장입니다. 바다에도 빠져 죽었고, 산에서도 죽었고, 사막에서도 죽었으며 이 지구 어느 곳 하나 인류의 무덤 아닌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상의 모든 사업의 현장도 내가 죽을 자리지 내가 사는 자리가 아닙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내 가정도 골고다입니다. 내 직장도 골고다입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다 골고다로 죽음이 덮쳐오는 자리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모두 다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리스도를 해골들이 보고 있습니다.
골고다 현장에는 울며 따랐던 여인들도 돌아갔고, 그 어머니 마리아도 울며 돌아갔고, 제자들도 도망쳐 아무도 없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울다가 돌아갔습니다. 남아있는 존재는 해골들뿐이고 해골들만 예수님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골고다에 우뚝 서 있는 그리스도가 나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의 주가 되어야 합니다. 살았으나 우리는 이미 골고다의 존재입니다. 심판받은 아담의 후예들입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가야 할 곳은 골고다밖에 없습니다. 이미 이 몸은 골고다입니다. 그래서 이 골고다 같은 나의 위에 우뚝 서서 나를 구원하러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골고다 없이 믿기 때문에 그의 삶이 모두 다 허무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다 자기 삶의 현장에서, 사업 현장에서 십자가를 보지 아니하면 골고다 사업으로 끝납니다. 그 사업은 자기를 죽이는 것 뿐이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으니까 골고다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 위에 있는 십자가의 주님을 보면 그 사업은 가치있는 사업이 됩니다. 내가 아무리 뛰고 달린다 해도 그것은 골고다일 뿐입니다. 결국 해골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달려 피흘리시는 주님을 바라볼 때 나에게는 영광과 죄사함의 은총이 있습니다. 내가 땅에 아무리 금은보화를 쌓아놓아도 그것은 이미 골고다일 뿐입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이래 자기 삶 속에서 골고다를 보면서 그리스도를 본 자만이,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건 자만이 그의 삶은 위대했고, 영생을 얻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보화로 빛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다 골고다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 피의 능력으로, 그 피의 구속함으로, 그 피의 위대한 죄사함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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