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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말 론 적 선 행 / 야고보서 4:13-17

by 【고동엽】 2021. 12. 12.

종 말 론 적 선 행

 

야고보서 4:13-17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나 새 천년을 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새 천년 한 해를 보내면서 송년주일로 맞이했습니다. 첫 주일이 우리의 출발이라고 말한다면 끝주일은 종말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적입니다. 불교는 윤회적이기 때문에 돌고 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시작이 있고 코스가 있고 종말이 있습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기독교의 시간관입니다. 우리의 생에 다시 없는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청년시절 또는 장년시절, 노년시절 어떤 세월을 살든지 우리의 생애는 한 번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연습할 시간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연습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어린시절이나 어른이나 한 번 살다 가기 때문에 되풀이 할 수 있는,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그대로 한 번이고 그대로 종말일 뿐입니다. 이 역사의 방향을 따라 인생은 한 번 살다 갈 뿐입니다. 아무도 우연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에 한 번이 지나가는 하루 하루가 우리에게는 마지막이고, 최후요, 전부입니다. 이런 엄숙한 한 해를 우리는 마감하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입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나의 나 됨의 본질을 아는 것이 인간됨의 최고의 지혜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곧 자기의 정체성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 역사속에 이 시대에 태어나 존재하는가 이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가장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을 바로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자기 할 일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 하는 일로서 보람을 느끼며 인생을 창조하며 삽니다. 그것은 그 일에 대해 자기 자신이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가치감을 느낄 때 자기 삶의 의미를 느끼게 됩니다.

인생의 과정에서 사춘기가 있고 사추기가 있습니다. 사춘기는 소년시절 봄을 생각하는 때요,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사춘기 때는 화사한 봄철에 꽃이 피듯이 우리 외모의 아름다움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옷도 자주 갈아입고, 인물도 생기가 있고, 모든 삶이 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40이 넘으면 자기 외모에서 어떤 모양을 내는 것으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사추기는 가을을 생각하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으로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산에 가보면 가을꽃은 초라합니다. 가을은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나무에도 열매요, 곡식에도 열매가 있어야 아름다운 것이지 꽃이 피는 것으로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나이가 40이 넘으면 자기 삶에 의미가 있어야 됩니다. 가치가 있어야 됩니다. 보람이 있어야 됩니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아무런 보람이 없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인생이 공허해지기 시작합니다. 50이 넘고 나이가 든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립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나’ 하면서 공허를 느낄 때 그 인생이 우울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적의 상실입니다. 여기에서부터 그의 인생의 무의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해가 기울어가는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서 삶의 목적에 맞는 일을 하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셋째는 인생의 종말을 아는 것입니다. 종말은 인생이 끝나는 날입니다. 죽는 날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입니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죽는 날이 있습니다. 자기 종말을 알고 산다는 것은 놀라운 지혜입니다.

종말은 어떤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도 잘될 때 끝나는 날이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학교를 졸업하는 날도 있습니다. 직장에 들어갔으면 나올 날이 있습니다. 올라갔으면 떨어질 날이 있습니다. 종말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나이를 알고 인생의 허무를 압니다. 사는 날이 짧은 것을 압니다. 자기 사는 날을 헤아리는 것이죠.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야고보 사도는 인생의 짧음과, 허무성과, 연약함에 대하여 간략하고 명료하게 우리에게 표현해 주었습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지금 무슨 생각이 드시는지요. ‘한 해가 사라졌구나! 내 인생에 다시는 안올 세월이 흘러가고 있구나!’ 그런 허무감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에게 우리날을 계수함을 가르치사 우리가 몇 날이나 사는지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옛날에 다윗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화려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종말을 생각했고, 세월을 생각했고, 인간이 연약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시 39:5)

사업이 든든하다, 건강이 든든하다 말하지만 이것이 언제 안개처럼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잘 묘사했던 솔로몬 왕은 인생의 헛됨을 바람을 잡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전 1:14)

바람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잡으러 쫓아가는 것처럼 인생을 어리석고 헛되게 산다는 것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 앞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말이 앞서 있습니다. 내일이 뭡니까? 내일은 네 날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주시면 있고 안주시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모든 날들이 다 주께서 주신 날이고,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 날이고 거두시면 내 날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전세 기한동안 이 지구라는 전세 집에 살다가 끝나라 하시면 끝나는 것을 안다는 것이죠.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전세 기한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지금 전세 기한 중에서 1년이 갔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그래서 계산해야 됩니다. 그래서 실로 인생의 사는 날에 대하여 덧없음이 지나갔던 허무한 인생에 대하여 지나간 우리 조상들은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

 

내 청춘 누구 주고 뉘 백발 가져온고

백발이 오가는 길 알았더면 막을 것을

알고도 못막는 길이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60이 넘으니까 1년이 새롭고, 70이 넘으니까 한달이 새롭고, 80이 넘으니까 하루가 새롭다.”

우리의 세월이라는 것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허무를 느끼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짧은 인생동안 속지 말아야 됩니다. 젊어서 모은 재산, 퇴직해서 가진 돈 사기 당할 때 그 억울함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그 억울함이 늘 있습니다. 세월 속에서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청춘을 고스란히 사기당한 것처럼 살아가는 것, 헛된 일에 분요할 때, 짧은 인생을 속아서 헛되이 살고 나중에 사기 당한 것처럼 억울해 탄식하고 괴로워할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속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속고 있습니까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13절)

이것이 무슨 말인 줄 아십니까? 사는 목적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사기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사기 당하고 있느냐? 어떤 이익을 추구하면서 사기 당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 그의 년간 계획입니다. 치밀한 계획입니다. ‘이를 보리라’ 분명한 그의 목표가 있습니다. 당시에 새로운 도시가 서면 많은 장사꾼들이 거기에 가서 사업을 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현재나 그때나 시장을 개척해서 나가려는 사업의 계획은 똑같습니다. 이 사람이 돈 벌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한가지가 문제입니다. 지금 야고보 사도가 여기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돈을 번 이후에 계획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계획이 없습니다. ‘이를 보리라’ 그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목적이 없으며, 하나님을 위한 계획이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돈버는 목적이 있어야 하고 사업을 하면 사업의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목적이 없습니다. 빌딩을 짓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이후의 목적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있어야 합니다.

얼마전에 평화시장에서 지게꾼이 장사를 해서 오천 만원짜리 적금을 들어서 은행으로부터 상패와 저축상을 받았습니다. 사회자가 수상자에게 물었습니다. “그 돈으로 무엇하겠습니까?” 수상자는 주저없이 대답했습니다. “저금해야지요. 그리고 금년에도 5천만원 벌어 적금하렵니다. 그래서 일억을 만들랍니다.” 사회자가 또 묻습니다. “그 일억으로 뭘 하시렵니까” “계속 저축해서 일억 오천을 만들랍니다.”

이 사람 대단한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풀빵 장사해서 오천만원 적금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돈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사람이 돈 버는 재미도 있고, 돈 갖고 있는 재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재미가 없습니다. 돈 쓰는 재미가 없습니다. 돈 쓰고, 칭찬듣고, 보람을 얻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슨 목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한 해를 결산할 때 무슨 목적으로 사셨습니까 ‘오늘이나 내일이나 돈 벌고 이를 보리라’ 하는 마음뿐입니까? 빌딩이나 짓고 사업이나 늘리다가 죽으시렵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벌면 성공했다 말합니다. 그런데 돈 벌고 부도난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벌고 양심을 부도내고, 돈 벌고 인간의 의리를 부도 낸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패했어도 그가 진실하게 산 사람은 성공한 사람입니다. 남들이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섰다면,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감사하고 있다면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기 생에 대하여 속지말고 살아야 합니다.

미국 시카고에 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의 담임 목사님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가 젊은시절 아버지의 도움으로 남미 브라질로 여행을 가게 되었습니다. 리오데자네이로 한 호텔 스카이 라운지에서 혼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세계에서 돈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는 호텔에서 60대로 보이는 한 노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여보, 우리가 그동안 고생한 가치가 있지 이제까지 60년이 넘게 먹지 않고, 쓰지도 않고, 고생만 하다가 이런 멋진 휴가를 보내며 오늘밤에는 이렇게 호화로운데서 호강을 하니 고생한 가치가 있지”

빌 하이벨스 목사는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노부부가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고 측은하게 보이더랍니다. ‘일생 안먹고, 안쓰고, 고생하다가 고급 식당에서 저녁 한끼 먹는 것이 뭐 그리 행복하단 말인가?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란 말인가 그는 그날 숙소에 돌아와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제가 적어도 이보다는 더 가치있는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이것보다는 더 영광스런 인생을 살게 해 주십시오.” 그는 그때 일을 통해 인생의 목적과 행로에 대해 귀중한 깨우침을 얻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목적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의 종말을 교훈으로 남겼습니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눅 12:16-19)

이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에 소출이 많아 큰 곳간을 짓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리고 내 영혼으로 하여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리라”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라”라고 말씀하셨고 부자는 번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죽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오늘 우리 사회에 산다면 그는 크게 성공한 사람일 것이요, 사회적 명성과 존경을 독차지 할 것이요, 그는 아마 경제계에서 극소수의 특권을 가진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예수님은 왜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사는 목적을 먹고 마시는 동물적 가치관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목적과 가치관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목적이 자기 안일과 행복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견딜 수 없으리 만큼 모든 것이 무의미하여 질 것이다. 그러나 반면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을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보라 그 순간 영구한 희열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사업에 성공했다고 떵떵거리면서 인생을 탕진하는 사람을 보면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시 17:14)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자신을 평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잡지사에서 설문조사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설문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당신에게 생명이 일년만 남았다면 어떻게 쓰겠습니까?” 이 설문에 대하여 대답은 다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남을 도우면서 살겠다, 주면서 살겠다, 전적으로 사랑하면서 살겠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오직 사랑하며 살겠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높이 평가되어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마음이 착해진다고 합니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 가지 일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을 것을, 좀 더 베풀 것을, 좀 더 재미있게 살 것을 그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좀 더 참지 못해서 마음 상하고, 천천히 판단해야 되는데 조급하게 판단해버리고, 평가해버리고 절망합니다. 지난 일년을 회개해 보세요. 참지 못한 언행으로 잃어버린 우정, 평안, 진실이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참을 것을 후회하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좀 더 베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것이지요. 내가 좀 더 넉넉할 때 핑계를 대면서 베풀지 못했고, 줄 수 있었을 때 안주었습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우리는 선을 행하여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으로 선한 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기적인 마음을 포기해야 됩니다. ‘이를 보리라 하는 자’는 남에게 선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선을 알지만 못합니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양심이 고발합니다. 다른 사람도 기만합니다.

오래전에 미국 보스턴시에 스토로사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큰 꿈을 가졌으나 그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돈이 없어서 거부인 바턴씨를 찾아가서 이천불을 꾸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자기에게는 담보는 없지만 일에 대한 꿈과 용기가 있으니 믿고 대여해 주시면 그 은혜는 잊지 않겠노라고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바턴씨의 주위 사람들은 경력도 없는 그에게 담보나 후원자도 없이 돈을 꾸어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바턴씨는 웬지 그 청년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모험을 걸고 2천불을 주었습니다. 과연 스트로사는 얼마 되지 않아 그 돈을 갚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지 10년이 지났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대 경제공황이 일어나 바턴씨는 파산 위기에 있었습니다. 소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스트로사는 바턴씨를 찾아가 “당신이 빚진 돈 7만 오천불을 내가 대신 갚아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턴씨는 깜짝 놀라 “자네가 가져갔던 돈은 이미 갚았는데 무슨 소리요” 하고 의아해했습니다. “분명히 빚진돈 2천불은 옛날에 갚았지만 당신이 나에게 베풀어 준 은덕은 평생을 두고 갚아도 다 못갚습니다. 그때 이천불로 장사를 해서 오늘 이렇게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라고 스트로사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마워했습니다.

여러분, 은덕과 사랑은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돈으로 갚아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갚아야 할 은덕이 생각 날 것입니다. 카드 한 장을 써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십시오. 그래야 선이 됩니다.

작자 미상의 아름다운 시 한 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 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밝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어제는 이미 당신의 것이 아니니 지금 하십시오.

친절한 말 한 마디가 생각나거든 지금 말하십시오.

내일은 당신의 것이 안될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있다면 지금 하십시오.

미소를 짓고 싶거든 지금 웃어주십시오.

당신의 친구가 떠나기 전에

장미는 피고 가슴만 설레일 때

지금 당신의 미소를 주십시오.

불러야 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때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에 너무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그러므로 이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선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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