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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삿 6:11-18) / 박조준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사시기 6:11~18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정시대 이전에는 사사들이 민족을 지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를 사사시대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바로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주신 말씀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바알신이나 아스다롯 그리고 아무 쓸모 없는 우상을 섬기는 일을 점점 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니까 자연히 그 당시 제상의 타락한 문명에 깊이 오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가나안을 둘러싸고 있던 이웃 백성과 유목민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처럼 세상에 빠져 타가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상에 대해서 말해 내려가다가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 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슴아파 하시는지 아십니까? 그토록 고귀한 약속을 받고 택함을 받은 특별한 백성이 그 고귀한 신분을 떨치기는커녕 그 당시 세상 사람들의 무지와 죄악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만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은 거짓 우상을 쫓느라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될 것을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압제하던 자들의 손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을 오히려 멀리하게 되고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곤경 중에서도 더욱 깊은 곤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이 백성들은 자기네 멋대로 뿌린 죄악의 씨 때문에 무서운 재난의 태풍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웃 강대국들로부터 침략을 당하고 노략을 당했습니다. 백성들은 사로 잡혀가게 되고 많은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손실을 막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에게 소망이 끊기고 마음속엔 두려움과 불길한 생각으로 가득 차였습니다.


이런 절망 속에 처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곤경 속에서 다시 한번 구원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집과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럴 때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들을 형벌에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들이 범죄하고 그 범죄 때문에 고통 당하고, 눈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비하심 속에 용서받고 구원하고 또 범죄하고 고통 당하고 회개하고 용서받고 구원받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크시니까 그래도 참으시고 또 참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채찍을 드셨다가도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면 다 용서해 주시고 지난날의 잘못을 기억도 안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곤경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사사들과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셔서 그들을 지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악한 길에 들어가 그 사랑의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사람의 경우로 말해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데 그런 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극입니다. 7년간의 고통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황무하고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잔인 무도한 미디안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공격해 왔습니다. 사막의 메뚜기 떼처럼 공격해와 요사이 융단폭격이란 말을 씁니다만 아예 싹 밀어버릴 정도로 미디안의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암흑의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마귀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안타까워 채찍의 벌을 가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법칙인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으면 팥을 거둡니다. 악을 심으면 벌을 거두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 거기에 대한 응징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최대한의 이익을 주시기 위해서 이런 징벌을 내리십니다. 징벌을 위한 징벌을 하신다면 하나님 자신의 속성과 그의 백성을 동시에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의 억압아래서 살아 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산에는 동굴을 만드는 작업을 해야했고 땅에는 땅굴을 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해야 하는 때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어둡고 메말랐습니다. 곡식이나 포도를 수확해도 빵을 구워먹거나 포도주 맛을 본다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일본 사람의 식민지로 있을 때 형편과 비슷했습니다. 우리도 농사를 하면 곡식을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자나면 곡식이 다 떨어져 말할 수 없이 궁핍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때부터 춘궁기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봄철 궁핍한때 우리말로 보리쌀이 나기 전에 넘기 어려운 고개라고 해서 보릿고개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젊은이들에게 그런 말을 하면 '왜 그런 고생을 했어요? 라면 끓여 먹으면 될 텐데요'라고 말합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의 소망은 없었습니다. 도덕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백성 모두는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더구나 경제적으로 빈 털털이였습니다. 더 이상 내려 갈래야 내려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임사호천이란 옛말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범죄 함을 뉘우치고 염치는 없지만 죽을 지경에 이르러 하나님의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부르짖음을 절망의 심연에서 부르짖는 절규였습니다. 그것은 빈주먹밖에 남지 않은 가련한 민족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절망과 두려움의 구덩이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의지할 때 없는 백성의 뜨거운 기도였습니다. 이 무서운 적의 무자비한 발길에 짓밟힌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간구을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바로 오늘 우리의 처지입니다. 우리가 지쳐 자빠지기까지는 자기 고집에 사로 잡혀서 오랫동안 애를 써 봅니다. 우리의 이 못된 성격 속에 들어있는 교만과 아집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주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를 바라보시며,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주시고자 준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우리의 드린 기도가 즉시 응답되거나 순간적인 기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들이 당하게된 이런 시련의 이류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당한 곤경의 원인을 알아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온 선지자를 이 고집 센 백성에게 보내셔서 그런 어려움을 당하게 된 이유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의 노예생활에서부터 벗어나게 하신 분이 자기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꾸준히 그 마음속 깊은데서 되새겨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분이 하나님 아니었습니까? 그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충성과 순종을 요구하며 은혜로운 약속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고집이세고 제멋대만 하는 어린애처럼 그런 것들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교만 속에 빠져서 하나님의 인도를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그들의 원수들이 섬기는 우상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자기의 영혼을 우상에게 의탁하는 것은 스스로의 멸망을 자처하는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무서운 환난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심령에 깊은 상처받은 사람을 주님께서 가까이 부르시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이것은 불순종하는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깊고도 엄격하신 속성이이십니다. 한사람이든 온 백성이든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십니다.


시편 34편 6절 마름에 "곤고 한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 하셨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말로 다 할 수 없이 넓으신 자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의 도움이 되십니다. 그리고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 잘못한 일이 있어도, 이렇게 가련한 사람의 기도를 한번도 응답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십니다. 내 모든 힘을 완전히 잃어 버렸을 때, 도저히 나 혼자로서는 일어설 수 없이 되었을 때, 두손들고 주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그때 그 무한하신 능력과 민첩하신 손길로 우리를 소생시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개인이던 민족이던 주를 믿는 사람, 하나님의 백성이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주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능력의 오른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사자가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 있으면서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젊은이는 미디안 사람의 눈을 피해서 몰래 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잠시동안 하나님의 사자는 젊은이가 땀을 흐리며 애써 일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가끔씩 이 젊은이는 등을 펴고 고개를 들어 혹시 누군가가 보고 있지 않나 해서 사방을 살피곤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나타난 방문개의 눈길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 젊은이는 낯선 손님이 하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미디안의 침략 속에서 절망적인 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다는 말인가?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무명청년인 나를 가리켜 "큰 용사여"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큰 용사라면 이렇게 적의 눈을 피하여 포도주 틀에 숨어서 일하고 있지 않았을 터인데, 이 젊은이는 기드온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생각해 사로 잡혀 있는 기드온에게, "기드온아,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 임했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에게 있어서 확실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젊은 농부 기드온은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일이 자기 백성의 구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분을 믿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기드온은 그 분에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버리셨나이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미디안 군대의 발굽아래 짓밟혔겠습니까?"


그런데 다행하게도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의 이런 불평과 비난에도 묵묵히 참아 주셨습니다. 이 젊은이의 무례한 반항에도 아무런 보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시면서 기드온이 일찍이 들어 본적이 없는 놀라운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드온아, 내가 여기 있다.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여기 너와 함께 하신다. 내가 너를 지키며 능력을 주마. 이것이 너희 힘이요 너의 능력이요 이것이 너희 끊임없이 솟는 힘이니라. 이제 너는 주의 능력을 힘입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 족속의 손에서 구하라. 내가 너를 보내노라"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드온의 튼튼한 힘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린 나팔소리만큼이나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이 격려의 말씀이 기드온의 피를 끓게 하였습니다. 기드온의 맥박은 힘있게 뛰기 시작했습니다. 기드온은 자기 앞에 있는 수십만의 적도 거뜬히 물리 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와 담력 그리고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기드온, 그렇습니다. 그의 이름 기드온은 '베어내는 자' '이기는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뛰어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주님과 기드온의 만남은 기드온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게 되었습니다. 그의 생활에는 위로부터 임하는 감동을 입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평범한 농부이상으로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속에 숨어 있는 용맹스러운 장군으로서의 자질을 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면 우리의 삶이 온전히 바꿔집니다. "속이는 자"라는 뜻을 가진 야곱이 주님을 만남으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불안한 사람'이란 뜻을 가진 이름의 시몬이 주님을 만남으로 반석이란 뜻의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앞장서서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남으로 교회의 선구자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응답하기만 하면 주님은 그 선하신 손,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믿음의 위인으로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드온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주저했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제 집은 므낫세 주에 지극히 약하고 저는 제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이 말씀은 간단해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이 말씀 한마디만 믿어도 이 험한 세상 염려 근심 걱정 두려움 없이 주님과 함께 승리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가운데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우리에게 힘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 안에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시는 뜻을 행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니' 라고 말씀했습니다. 기드온에서 적군 미디안을 쳐 부 술 수 있는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는 말씀을 들은 기드온은 너무 감격하여 성의 있는 예물을 하나님의 사자에게 드렸습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완전히 드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렸으므로 하나님을 그를 온전히 쓰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 마음대로 쓰시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더 귀하게 더 아름답게 더 좋게 사용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는 것을 빼앗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그것들을 내 놓기를 기다리십니다. 주님을 위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 생명까지 내 놓으면 오히려 그것을 찾게 하십니다. 기드온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내놓았습니다. 그는 그 보답으로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 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해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면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소유 할 수 있게 됩니다. 어린 소년이 가지고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가 만 명이 넘는 많은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가지고 자기만 먹었으면 혼자 먹기도 넉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 드렸더니 그 많은 사람이 배불리 먹고 남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활주변에서 하나님이 비상한 방법으로 쓰시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까지도 뜨겁게 해 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틀림없이 주님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친 사람들입니다. 내가 가진 것은 내놓지 않고 꽉 쥐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주님께 제물로 드렸다고 입술로 외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기드온은 자기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찾아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담대히 행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통해서 이스라엘 앞에 놀라운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이 세상을 두루 살피시며 은혜의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고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주님을 향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이 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같은 뜻을 품으신 이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사람과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 하십니다. 지금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가 정말 믿고 있던 사람까지도 뒤돌아 서서 배신하며 내게 은혜를 입고 살아온 사람마저도 나를 배반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 하리라. "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평탄해 보이는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해 주지 아니하시면 거칠고 험하기 때문에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길을 걷도록 명하시면 그 길은 안전한 길로 바꿔집니다. 다윗의 간증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기시 때문입니다.


전에 야곱은 라반을 떠날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그대들의 아버지의 안색을 본즉 내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 하도다. 그러할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느니라." 이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 아내와 내 자녀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내게서 탈취해 가려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내가 이토록 번영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이처럼 많은 단점이 있는 사람이지만 내 아버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 이 얼마나 복된 간증입니까? 우리도 이와 같은 간증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이 되겠습니까?


야곱은 라반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곡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야곱은 그 형에게 가 자기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들고 두려움에 가득 찼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만일 두려워한다고 우리를 버리신다면 우리는 벌써 다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 마음속에 지닌 믿음이 적다고 해도 그럼 믿음만 있으면 "주께서 내 고난의 날에 나와 함께 하셨고 내가 가는 길에 나와 함께 하셨도다." 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내 생애 중 가장 암담했던 때가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모든 악이 변하여 선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의 이 축복의 약속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셔서 현재도 이래도 축복 받고 우리 삶 속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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