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의 찬가
누가복음 1:46-55
녜, 귀한 찬양 감사 합니다.
우리교회 성가대 찬양을 Miss 했는데요 아주 오늘, 아~ 너무 아름다운 찬양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함깨 봉독한 본문은 교회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워지는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 ‘The Magnificat’ 라고 불리워지는 마리아의 찬가, 마리아의 송가. 이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를 잉태하고 불렀든 기쁨의 노래의 찬양입니다.이 찬양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 하나님이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를 아~노래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녀가 경험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 이 첫번 크리스마스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면서 경험했든 그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긍휼을 마리아는 경험할 수가 있었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50절 말씀입니다. 본문의 50절, 본문의 50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본문의 5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여기보시면 긍휼하심이,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또 54절 한번 보겠습니다. 54절요, 54절 같이 읽겠습니다.시작,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여기서 두 번씩 반복된 단어가 긍휼이라는 단어죠? 자, 마리아의 잉태 경험에 있어서 그가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경험했든 하나님, 그것은 긍휼의 하나님이였습니다.
저는 이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저와 여러분에게 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긍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Mercy, 긍휼이란, 비참함의 상태 속에 그 상태를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Mercy,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이 긍휼하고 비슷한 단어가 하나가 있어요. 이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아주 비슷한 내용이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은혜보다는 사실 긍휼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강도가 진한 단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 죄 때문에 자격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을 나타낼 때 그것을 은혜라고 Grace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긍휼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그 비참함을 향해서 비참한 상태나 비참한 인생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성경은 긍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시대에 무엇보다도 이 긍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KAL기는 그 케네디 공항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말고 또 하나의 공항이 있습니다. ‘라구아르디아’ 라는 공항이 있습니다. 본래 이 ‘라구아르디아’ 라는 것은 뉴욕시민이 아주 사랑했든 유명한 그 시장의 이름입니다. 메이어 시장, 라구아르디아 라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시장이 되기 전에 판사였습니다. 아주 명 판사였습니다. 한번 그가 추운 겨울날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 노인은 아~추운 겨울에 아~외롭게 사는 분으로서 가족들 없이 살다가 너무 배고프고, 그래서 그 지갑에서 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서 법정에서게 되었습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재판장을 향해서 라구아르디아 Judge를 향해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판사님 저에게 한번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잠시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든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10불을 아~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둔데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죠.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프도록 방황하도록 도둑질 하도록 버려둔데 대해서 우리도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좀 자유롭게 Voluntary 로 헌금을 좀 하시죠”. 하~ 그래서 헌금대를 돌렸습니다.그러니까 10불 더 나왔겠죠?
녜, 이 명 판결을 보고 뉴욕 시민들은 참 긍휼이 많은 판사다. ‘라구아르디아’ 는 긍휼이 많은 Judge다. 그는 후일에 존경 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냥 긍휼의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 또 잉태 하고 나서 기쁨의 찬미를 부르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서 그녀가 경험한 하나님, 이 첫번 크리스마스에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을 같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은 어떤 경험이였을까요?
우리는 첫째로 마리아의 선택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마리아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50절을 한번더 같이 읽겠습니다.
50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자,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시점에서 마리아는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본문에 마리아의 노래를 가만히 보시면 살펴보면, 마리아가 느끼고 있었든 자화상이 한 두 가지 인상적인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선 48절에 보시면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비천한 계집종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아~우리가 조금 아까 읽었든 50절의 말씀인데 긍휼하심이 어떤 사람에게 다가온다구요? ‘두려워하는 자에게’ 저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과정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특별히 경험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비천한 어린 소녀, 비천한 어린 소녀. 여기서 비천하다는 단어가 많은 영어번역에 보시면 ‘로 스테이드’ ‘로 에스데이트’ 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에는 ‘humble’ 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기도 합니다마는 아주 낮은 신분, 낮은 상태를 나타내어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 단어 속에 열등감이 배어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이스라엘에 많은 도시마을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었든 곳이 물론 예루살렘이죠. 그러나 나사렛은 상대적으로 아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든 타운이였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나사렛 사람, 이 말도 예수님을 혐오하는 단어 중에 하나였습니다, 본래는. 그런데 이런 시골 나사렛에서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든 어린소녀, ‘주님 나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 단어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든 인생의 자리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고있었든 이 소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우리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비천한 소녀입니다. 열등감과 싸우고 있었든 이 소녀의 모습. 또 하나는 저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소녀,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이 마리아가 임신을 했잖아요. 이것은 스캔달입니다. 지금도 스캔달일수 있는 사건인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봉건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크다란 스캔달이였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스캔달이 아니에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사건이였습니다. 그당시 이런 어린 소녀가 임신을 하게 되면은 그 소녀를 죽여도 그 사회는 무관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을까요? 이것 때문에 내가 당해야 할 수모? 사람들에게 받아야할 손가락질? 그 혐오와 그리고 수많은 그 비방의 말들? 그리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어쩌면 잃어야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소녀가 겪고 있었든,그 마음에 내제하고 있었든 엄청난 두려움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이러한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님은 이 소녀에게 다가오셨습니다.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누가복음 1장을 보시면 마리아가 잉태를 하자 마자 두려움 속에 사로잡힌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십니다.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죠?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 우리가 같은 누가복음 1장에 보시면 30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한번 그 부분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 시작,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녜,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뭐라고 그랬습니까? 제일성이, 무서워말라, 두려워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이것은 네가 두려워해야 할 사건이 아니고 부끄러워할 사건도 아니고, 이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야. 너는 구세주 메시야를 낳을 꺼야.
나 같은 계집종을 주께서 찾아오시고 그리고 나를 쓰시겠다고, 이것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사건이 아니라고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다가오시고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그 메세지를 주시는 그 순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마리아는 무얼 느꼈을까요? 하나님이 정녕 나를 얼마나 긍휼히 여겨주셨는지.
이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히브리 말로는 그 하나님을 표현하는 독특한 단어가 있습니다. “엘 라훔” 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엘 라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그런데 “라훔” 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 “렉켐” 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뜻은 뭐냐하면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이에요. 혹은 어머니의 가슴, 자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것은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는 그 여인의 깊은 가슴과도 같은 것입니다.지금 여기에 외로워 하고 두려워하고 아파하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든 이 어린소녀 외로운 소녀, 그리고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든 열등감 속에 빠져있었든 이 소녀, 그러나 하나님이 다가오시면서 그 사랑을 부어주시고 주님의 긍휼을 부어주는 그 순간 이 소녀의 열등감은 아마도 눈처럼 녹아 나면서 ‘그래, 나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여인이야’
그 열등감을 넘어서서 두려움을 넘어서서 일어서게 된 한 여인의 심정을 여러분 생각 해보세요. 이런 긍휼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오늘 여러분에게나 저에게 긍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겪고있는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이 생존경쟁,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껴야 하는 나의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나만이 가지고 있는,붙들고 있는 나의 외로움과 나의 두려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의 두려움이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겪고있는 열등감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면, 마리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너는 은혜를 받은 자야, 만약 주께서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그의 은혜와 긍휼을 부어주신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얼마만큼 달라질까요? 따라서 마리아에게 부어주셨든 그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우리가 크리스마스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우리가 두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리아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이 시점, 아~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시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은 어떤 현실이였을까요? 우선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든 이스라엘 민족이죠. 녜,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많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자, 이집트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구요? 또 저 북방에 있든 앗시리 앗수르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죠.그런가 하면 저 남쪽에 바벨로니아에 끌려가서 그 바벨로니아에서 또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자존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노예생활 하면서도 결코 자기들이 한번도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고 이 노예의 속박은 곧 벗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부서지고 끌려가고 그리고 짓밟히는 노예의 경험을 계속 해야만 했었습니다.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은 아직도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노예였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통치하고 있었든 로마제국은 지금까지의 어떤 과거의 제국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주 강력한 철의 제국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은 로마에 대해서만은 승산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끌려가면서도, 앗시리아로 끌려가면서도 바벨로니아로 끌려가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돌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강력하게 전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든 로마의 철권을 향해서만은 그들은 민족해방의 어떤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마리아가 한 생명을 잉태합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그가 바로 기다리고 있었든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자,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기다렸든 메시야,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그 백성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줄 수 있는 놀라운 그 메시야. 멧사이야, 메시야가 이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한다 그것은 마리아 개인에게 소망이였을뿐 아니라 그것은 민족의 소망이 회복된 순간이였습니다. 아! 우리민족을 그대로 버리지 않으셨구나, 노예 되었고 또 앞으로 다시 로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아무런 승산이 없었든,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 단절된 이 상태의 민족, 이스라엘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긍휼, 이 민족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 민족이 긍휼이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시 IMF가 온다고 난리인데요? 제가 외국에 나가보니까 미국에 살고있는 우리 교포들도 조국 걱정이 보통이 아닙니다. 에~나라가 잘되어야 할텐데, 이 나라의 현실은 그대로 외국에 살고있는 교포들에게도 불안을 증대 시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시 한번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민족이 또 한번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낮아져서 ‘하나님 우리 민족 한번 긍휼을 베푸세요’.이렇게 정말 기도할 수 있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교만한 사람은 깨닫지 못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 느끼고 부딪히고 또 확인하는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고 말입니다. 대적하신다고,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만한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만한 가정도, 교만한 민족도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그저 IMF 시작되니까 조금 겸손 해지는 것 같더라 구요 우리 민족이, 조금 있으니까 극복했다고 다시 옛날처럼 방탕하고 사치하고, 우리가 또 한번 낮아 질 수가 있다면,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겸허할 수 없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낮아져야 할 때, 긍휼을 구해야 할 때.
교만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용서나 도움을 정직하게 구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 다음엔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용서나 도움을 정직하게 구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정직하게 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필요하니까 도움을 구하죠.그러나 이상한 방법으로 구합니다. 꼭 저 북한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걸 알면서도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비비 꼬아가지고 도움을 얻어낼려고 한단 말이죠. 이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이 사람들의 윤리와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결론이에요.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연변 과기대에 우리 김박사께서 다녀가셨습니다마는 김진영 박사께서 그 중국에서 사시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이 공산 사회에 세뇌된 사람들에게 두 가지 특성이 있다면, 결코 볼 수 없는 두 가지, 절대로 하지않는 두 가지, 첫째는 뭐냐하면 I’m sorry가 없다는 것,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I’m sorry, 또 하나는 들어볼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Thank you, 감사합니다. 이 소리가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 사람들 만나면 얼마나 자주 이 소리를 합니까? I’m sorry, I’m sorry. 자기가 발을 밟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도 밟히는 사람이 I’m sorry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밟아 놓고도 I’m sorry를 안해요. 그러니까 I’m sorry, 그리고 Thank you, 기독교 문화가 준 그 영향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준 영향,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문화가 우리에게 생활화 되지 않아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아직도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허함이 우리 문화나 라이프 스타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화가 생겼어요. 오직하면 이런 얘기가 생겼겠어요? 미국 사람하고 인도 사람하고 한국 사람이 셋이서 함께 식당에 갔대요 아마 한국사람이 주문을 했습니다. 비후 스테이크를 살려고 비후 스테이크를 주문을 했는데 웨이터가 말하기를 ‘죄송하지만 비프 스테익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런데 미국사람이 보여준 반응이 뭐에요? ‘떨어졌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떨어졌다니, 미국사람은 이 풍요의 나라에 살다보니까 떨어졌다는 말을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 인도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하면 ‘비프 스테익이 뭡니까? 소를 먹다니요?’ 하하~ 소는 경배해야지 먹는게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한국사람은 ‘죄송하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하하~, 한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송합니다에요. ‘죄송합니다 마는 비프스테익이 떨어졌습니다’. 녜, 떨어졌다는 것을 미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도사람은 비프스테익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송합니다란 뜻이 뭡니까?’ 그걸 배워야 해요. 우리가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낮아질 줄 알아야 되요.
그래서 한번 더 이민족이 정말 겸허의 자리에 앉아서 살아계신 주님 앞에, ‘하나님 한번 더 이민족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만약 이 낮아짐이 있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게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가 아닌가요? 이스라엘 민족사 가운데 긍휼을 베풀어 주시든 하나님, 동일한 긍휼을 이민족 가운데 베풀어 주시옵소서.
마리아가 체험한 성탄의 사건. 첫째로 자신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고, 둘째로 마리아 개인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가운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우리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의 출발을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예수 믿어셨나요? 여러분과 저가 어떻게 예수 믿으셨습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까? 여러분의 당당한 구도의 결론이였습니까? 생각해 보면 돌이켜보면, 어쩌다 믿은 거에요. 또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은혜에요. 나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든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였습니까? 우리 부모가 믿어서 믿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은혜가 아니에요?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내가 예수 믿었을까? 내가 하나님을 알았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내 삶을 만들어가는 이 놀라운 삶이 가능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은혜에요. 긍휼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2장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뭘 받았어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구요.
그러나 이런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이 놀라운 강조점은 그 앞서서 더 강조된 것이 하나 있어요.
에베소서 2장8절이 나오기 전에 같은 맥락 속에 에베소서2장 4절을 읽어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에베소서 2장4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 대목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한번 따라서 읽어보셔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성경은 은혜에 앞서서 먼저 강조한 것이 긍휼이였습니다. 긍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주어졌고 또 우리가 그를 믿으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인지요.
여러분과 저가 구원 받은 구원사건이 하나님의 긍휼때문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으세요? 그러면 그 다음에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구원 받았으니까? 당당하게,진실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놀라운 승리의 삶을, 거룩의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 앞에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않을 것 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은혜인줄 알면서도,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 시켜드리고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런데도 아직도 살고있는 이유, 그리고 또다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해를 바라보고 있는,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든 것,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긍휼때문이 아니에요?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께서 나를 받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냐 말이에요.
바울 사도는 그래서 어느날 자기가 살아왔든 인생의 모든 길을 되돌이켜 바라보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무어라구요? 은혜라구요. 그 말을 하나님의 긍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착오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 어떤 사건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신 사건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 속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돼요.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바로 그분,그 예수님, 아기 예수로 오셨든 예수님이 이땅에서 33년 동안 삶을 살 때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날 때에 제일 많이 가졌든 마음이 어떤 마음이였습니까? 예수님이 주변의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각, 또 사람들을 보셨을 때 그분이 느꼈든 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하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지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실 때 어떻게 느껴셨다구요? 민망히 여기셨다. 혹은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민망, 불쌍히 여겼다라는 말은 영어로는Compassion 이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Compassion, 같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좌절, 우리의 낙심, 우리의 절망을 같이 느껴주시고 아파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바로 그 분,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한 해가 흘러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그 분 앞에 나와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요!’ 바로 그 긍휼을 빌어야 할 때가 아닌가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열등감 많았든 한 소녀, 두려움 많았든 한 소녀. 그러나 이 소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든 바로 그 주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님인 것을 인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스라엘 민족, 보잘것없는 한 민족, 한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고 그를 긍휼히 여겨주시든 바로 동일하신 주님이 바로 이 민족, 이 역사에 주님이 될 수가 있다면, 우리 민족 가운데 주의 긍휼을 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됩니다. 정말 낮아져야 되요. 우리가 성경에 보면 바리세인과 세리 두 사람이 동시에 성전에 왔습니다. 두 사람이 꼭 같이 성전에 왔습니다. 똑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기도를 주께서 외면하셨어요. 거절하셨어요. 그러나 또 한 사람의 기도 세리의 기도를 받아 주셨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가져 왔을까요? 바리세인의 기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저 토색질하고 강도질하고 간음하는 저 사람들과 세리와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저는요 십일조 잘하고, 헌금 잘하고, 주일 성수하고요, 저는 모태 신앙이고요, 만세 전부터 택정함을 입었고요’ 주님은 그것을 기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만이였습니다. 그것은 프라이드 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전시, 자기 과시의 불과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발언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들어야 할 가치가 있는 기도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내어놓을 곳이 없었든 세리, 그래서 세리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러나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세리를 받아주시는 바로 그 순간 세리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이 비천한 여인, 이 어린소녀, 두려움 많은 소녀, 그러나 이 소녀가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 곁에 다가오신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라고,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 순간 깨끗이 열등감이 사라지고 “아! 하나님이 나도 쓰신다, 나 같은 사람도 쓰신다” 그 순간 마리아는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동일하신 주의 긍휼을 체험하는 이 크리스마스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요즘 어떻게 살고 계시나요? 마음의 아픔이 없습니까? 고통이 없습니까? 밝아오는 새해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우리가운데 많은 두려움, 많은 혼란, 당황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앞에 불안해 하는 많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괜찮아요 우리가 주앞에 엎드릴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그의 긍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가 약할 때 그가 우리의 강함이 되어주시고, 그가 우리의 보배로운 주님이 되어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날수 있어요.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로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의 가정을, 그리고 저의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다같이 통성으로 함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앞에 나와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벌거벗음을 주앞에 숨기지 않겠습니다. 비천한 종들이지만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한번 우리를 붙잡아주시면 우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오셔서 우리를 텃치 해주시고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약할 때 강함 되시는 나의 보배가 되시는 주 나의 모든,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 함께 하신다면 주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저는 다시 일어 설 것입니다. 찬양 할 것입니다.그리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것입니다.
오 주님, 2000년 전 마리아에게 주셨든 그 찬양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녀에에 주셨든 그 소망과 꿈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가복음 1:46-55
녜, 귀한 찬양 감사 합니다.
우리교회 성가대 찬양을 Miss 했는데요 아주 오늘, 아~ 너무 아름다운 찬양 축복이 됩니다.
우리가 함깨 봉독한 본문은 교회사회에서 마리아의 찬가라고 불리워지는 아주 유명한 대목입니다. ‘The Magnificat’ 라고 불리워지는 마리아의 찬가, 마리아의 송가. 이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구세주를 잉태하고 불렀든 기쁨의 노래의 찬양입니다.이 찬양의 내용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또 하나님이 어떻게 큰일을 행하셨는가를 아~노래하고 있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녀가 경험하는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서 본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 이 첫번 크리스마스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면서 경험했든 그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의 긍휼을 마리아는 경험할 수가 있었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50절 말씀입니다. 본문의 50절, 본문의 50절 말씀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본문의 5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여기보시면 긍휼하심이,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또 54절 한번 보겠습니다. 54절요, 54절 같이 읽겠습니다.시작,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여기서 두 번씩 반복된 단어가 긍휼이라는 단어죠? 자, 마리아의 잉태 경험에 있어서 그가 그 과정을 통과하면서 경험했든 하나님, 그것은 긍휼의 하나님이였습니다.
저는 이번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저와 여러분에게 또 우리 민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그것은 긍휼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일까요? Mercy, 긍휼이란, 비참함의 상태 속에 그 상태를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켜서 우리가 일방적으로 Mercy,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이 긍휼하고 비슷한 단어가 하나가 있어요. 이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아주 비슷한 내용이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 은혜보다는 사실 긍휼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강도가 진한 단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우리가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자격을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 죄 때문에 자격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베풀어지는 사랑을 나타낼 때 그것을 은혜라고 Grace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긍휼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그 비참함을 향해서 비참한 상태나 비참한 인생을 향해서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성경은 긍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시대에 무엇보다도 이 긍휼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뉴욕을 가게 되면 일반적으로 KAL기는 그 케네디 공항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말고 또 하나의 공항이 있습니다. ‘라구아르디아’ 라는 공항이 있습니다. 본래 이 ‘라구아르디아’ 라는 것은 뉴욕시민이 아주 사랑했든 유명한 그 시장의 이름입니다. 메이어 시장, 라구아르디아 라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시장이 되기 전에 판사였습니다. 아주 명 판사였습니다. 한번 그가 추운 겨울날 재판석상에서 한 노인을 보았습니다. 그 노인은 아~추운 겨울에 아~외롭게 사는 분으로서 가족들 없이 살다가 너무 배고프고, 그래서 그 지갑에서 한 20불을 훔치다가 체포되어서 법정에서게 되었습니다. 판결을 하기 전에 판사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노인장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이 노인은 재판장을 향해서 라구아르디아 Judge를 향해서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런 말을 했다고 그래요. “판사님 저에게 한번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잠시동안 그 노인장을 조용히 굽어보든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노인장에게는 정말 긍휼이 필요하시군요 그러나 노인이 잘못한 그 20불에 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아~마침 제게 10불이 있군요. 제가 10불을 아~노인장을 대신해서 변상하겠습니다. 노인장을 춥고 배고프도록 버려둔데는 저의 책임도 상당히 크기 때문이죠. 10불이 더 필요한데 여기 계신, 이 법정에 계신 방청하시는 여러분, 우리 사회와 여러분도 이 노인이 춥고 배고프도록 방황하도록 도둑질 하도록 버려둔데 대해서 우리도 공동의 책임이 있습니다. 좀 자유롭게 Voluntary 로 헌금을 좀 하시죠”. 하~ 그래서 헌금대를 돌렸습니다.그러니까 10불 더 나왔겠죠?
녜, 이 명 판결을 보고 뉴욕 시민들은 참 긍휼이 많은 판사다. ‘라구아르디아’ 는 긍휼이 많은 Judge다. 그는 후일에 존경 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에요. 성경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그냥 긍휼의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이렇게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오늘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 또 잉태 하고 나서 기쁨의 찬미를 부르는 이 마리아의 찬가를 통해서 그녀가 경험한 하나님, 이 첫번 크리스마스에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을 같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마리아가 경험한 하나님의 긍휼은 어떤 경험이였을까요?
우리는 첫째로 마리아의 선택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마리아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가 50절을 한번더 같이 읽겠습니다.
50절, 같이 읽습니다. 시작,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자,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시점에서 마리아는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었을까요? 그러니까 본문에 마리아의 노래를 가만히 보시면 살펴보면, 마리아가 느끼고 있었든 자화상이 한 두 가지 인상적인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우선 48절에 보시면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으며” 비천한 계집종이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그것은 아~우리가 조금 아까 읽었든 50절의 말씀인데 긍휼하심이 어떤 사람에게 다가온다구요? ‘두려워하는 자에게’ 저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과정에 있어서 이 두 가지를 특별히 경험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비천한 어린 소녀, 비천한 어린 소녀. 여기서 비천하다는 단어가 많은 영어번역에 보시면 ‘로 스테이드’ ‘로 에스데이트’ 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어떤 번역에는 ‘humble’ 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기도 합니다마는 아주 낮은 신분, 낮은 상태를 나타내어주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이 단어 속에 열등감이 배어있는 그런 단어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 이스라엘에 많은 도시마을 가운데서 가장 화려한 각광을 받고 있었든 곳이 물론 예루살렘이죠. 그러나 나사렛은 상대적으로 아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든 타운이였습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 나사렛 사람, 이 말도 예수님을 혐오하는 단어 중에 하나였습니다, 본래는. 그런데 이런 시골 나사렛에서 가난하고 평범하게 살든 어린소녀, ‘주님 나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 나 같은 사람을 쓰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우리는 이 단어 속에서 그동안 살아왔든 인생의 자리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살고있었든 이 소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우리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비천한 소녀입니다. 열등감과 싸우고 있었든 이 소녀의 모습. 또 하나는 저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소녀,
사랑하시는 여러분 지금 이 마리아가 임신을 했잖아요. 이것은 스캔달입니다. 지금도 스캔달일수 있는 사건인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봉건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잉태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크다란 스캔달이였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스캔달이 아니에요.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사건이였습니다. 그당시 이런 어린 소녀가 임신을 하게 되면은 그 소녀를 죽여도 그 사회는 무관했습니다. 얼마나 두려움이 컸을까요? 이것 때문에 내가 당해야 할 수모? 사람들에게 받아야할 손가락질? 그 혐오와 그리고 수많은 그 비방의 말들? 그리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어쩌면 잃어야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소녀가 겪고 있었든,그 마음에 내제하고 있었든 엄청난 두려움을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이러한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두려움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님은 이 소녀에게 다가오셨습니다.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우리가 누가복음 1장을 보시면 마리아가 잉태를 하자 마자 두려움 속에 사로잡힌 여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십니다.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죠?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자, 우리가 같은 누가복음 1장에 보시면 30절에 ‘천사가 일러 가로되’ 한번 그 부분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30절 시작,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녜,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뭐라고 그랬습니까? 제일성이, 무서워말라, 두려워말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이것은 네가 두려워해야 할 사건이 아니고 부끄러워할 사건도 아니고, 이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거야. 너는 구세주 메시야를 낳을 꺼야.
나 같은 계집종을 주께서 찾아오시고 그리고 나를 쓰시겠다고, 이것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사건이 아니라고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다가오시고 그 마음을 만져주시고, 그 메세지를 주시는 그 순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마리아는 무얼 느꼈을까요? 하나님이 정녕 나를 얼마나 긍휼히 여겨주셨는지.
이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상상해 보세요 우리가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 히브리 말로는 그 하나님을 표현하는 독특한 단어가 있습니다. “엘 라훔” 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엘 라훔”.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그런데 “라훔” 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 “렉켐” 이라는 단어에서부터 유래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뜻은 뭐냐하면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뜻이에요. 혹은 어머니의 가슴, 자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것은 생명을 품고 생명을 낳는 그 여인의 깊은 가슴과도 같은 것입니다.지금 여기에 외로워 하고 두려워하고 아파하면서 어쩔줄 몰라하고 있었든 이 어린소녀 외로운 소녀, 그리고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든 열등감 속에 빠져있었든 이 소녀, 그러나 하나님이 다가오시면서 그 사랑을 부어주시고 주님의 긍휼을 부어주는 그 순간 이 소녀의 열등감은 아마도 눈처럼 녹아 나면서 ‘그래, 나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여인이야’
그 열등감을 넘어서서 두려움을 넘어서서 일어서게 된 한 여인의 심정을 여러분 생각 해보세요. 이런 긍휼이 필요하지 않으세요?
오늘 여러분에게나 저에게 긍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겪고있는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이 생존경쟁, 무한경쟁의 시대 속에서 끊임없이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껴야 하는 나의 열등감은 무엇입니까? 나만이 가지고 있는,붙들고 있는 나의 외로움과 나의 두려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의 두려움이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겪고있는 열등감이 무엇이든지간에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하면, 마리아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너는 은혜를 받은 자야, 만약 주께서 다가오시고 우리에게 그의 은혜와 긍휼을 부어주신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얼마만큼 달라질까요? 따라서 마리아에게 부어주셨든 그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우리가 크리스마스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교훈입니다.
우리가 두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는 이스라엘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리아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의 그 경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자, 이 시점, 아~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는 그 시점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현실은 어떤 현실이였을까요? 우선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든 이스라엘 민족이죠. 녜, 이스라엘은 역사적으로 많은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자, 이집트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구요? 또 저 북방에 있든 앗시리 앗수르에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죠.그런가 하면 저 남쪽에 바벨로니아에 끌려가서 그 바벨로니아에서 또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자존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노예생활 하면서도 결코 자기들이 한번도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자유인이고 이 노예의 속박은 곧 벗어질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했습니다. 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부서지고 끌려가고 그리고 짓밟히는 노예의 경험을 계속 해야만 했었습니다. 이 시점에도 이스라엘은 아직도 노예였습니다. 로마의 노예였습니다. 이번에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통치하고 있었든 로마제국은 지금까지의 어떤 과거의 제국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주 강력한 철의 제국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은 로마에 대해서만은 승산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으로 끌려가면서도, 앗시리아로 끌려가면서도 바벨로니아로 끌려가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돌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강력하게 전 세계를 통치하고 있었든 로마의 철권을 향해서만은 그들은 민족해방의 어떤 소망을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마리아가 한 생명을 잉태합니다. 천사는 말하기를 그가 바로 기다리고 있었든 메시야 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자,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기다렸든 메시야, 궁극적으로 본질적으로 그 백성에게 참된 자유와 해방과 구원을 줄 수 있는 놀라운 그 메시야. 멧사이야, 메시야가 이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한다 그것은 마리아 개인에게 소망이였을뿐 아니라 그것은 민족의 소망이 회복된 순간이였습니다. 아! 우리민족을 그대로 버리지 않으셨구나, 노예 되었고 또 앞으로 다시 로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아무런 승산이 없었든,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 단절된 이 상태의 민족, 이스라엘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긍휼, 이 민족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우리 민족이 긍휼이 필요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다시 IMF가 온다고 난리인데요? 제가 외국에 나가보니까 미국에 살고있는 우리 교포들도 조국 걱정이 보통이 아닙니다. 에~나라가 잘되어야 할텐데, 이 나라의 현실은 그대로 외국에 살고있는 교포들에게도 불안을 증대 시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다시 한번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민족이 또 한번 낮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낮아져서 ‘하나님 우리 민족 한번 긍휼을 베푸세요’.이렇게 정말 기도할 수 있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면, 교만한 사람은 깨닫지 못해요.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 느끼고 부딪히고 또 확인하는 사실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요?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신다고 말입니다. 대적하신다고,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만한 개인 뿐만이 아니라 교만한 가정도, 교만한 민족도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습니다.그저 IMF 시작되니까 조금 겸손 해지는 것 같더라 구요 우리 민족이, 조금 있으니까 극복했다고 다시 옛날처럼 방탕하고 사치하고, 우리가 또 한번 낮아 질 수가 있다면,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겸허할 수 없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낮아져야 할 때, 긍휼을 구해야 할 때.
교만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특성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뭐냐하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용서나 도움을 정직하게 구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 다음엔 자기에게 정말 필요한 용서나 도움을 정직하게 구하지도 않습니다. 제가 정직하게 라는 단어를 쓰는데요? 필요하니까 도움을 구하죠.그러나 이상한 방법으로 구합니다. 꼭 저 북한 같아요. 도움이 필요한걸 알면서도 정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비비 꼬아가지고 도움을 얻어낼려고 한단 말이죠. 이 잘못된 공산주의 철학이 사람들의 윤리와 가치관을 파괴시키는 결론이에요. 얼마 전에 저희 교회에 연변 과기대에 우리 김박사께서 다녀가셨습니다마는 김진영 박사께서 그 중국에서 사시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이 공산 사회에 세뇌된 사람들에게 두 가지 특성이 있다면, 결코 볼 수 없는 두 가지, 절대로 하지않는 두 가지, 첫째는 뭐냐하면 I’m sorry가 없다는 것,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I’m sorry, 또 하나는 들어볼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Thank you, 감사합니다. 이 소리가 없다는 것, 그러나 미국 사람들 만나면 얼마나 자주 이 소리를 합니까? I’m sorry, I’m sorry. 자기가 발을 밟는 사람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도 밟히는 사람이 I’m sorry 그래요. 한국 사람들은 밟아 놓고도 I’m sorry를 안해요. 그러니까 I’m sorry, 그리고 Thank you, 기독교 문화가 준 그 영향입니다. 기독교 문화가 준 영향,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문화가 우리에게 생활화 되지 않아서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도 아직도 잘못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겸허함이 우리 문화나 라이프 스타일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우화가 생겼어요. 오직하면 이런 얘기가 생겼겠어요? 미국 사람하고 인도 사람하고 한국 사람이 셋이서 함께 식당에 갔대요 아마 한국사람이 주문을 했습니다. 비후 스테이크를 살려고 비후 스테이크를 주문을 했는데 웨이터가 말하기를 ‘죄송하지만 비프 스테익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런데 미국사람이 보여준 반응이 뭐에요? ‘떨어졌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떨어졌다니, 미국사람은 이 풍요의 나라에 살다보니까 떨어졌다는 말을 이해를 못해요. 그런데 인도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하면 ‘비프 스테익이 뭡니까? 소를 먹다니요?’ 하하~ 소는 경배해야지 먹는게 아니거든요 그 사람들은,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한국사람은 ‘죄송하다는 뜻이 무슨 뜻입니까?’ 하하~, 한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송합니다에요. ‘죄송합니다 마는 비프스테익이 떨어졌습니다’. 녜, 떨어졌다는 것을 미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도사람은 비프스테익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한국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죄송합니다란 뜻이 뭡니까?’ 그걸 배워야 해요. 우리가 잘못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낮아질 줄 알아야 되요.
그래서 한번 더 이민족이 정말 겸허의 자리에 앉아서 살아계신 주님 앞에, ‘하나님 한번 더 이민족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요’. 만약 이 낮아짐이 있다면 저는 우리 민족에게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때가 아닌가요? 이스라엘 민족사 가운데 긍휼을 베풀어 주시든 하나님, 동일한 긍휼을 이민족 가운데 베풀어 주시옵소서.
마리아가 체험한 성탄의 사건. 첫째로 자신의 선택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했고, 둘째로 마리아 개인 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가운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그러면 우리의 선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선택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여러분과 저의 신앙생활의 출발을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예수 믿어셨나요? 여러분과 저가 어떻게 예수 믿으셨습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까? 여러분의 당당한 구도의 결론이였습니까? 생각해 보면 돌이켜보면, 어쩌다 믿은 거에요. 또 생각해 보면 그것이 은혜에요. 나 같은 사람이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든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였습니까? 우리 부모가 믿어서 믿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은혜가 아니에요? 그대로 놓아두었으면 내가 예수 믿었을까? 내가 하나님을 알았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내 삶을 만들어가는 이 놀라운 삶이 가능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은혜에요. 긍휼은.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고백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에베소서2장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뭘 받았어요?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그 다음에 뭡니까?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구요.
그러나 이런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이 놀라운 강조점은 그 앞서서 더 강조된 것이 하나 있어요.
에베소서 2장8절이 나오기 전에 같은 맥락 속에 에베소서2장 4절을 읽어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에베소서 2장4절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 대목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한번 따라서 읽어보셔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성경은 은혜에 앞서서 먼저 강조한 것이 긍휼이였습니다. 긍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가 주어졌고 또 우리가 그를 믿으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인지요.
여러분과 저가 구원 받은 구원사건이 하나님의 긍휼때문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게 믿으세요? 그러면 그 다음에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지금까지는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구원 받았으니까? 당당하게,진실하게 겸손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놀라운 승리의 삶을, 거룩의 삶을 살아오셨습니까?
아마도 이 질문 앞에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않을 것 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은혜인줄 알면서도,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실망 시켜드리고 주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왔는지, 그런데도 아직도 살고있는 이유, 그리고 또다시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새로운 해를 바라보고 있는,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든 것,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긍휼때문이 아니에요?
주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주께서 나를 받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 아니냐 말이에요.
바울 사도는 그래서 어느날 자기가 살아왔든 인생의 모든 길을 되돌이켜 바라보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오직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무어라구요? 은혜라구요. 그 말을 하나님의 긍휼로 바꾸어도 조금도 착오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 어떤 사건입니까? 여러분과 저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이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신 사건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 속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돼요.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바로 그분,그 예수님, 아기 예수로 오셨든 예수님이 이땅에서 33년 동안 삶을 살 때에 예수님이 사람들을 만날 때에 제일 많이 가졌든 마음이 어떤 마음이였습니까? 예수님이 주변의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각, 또 사람들을 보셨을 때 그분이 느꼈든 마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단어하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자주 반복되는 표현이지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실 때 어떻게 느껴셨다구요? 민망히 여기셨다. 혹은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민망, 불쌍히 여겼다라는 말은 영어로는Compassion 이라는 단어가 쓰여집니다. Compassion, 같이 느낀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아픔, 우리의 좌절, 우리의 낙심, 우리의 절망을 같이 느껴주시고 아파하시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신 바로 그 분,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이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한 해가 흘러가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우리는 그 분 앞에 나와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요!’ 바로 그 긍휼을 빌어야 할 때가 아닌가요?
사랑하시는 여러분 열등감 많았든 한 소녀, 두려움 많았든 한 소녀. 그러나 이 소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든 바로 그 주님이 여러분과 저의 주님인 것을 인해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자, 이스라엘 민족, 보잘것없는 한 민족, 한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시고 그를 긍휼히 여겨주시든 바로 동일하신 주님이 바로 이 민족, 이 역사에 주님이 될 수가 있다면, 우리 민족 가운데 주의 긍휼을 구할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됩니다. 정말 낮아져야 되요. 우리가 성경에 보면 바리세인과 세리 두 사람이 동시에 성전에 왔습니다. 두 사람이 꼭 같이 성전에 왔습니다. 똑같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기도를 주께서 외면하셨어요. 거절하셨어요. 그러나 또 한 사람의 기도 세리의 기도를 받아 주셨습니다. 무엇이 그 차이를 가져 왔을까요? 바리세인의 기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 저는 저 토색질하고 강도질하고 간음하는 저 사람들과 세리와는 절대로 같지 않습니다. 저는요 십일조 잘하고, 헌금 잘하고, 주일 성수하고요, 저는 모태 신앙이고요, 만세 전부터 택정함을 입었고요’ 주님은 그것을 기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교만이였습니다. 그것은 프라이드 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전시, 자기 과시의 불과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발언에 불과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들어야 할 가치가 있는 기도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내어놓을 곳이 없었든 세리, 그래서 세리는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입술에서 튀어나오는 단어는 단 하나였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그러나 주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 세리를 받아주시는 바로 그 순간 세리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이 비천한 여인, 이 어린소녀, 두려움 많은 소녀, 그러나 이 소녀가 하나님의 긍휼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 곁에 다가오신 하나님, 두려워하지 말라고,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 순간 깨끗이 열등감이 사라지고 “아! 하나님이 나도 쓰신다, 나 같은 사람도 쓰신다” 그 순간 마리아는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동일하신 주의 긍휼을 체험하는 이 크리스마스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요즘 어떻게 살고 계시나요? 마음의 아픔이 없습니까? 고통이 없습니까? 밝아오는 새해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우리가운데 많은 두려움, 많은 혼란, 당황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앞에 불안해 하는 많은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괜찮아요 우리가 주앞에 엎드릴 수 있다면 기도할 수 있다면 그의 긍휼을 구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우리가 약할 때 그가 우리의 강함이 되어주시고, 그가 우리의 보배로운 주님이 되어주신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날수 있어요. 우리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꿈을 꿀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로 나아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저의 가정을, 그리고 저의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세요.
다같이 통성으로 함께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앞에 나와 머리 숙여 기도합니다.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벌거벗음을 주앞에 숨기지 않겠습니다. 비천한 종들이지만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한번 우리를 붙잡아주시면 우리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오셔서 우리를 텃치 해주시고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시옵소서
약할 때 강함 되시는 나의 보배가 되시는 주 나의 모든,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 함께 하신다면 주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신다면 저는 다시 일어 설 것입니다. 찬양 할 것입니다.그리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것입니다.
오 주님, 2000년 전 마리아에게 주셨든 그 찬양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녀에에 주셨든 그 소망과 꿈을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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