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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평화

약 3:1-12 / 평화 사랑 (7)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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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사랑 (7)
약 3:1-12.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여 삶의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있는 말씀 중에 하나는 마태복음 6장 33절의 말씀인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중국 대학이라고 하는 책에 마태복음 6장 33절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만물에는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이 있나니 곧 먼저 할 것과 나중할 것이라, 사람이 먼저 할 것과 나중할 것을 바로 알면 도에 가까우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들의 어리석음 중에 하나는 먼저 할 것을 나중에 하고, 나중에 할 것을 먼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살기를 거부하면서 나타난 현상인데,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 보다 먼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를 더 중히 여겨 그것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보다 앞세우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사 55:2) 우리는 남보다 좀 더 좋은 것을 먹고 입고 마시기 위하여 온 인생을 다 쏟아 부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하여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평화인데, 우리는 평화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으며, 더 중요한 것은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알려고 하지 않고 공부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 우리는 평화에 서툴고 그 때문에 우리는 밤낮 불화에 시달리며 하루, 하루를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소원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즈음 주일 날 마다 선포되는 평화에 대한 설교 말씀을 한 번만 듣지 마시고 인터넷이든지 테잎을 통하여 자꾸 반복하여 들으시고 공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과 삶의 모든 현장 속에 넘치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469장의 찬송이 저와 여러분의 찬송이 되게 될 것입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 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내 맘속에 솟아난 이 평화는 깊이 묻히인 보배로다 나의 보화를 캐내어 가져 갈 자 그 누구랴 안심일세.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내 영혼의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이 땅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오늘은 평화에 대한 일곱 번째 설교로서, 오늘 설교의 핵심은 말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평화를 깨트리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길들여지지 않은 불완전한 말을 악과 독으로 심지어는 지옥의 불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말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도 보면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보면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2절) 평화를 깨는 트러블 메이커의 특징은 우선 말이 많고, 더 나아가 말에 실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기 위하여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말입니다. 사실이 아닌 거짓말은 사람을 잡습니다. 생사람을 잡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이 아닌 거짓말을 지어서하는 것은 살인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 중에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 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록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물론 생짜로 거짓말을 만들어 퍼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을 모함하는 것입니다. 새빨간 거짓말이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좋지 못한 거짓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 같지 않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사실에다가 의도적으로 약간의 거짓을 보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거짓말은 이런 거짓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거짓말은 하도 우리가 많이 하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종류의 거짓말들을 하면서 산다는데 우리들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아를 어로 바꿈으로 은근슬쩍 말을 바꾸어 상대방에게 흠집을 내려는 좋지 못한 마음들을 대개 가지고 있습니다.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마음과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습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 없이 하는 말입니다. 평화에 대한 설교 중에 한번 다룬 본문입니다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나님은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그 말이 천사와 같다고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사실이 아닌 거짓말 보다 더 무서운 말이 사랑 없는 옳은 말일는지 모릅니다. 사랑 없는 옳은 말이 평화를 깨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평화는 옳지 않은 일이 깨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사랑 없는 옳은 말이 깨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으로는 사랑한다고 하여도 표현이 잘못되어 사랑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 말도 평화에 있어서 매우 좋지 않은 위험한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은 마음도 중요하지만 표현도 중요합니다. 표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의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의 대부분은 옳은 말입니다. 그 속에 사랑이 있는 말입니다. 아이들도 그것을 대개는 다 압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그 말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옳고 바른 말을 무례하게 아이들에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말을 할 때 우리 부모들이 쉽게 범하는 잘못은 화를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내다가 지나쳐서 아이들의 자존심과 인격을 건드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경우는 백전백패입니다. 아이들의 자존심과 인격을 건들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아무리 옳은 말도, 자기를 사랑하여 자기를 위하여 하는 말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을 반항을 하고 뛰쳐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모든 관계에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1:20)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 중요한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하느냐?’입니다.

말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논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일부러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상대방의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의 극치는 폭력입니다. 그러나 그 폭력 못지않게 심한 것이 바로 욕입니다.

예수님은 욕을 아주 심하게 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은 상대의 인격과 자존심을 모독하는 것으로 살인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할 때 사실을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실을 예의를 갖추어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부부가 해외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여행을 하는 동안 서로 반말을 하지 말고 존댓말을 하자고 약속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반말을 하면 만원씩 벌금을 내자고 하셨답니다. 평소에 잘 안하던 일이어서 서로 벌금을 제법 물었는데 그와 같은 존댓말 게임을 하면서 같은 말을 해도 반말을 하는 것과 존댓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똑 같은 말을 해도 반말을 하면 하기가 싫은데, 똑 같은 말도 존댓말로 하면 순종하게 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피스메이커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옳은 말을 상대방이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셋째는 뒤에서 수군수군 하는 비방의 말입니다. 로마서 1장 29과 30절에 보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은 때 나타나는 죄악들에 대한 구체적인 열거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뒤에서 수군수군 남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 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베드로전서 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에 보면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형제를 뒤에서 수군수군하며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형제가 잘못하였을 때 무조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형제가 잘못하였을 때 그에 대하여 우리가 하여야 할 일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15절에서 17절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정확히 말씀하여 주고 계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경험적으로 볼 때 평화의 가장 큰 적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수군수군 거림입니다. 뒤에서 형제를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서 이 수군수군거림이 없어지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함께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평화를 위하여 해서는 안 되는 말은 저주의 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저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4절에 보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라도 저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목회하는 목사님들 중에 저주를 무기처럼 사용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는 하나님의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닙니다. 저주는 무당들이 보검처럼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창세기 12장 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 하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22장에는 발람이라는 선지자가 모압의 사주를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의 본능이 있습니다. 특히 자기를 핍박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을 저주하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실제로 형제를 저주하기도 하지만, 형제의 어려움과 고난을 자신을 괴롭히고 힘들게 한 것에 대한 저주라고 해석하고 그렇게 말함으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주는 불화의 언어이고, 축복은 평화의 언어입니다. 평화를 위하여 우리 입과 말 속에서 저주를 몰아내고 축복의 언어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피스메이커로서의 삶을 살려면 우선 말부터 바꾸어야만 합니다. 옛말에도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 것이 아니라, 말로 천 냥 빚을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화의 말이 있고 평화의 말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은 불화의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터넷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말에 가기가 있고 독이 있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비단 인터넷 세상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직장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41편 3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 시편 기자의 기도가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 입 앞에 하나님의 파수꾼을 세워 내 입술의 문을 지키게 함으로 불화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고 평화의 말만을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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