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목록가기 | 평화 목록 돌아가기 |
평화 사랑(4)
요 3:1-8, 갈 2:20.
오늘은 평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는 네 번째 날 입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몇 주 동안 이 제목으로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 천사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말씀하시면서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평화’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평화는 소중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는 크리스천이신 여러분의 마음속에 평화가 있으십니까? 요즘 집중적으로 평화에 대한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들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와 직장 속에 평화가 있으십니까? 그 동안 있던 이런 저런 불화가 조금씩 깨져가고 평화의 기미가 보이십니까? 오늘 주시는 평화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여러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전부면 좋겠지만) 실제적이고 실질적인 평화의 역사를 체험하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땅을 나누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양이 많아지면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풀과 물 때문에 서로 다투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화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서로 다투거나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다시 말해서 평화롭게 분립하자는 제안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네가 동쪽으로 가면 나는 서쪽으로 가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지만 목축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땅을 먼저 선택한다는 것은 엄청난 이익이 보장되어 있는 일입니다. 땅을 먼저 택하는 사람은 유리하고, 나중에 택하는 사람은 당연이 불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를 리가 없는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그 기득권을 양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나 생각해도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먼저 땅을 선택하는 것이 상식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이익을 조카 롯에게 양보함으로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평범하지만 매우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는 누군가 가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고 양보할 때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화’는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지키려고만 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것이 없이는 평화가 생겨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양보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어떤 모양으로든지 불화가 있으시다면 그것은 분명합니다. 불화가 일어나고 있는 곳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지키려고만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는 당신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과 같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방에게 언제나 양보를 요구하며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은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양보’와 ‘포기’처럼 어려운 말이 어디 있을까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누가 이 세상에서 불화의 고통을 당하며 살아갈까요? 세상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이익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닐까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어야 할 교인들과 교회에도 평화가 쉽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도 끊임없는 불화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가 분열되고 나뉘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경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많습니다. 세상에 교회처럼 많이 그리고 자주 분열되는 조직이 있을까요?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걸고 있는 교회가 우리나라에는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믿지 않는 분들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건 교회는 모두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안에 수 백 개의 다른 교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습니다. 평화하지 못하고 불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그 수도 없는 많은 교단의 분열 중에 그 원인이 신학과 신앙 때문인 경우가 크게 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제가 알기로 신학적인 입장이 달라서 교단이 갈라진 것은 예장과 기장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입장이 달라서 교단이 갈라진 것은 고신뿐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로교회의 가장 큰 분열이라고 할 수 있는 합동과 통합으로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분열은 자기 이익과 주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못해서 일어난 분열들입니다.
선과 악, 의와 불의의 문제라면 양보와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마귀에게 양보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대적하라 하십니다. (약 4:7) 선과 악 그리고 의와 불의의 문제라면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 관한 문제라면 할 수 있는 대로 양보하라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오른 편을 뺨을 치면 왼 편 뺨도 돌려 대며, 원수가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겉옷을 달라면 아예 속옷까지 다 벗어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마5:39-41)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저런 불화의 소문들이 들립니다. 별로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들 사는 곳에 불화의 소식과 소문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생겨난 불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아닙니다. 대부분은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다 개인적인 문제들입니다. 의(義)에 대한 문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이(利)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대부분은 이 때문에 불화합니다.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이익이라고 할 때의 이(利) 자가 ‘날카로울 이’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는 대부분 의에 둔하고 이에 날카롭습니다. 이에 둔하고 의에 좀 날카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자신의 기득권과 이익을 포기하고 양보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러분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 조카 롯에게 땅을 양보하기 전 아브라함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와 네 자손으로 인하여 모든 나라와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는 축복의 약속을 받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을 통하여 복이 땅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땅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그 소중한 땅과 그 땅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사람들이 생명처럼 귀히 여기는 땅과 그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할 만큼 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오른 편 빰을 맞고도 왼 편 빰까지 내 놓을 수 있는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까닭도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과 그 믿음이 주는 여유 때문입니다. 충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충분한 축복을 받은 사람은 사소한 것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웬만한 것은 양보할 수 있고, 웬만한 것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것은 평화를 위하여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화는 양보와 포기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데 땅은 하늘을 소유한 사람만이 포기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땅에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의한 자가 불의한 방법으로 내 재산을 노릴 때에도 무조건 싸우지 말고 그에게 땅과 재산을 내어 놓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과 악, 의와 불의에 관계된 일이 아니라면, 그냥 내가 좀 양보하고 손해를 보면 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며.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되어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게 됩니다. 사도바울이 그 경지에 이르렀던 사람 같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의 말씀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평화하려면 육이 죽고 영이 살아야 합니다. 영이 살면 육은 죽습니다. 아무리 신령한 것처럼 말한다고 하여도 육이 죽지 못했다면 그는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육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육 때문에 흥분하지 않습니다. 육 때문에 싸우지 않습니다.
한동대학교 김영길 총장 사모님으로부터 귀한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 총장님이 학교의 일로 참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격은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어느 날 사모님이 보시기에도 정말 힘든 일을 총장님이 당하시게 되어 그 때문에 총장님이 잘못되면 어떻게 하나 염려가 많으셨답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총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사도 하시고 잠도 깊이 주무시더랍니다.
그와 같은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당신은 그런 일을 당하고도 밥이 먹히고 잠이 오느냐?’고 물으셨답니다. 그 때 총장님의 답변이 너무 근사했습니다.
‘죽었는데 뭐. 당신 죽은 사람이 화내는 거 봤어?’
그는 오늘 본문의 말씀 중 하나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과 같이 정말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말씀과 같이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까지 죽을 수 있었던 것은 영이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을 보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니 땅이 별 큰 의미가 없었고 육이 별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고, 양보할 수 있고,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사탄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정말 큰 사람이 됩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전서 2장 19절에 보면 ‘애매히 고난을 당하여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로 아름답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애매한 고난은 정말 억울하고 펄쩍 뛸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생각을 하면, 하나님이 나를 아시지 하는 생각을 정말로 할 수 있다면, 정말 애매한 고난을 당한다고 하여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정말로 애매한 고난 까지도 참을 수 있다면, 그래서 그것과 다투지 않을 수 있다면,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로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불의와는 타협하지 마십시다. 생명을 걸고라도 싸우는 사람이 되십시다. 불의와 평화하지는 마십시다. 불의와는 불화하십시다. 불의와의 불화는 불화가 아니라 평화입니다. 불의와의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불화입니다. 그러므로 불의와는 절대로 평화하지 마십시다. 내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정의의 검을 가지고 끝까지 싸우는 용사가 되십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면 아브라함과 같이 양보하십시다. 포기하십시다. 죽으십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억지로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아예 다 벗어 주고, 오른 편을 뺨을 때리거든 왼 편 빰까지 내어 주는 사람이 되십시다.
조카 롯에게 세상 사람들이 생명처럼 귀히 여기는 땅을 양보한 아브라함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도리까지 버리고 욕심을 따라 삼촌을 앞서 땅을 선택한 롯은 망하였습니다. 그가 택한 땅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었습니다. 이익에 눈이 먼 사람이 분별력이 있어서 축복의 땅을 택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고 겨우 목숨만 건지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양보한 아브라함은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적으로도 부자가 되고 성공을 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불화가 있으십니까? 그 불화가 불의 때문이라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불화라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회피하지 마십시오. 끝까지 불화하며 싸우십시오. 그 불화는 평화를 위한 불화이기에 그 결국은 평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화가 내가 죽지 못해, 포기하지 못해, 양보하지 못해 생긴 것이라면, 그 불화에 한번 도전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처럼 정말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아 보십시다. 정과 욕심을 육체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보십시다. 그러기 위하여 물과 성령으로 정말 거듭나기를 사모하십시다. 땅에 살면서도 하늘을 보고, 하늘을 볼 뿐 아니라 하늘에 속한 자가 되어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줄 알고 김 총장님처럼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흥분하지 아니하고, 싸우지 아니하고, 다투지 아니하고 ‘죽은 사람이 화내는 거 봤어?’라며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은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는 누군가의 양보와 포기가 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누군가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성령으로 거듭나 하늘을 보고, 하늘에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양보하고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기대처럼 그와 같은 사람이 되어 저와 여러분이 속하여 있는 가정과 교회와 세상에 하나님의 평화가 넘쳐 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 10:33-36 / 평화 사랑(2) / 김동호 목사 (0) | 2021.12.03 |
---|---|
고전 13:1-3 / 평화 사랑(3) / 김동호 목사 (0) | 2021.12.03 |
이웃을 사랑하지 못 하는 죄/누가복음 10:30-37 (0) | 2021.12.03 |
마리아의 찬가 (3) 하나님의 성실성/누가복음 1:54-55 (0) | 2021.12.03 |
마리아의 찬가(2)/누가복음 1:46-56 (0) | 2021.12.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