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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사랑(2)
마 10:33-36.
우리는 어려서부터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증거로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공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않은 것은 ‘혹시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민족은 참 공격적이고 사나우며 싸움을 좋아하는 민족처럼 보여 지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연 우리 민족이 과연 평화를 사랑하였던 민족이냐 아니냐는 것을 규명하는 것은 잘 모르겠으나 현재 우리 민족은 평화를 위한 교육과 훈련이 그 어느 민족 보다도 필요한 민족이라고 하는 데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마저도 분란과 분열이 그치지 않아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평화에 대하여 무지하며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정말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공부하고 훈련하고 기도하여야 할 주제 중에 하나가 바로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당분간 계속될 평화에 대한 설교에 집중하시고, 그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놓치지 마시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어느 누구보다, 그 어느 교회의 교인들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하여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트러블 메이커가 아닌 피스 메이커로서 가정과 세상과 교회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하면 너무 개념이 넓고 커서 잘못하면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평화를 좀더 구체적이고 실감이 나는 말로 다시 정의하자면 ‘사람과 사람간의 좋은 관계와 좋은 사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과의 사이와 관계가 좋은 것을 우리는 평화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우리는 불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피스 메이커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 있다면 사람들과 좋은 관계와 사이를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무엇이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이를 나쁘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기 전,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죄가 들어오기 전 아담과 하와의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한 첫 말인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말이었습니다. 아담에게 하와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 자신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정말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후 아담이 하나님께 하와에 대하여 한 말은 ‘저 여자 때문에’였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평화를 느낄 수 있고, ‘저 여자 때문’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불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였을 때 저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형벌은 언어가 혼잡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언어가 혼잡해 짐으로 저들은 함께 있을 수가 없게 되었고 저들은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과 3장을 살펴보면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정 반대의 사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은 승천하실 때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것이 무척이나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모여서 함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탑을 쌓았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것과는 정 반대가 되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 충만함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나게 되자 저들에게 처음 나타난 은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방언의 의미는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하나로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여는 주는 것이었습니다. 언어의 회복을 통하여 저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모이기를 힘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떡을 떼며 놀랍게도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서로의 것을 함께 나누어 쓰는 공동체가 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이전에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있었고,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초대교회 안에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평화가 죄의 문제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악이 있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불법이 있는 곳에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악과 불법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피스 메이커가 될 수 없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법과 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9절에 보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마지막 절인 21절에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싸워 이기되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악과 싸운다고 하는 명분이 있어도 그 싸움에 악이 사용된다면 그 자체가 패배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 중에 하나를 악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복수는 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상대방이 악한 자라고 하여도 그에게 복수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복수의 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수의 법이 아니라 책임의 법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전혀 서로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전자는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복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복수를 이야기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말씀하지 않고, 책임을 이야기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약은 복수를, 그리고 신약은 용서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한번도 원수에 대한 복수를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이마에 가인의 표를 주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함부로 사람에 대하여 복수하거나 심판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같은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이처럼 불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복수에 있습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작은 복수가 큰 복수를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나 평화에 대한 싸움은 악과의 싸움인데 악과의 싸움은 악이 아닌 선으로 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만큼 평화는 악에 대하여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명분이 있다고 하여도 악한 방법으로 싸움을 하면 그것은 이미 진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2절에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에 있어서 악은 그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여 피스 메이커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악한 흉내도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결국 피스 메이커가 아니라 트러블 메이커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싸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조건 악을 덮어주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싸우지 않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평화는 싸움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죄와 악과 불법을 미워하여 그것과 싸우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시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평화는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도리어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드러내고 그것과 싸워 그 문제를 해결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바로 진리의 검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는 말 중에 하나는 ‘은혜스럽게 합시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 것은 웬만하면 그냥 적당히 덮어두고 넘어가자는 말과 동의어로 종종 사용되곤 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생각을 불식시키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검을 주러 오셨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게 하려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잘못과 죄와 불법에 도전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힘들고 아프고 부끄러울지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그것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수술해야 할 것입니다. 남과 다른 교회에 개혁을 요구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그 칼과 화살을 들여대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렵고 부끄럽다고 적당히 덮어주고 은폐하고 타협하려고 한다면 우리 교회 안에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악과 싸우되, 악과 싸울 때 절대로 악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은 흉내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악과도 싸워야 하지만 자신의 악과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악을 행 한자라고 하여도 나는 그에게 악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에게는 이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악에게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요 악과의 싸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싸울 때 사람과 문제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합니다. 문제와는 싸우되 사람과는 싸우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수는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복수는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와는 싸워도 복수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사람까지 잡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려 하다가 문제까지 덮어 버립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사람까지 잡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보호한다고 하다가 문제를 덮어 버리면 그 또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불화는 사람을 잡아도 생기고, 문제를 덮어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잡지 않는 것에 대하여서는 다음 주에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은 문제를 덮지 않는 것, 악과 싸우는 것을 더 치중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서울이 평화라면 그 서울은 절대로 모로는 갈 수 없는 서울입니다. 평화의 서울을 가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똑바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목적만 옳다면 수단과 방법은 좀 옳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과 방법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쳐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죄와 악과 불법과의 전쟁을 선포하여야만 합니다. 교회 재정을 인터넷에 공개하여 할 수 있는 대로 투명하고 정직한 교회가 되려고 발버둥질 치는 것도,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던 불법 소프트웨어를 정품으로 다 바꾸기 위하여 수 천 만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까닭도 다 우리 교회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쳐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교회 안에는 그 동안 관행화되고 습관화되어 죄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많은 잘못과 불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 싸움은 절대로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올해 들어서 저는 정직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 말씀에 도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교인들이 정직에 도전하여 거짓과의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정직하게 사업을 하기 위하여 싸우다가 벌써 회사 문을 닫은 교인도 생겨나게 되었고, 아직 문을 닫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고 있는 교인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하나님의 식대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요한 계약을 스스로 포기하였다는 교인의 메일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교인은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동안 정말 무늬만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데 최근 예배와 설교에 은혜를 받으면서 그와 같은 엄청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경의 말씀과 같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인들이 정직하게 살기 위하여, 바르게 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움을 시작하였는데 교회가 둔하다면 안 될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미처 해결하지 못한 모든 불의한 관행과의 전쟁을 선포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만 정직 뿐만 아니라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의 전쟁을 선포해야만 할 것입니다. 악은 물론이고 악의 모양까지도 버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가장 큰 적은 죄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도, 세상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도, 교회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도 바로 죄와 불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평화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일들을 한 주일씩 설교해 나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째 시간으로 죄와 악과의 싸움입니다. 악은 물론이고 악의 모양까지도 버리는 철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먼저 고쳐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게는 여러분들이 놀라시겠지만 나름대로의 비자금 통장이 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바른교회 운동과 청소년 전도 운동에 쓰라면 교인들이 주신 돈을 따로 모아 관리하는 통장입니다. 제 양심에 어긋나게 사적으로 돈을 쓴 일은 없으나 그래도 일종의 비자금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통장에 있는 돈을 (몇 천 만원 정도 됩니다) 공식적인 교회재정으로 들여 놓겠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그 재정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 얼마를 쓸 것인가는 저에게 위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쓰여졌는가는 언제나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요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평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교인 여러분들이 다 평화를 위하여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평화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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