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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8:1-13 / 평화 사랑 (8) / 김동호 목사

by 【고동엽】 2021.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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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사랑 (8)
고전 8:1-13.

예수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은 구원입니다. 우리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다 세상이 잘못 되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사람이 잘못 되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격는 모든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어려움들은 다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딴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거듭남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거듭남입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인간의 모습에서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세상 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식으로 그 근본은 사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의 식이 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는 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저는 성경이 참 재미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식을 의미합니다. 세상 식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식이 성경에 있는데 저도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식이 때로는 황당해 보이고, 바보 같아 보이고, 말도 되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하나님의 식에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세상 식이 틀린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열매를 보아 아는 것처럼 세상 식의 열매는 언제나 우리의 삶을 사망으로, 고통으로, 아픔으로, 혼란으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세상 식이 틀렸다면 세상 식과 전혀 반대가 되는 하나님의 식이 맞는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식에 관심을 가지고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솔직히 겁도 나고 잘 믿어지지도 않았지만 삶에 세상 식이 아닌 하나님의 식을 적용해 보았습니다. 식을 바꾼다는 자체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예수님을 그것을 좁은 길과 십자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놀랍게도 그 결과는 구원이었습니다. 세상 식은 바람에 나는 겨가 열매이었지만, 하나님의 식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맺어내는 열매와 같았습니다.

사람에게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지 못해 세상 식대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식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식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누리는 구원의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늘 감사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마음에 늘 평안을 누리고 살아가는 삶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와 같은 구원의 삶을 얻는다면 세상이 높은 산이어도 큰 상관이 없고, 거친 들이어도 큰 상관이 없고, 초막이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면, 그리하여 내 삶에 구원의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면 그와 같은 세상의 환경과는 아무 상관없이 늘 천국을 사는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삶이 부럽습니다. 예수 믿는 목적은 그와 같은 삶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좀더 좋은 것을 먹고, 좀 더 좋은 것을 입고, 좀 더 좋은 것을 마시고 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매 주일의 설교를 통하여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여야 할 하나님의 식을 배우셔야만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듣지만 말고 그것을 실천함으로 여러분들이 과연 하나님의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됨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누리는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축복이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강단을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넘쳐나게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평화에 대하여 설교하는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도 여러분들은 성경을 통하여 전혀 세상 식과는 다른 하나님의 식을 배우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 동안의 잘못된 세상 식을 과감하게 버리고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식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된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평강이 넘쳐나게 될 줄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와 같은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 교회에는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하여 이견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유통되는 고기들은 사람들에게 판매되기 전에 먼저 우상에게 바쳐지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모든 고기는 다 우상제물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기를 놓고 초대 교인들은 절대로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들과 먹어도 상관 없다는 사람으로 나뉘어 제법 심각하리만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와 갈등은 교회의 평화를 위협하리만큼 위험한 것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그와 같은 종류의 갈등은 교회의 위협이 되곤 합니다.

아주 옛날 미국 교회에서 술집 바에서 쓰던 전자 올겐이 기증되었습니다. 술집이 문을 닫으면서 바에서 쓰던 전자 올겐을 교회에 기증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받느냐 받지 말아야 하느냐, 그 올겐을 교회 예배용으로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 본문의 고린도 교회가 우상의 제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고기를 놓고 예수 믿는 사람이 그것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심각하게 다투었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미국 교회는 그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분열되게 되었습니다. 술집이 기증한 전자 올겐 때문에 교회가 두 쪽이 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와 같은 문제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교회와 가정과 세상의 가장 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없어서 결국은 교회와 가정과 세상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갈등하며, 다투며, 불화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세상 식은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꺽지 않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서 세상 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식과 방법은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은 오늘 고린도전서 8장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와 우리들에게 바로 그것을 가르쳐 주려 하고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일에 대하여 바울은 자기 나름대로 분명한 생각과 입장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 4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다시 말해서 바울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와 같은 문제를 가지고 형제들과 다투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형제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생각은 서로 다르나 그 다른 생각의 동기가 같다고 말하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형제들을 두둔하였습니다.

바울은 매우 중요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결과가 아니라, 왜 먹으며, 왜 먹지 않는가하는 동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의 동기는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고기를 먹으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기를 좋아하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고통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으려 하였던 것입니다.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하는 사람도 그 동기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우상에 드려진 것이고 먹지 않는다면 도리어 우상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이유가 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을 무시하고 하나님만 섬기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혀 다른 생각 같아 보였지만 그 동기를 캐보니 똑 같았습니다. 바울은 그와 같은 면을 보았고, 그렇다면 생각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우리가 다 잘 아는 아주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라면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람과 하나님 때문에 먹어도 된다는 사람이 바울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서로 싸운다면, 그리고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그것은 자기들은 하나님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기 고집 때문에 싸우는 것이 됩니다. 자기 교만 때문에 싸우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이 더 합리적이고 우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바울은 우상제물인 고기 먹는 일에 대하여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바울이 실제로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자기의 행동 때문에 오해를 하고 믿음의 손상을 입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오늘 본문 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아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실제로 적용하며 살아가는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끝까지 자기 고집을 꺽지 아니하고, 말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자기 때문에 싸우다가 가정과 교회와 세상을 분열시키는데 까지 이르는 것이 보통 우리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식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형제에게서 자기와 똑같은 믿음의 동기를 발견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이 틀렸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나 자기와 생각이 다른 형제의 생각을 존중하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좇아 행동함으로 자기와 생각이 다른 형제와 서로 평화 하는 기가 막힌
모습을 오늘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집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었으며, 결국 그 진리를 위하여 순교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을 경우에 따라서 생각을 아무렇게나 바꾸고 사는 생각과 지조가 없는 사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순교의 고집을 가지고 있는 용기 있는 바울이 교회 안에서 전혀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오늘 본문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고집이 너무 강하여 종종 하나님의 사람들과도 다투고 싸우고 헤어지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와도 싸웠고, 마가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바나바와도 헤어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바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하여 바울이 믿음 안에서 점점 더 성숙해 져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의 성장이 있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에는 참 많은 불화들이 있습니다. 그 불화의 원인들을 찾아보면 참으로 하찮은 것들일 때가 참 많습니다. 치약을 끝에서부터 꼭꼭 짜지 않고 중간을 눌러 짠다고 그것을 가지고 싸우다가 이혼한 부부도 있습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이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살다보니 이혼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양말을 벗을 때 뒤집어서 벗지 말고 똑바로 벗어 놓으라고 잔소리하다가 이혼한 부부도 있습니다.

치약은 끝에서부터 꼭꼭 짜도 되고, 중간 허리를 눌러 짜도 되는 것입니다. 짜서 이만 닦으면 되는 것이지 꼭 끝에서부터 짜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다.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치약을 중간 허리부터 눌러 짜 놓지 말고 끝에서부터 꼭꼭 눌러 짜라고 남편이나 아내가 말한다면, 그 까짓것 치약 끝에서부터 꼭꼭 짜주는 것이 무엇이 어렵다고 고집을 부리고 싸웁니까? 이제까지 그런 것 가지고 고집을 부리고 다투고 싸웠다면 식을 바꾸어 끝에서부터 꼭꼭 짜줍시다. 평화는 그와 같은 작은 일을 실천하는데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제 아내는 양말 가지고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바로 벗어 놓으면 바로 빨아서 개어 놓고, 뒤집어 벗어 놓으면 양말이 뒤집어진 채 빨아서 그냥 그대로 개어 놓습니다. 양말을 바로 벗어 놓으면 신을 때 바로 신으면 되고,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으면 나중에 신을 때 다시 뒤집어서 신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제가 양말을 뒤집어 벗어 놓으면 그것을 바로 다시 뒤집어 빨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내는 제가 양말을 어떻게 벗어 놓든 잔소리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빨든 똑바로 빨든 빨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신는 것은 제가 알아서 신는 것이니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제 아내가 그것을 가지고 잔소리를 한다면 저는 아내와 고집 부리고 다투지 않고 조금 귀찮지만 양말을 똑바로 벗어 놓겠습니다. 그것으로 집안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들과 별로 사이좋지 않게 지내는 어떤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부자지간의 갈등 원인도 치약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었는데 일회용 샴푸 두 번 써도 되는데 샴푸 아까운줄 모르고 한 번에 다 써버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부자지간의 갈등의 원인은 아버지에게 있는 것 같습니까 아니면 아들에게 있는 것 같습니까? 둘 다 다 입니다. 치약이나 일회용 샴푸가지고 짜증나게 잔소리 안하는 것이 좋지만, 그까짓 잔소리 정도 가지고 멀 부자지간 사이까지 나빠지면서 싸웁니까? 까짓것 치약 끝에서부터 꼭꼭 짜주고, 샴푸 두 번 쓰면 될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쉬운데 사실 우리는 대부분 그런 것 가지고 싸우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여튼 자기와 다른 것을 도무지 용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과 같이 자기와 다른 것은 다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참으로 엉뚱한 고집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해 주고 존중해 줄 때 오히려 사랑과 평화가 넘쳐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론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사람이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해 주며 살아간다면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사는 것보다 몇 배나 더 행복하고 평화스러울 것입니다.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 바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다 알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바울이 누구 편을 들어 줄 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을 이해해 주고, 자기들과 같이 평생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와 같은 바울의 생각과 행동이 고기 먹는 일로 인하여 분열의 위기까지 몰렸던 고린도 교회에 끼쳤을 영향을 한번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는 바울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자기 생각과 주관이 뚜렷하고 또 고집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꺽는 논리에 강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꺽는 것은 제게 큰 어려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 자신을 꺽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만큼 제게 어려운 일입니다. 저 같았으면 틀림없이 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는 사람을 논리로 몰아부쳤을 것입니다. 꼼짝 못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고기 먹는 교회로 몰아갔을 것입니다.

저는 진심으로 바울 같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너무 훌륭해 보입니다. 근사해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바울을 본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늘 고집을 부리며 트러블 메이커가 되고 있는 우리들을 반성하고, 나와 다른 사람까지도 품고 존중하여 나와 같은 사람들끼리만 평화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들과도 평화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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