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질서의 문제
고전11장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부딪쳐 있었든 또 하나의 문제, 예배와 질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배의 원리와 정신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문화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현대 한국 교회가 예배 스타일의 변화를 둘러싸고 상당한 홍역을 치루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보수주의적 문화가 깊은 교회 일수록 예배의 전통을 붙잡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런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가스펠송 그 자체를 완전히 거절하고 또 부르면 안된다는 공식적인 명령까지 내린 교회가 있다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진보 주의적인 문화를 가진 교회에서는 예배의 틀을 깨고 현대의 문화, 특별이 젊은이의 문화에 맞는, 그런 열린 예배를 시도하고 있는 현상들도 볼 수 있습니다. 찬양을 많이 하고 드라마를 한다든지, 이런 예배의 다양한 변화의 시도를 하고 있는 모습들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어느것이 옳으냐, 어느것이 틀리느냐, 하는 문제는 없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문화의 문제입니다.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정신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시대의 문화, 혹은 지역의 문화, 혹은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문화에 맞도록 예배를 시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이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가 채워지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느냐가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면 성경의 명령 가운데 너희가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이걸 문자그대로 순종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가 한번 순종을 해볼까요? 이따가 끝 나고 나서 저 뒤에 서서 나가시는 분들을 한 분 한 분 붙들고 제가 뽀뽀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입맞춤이란 것은 문화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문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권 속에선 허용이 되었다는 말이죠.
정신은 뭐냐하면 중요한 정신은 교제의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날 때 마다 성도들이 친절하게 서로를 돌아보고, 삶의 상태를 알아보고, 진지하게 문안을 드리는 교제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입맞춤이란 것은 문화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 입니다. 옛날에 한국 교회에서 남녀가 악수 하는 것도 흉측한 일로 생각 되든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그런 정도는 우리가 이제 극복을 했다는 말이죠. 아마 악수도 안 한다고 그러면 굉장히 쌀쌀하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실런지도 모르죠. 그만큼 문화가 바뀐 것이죠. 또 언제 문화가 바뀌면 입맞춤도 허용되는 시대가 올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직은 안되죠, 그것은 문화입니다.
일세기에 성경이 쓰여지든 때의 당시 소위 신약시대의 문화 속에서 고린도 교회는 예배를 둘러싸고 일련에 홍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문제가 발생 했어요. 예배의 질서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를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는데, 하나는 수건의 문제, 또 하나는 성찬의 문제 였습니다. 수건과 성찬의 문제였습니다. 첫째 우리는 수건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수건, 혹은 너울, 베일, 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안 쓰느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의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사회는 급격하게 자유화의 길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 고린도 사회의 자유화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기여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여성들이 해방되고 여권이 존중되는 것은 일반적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 가는 곳 마다 여성들의 권익이 인정되고, 여성들의 해방이 촉진되는 문화적인 경향은 일종의 세계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 입니다.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참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여성들 가운데는 그러나 이 변화의 바람, 변화의 분위기를 지나치게 편성해서 극단적인 방향까지 나아간 일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여성의 해방은 필요한 것 이지만, 저는 오늘날의 극단적인 여성의 해방 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여성들이 일종의 미덕으로 생각하든, 순종의 표시로 생각하고, 미덕의 표시로 생각했든, 얼굴을 감추고, 혹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그러한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여성들 가운데는 거부하는 그런 현상이 생겼든 것으로 보여집니다.그래서 교회의 예배 시간에 일반적으로는 다 그것은 이미 교회의 하나의 좋은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건을 거부하는 현상이 생겼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늘 11장 1절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데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좋은 문화, 좋은 전통,이라는 것은, 문화가 바뀔 때까지는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지요 .문화가 바뀌었는데도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안 좋죠. 정신은 계속해서 지켜야지만 문화는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일단 좋은 전통을 지키는 고린도 교인들을 칭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뭐냐하면 3절에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좋은 전통까지도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거절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뭐냐하면 여인들이 머리에 쓰는 수건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좋은 전통이라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든 여성들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까지도 거절하고 수건을 벗고 기도하고, 수건을 벗고 찬양하고, 수건을 벗고 예언하는 현상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5절을 보시면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머리에 쓴 것을 벗어버리고 수건을 벗어버리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마치 여자들이 머리를 빡빡 깍아 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렇게 바울은 지적을 합니다 자! 이것이 문제의 배경 이였습니다. 자! 이런 그 당시 문제의 배경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오늘날도 여전히 강조 되어야 할 우리가 배워야 할 원리적 교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수건 이라는 것이 가르치고 있는 원리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교훈을 붙잡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톨릭의 여성들이 수건을 쓰죠?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수건을 씁니다. 개신교 가운데서도 형제교회 전통에서는 지금도 개신교 안에서도 머리에 수건을 쓰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문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문화를 떠나서 그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원리적 교훈을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거죠.
몇 가지 중요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원리적 교훈이 있는데, 첫째는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지만 질서에 따를 역할의 차이는 인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이며,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가장 첫번째 레슨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지만 질서에 따른 역할의 차이는 여전히 존중 되어야 한다는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11절과 12절을 보시면 남녀는 평등하다는 사실을 변함없이 강조 되어있습니다.
11절 12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 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녜, 남자나 여자가 다 하나님에게서 부터 나왔다. 하나님이 남녀를 지으셨다. 동등 하게 지으셨다. 균등하게 지으셨다. 남녀의 본질적 어떤 우열의 차이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꼭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도 여자도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 주셨습니다. 동등 합니다.그러나 질서는 있어요. 질서에 따른 역할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우리가 잘 이해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11장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것은 다시 순서대로 정리 하면 이렇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써놓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죠? 여자가 맨 아래에 오니까,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 하기위해서는 먼저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자,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중에서 누가 더 높습니까? 하나님이 더 높다 그런 분이 있으면 이단입니다. 하니님과 그리스도는 뭐에요 동등합니다. 그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절대로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낮으신 분이 아닙니다. 물론 스스로 낮추셨어요. 스스로 낮추셨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등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도 나오죠?.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등하죠.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성의 머리가 남성이다 라고 해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할까요? 천만에 그렇지 않아요. 머리 쓰는 것을 보아도 여성들이 훨씬 더 똑똑합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인 싸움이나 말 싸움에서 절대로 남성이 여성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먹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성들이 훨씬 더 똑똑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성의 머리가 남성이다 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걸 이해 하기 위해선 다시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법이 있어요. 성부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십니까? 성부 하나님이 역할을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역할을 다르게 담당 하셔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 보고 너가 내려가서 사람들을 다 구원하라. 동등 하시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예수님이 복종했어요. 복종 한다고 해서 열등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것을 복종한다고 해서 열등해진다고 생각해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어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역할의 차이입니다. 질서에 따른 일종의 역할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한 가정이나 사회를 만드셨을 때 거기서 리더쉽을 남성에게 기대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똑똑해서만은 안되요, 리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없는 사회 한번 생각해보세요. 리더가 없는 교회, 리더가 없는 공동체, 어떻게 될까요? 가정에도 리더가 있어야 해요.
저는 여전히 가정에 리더쉽은 남편에게 기대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여성 해방 운동으로 말미암아 그것 까지 넘어서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남성의 지도력을 폐기한 결과가 뭐냐? 남성의 무력함, 남성이 무력해 졌어요. 그러니까 자식들이 바라볼 수 있는 남성의 지도자의 역할 모델이 없어지고 말았어요.그 결과로 현대에 생긴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채찍 가운데 하나가 동성연애 입니다. 동성연애증 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 모델이 없어서 입니다. 아버지의 리더쉽이 있는 곳, 아버지의 리더쉽이 존중 되는 곳에서 동성애, 물론 동성애가 유전적이냐 아니냐는 이런 논쟁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후천적인 환경에 영향력으로 볼 때는 가장 결정적인 영향이 뭐냐하면 아버지의 리더쉽이 없는 가정에서 동성애 환자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만큼 남성의 리더쉽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의 리더쉽을 세워준다고 해서 그것이 열등 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서도 얼마든지 저는 여성들이 사역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여성의 사역 그 자체를 좌절 시키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도 보면 뭐 여성은 기도하면 안된다, 여성은 설교하면 안된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이런 말은 없어요.
성경에는 5절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수건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기도 할 수 있어요. 예언 할 수 있어요. 설교 할 수 있어요. 여성도 얼마든지, 그러나 그기 어떤 사역을 하면서도 여성이 얼마든지 사역을 하면서도 리더쉽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리더가 없어지면 리더쉽이 존중 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동등하다는 얘기와 역할의 차이 까지 무시해야 하느냐 라는 사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성경에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뭐냐하면 왜 수건이라는 문제가 나왔느냐 여기서 여성의 머리는 누구라고 그랬어요? 남성, 그러면 예배 드릴 때는 누구의 영광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남자의 영광이 나타나면 안되죠. 그래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거죠. 이것이 초대교회 교인들이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남성의 머리는 누구라 그랬어요? 그리스도와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나타나야 됩니까?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까?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안 쓰는 거다. 초대 교회에서는 쉽게 이해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도 뭐냐하면 문화적인 표현이지만 그 정신은 어때야 합니까?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은 숨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에 쓰는 이유 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은 여성들의 신앙 고백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쉽과 질서는 나는 소중히 여깁니다 라는 고백의 표시가 바로 그 수건 이였든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한번 써 볼까요? 쓰는 교회가 많아요. 개신교 가운데서도 지금도 쓰는 교회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문화적인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신을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두번째로 여기서 강조 되어야 할 또 하나의 원리적 교훈이 있다면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지만 성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 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여전히 동등 하지만 성적 차이가 인정되고 수용 되어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여성은 여성 다움이 있어야 되고, 남성은 남성 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 여성다움의 특성이 그 당시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그것이 긴 머리란 말이죠. 그 여성다움 의 긴 머리, 그런데 왜 자꾸 자르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성다움이 자꾸만 없어 보여요
5절과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 지니라"
그러나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14절,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일종의 긴 머리는 수건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긴 머리 그것이 여성다움의 특성이다. 성경은 그것이 본성이 너희들을 가르치지 않느냐, 본성적으로도 우리에게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 특성중의 하나가 긴 머리와 짧은 머리 의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문화적인 면에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옛날 보다는 많이 여성의 머리가 짧아 졌지만,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 당시 그 시대의 문화에 맞도록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자꾸만 그 선을 없애려고 합니다. 자꾸만 유니섹스 컨츄럴로 만들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타락 해가는 문화의 한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꾸만 남자가 여자가 되고싶어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고싶어 하고, 그러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여성다움에 있습니다. 남성의 아름다움은 남성다움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결코 열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또 우리가 이 수건 사건에 있어 강조 되어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예배에 있어서 순종적 자세의 중요성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서 순종적자세로,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낸다, 주님만 드러내겠다, 나 자신을 감추겠다, 그것이 수건을 통한 신앙 고백 입니다. 자,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느냐 라는 것은 예배가 끝났을 때,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순종이 결단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결론이고, 예배의 결과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결단을 갖고, 순종의 결단을 갖고, 예배의 자리를 떠나 가셔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건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건을 쓰고도 순종을 안하면 소용이 없는거죠. 중요한 것은 순종 그 자체의 결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성들이 자유화 되고 해방화 되면서 너무 극단적인 경향으로 나가서 그와 같은 절제의 선을 넘어 갔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예배의 자리에서도 제일 시끄러운 곳이 여성이고, 또 방언 문제가 나오죠, 방언문제로 그냥 통역을 안 세우고 방언을 하다보니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은사의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필요 한 것이다. 그러나 질서는 존중되어야 된다. 이것이 바울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재미 있는 표현하나가 나와요. 난해한 표현 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표현 이기도 한데, 10절 말씀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권세 아래 있는 표시, 내가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 하겠습니다. 순종의 표시로 머리에다 표시를 두어라, 수건을 쓰라는 말이죠, 그런데 누구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이 부분이 재미있는데 누구 때문에? 천사들을 인하여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성서 학자 들이 여러 가지 토론을 많이 했는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 말고도 예배의 자리에 참관자가 있습니다. 천사들이에요. 천사들이 오늘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의 참관자가 있어요. 예배를 잘 드리나 못 드리나 졸고 있지나 않는지, 정말 진지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지, 아닌지,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정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고백하느냐 저들이, 그것을 천사 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것이 사실 이라면 여러분 자! 누가 내 예배드리는 태도 일거수 일투족을 누군가 가 감시하고 있다 이걸 정말 내가 느낀다면, 우리 들의 태도와 자세가 좀 달라 질까요? 안 달라 질까요?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숨기가 좋아요. 사람 들이 많아 질수록, 그러나 사람들이 적을수록 뭐에요 드러나죠. 제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째려 보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번 가정을 해봐요 한 사람, 한 사람, 그러면 태도가 좀 달라 질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신다, 아니 하나님이 당신의 천사 들을 보내어 예배 드리는 내 태도를 점검 하고 계신다. 얼마나 달라 지겠어요, 순종적 결단, 순종적 자세, 이것이 중요 하다는 말이죠. 꼭 수건을 쓰느냐 안 쓰느냐 보다도 그것을 통해서 순종의 결단을 드리느냐 라는 것을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서 첵크하고 계시다.
저는 수건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상징이 우리의 고백을 도와 줄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쓰고 그 쓰는 것을 통해서 아! 나는 순종 해야된다! 그것을 자기자신에게 늘 깨우치고 있다면, 쓰는 것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뭐 수건 쓰는 사람들을 보고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 하지 마십시오.
초대 교회 에는 본래 성찬만 있었든 것이 아니라 애찬도 있었습니다. 애찬과 주의만찬, 성찬에서 나중에 보편화된 표현이고, 사실은 주의 만찬, 애찬과 주의 만찬은 어떻게 다른가?
애찬은 러브 피스트, 아가페 밀 이라고 불려지는데 정말 문자 그대로 사랑 하기 위해서 식사를 같이 하는 거에요. 그리고 식사가 끝날 무렵 쯤 되어서 주님을 기억하는 만찬 을 마지막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따로 따로 되어 있었는데 역사가 흘러 가면서 애찬과 성찬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발생했느냐, 두 가지 문제를 들면, 교회 와서 식사를 하는 거죠 교회에 와서 사실 교인들의 숫자가 적어서 모일 때 마다 우리가 같이 식사를 하면 얼마나 좋으냐 하는 뜻에서, 그런데 식사할 때 두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생기는 문제 입니다. 식당에 가면 오늘오후에도 확인 해볼 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좋아 하는 사람들만 끼리 끼리 모여서 밤낮 모여요 그러니까 파당이 생기는 거죠. 심지어는 분쟁이 생겼어요. 파당과 분쟁이 생겼어요.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뭐냐하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먹을 것을 생각해서 집에서는 안 먹고 교회에 온 기회를 통해서 왕창 먹어 버려요. 그러니까 모자라요. 그래서 먼저 많이 먹는 사람 때문에 못 먹는 사람이 생겨요.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마찬 가지다. 우리 교회에서도 추수 감사절이 또 오는데 그때 떡 나눠 주면 꼭 문제가 생겨요. 자기 것만 가지고 가면 되는데, 열 개 이십 개씩 챙겨 가는 사람들이 있어 나중에는 모자라요. 왜 그렇게 모자라게 떡을 만들었느냐? 그래서 교회가 그걸 생각해서 미리 많이 만들어놓으면 또 남아요. 남으면 교회가 낭비하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하여튼 이런 인생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목회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여러분, 그거 알아요? 그래서 모자라면 왜 모자라게 만들었느냐? 그리고 또 남으면 교회가 남아 돌아 가도록 낭비한다. 그러면 어떤 인간의 비위를 맞추어야 됩니까? 우리가 모자라야 돼요? 남아야 돼요? 이래서 항상 문제에요. 뭐 고린도 교회라 해서 별수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에요.
18절 19절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분쟁과 파당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물론 좋은 사람하고 식사 하면 편하죠. 소화도 잘되고, 그런데 좀 서먹 서먹한 사람하고도 자꾸 교제를 하고 그분들 하고도 앉아서 차도 마시고 그런 훈련을 해야 돼요. 그것이 성숙한 사람들 이에요. 그래서 밤낮 끼리 끼리 돌아 다니는 인간은 성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광고 하고 다니는 거에요. 좀 낯선 사람, 그런 우리 교우들을 돌아보고 자기가 누구라고 소개하고, 같이 식사해요! 그리고 식사할 줄 알고 이것이 참 중요한 거에요.
자, 21절 22절을 한번 보시면 문제를 알 수 있어요.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것이 뭐냐하면, 또 교회도 보면 교회도 또 쎈 사람들이 있어요. 쎈 사람들이 떡을 많이 가지고 간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것이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서 정말 쎈사람 성숙한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자기가 안 먹고 남을 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들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타락한 인간성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꼭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33절에 무어라고 그랬느냐하면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33절에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먼저 먹으려고 애쓰지 말고 좀 기다리라"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자기의 몫만 딱 먹고 더 성숙한 사람은 자기가 안 먹더라도 남을 챙겨주고 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에요.
3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때에 귀정 하리라" 바울이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나는 이해가 잘돼요 날이 갈수록 목회하면서 더 이해가 잘돼요. 교회 교인들이 예의를 잘 지킬 줄 알아야해요. 매너를 잘 지켜야 해요. 주차장에 나가 봐요, 주차장에선 밤낮 싸워요. 심지어 남의 차 부딪쳐 놓고 메모지 하나 남기지 않고서 그냥 간단 말이죠. 나는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 하고서도 왜 늦게 나왔느냐고 소리치더래요. 예의가 없어요. 매너가 없어요. 교회 나오면서도 아직도 성숙 되지 못했어요. 남을 양보하고 남을 세워주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인데,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이기적인 태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왜 이것이 성찬 문제와 관련 시켜서 나오느냐 하면, 성찬을 통해서 배워야 할 진정한 정신은 무엇이냐, 성찬의 정신 세가지, 성찬은 언제나 세가지 시제를 갖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바라보아야 할 세가지 사건 대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새공동체 반에서 공부 했을 거에요. 첫째는 과거시제, 과거에 있었든 십자가를 바라 보는 것, 예수님을 바라 보는 것, 성찬의 첫 번째 정신이며, 예수님을 묵상하는것, 너희가 떡을 땔 때 마다 주님을 기억하라, 잔을 받을 때 마다 피 흘리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같은 떡, 같은 잔,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에 참여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한 몸에 소속된 지체가 되었다. 하나의 공동체 예수그리스도의 한 몸인 공동체에 속한, 한 가족 한 지체이다 란 말이죠. 우리 중에 무슨 파가 있겠어요
목사님은 아무개 하고 더 친한 것 같다... 친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똑 같죠 나는 정말 다같이 바라 볼려고 애를 씁니다. 다 같은 교제 다 같은 지체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걸요 그것을 성찬식을 할 때 마다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몸 그리스도의 한 피, 한 몸,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와 자매들 이다.그것을 계속 확인해야 돼요. 그리고 두 번째 시제는 현제 시제 인데,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마다 현제 자기의 심령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2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우리가 만찬을 받기 전에 기도합니다. 조용히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주일날 마다 안식 후 첫날마다 모일 때 마다 떡을 떼었어요. 우리 교회도 성찬식을 좀더 자주해야 되겠다고 늘 생각을 하는데... 그러니까 할 때 마다 무얼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반성을 합니다. 내가 이 떡을 먹기에 합당 한가, 잔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는가, 내 심령의 상태, 특별히 나에게 이기심이 없는지, 나에게 파당심이 없는지, 이런 것들은 내가 그리스도의 몸을 오히려 분열시키는 사람은 아닌지, 이런 것 들을 생각하고 늘 주앞에 회개하고 자성하고 늘 주앞에 깨끗함을 얻을 때, 거기서 성숙이 이루어지고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 미래 시제, 중요한 미래시제가 무어냐 하면,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 보아야 됩니다.
26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언제 만찬이 끝나는 것 입니까 주의만찬이, 성찬을 언제 안하게 됩니까? 예수님이 오시면 안하게 되는 거에요. 그때는 직접 예수님하고 천국에서 우리가 함께 식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그때 까지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늘 이 성찬식을 갖는 것 입니다 다시 오신다 주님이, 또 다시 오실 주님을 선포하는 공동체, 전도하는 공동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교회로 합당한 교회가 될려면 교인들이 성숙해야 합니다. 저는 전도의 최대의 방해는 누구냐, 전도의 최대의 장해물은 교인들이에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 해봐요 왜 안믿나 교인들 꼴보기 싫어서 안믿는다고 해요 교인들의 이기적인 자세,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손해 볼 줄 모르고, 양보 할 줄 모르고, 그런 교인들을 보고서 믿기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선교 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만찬의 자리에서 참여 할 때 마다 거기서 회개와 성숙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렇게 회개 하지 못하고 그냥 형식적으로 만찬에 참여하고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는 참석하면서 변화는 되지않고,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특단의 조치를 행하십니다.
경고가 있습니다. 3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29절에 보면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신다. 형식적으로 성찬식에 참여한다. 형식적으로만 예배에 참석한다. 성찬에 참여하고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 성찬을 더럽힌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이다. 이러므로, 너희들 중에 약한 자가 많고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가 많다. 이건 단계 적이에요 하나님의 징계의 단계, 처음에는 약하게 만드셔요. 우리가 약해지면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 그런데 약해졌는 데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약한 상태가 아니라, 너 좀 들어 누워서 생각해! 그리고 병들어 침대 위에 눕게 합니다. 빨리 깨달아야 하는데 침대에 누워서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너 그냥 자, 영원히 자, 그리고 생명을 가지고 가십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가지고 가시는 사람은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너무 너무 사랑해서 일찍 데리고 가시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에 필요해서 하나님이 일찍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어요. 또 한 사람은 하나님께 너무 부담이 되어가지고, 너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빛이 안 된다, 소금이 안 된다, 그만 살아라, 그리고 데리고 가시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계속 주 앞에 영광이 못되면 나중에 어떻게 될 수가 있다? 옆 사람 보고 얘기해 보세요. 그냥 가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늘 예배 드리면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변화 되어야 해요. 중요한 것은 예배만 드렸다 해서 변화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화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고, 주님께 순종하고, 좀더 성숙하고, 좀더 양보 잘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예배 잘 드리고 와서 주차장에 와서 주차 잘했느냐 못했느냐 서로 싸우고 말입니다. 이게 뭐 예배 드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예배 드리면서 변화되고,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고, 예배 드리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때, 그때 주님은 우리 몸 된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고전11장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부딪쳐 있었든 또 하나의 문제, 예배와 질서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배의 원리와 정신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의 문화는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고 또 달라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문화는 계속해서 바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현대 한국 교회가 예배 스타일의 변화를 둘러싸고 상당한 홍역을 치루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보수주의적 문화가 깊은 교회 일수록 예배의 전통을 붙잡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런 양상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가스펠송 그 자체를 완전히 거절하고 또 부르면 안된다는 공식적인 명령까지 내린 교회가 있다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진보 주의적인 문화를 가진 교회에서는 예배의 틀을 깨고 현대의 문화, 특별이 젊은이의 문화에 맞는, 그런 열린 예배를 시도하고 있는 현상들도 볼 수 있습니다. 찬양을 많이 하고 드라마를 한다든지, 이런 예배의 다양한 변화의 시도를 하고 있는 모습들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 어느것이 옳으냐, 어느것이 틀리느냐, 하는 문제는 없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문화의 문제입니다.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의 정신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시대의 문화, 혹은 지역의 문화, 혹은 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문화에 맞도록 예배를 시도 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이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가 채워지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느냐가 중요한 과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면 성경의 명령 가운데 너희가 서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이걸 문자그대로 순종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제가 한번 순종을 해볼까요? 이따가 끝 나고 나서 저 뒤에 서서 나가시는 분들을 한 분 한 분 붙들고 제가 뽀뽀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입맞춤이란 것은 문화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문화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권 속에선 허용이 되었다는 말이죠.
정신은 뭐냐하면 중요한 정신은 교제의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날 때 마다 성도들이 친절하게 서로를 돌아보고, 삶의 상태를 알아보고, 진지하게 문안을 드리는 교제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입맞춤이란 것은 문화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 입니다. 옛날에 한국 교회에서 남녀가 악수 하는 것도 흉측한 일로 생각 되든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그런 정도는 우리가 이제 극복을 했다는 말이죠. 아마 악수도 안 한다고 그러면 굉장히 쌀쌀하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실런지도 모르죠. 그만큼 문화가 바뀐 것이죠. 또 언제 문화가 바뀌면 입맞춤도 허용되는 시대가 올런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아직은 안되죠, 그것은 문화입니다.
일세기에 성경이 쓰여지든 때의 당시 소위 신약시대의 문화 속에서 고린도 교회는 예배를 둘러싸고 일련에 홍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문제가 발생 했어요. 예배의 질서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특별히 두 가지를 둘러싼 문제가 발생했는데, 하나는 수건의 문제, 또 하나는 성찬의 문제 였습니다. 수건과 성찬의 문제였습니다. 첫째 우리는 수건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수건, 혹은 너울, 베일, 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자들이 예배를 드릴 때 머리에 수건을 쓰느냐 안 쓰느냐, 라는 문제였습니다. 그 문제의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고린도 사회는 급격하게 자유화의 길을 겪고 있었습니다. 또 고린도 사회의 자유화에는 기독교의 복음이 기여한 바가 없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여성들이 해방되고 여권이 존중되는 것은 일반적 현상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 가는 곳 마다 여성들의 권익이 인정되고, 여성들의 해방이 촉진되는 문화적인 경향은 일종의 세계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일 입니다. 전혀 나쁜 일이 아닙니다. 참 좋은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여성들 가운데는 그러나 이 변화의 바람, 변화의 분위기를 지나치게 편성해서 극단적인 방향까지 나아간 일들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여성의 해방은 필요한 것 이지만, 저는 오늘날의 극단적인 여성의 해방 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오히려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여성들이 일종의 미덕으로 생각하든, 순종의 표시로 생각하고, 미덕의 표시로 생각했든, 얼굴을 감추고, 혹은 머리에 수건을 쓰는, 그러한 것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여성들 가운데는 거부하는 그런 현상이 생겼든 것으로 보여집니다.그래서 교회의 예배 시간에 일반적으로는 다 그것은 이미 교회의 하나의 좋은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건을 거부하는 현상이 생겼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오늘 11장 1절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데로 그 유전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좋은 문화, 좋은 전통,이라는 것은, 문화가 바뀔 때까지는 그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 것이지요 .문화가 바뀌었는데도 전통을 고집하는 것은 안 좋죠. 정신은 계속해서 지켜야지만 문화는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일단 좋은 전통을 지키는 고린도 교인들을 칭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뭐냐하면 3절에 그러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좋은 전통까지도 너무나 쉽게 포기하고 거절하는 경향이 있다 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뭐냐하면 여인들이 머리에 쓰는 수건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좋은 전통이라고 그 당시에는 생각했든 여성들의 머리에 수건을 쓰는 것까지도 거절하고 수건을 벗고 기도하고, 수건을 벗고 찬양하고, 수건을 벗고 예언하는 현상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5절을 보시면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머리에 쓴 것을 벗어버리고 수건을 벗어버리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것은 마치 여자들이 머리를 빡빡 깍아 버린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렇게 바울은 지적을 합니다 자! 이것이 문제의 배경 이였습니다. 자! 이런 그 당시 문제의 배경을 우리가 살펴보면서 오늘날도 여전히 강조 되어야 할 우리가 배워야 할 원리적 교훈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 수건 이라는 것이 가르치고 있는 원리적 교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교훈을 붙잡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대로 하느냐 안 하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대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톨릭의 여성들이 수건을 쓰죠? 지금도 카톨릭에서는 수건을 씁니다. 개신교 가운데서도 형제교회 전통에서는 지금도 개신교 안에서도 머리에 수건을 쓰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문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문화를 떠나서 그 사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원리적 교훈을 도대체 무엇이냐 라는 거죠.
몇 가지 중요한, 우리가 붙잡아야 할 원리적 교훈이 있는데, 첫째는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지만 질서에 따를 역할의 차이는 인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첫번째 교훈이며, 이 사건에서 배워야 할 가장 첫번째 레슨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지만 질서에 따른 역할의 차이는 여전히 존중 되어야 한다는 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11절과 12절을 보시면 남녀는 평등하다는 사실을 변함없이 강조 되어있습니다.
11절 12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 하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녜, 남자나 여자가 다 하나님에게서 부터 나왔다. 하나님이 남녀를 지으셨다. 동등 하게 지으셨다. 균등하게 지으셨다. 남녀의 본질적 어떤 우열의 차이란 존재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꼭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도 여자도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 주셨습니다. 동등 합니다.그러나 질서는 있어요. 질서에 따른 역할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 합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우리가 잘 이해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11장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이것은 다시 순서대로 정리 하면 이렇습니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써놓으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죠? 여자가 맨 아래에 오니까,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 하기위해서는 먼저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자,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하나님과 그리스도중에서 누가 더 높습니까? 하나님이 더 높다 그런 분이 있으면 이단입니다. 하니님과 그리스도는 뭐에요 동등합니다. 그 본질과 속성에 있어서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십니다. 절대로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낮으신 분이 아닙니다. 물론 스스로 낮추셨어요. 스스로 낮추셨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동등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이십니다. 빌립보서 2장에도 나오죠?.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동등하죠.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성의 머리가 남성이다 라고 해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할까요? 천만에 그렇지 않아요. 머리 쓰는 것을 보아도 여성들이 훨씬 더 똑똑합니다.
그러니까 논리적인 싸움이나 말 싸움에서 절대로 남성이 여성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먹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성들이 훨씬 더 똑똑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성의 머리가 남성이다 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걸 이해 하기 위해선 다시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라는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일 하시는 방법이 있어요. 성부 하나님이 누구를 보내십니까? 성부 하나님이 역할을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역할을 다르게 담당 하셔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하나님 보고 너가 내려가서 사람들을 다 구원하라. 동등 하시지만 아버지 하나님의 명령 앞에 예수님이 복종했어요. 복종 한다고 해서 열등해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것을 복종한다고 해서 열등해진다고 생각해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뜻을 이루어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역할의 차이입니다. 질서에 따른 일종의 역할의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한 가정이나 사회를 만드셨을 때 거기서 리더쉽을 남성에게 기대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똑똑해서만은 안되요, 리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리더가 없는 사회 한번 생각해보세요. 리더가 없는 교회, 리더가 없는 공동체, 어떻게 될까요? 가정에도 리더가 있어야 해요.
저는 여전히 가정에 리더쉽은 남편에게 기대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여성 해방 운동으로 말미암아 그것 까지 넘어서려는 경향도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남성의 지도력을 폐기한 결과가 뭐냐? 남성의 무력함, 남성이 무력해 졌어요. 그러니까 자식들이 바라볼 수 있는 남성의 지도자의 역할 모델이 없어지고 말았어요.그 결과로 현대에 생긴 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채찍 가운데 하나가 동성연애 입니다. 동성연애증 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아버지 모델이 없어서 입니다. 아버지의 리더쉽이 있는 곳, 아버지의 리더쉽이 존중 되는 곳에서 동성애, 물론 동성애가 유전적이냐 아니냐는 이런 논쟁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후천적인 환경에 영향력으로 볼 때는 가장 결정적인 영향이 뭐냐하면 아버지의 리더쉽이 없는 가정에서 동성애 환자들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만큼 남성의 리더쉽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의 리더쉽을 세워준다고 해서 그것이 열등 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 서도 얼마든지 저는 여성들이 사역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여성의 사역 그 자체를 좌절 시키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도 보면 뭐 여성은 기도하면 안된다, 여성은 설교하면 안된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이런 말은 없어요.
성경에는 5절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수건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기도 할 수 있어요. 예언 할 수 있어요. 설교 할 수 있어요. 여성도 얼마든지, 그러나 그기 어떤 사역을 하면서도 여성이 얼마든지 사역을 하면서도 리더쉽에 대한 존중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리더가 없어지면 리더쉽이 존중 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동등하다는 얘기와 역할의 차이 까지 무시해야 하느냐 라는 사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성경에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뭐냐하면 왜 수건이라는 문제가 나왔느냐 여기서 여성의 머리는 누구라고 그랬어요? 남성, 그러면 예배 드릴 때는 누구의 영광이 나타납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남자의 영광이 나타나면 안되죠. 그래서 머리에 수건을 쓰는 거죠. 이것이 초대교회 교인들이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남성의 머리는 누구라 그랬어요? 그리스도와 하나님 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나타나야 됩니까?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까?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는 안 쓰는 거다. 초대 교회에서는 쉽게 이해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도 뭐냐하면 문화적인 표현이지만 그 정신은 어때야 합니까?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야 합니다. 사람은 숨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머리에 쓰는 이유 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은 여성들의 신앙 고백중의 하나가 뭐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리더쉽과 질서는 나는 소중히 여깁니다 라는 고백의 표시가 바로 그 수건 이였든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한번 써 볼까요? 쓰는 교회가 많아요. 개신교 가운데서도 지금도 쓰는 교회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문화적인 표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정신을 이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두번째로 여기서 강조 되어야 할 또 하나의 원리적 교훈이 있다면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지만 성적인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 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여전히 동등 하지만 성적 차이가 인정되고 수용 되어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여성은 여성 다움이 있어야 되고, 남성은 남성 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 여성다움의 특성이 그 당시 뭐로 나타나느냐 하면 그것이 긴 머리란 말이죠. 그 여성다움 의 긴 머리, 그런데 왜 자꾸 자르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여성다움이 자꾸만 없어 보여요
5절과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 만일 여자가 머리에 쓰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쓸 지니라"
그러나 남자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14절,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남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욕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쓰는 것을 대신하여 주신 연고니라"
일종의 긴 머리는 수건 대신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긴 머리 그것이 여성다움의 특성이다. 성경은 그것이 본성이 너희들을 가르치지 않느냐, 본성적으로도 우리에게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그런 특성중의 하나가 긴 머리와 짧은 머리 의 특성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문화적인 면에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옛날 보다는 많이 여성의 머리가 짧아 졌지만,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그 당시 그 시대의 문화에 맞도록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라는 말입니다. 사탄은 자꾸만 그 선을 없애려고 합니다. 자꾸만 유니섹스 컨츄럴로 만들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이 타락 해가는 문화의 한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꾸만 남자가 여자가 되고싶어 하고, 여자가 남자가 되고싶어 하고, 그러나 여성의 아름다움은 여성다움에 있습니다. 남성의 아름다움은 남성다움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결코 열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또 우리가 이 수건 사건에 있어 강조 되어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예배에 있어서 순종적 자세의 중요성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중요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서 순종적자세로,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낸다, 주님만 드러내겠다, 나 자신을 감추겠다, 그것이 수건을 통한 신앙 고백 입니다. 자,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느냐 라는 것은 예배가 끝났을 때,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라는 순종이 결단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의 결론이고, 예배의 결과 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 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라는 결단을 갖고, 순종의 결단을 갖고, 예배의 자리를 떠나 가셔야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건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건을 쓰고도 순종을 안하면 소용이 없는거죠. 중요한 것은 순종 그 자체의 결단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성들이 자유화 되고 해방화 되면서 너무 극단적인 경향으로 나가서 그와 같은 절제의 선을 넘어 갔어요. 그래서 심지어는 예배의 자리에서도 제일 시끄러운 곳이 여성이고, 또 방언 문제가 나오죠, 방언문제로 그냥 통역을 안 세우고 방언을 하다보니까 예배의 질서가 무너져 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이런 은사의 표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필요 한 것이다. 그러나 질서는 존중되어야 된다. 이것이 바울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교훈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재미 있는 표현하나가 나와요. 난해한 표현 이기도 하고, 흥미로운 표현 이기도 한데, 10절 말씀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여자는 천사들을 인하여 권세 아래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권세 아래 있는 표시, 내가 하나님의 권세에 순종 하겠습니다. 순종의 표시로 머리에다 표시를 두어라, 수건을 쓰라는 말이죠, 그런데 누구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까? 이 부분이 재미있는데 누구 때문에? 천사들을 인하여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성서 학자 들이 여러 가지 토론을 많이 했는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하나님 말고도 예배의 자리에 참관자가 있습니다. 천사들이에요. 천사들이 오늘 우리를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배의 참관자가 있어요. 예배를 잘 드리나 못 드리나 졸고 있지나 않는지, 정말 진지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지, 아닌지,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정말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을 고백하느냐 저들이, 그것을 천사 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것이 사실 이라면 여러분 자! 누가 내 예배드리는 태도 일거수 일투족을 누군가 가 감시하고 있다 이걸 정말 내가 느낀다면, 우리 들의 태도와 자세가 좀 달라 질까요? 안 달라 질까요? 사람들이 많아 질수록 숨기가 좋아요. 사람 들이 많아 질수록, 그러나 사람들이 적을수록 뭐에요 드러나죠. 제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째려 보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번 가정을 해봐요 한 사람, 한 사람, 그러면 태도가 좀 달라 질 것 아니에요? 하나님이 정말 나를 보신다, 아니 하나님이 당신의 천사 들을 보내어 예배 드리는 내 태도를 점검 하고 계신다. 얼마나 달라 지겠어요, 순종적 결단, 순종적 자세, 이것이 중요 하다는 말이죠. 꼭 수건을 쓰느냐 안 쓰느냐 보다도 그것을 통해서 순종의 결단을 드리느냐 라는 것을 하나님이 천사들을 통해서 첵크하고 계시다.
저는 수건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때는 상징이 우리의 고백을 도와 줄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쓰고 그 쓰는 것을 통해서 아! 나는 순종 해야된다! 그것을 자기자신에게 늘 깨우치고 있다면, 쓰는 것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뭐 수건 쓰는 사람들을 보고 여러분은 이상하게 생각 하지 마십시오.
초대 교회 에는 본래 성찬만 있었든 것이 아니라 애찬도 있었습니다. 애찬과 주의만찬, 성찬에서 나중에 보편화된 표현이고, 사실은 주의 만찬, 애찬과 주의 만찬은 어떻게 다른가?
애찬은 러브 피스트, 아가페 밀 이라고 불려지는데 정말 문자 그대로 사랑 하기 위해서 식사를 같이 하는 거에요. 그리고 식사가 끝날 무렵 쯤 되어서 주님을 기억하는 만찬 을 마지막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두 가지가 따로 따로 되어 있었는데 역사가 흘러 가면서 애찬과 성찬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발생했느냐, 두 가지 문제를 들면, 교회 와서 식사를 하는 거죠 교회에 와서 사실 교인들의 숫자가 적어서 모일 때 마다 우리가 같이 식사를 하면 얼마나 좋으냐 하는 뜻에서, 그런데 식사할 때 두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생기는 문제 입니다. 식당에 가면 오늘오후에도 확인 해볼 수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좋아 하는 사람들만 끼리 끼리 모여서 밤낮 모여요 그러니까 파당이 생기는 거죠. 심지어는 분쟁이 생겼어요. 파당과 분쟁이 생겼어요. 그리고 또 하나 문제는 뭐냐하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먹을 것을 생각해서 집에서는 안 먹고 교회에 온 기회를 통해서 왕창 먹어 버려요. 그러니까 모자라요. 그래서 먼저 많이 먹는 사람 때문에 못 먹는 사람이 생겨요. 그러니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마찬 가지다. 우리 교회에서도 추수 감사절이 또 오는데 그때 떡 나눠 주면 꼭 문제가 생겨요. 자기 것만 가지고 가면 되는데, 열 개 이십 개씩 챙겨 가는 사람들이 있어 나중에는 모자라요. 왜 그렇게 모자라게 떡을 만들었느냐? 그래서 교회가 그걸 생각해서 미리 많이 만들어놓으면 또 남아요. 남으면 교회가 낭비하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하여튼 이런 인생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목회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여러분, 그거 알아요? 그래서 모자라면 왜 모자라게 만들었느냐? 그리고 또 남으면 교회가 남아 돌아 가도록 낭비한다. 그러면 어떤 인간의 비위를 맞추어야 됩니까? 우리가 모자라야 돼요? 남아야 돼요? 이래서 항상 문제에요. 뭐 고린도 교회라 해서 별수없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 가지에요.
18절 19절 같이 읽겠습니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분쟁과 파당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물론 좋은 사람하고 식사 하면 편하죠. 소화도 잘되고, 그런데 좀 서먹 서먹한 사람하고도 자꾸 교제를 하고 그분들 하고도 앉아서 차도 마시고 그런 훈련을 해야 돼요. 그것이 성숙한 사람들 이에요. 그래서 밤낮 끼리 끼리 돌아 다니는 인간은 성숙하지 않았다 그렇게 광고 하고 다니는 거에요. 좀 낯선 사람, 그런 우리 교우들을 돌아보고 자기가 누구라고 소개하고, 같이 식사해요! 그리고 식사할 줄 알고 이것이 참 중요한 거에요.
자, 21절 22절을 한번 보시면 문제를 알 수 있어요.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이것이 뭐냐하면, 또 교회도 보면 교회도 또 쎈 사람들이 있어요. 쎈 사람들이 떡을 많이 가지고 간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것이 없어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서 정말 쎈사람 성숙한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자기가 안 먹고 남을 주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들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타락한 인간성이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꼭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33절에 무어라고 그랬느냐하면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33절에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먼저 먹으려고 애쓰지 말고 좀 기다리라"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자기의 몫만 딱 먹고 더 성숙한 사람은 자기가 안 먹더라도 남을 챙겨주고 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에요.
34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때에 귀정 하리라" 바울이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나는 이해가 잘돼요 날이 갈수록 목회하면서 더 이해가 잘돼요. 교회 교인들이 예의를 잘 지킬 줄 알아야해요. 매너를 잘 지켜야 해요. 주차장에 나가 봐요, 주차장에선 밤낮 싸워요. 심지어 남의 차 부딪쳐 놓고 메모지 하나 남기지 않고서 그냥 간단 말이죠. 나는 이런 분들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 하고서도 왜 늦게 나왔느냐고 소리치더래요. 예의가 없어요. 매너가 없어요. 교회 나오면서도 아직도 성숙 되지 못했어요. 남을 양보하고 남을 세워주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인데,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이기적인 태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왜 이것이 성찬 문제와 관련 시켜서 나오느냐 하면, 성찬을 통해서 배워야 할 진정한 정신은 무엇이냐, 성찬의 정신 세가지, 성찬은 언제나 세가지 시제를 갖고 있습니다.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마다 바라보아야 할 세가지 사건 대상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마 새공동체 반에서 공부 했을 거에요. 첫째는 과거시제, 과거에 있었든 십자가를 바라 보는 것, 예수님을 바라 보는 것, 성찬의 첫 번째 정신이며, 예수님을 묵상하는것, 너희가 떡을 땔 때 마다 주님을 기억하라, 잔을 받을 때 마다 피 흘리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같은 떡, 같은 잔, 하나의 떡과 하나의 잔에 참여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한 몸에 소속된 지체가 되었다. 하나의 공동체 예수그리스도의 한 몸인 공동체에 속한, 한 가족 한 지체이다 란 말이죠. 우리 중에 무슨 파가 있겠어요
목사님은 아무개 하고 더 친한 것 같다... 친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똑 같죠 나는 정말 다같이 바라 볼려고 애를 씁니다. 다 같은 교제 다 같은 지체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인걸요 그것을 성찬식을 할 때 마다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몸 그리스도의 한 피, 한 몸,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와 자매들 이다.그것을 계속 확인해야 돼요. 그리고 두 번째 시제는 현제 시제 인데, 우리가 주의 만찬에 참여할 때 마다 현제 자기의 심령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2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우리가 만찬을 받기 전에 기도합니다. 조용히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는 주일날 마다 안식 후 첫날마다 모일 때 마다 떡을 떼었어요. 우리 교회도 성찬식을 좀더 자주해야 되겠다고 늘 생각을 하는데... 그러니까 할 때 마다 무얼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반성을 합니다. 내가 이 떡을 먹기에 합당 한가, 잔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에 있는가, 내 심령의 상태, 특별히 나에게 이기심이 없는지, 나에게 파당심이 없는지, 이런 것들은 내가 그리스도의 몸을 오히려 분열시키는 사람은 아닌지, 이런 것 들을 생각하고 늘 주앞에 회개하고 자성하고 늘 주앞에 깨끗함을 얻을 때, 거기서 성숙이 이루어지고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다음에 미래 시제, 중요한 미래시제가 무어냐 하면,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 보아야 됩니다.
26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언제 만찬이 끝나는 것 입니까 주의만찬이, 성찬을 언제 안하게 됩니까? 예수님이 오시면 안하게 되는 거에요. 그때는 직접 예수님하고 천국에서 우리가 함께 식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그때 까지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면서 늘 이 성찬식을 갖는 것 입니다 다시 오신다 주님이, 또 다시 오실 주님을 선포하는 공동체, 전도하는 공동체,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교회로 합당한 교회가 될려면 교인들이 성숙해야 합니다. 저는 전도의 최대의 방해는 누구냐, 전도의 최대의 장해물은 교인들이에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전도 해봐요 왜 안믿나 교인들 꼴보기 싫어서 안믿는다고 해요 교인들의 이기적인 자세,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이기적이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손해 볼 줄 모르고, 양보 할 줄 모르고, 그런 교인들을 보고서 믿기 싫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려면 선교 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만찬의 자리에서 참여 할 때 마다 거기서 회개와 성숙이 일어나야 됩니다. 이렇게 회개 하지 못하고 그냥 형식적으로 만찬에 참여하고 형식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예배는 참석하면서 변화는 되지않고,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 특단의 조치를 행하십니다.
경고가 있습니다. 3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29절에 보면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신다. 형식적으로 성찬식에 참여한다. 형식적으로만 예배에 참석한다. 성찬에 참여하고 예배에 참석하면서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다. 성찬을 더럽힌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이다. 이러므로, 너희들 중에 약한 자가 많고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가 많다. 이건 단계 적이에요 하나님의 징계의 단계, 처음에는 약하게 만드셔요. 우리가 약해지면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 그런데 약해졌는 데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약한 상태가 아니라, 너 좀 들어 누워서 생각해! 그리고 병들어 침대 위에 눕게 합니다. 빨리 깨달아야 하는데 침대에 누워서도 깨닫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너 그냥 자, 영원히 자, 그리고 생명을 가지고 가십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가지고 가시는 사람은 두 가지 종류가 있어요. 너무 너무 사랑해서 일찍 데리고 가시는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 나라에 필요해서 하나님이 일찍 데리고 가는 사람이 있어요. 또 한 사람은 하나님께 너무 부담이 되어가지고, 너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빛이 안 된다, 소금이 안 된다, 그만 살아라, 그리고 데리고 가시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계속 주 앞에 영광이 못되면 나중에 어떻게 될 수가 있다? 옆 사람 보고 얘기해 보세요. 그냥 가버리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늘 예배 드리면서 변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면서 변화 되어야 해요. 중요한 것은 예배만 드렸다 해서 변화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변화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고, 주님께 순종하고, 좀더 성숙하고, 좀더 양보 잘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예배 잘 드리고 와서 주차장에 와서 주차 잘했느냐 못했느냐 서로 싸우고 말입니다. 이게 뭐 예배 드리는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예배 드리면서 변화되고,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이 되고, 예배 드리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때, 그때 주님은 우리 몸 된 교회의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십시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 8:1-13 / 평화 사랑 (8) / 김동호 목사 (0) | 2021.12.02 |
---|---|
마리아의 찬가/누가복음 1:46-55 (0) | 2021.12.02 |
역사와 현실/고린도전서 10장 (0) | 2021.12.02 |
한신대 신학대학원 목요강좌-김재진 교수 (0) | 2021.12.02 |
김재진 목사, 하나님의 현존, 연세대학교 삼애교회 (0) | 2021.12.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