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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것을 알라(디모데후서 3장 1절~5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해마다 정초가 되면 일년 운수를 점쳐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본다, 화투점을 쳐본다 하고 신수를 점치느라 바쁜 모습들을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으레 그렇겠거니 하지만, 명색이 교인들이 토정비결을 들고 다니는 것은 참으로 꼴불견입니다. 하기야 앞에 무슨 일이 놓여 있을까, 금년 신수는 어떨까 하고 궁금히 여기는 데에는 한 가닥 동정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대로, '셰이킹 파운데이션(shaking foundation)'---기초가 흔들리고 아예 터전까지 흔들리는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주 뼈저리게 체험하고 아주 실감합니다. 어제의 우방이 오늘은 철천지원수가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됩니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어지기 잘하는 세상입니다. 이대로 나가면 금년 한 해 동안에도 얼마나 굉장한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인지 내심 염려도 됩니다. 가치 기준도 없고 종교도 무력해지고 근본마저 뿌리째 흔들리는 무서운 불안정, 불확실의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살을 더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살 더 늙었고 한 살 더 세상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언제 닥칠지는 알 수 없으되 죽음에 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후회한다 하여 그것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고쳐 볼 길이 없습니다. 이제 새롭게 무엇을 건설하고 새롭게 무엇을 계획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놓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절실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장막을 걷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세상은 날로 더 어지러워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모든것이 흔들리고 변하는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끝까지 변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을 남겼는데, 맨처음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요, 이 디모데후서가 마지막 편지입니다. 임종 직전에,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이 말씀은 알아도 좋고 몰라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을 일, 다가오는 미래의 현실, 실제적인 것, 이것을 알고 있으라는 당부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지식 공해(知識公害)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많은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정보 공해입니다. 일본에 가 있는 친구 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곳에는 바닷가 여기저기에 오두막을 여러 채 지어놓은 휴양소가 있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화도 라디오도 신문도 전혀 없답니다. 심지어 비누조차 없다고 합니다. 완전히 문명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태고의 시대로 되돌아가 있습니다. 이곳에 가서 모든 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며칠 푹 쉬었다 오면 그야말로 참된 휴식이 된답니다.
전화야말로 공해가 아닙니까? 텔레비전과 라디오, 이런 것은 또 얼마나 말썽입니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부 피상적인 것이지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세상일을 다 떠맡은 듯이 걱정들을 합니다. 여러분, 알아야 할 것만 아십시다. 생각해야 할 부분만 집중적으로 생각하십시다. 폭넓게 이것저것을 섭렵하는 것도 좋지만, 쉰이 넘으신 분이라면 한 가지 일만 똑똑히 하십시다. 이것 한다 저것 한다, 이 생각 저 생각하시지 말고 한 가지 일만 집중적으로 깊이 알고 깊이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특징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첫째, 네가 알아야 할 일, 여러분과 제가 다같이 알아야 할 일, 현시점에서 내가 알아야 할 일, 생명에 관한 것, 영생에 관하여 내가 오늘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이것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대개가 과거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에 관한 지식도 물론 필요합니다마는 그것은 미래를 전제할 때에 소용되는 것입니다. 미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일도 현재의 일도 아니요, 흔히 말하는 정보(情報)도 아닙니다.
반드시 있을 일,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끝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지막(end;the last)을 알라-----결국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수의(壽衣)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바로 어제 겪은 일입니다. 신문, 방송을 통해서 이미 보도가 되었습니다마는, 88도로를 지나가다 보니 자동차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차량은 어느 교회의 버스였습니다. 차체는 산산조각이 나서 널부러져 있고 길바닥에 핏자국이 낭자합디다. 지나치기에도 섬찍했습니다. 어디 이것을 남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므로 임종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간혹 정해진 시간의 임종을 기다리는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지요. 그런데 그 마지막 시간에 그 사람의 일생이 다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신앙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마지막을 어떻게 마쳐야 하겠습니까? 내 생애의 끝을 어떠한 장면으로 마쳐야 하는가, 이것이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 어느 연로하신 권사님은 생전에 식사 때마다 "하나님, 따뜻한 봄날에 죽게 해주십시오. 장례식 치르는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도록……"하고 기도 드렸습니다. 자녀들이 언짢은 마음에 만류하지만 이 권사님은 요지부동입니다. "내 소원은 그것밖에 없다." 그러더니 정말로 아주 따뜻한 봄날에 가셨습니다. 우리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또 역사의 끝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오늘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향방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의 흐름이 제멋대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방향(direction)이 있습니다. 지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 사업할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왜요?" "사업할 만큼 큰 부자도 아니지만 '사장님, 사장님'하는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요즘에는 노조니 뭐니 하면서 저보고 '이놈 저놈'합니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당신은 사업가가 못됩니다. 당신은 '놈' 소리 안들을 줄 알았나요? 사실이야 남자니까 놈이지 뭘 그래요?"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당신이나 그들이나 똑같은 사람이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돈푼이나 있다고 더 잘난 사람인 듯 착각하지 말라. 귀족인 양 양반인 양 행세하지 말라,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아니겠는가 하고요.
여러분, 역사가 과연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지금 이 시대에 특권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높은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이셔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벌거숭이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세대가 변하되 곤두박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방향이 있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향방을 알고 오늘을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세상의 진행에 대하여 어두운 시각(視覺)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세(末世)라고 합니다. 말세란 구약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시기 직전의 때를 말하는 것이며, 신약적으로는 십자가에서부터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또한 재림 직전의 시기, 즉 말세의 성격을 이렇게 한마디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라." 고통 하는 때---'카이로이 칼레포이,' 아주 견디기 어려운 때가 이르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사납다, 거칠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야흐로 폭력의 시대가 오고 악마적인 성격의 때가 오리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몹시도 시달리게 되는 때가 이를 것입니다.
동서 진영이 화해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고 유토피아가 이르리라는 기대나 감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넉넉하다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가 안정되었다고 평안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보아오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복지국가에는 아무런 사회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도 더 많은 문제로 골치가 아프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요즈음 절감하는 '교통 지옥'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마약으로 인한 지옥은 어떻습니까? 한때는 에이즈(AIDS) 때문에 온 세계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에 비하면 파급 효과가 오히려 작답니다. 에이즈야 저 하나 죽으면 그만인데, 마약은 나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온 세계가 마약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야 경제문제가 해결되고 교통문제가 해결되고 산업평화가 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어려운 세대가 다가옵니다. 고통의 때가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고통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이 삼자(三者)의 기본관계가 깨어지고 맙니다.
질서가 무엇입니까? 질서는 정의 위에 세워집니다. 또한 정의는 경건(敬虔)을 뿌리로 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질서란 그것을 아무리 외쳐봐도 정의와 공의의 토대를 놓지 않고는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너나할것없이 정의를 외치는데도 정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이 없는 정의는 독재자의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경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말세가 되니 이러한 것들이 근본적으로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악덕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한 대목 한 대목을 읽어봅시다.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본문은 우선 자아(自我)에 대하여 두 가지 부정적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사랑이요, 둘째는 돈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신만을 위합니다. 이기적입니다.
얼마 전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죽어 가는 어린아이에게 수혈을 해야 했습니다. 당장 급하니까 어머니의 피를 넣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 보십시오. 자기의 미용에 나쁘다며 그것을 거절하더랍니다. 죽어 가는 자식에게 피 한 방울을 아끼는 어머니---말문이 막히는 이기주의입니다. 또한 돈을 사랑합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 돈이 아니겠습니까? 다들 돈이라는 것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돈으로 해서 빚어지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타락한 자의 태도에 대해서는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인은 참으로 교만합니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쥐뿔도 없으면서, 교만합니다. 어느 대학에 데모가 심했습니다. 교수 한 분이 생각하기를, 자신은 특별한 보직도 없고 성실하게 가르쳐왔으니 자기 말은 들어주겠거니 하여 데모대열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교수님 나오셨습니까?" 학생들에게서 인사를 받을 줄 알았는데 웬걸, "야, 너 좀 똑똑히 가르쳐!"하고 소리치더랍니다. 깜짝 놀라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래, 너희 말이 맞다. 내가 엉터리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10년이나 걸려 박사학위를 따고 공부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한 사람입니다. 제가 사직을 만류해보았으나 아무리 권면해도 그분은 생각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제가 엉터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디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마는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해봅시다. 우리가 뭐 좀 안다고 한들 무엇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가진 것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이렇다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백지상태일 뿐입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교만이라는 허세일 뿐입니다. 스스로 여기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웃에 대해서, 가정과 사회를 구분해서 생각해봅시다.
먼저 가정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를 말씀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원한 관계가 이렇게 심화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원수로 여기고 자식을 원수처럼 생각합니다. 모두 병리적 현상입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원한 때문에 저 죽고 남 죽이는 줄 모르는 채 끝까지 원한을 품고 사는 불행한 사람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는 일곱 가지를 말씀합니다.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현대인의 특징 가운데 조급함이 있습니다. 제가 북경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등소평씨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일본사람들이 자랑삼아 초특급 신간선(新幹線) 열차를 태워주었답니다. 중국에서는 기차가 형편없이 느리게 달립니다. 그런데 시속 200km나 달리는 기차를 탔으니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일본사람들이 이 점을 노리고 일부러 꾸민 일이지요. 수행 기자가 기차 안에서 묻습니다. "어떻습니까, 상당히 빠르지요?" 등소평씨가 껄껄 웃으며 대답합니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뭐가 그리 급하노?"
과연 그렇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야단들입니까?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십니까? 클랙슨 울리지 마십시오.
빵빵거린다고 좀 나아집니까? 이런 사람 틀림없이 일찍 죽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입니다. 눈이 하얗게 덮인 길을 가면서 친구가 계속 경적을 누릅니다. "이사람, 조심하게." 자세히 보니 경적 울리는 사람 거의가 다 한국사람입니다.
돈 많은 친구 하나가 사업을 크게 하다가 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여기저기 좋다는 병원은 다 가보았지만 희망이 없다 하여 서둘러 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의사가 다 진찰한 후 진단을 내립니다. "당신의 조급증 때문에 병이 더 깊어졌소. 자꾸만 이 약 저 약 많이 쓴 탓에 약물중독이 되었으니 모든 약을 다 끊으시오. 식사를 천천히 하되 급하거든 차라리 먹지 마시오." 그러면서 약을 하나도 주지 않더랍니다. 평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약 기운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랍니다. 조급해서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빨아서 먹어라"하고 넣어주지만, 입 속에서 세 번을 못 굴리고 와자작 깨물어버립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기다리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전된 신앙 관계를 말씀합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쾌락주의, 엑스터시(ecstasy)가 종교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종교는 종교대로 형식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거룩한 순종은 사라지고 형식뿐입니다. 전통을 내세우면서 성령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성경은 지식뿐이요 영적 기도생활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계적이고 습관적입니다. 관념적인 신앙이요, 감사와 감격이 없으며, 찬양은 단지 노랫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건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능력을 생산합니다. 죄를 이기고 허무를 이기고 고독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는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능력 없는 경건, 자기를 이길 수 없는 능력, 죄와 욕망을 이길 수 없는, 실패해버린, 무능한 경건은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고, 알맹이가 있고, 실속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세를 특징지어서 변질된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자기 사랑은 존재를 상실케 합니다. 돈 사랑은 가치를 상실케 합니다. 쾌락 사랑은 목적을 상실케 합니다. 목적이 없으므로 쾌락을 추구합니다. 쾌락을 목적하는 것처럼 허무하고 절망적인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알라. 그리고 돌아서라."
알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말세를 알라, 이 모든 일들이 당연지사(當沿之事)임을 알라, 예수님은 누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 24:6)." 이런 환난의 때, 고통의 때가 이르리라고 마태복음 24-25장에 걸쳐 구구절절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놀라지 말고, 이상하게 생각지도 말라. 마귀의 계책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라.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주님께서 가까이 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 또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라. 미움으로부터 돌아서고, 믿음으로 돌아서고 사랑으로 돌아서고 경건으로 돌아서라. 행동으로써, 타협하지 말고 용기 있게 돌아서라.'
예수님의 모범을 보십시다. 사단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시험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라고 호통치십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지 말도록 간(諫)할 때에도 냉혹히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그런가하면 겟세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기도하실 때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하고 기도하십니다. 깨끗하게 헌신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하여 권고하십니다. 초연하게, 고고한 믿음으로, 경건한 능력으로 이 세대를 분변(分辨)하며 이 모든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바른 신앙, 바른 경건으로 살아가라고. 이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디모데후서 3장 1절~5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해마다 정초가 되면 일년 운수를 점쳐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본다, 화투점을 쳐본다 하고 신수를 점치느라 바쁜 모습들을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으레 그렇겠거니 하지만, 명색이 교인들이 토정비결을 들고 다니는 것은 참으로 꼴불견입니다. 하기야 앞에 무슨 일이 놓여 있을까, 금년 신수는 어떨까 하고 궁금히 여기는 데에는 한 가닥 동정의 여지가 없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대로, '셰이킹 파운데이션(shaking foundation)'---기초가 흔들리고 아예 터전까지 흔들리는 변화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주 뼈저리게 체험하고 아주 실감합니다. 어제의 우방이 오늘은 철천지원수가 되고, 어제의 적이 오늘은 친구가 됩니다. 손바닥 뒤집듯 쉽게 뒤집어지기 잘하는 세상입니다. 이대로 나가면 금년 한 해 동안에도 얼마나 굉장한 변화를 겪어야 할 것인지 내심 염려도 됩니다. 가치 기준도 없고 종교도 무력해지고 근본마저 뿌리째 흔들리는 무서운 불안정, 불확실의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가 한 살을 더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한 살 더 늙었고 한 살 더 세상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언제 닥칠지는 알 수 없으되 죽음에 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후회한다 하여 그것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고쳐 볼 길이 없습니다. 이제 새롭게 무엇을 건설하고 새롭게 무엇을 계획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놓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절실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장막을 걷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세상은 날로 더 어지러워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시점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모든것이 흔들리고 변하는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끝까지 변치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유언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을 남겼는데, 맨처음 쓴 편지가 데살로니가전서요, 이 디모데후서가 마지막 편지입니다. 임종 직전에,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이 말씀은 알아도 좋고 몰라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을 일, 다가오는 미래의 현실, 실제적인 것, 이것을 알고 있으라는 당부입니다.
현대를 가리켜 '지식 공해(知識公害)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많은 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정보 공해입니다. 일본에 가 있는 친구 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곳에는 바닷가 여기저기에 오두막을 여러 채 지어놓은 휴양소가 있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화도 라디오도 신문도 전혀 없답니다. 심지어 비누조차 없다고 합니다. 완전히 문명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태고의 시대로 되돌아가 있습니다. 이곳에 가서 모든 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며칠 푹 쉬었다 오면 그야말로 참된 휴식이 된답니다.
전화야말로 공해가 아닙니까? 텔레비전과 라디오, 이런 것은 또 얼마나 말썽입니까? 많은 것을 보고 듣고 해서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전부 피상적인 것이지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온갖 세상일을 다 떠맡은 듯이 걱정들을 합니다. 여러분, 알아야 할 것만 아십시다. 생각해야 할 부분만 집중적으로 생각하십시다. 폭넓게 이것저것을 섭렵하는 것도 좋지만, 쉰이 넘으신 분이라면 한 가지 일만 똑똑히 하십시다. 이것 한다 저것 한다, 이 생각 저 생각하시지 말고 한 가지 일만 집중적으로 깊이 알고 깊이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특징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첫째, 네가 알아야 할 일, 여러분과 제가 다같이 알아야 할 일, 현시점에서 내가 알아야 할 일, 생명에 관한 것, 영생에 관하여 내가 오늘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로, 이것은 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대개가 과거에 관한 것입니다. 과거에 관한 지식도 물론 필요합니다마는 그것은 미래를 전제할 때에 소용되는 것입니다. 미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일도 현재의 일도 아니요, 흔히 말하는 정보(情報)도 아닙니다.
반드시 있을 일, 이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끝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지막(end;the last)을 알라-----결국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수의(壽衣)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지내야 합니다. 바로 어제 겪은 일입니다. 신문, 방송을 통해서 이미 보도가 되었습니다마는, 88도로를 지나가다 보니 자동차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 차량은 어느 교회의 버스였습니다. 차체는 산산조각이 나서 널부러져 있고 길바닥에 핏자국이 낭자합디다. 지나치기에도 섬찍했습니다. 어디 이것을 남의 일이라 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일이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목사이므로 임종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간혹 정해진 시간의 임종을 기다리는 분들도 만나게 됩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이지요. 그런데 그 마지막 시간에 그 사람의 일생이 다 드러납니다. 그 사람의 신앙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마지막을 어떻게 마쳐야 하겠습니까? 내 생애의 끝을 어떠한 장면으로 마쳐야 하는가, 이것이 기도 제목이어야 합니다. 어느 연로하신 권사님은 생전에 식사 때마다 "하나님, 따뜻한 봄날에 죽게 해주십시오. 장례식 치르는 사람들이 고생하지 않도록……"하고 기도 드렸습니다. 자녀들이 언짢은 마음에 만류하지만 이 권사님은 요지부동입니다. "내 소원은 그것밖에 없다." 그러더니 정말로 아주 따뜻한 봄날에 가셨습니다. 우리의 끝은 어떻게 될까요? 또 역사의 끝은 어떻게 될 것입니까? 이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오늘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향방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이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의 흐름이 제멋대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방향(direction)이 있습니다. 지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바퀴를 돌리고 계십니다.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사장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 사업할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왜요?" "사업할 만큼 큰 부자도 아니지만 '사장님, 사장님'하는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는데, 요즘에는 노조니 뭐니 하면서 저보고 '이놈 저놈'합니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당신은 사업가가 못됩니다. 당신은 '놈' 소리 안들을 줄 알았나요? 사실이야 남자니까 놈이지 뭘 그래요?"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당신이나 그들이나 똑같은 사람이다,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돈푼이나 있다고 더 잘난 사람인 듯 착각하지 말라. 귀족인 양 양반인 양 행세하지 말라,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중요한 것은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아니겠는가 하고요.
여러분, 역사가 과연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지금 이 시대에 특권층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높은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이셔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벌거숭이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세대가 변하되 곤두박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방향이 있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향방을 알고 오늘을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세상의 진행에 대하여 어두운 시각(視覺)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세(末世)라고 합니다. 말세란 구약적으로는 메시야가 오시기 직전의 때를 말하는 것이며, 신약적으로는 십자가에서부터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주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또한 재림 직전의 시기, 즉 말세의 성격을 이렇게 한마디로 특징짓고 있습니다.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라." 고통 하는 때---'카이로이 칼레포이,' 아주 견디기 어려운 때가 이르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사납다, 거칠다'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바야흐로 폭력의 시대가 오고 악마적인 성격의 때가 오리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몹시도 시달리게 되는 때가 이를 것입니다.
동서 진영이 화해한다고 해서 평화가 오고 유토피아가 이르리라는 기대나 감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넉넉하다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질서가 안정되었다고 평안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보아오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복지국가에는 아무런 사회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도 더 많은 문제로 골치가 아프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요즈음 절감하는 '교통 지옥'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마약으로 인한 지옥은 어떻습니까? 한때는 에이즈(AIDS) 때문에 온 세계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에 비하면 파급 효과가 오히려 작답니다. 에이즈야 저 하나 죽으면 그만인데, 마약은 나도 죽고 남도 죽입니다. 온 세계가 마약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야 경제문제가 해결되고 교통문제가 해결되고 산업평화가 온다면 참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어려운 세대가 다가옵니다. 고통의 때가 이르고 있습니다. 이 고통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때에는 하나님과 이웃과 자신---이 삼자(三者)의 기본관계가 깨어지고 맙니다.
질서가 무엇입니까? 질서는 정의 위에 세워집니다. 또한 정의는 경건(敬虔)을 뿌리로 하여 자라는 것입니다. 질서란 그것을 아무리 외쳐봐도 정의와 공의의 토대를 놓지 않고는 절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너나할것없이 정의를 외치는데도 정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이 없는 정의는 독재자의 구두선(口頭禪)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경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말세가 되니 이러한 것들이 근본적으로 흔들린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악덕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한 대목 한 대목을 읽어봅시다.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해당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본문은 우선 자아(自我)에 대하여 두 가지 부정적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사랑이요, 둘째는 돈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합니다. 심지어 부모 자식간에도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신만을 위합니다. 이기적입니다.
얼마 전에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습니다. 죽어 가는 어린아이에게 수혈을 해야 했습니다. 당장 급하니까 어머니의 피를 넣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 보십시오. 자기의 미용에 나쁘다며 그것을 거절하더랍니다. 죽어 가는 자식에게 피 한 방울을 아끼는 어머니---말문이 막히는 이기주의입니다. 또한 돈을 사랑합니다. 세속적인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 돈이 아니겠습니까? 다들 돈이라는 것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돈으로 해서 빚어지는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타락한 자의 태도에 대해서는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라고 말씀합니다. 현대인은 참으로 교만합니다.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쥐뿔도 없으면서, 교만합니다. 어느 대학에 데모가 심했습니다. 교수 한 분이 생각하기를, 자신은 특별한 보직도 없고 성실하게 가르쳐왔으니 자기 말은 들어주겠거니 하여 데모대열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교수님 나오셨습니까?" 학생들에게서 인사를 받을 줄 알았는데 웬걸, "야, 너 좀 똑똑히 가르쳐!"하고 소리치더랍니다. 깜짝 놀라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래, 너희 말이 맞다. 내가 엉터리다.' 그래서 사표를 내고 말았습니다. 10년이나 걸려 박사학위를 따고 공부하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한 사람입니다. 제가 사직을 만류해보았으나 아무리 권면해도 그분은 생각을 돌이키지 않습니다. "제가 엉터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디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마는 여러분, 솔직히 이야기해봅시다. 우리가 뭐 좀 안다고 한들 무엇을 얼마나 알겠습니까? 가진 것은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이렇다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저 백지상태일 뿐입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교만이라는 허세일 뿐입니다. 스스로 여기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웃에 대해서, 가정과 사회를 구분해서 생각해봅시다.
먼저 가정에 대해서는 다섯 가지를 말씀합니다.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원한 관계가 이렇게 심화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원수로 여기고 자식을 원수처럼 생각합니다. 모두 병리적 현상입니다. 감사할 줄 모릅니다. 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원한 때문에 저 죽고 남 죽이는 줄 모르는 채 끝까지 원한을 품고 사는 불행한 사람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사회에 대해서는 일곱 가지를 말씀합니다.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현대인의 특징 가운데 조급함이 있습니다. 제가 북경에 갔을 때 들은 이야기입니다. 등소평씨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일본사람들이 자랑삼아 초특급 신간선(新幹線) 열차를 태워주었답니다. 중국에서는 기차가 형편없이 느리게 달립니다. 그런데 시속 200km나 달리는 기차를 탔으니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일본사람들이 이 점을 노리고 일부러 꾸민 일이지요. 수행 기자가 기차 안에서 묻습니다. "어떻습니까, 상당히 빠르지요?" 등소평씨가 껄껄 웃으며 대답합니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뭐가 그리 급하노?"
과연 그렇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야단들입니까? 조급하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십니까? 클랙슨 울리지 마십시오.
빵빵거린다고 좀 나아집니까? 이런 사람 틀림없이 일찍 죽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입니다. 눈이 하얗게 덮인 길을 가면서 친구가 계속 경적을 누릅니다. "이사람, 조심하게." 자세히 보니 경적 울리는 사람 거의가 다 한국사람입니다.
돈 많은 친구 하나가 사업을 크게 하다가 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여기저기 좋다는 병원은 다 가보았지만 희망이 없다 하여 서둘러 미국으로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의사가 다 진찰한 후 진단을 내립니다. "당신의 조급증 때문에 병이 더 깊어졌소. 자꾸만 이 약 저 약 많이 쓴 탓에 약물중독이 되었으니 모든 약을 다 끊으시오. 식사를 천천히 하되 급하거든 차라리 먹지 마시오." 그러면서 약을 하나도 주지 않더랍니다. 평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약 기운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랍니다. 조급해서 기다리지를 못합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주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빨아서 먹어라"하고 넣어주지만, 입 속에서 세 번을 못 굴리고 와자작 깨물어버립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기다리는 것부터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역전된 신앙 관계를 말씀합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쾌락주의, 엑스터시(ecstasy)가 종교화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종교는 종교대로 형식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거룩한 순종은 사라지고 형식뿐입니다. 전통을 내세우면서 성령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성경은 지식뿐이요 영적 기도생활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계적이고 습관적입니다. 관념적인 신앙이요, 감사와 감격이 없으며, 찬양은 단지 노랫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건은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능력을 생산합니다. 죄를 이기고 허무를 이기고 고독을 이기고 사단을 이기는 능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능력 없는 경건, 자기를 이길 수 없는 능력, 죄와 욕망을 이길 수 없는, 실패해버린, 무능한 경건은 소용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고, 알맹이가 있고, 실속이 있는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세를 특징지어서 변질된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자기 사랑은 존재를 상실케 합니다. 돈 사랑은 가치를 상실케 합니다. 쾌락 사랑은 목적을 상실케 합니다. 목적이 없으므로 쾌락을 추구합니다. 쾌락을 목적하는 것처럼 허무하고 절망적인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이것을 알라. 그리고 돌아서라."
알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말세를 알라, 이 모든 일들이 당연지사(當沿之事)임을 알라, 예수님은 누누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마 24:6)." 이런 환난의 때, 고통의 때가 이르리라고 마태복음 24-25장에 걸쳐 구구절절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놀라지 말고, 이상하게 생각지도 말라. 마귀의 계책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라. 알곡과 쭉정이를 고르는 시간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주님께서 가까이 임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 또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돌아서라. 미움으로부터 돌아서고, 믿음으로 돌아서고 사랑으로 돌아서고 경건으로 돌아서라. 행동으로써, 타협하지 말고 용기 있게 돌아서라.'
예수님의 모범을 보십시다. 사단이 예수님께 나아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시험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마 4:10)"라고 호통치십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가 십자가를 지시지 말도록 간(諫)할 때에도 냉혹히 말씀하십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 16:23)." 그런가하면 겟세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기도하실 때에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하고 기도하십니다. 깨끗하게 헌신하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를 향하여 권고하십니다. 초연하게, 고고한 믿음으로, 경건한 능력으로 이 세대를 분변(分辨)하며 이 모든 악으로부터 돌아서서 바른 신앙, 바른 경건으로 살아가라고. 이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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