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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을 향한 결심(누가복음 9장 51절~62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사람은 어떤 때에 강하고 어떤 때에 약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적인 약세(弱勢), 경제 적인 빈곤, 육체의 질병, 지식의 빈약, 경험의 부족……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병듦으로 오히려 의지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억압당함으로 더욱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함으로 믿음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역경(逆境)에서 내적(內的) 존재가 더 탄탄해질 수 있고, 난관(難關) 앞에서 더 큰 용기가 생겨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원인은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양심의 가책(呵責)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그 평판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내부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으면 속사람이 나약해져서, 이를테면 목소리도 거칠고 행동도 마치 강한 것처럼 하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에 인간은 비굴할 정도로 약해집니다.
둘째는 확실한 목적이 없을 때에 약해집니다. 사람이란 내 인생을 다 걸만큼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여기 머물러야 하는지 모를 때, 다시 말하면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없을 때에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라고 하는 물음의 해답이 없는 생을 사는 것처럼 인생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자녀들한테 소망을 걸어 그들을 잘 키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데 목적을 두고 살다가,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춘기도 되고 대학생이 되고, 더 자라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부모님을 거역하게 되면, 그때에 가서 허탈상태에 빠져 가지고 '내가 이런 자식을 위해 일생을 바쳐왔던가. 나는 인생을 헛살았구나!'하고 탄식하는 부모님을 많이 만납니다. 처음부터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러한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 목적에 대하여 의심이 생겨서도 안됩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한결같은 목적, 가면 갈수록 잘했다 싶은 그런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 목적이 흔들릴 때에 사람은 약해집니다.
셋째는 이기적(利己的)인 생각을 할 때에 약해집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게 이익이 돌아온다고 여겨져 잠시잠깐 힘이 생기는 것 같아도 이런 힘은 순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양심의 성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를 성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심의 노예가 되고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어 인간이 약해집니다. 인간은 워낙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소라도 남을 위하고, 그래도 나딴에는 사회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고,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섬기고 봉사한다고 할 때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위주로 산다면 약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을 위해서 강한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넷째로, 뚜렷한 결단이 있을 때에 강합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것이 목적일까 저것이 뜻일까?---이같이 결단 없는 시간을 살아가느라면 별수 없이 비굴하고 약해지는 법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마음, 결정이 없는 삶이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결정이 있고, 그리고 그 결정이 불변하여 소위 외곬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일생을 통해서 초지일관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행위를 한번 진단해보십시다. 생각이 먼저 갑니까 행동이 먼저 갑니까? 행동을 먼저 하고 뒤에 생각하는 것입니까? 생각하고 뛰는 것입니까 뛰면서 생각하는 것입니까?---어떤 욕구와 욕망에 끌려서, 혹은 불가피성에 끌려서, 행동부터 먼저 해놓고 그 뒤에 생각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다운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정이 먼저 가고 지식이 뒤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 불쑥 기분 나쁜 말을 다 토해버리고, 욕할 것 다 해버리고, 화낼 것 다 내어버리고,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잘못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을 변명하느라고 진땀을 흘립니다. 구차한 변명, 억지로 억지로 합리화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참 비굴한 사람입니다. 많이 생각하고, 나중 일까지 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성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고 감정주도적으로 산다면 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사건이 먼저 있고 결단이 있는 것인지, 결정이 있고 사건이 있는 것인지---이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먼저 생각을 하고 계획하고, 그리고 행동한다면 사건을 내가 만드는 것이요 창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말려들어서 행동을 해버리고 뒤늦게 이 사건을 수습해야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 됩니다.
결단이 있고 행동할 때에 강함이 있고, 이것을 인간다운 행위라 하겠습니다. 유대사람 가운데에 힐렐이라고 하는 훌륭한 랍비가 있습니다. 이분이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 일을 하지 아니한다면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만일 지금 하지 않는다면 언제 할 것인가? 만일 나 자신만을 위하여 이 일을 한다면 내 존재는 어떤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해야 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목적을 바로 세워야 한다---이런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결심도 없고, 결심을 실천하는 능력도 없는, 말하자면 의미 없는 세월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재산도 많고 인격적으로 높이 존경받는 어느 성공한 사람에게 후배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서슴지 않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세 계명을 지니고 다녔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술 마시고 하는 일은 다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술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입에 댈 것이 못된다. 둘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 세상에 고통이 따르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셋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것---운명도 결과도 근심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러자 "그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후배들은 쉽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후배들을 보고 그 사람은 일침을 놓았습니다. "알기는 다 알면서도 실천하는 사람이 없다."
여러분, 성공의 비결이 별난 것이 아닙니다. 요사이는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라느니, 어떻게 해야 경영에 성공한다느니, 어떻게 하면 백만장자가 된다느니 하는 책들도 많이 쏟아져나옵니다 마는 그런 것 읽어서 뾰족한 결과를 얻은 사람 있습디까? 문제는 '실천'입니다. 미국에 백화점을 처음으로 열었던 대실업가 와너메이커(Wanamaker, John)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격이 훌륭해서 장관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나라 일에 사업에 숨돌릴 새 없이 바삐 돌아가는데도 그는 주일날만 되면 교회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바쁜데도 어떻게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치기까지 할 수 있는가?" 그는 대답했습니다. "이 일은 45년 전에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들 가르치는 이 일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참된 직무다. 그 밖의 다른 일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대수롭잖은 것들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약속을 며칠이나 지켜보았습니까? '다른 일은 다 몰라도 이것 한 가지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그래서 지켜 나오고 있는 '약속'이 있습니까? 만일에 그런 일이 없이 되는대로 살아왔다면,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약속 있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는 삶---분명한 '결정'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결정이 있고, 굳게 결심을 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절)"----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처럼 예수께서 '결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은 우연사가 아닌 것입니다. 어쩌다가, 일이 어떻게 잘못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셨습니다.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관철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결정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첫째, 예수님은 아시고 결정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회의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핍박받을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도 하시고 예언도 하시고, 그러면서 올라가십니다. 빌라도 법정의 모순도 아십니다. 골고다 언덕의 고통도 아십니다.
수욕(羞辱)을 다 아십니다. 다 아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올라가고 계십니다. 사건 자체를 확실하게 아셨고, 사건의 의미를 아셨고, 사건의 결말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final destination)--마지막 운명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운명이 종국에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 이 종말을 아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무지할 때에 오히려 용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용기는 만용이지 참된 용기가 아닙니다. 확실하게 알고 결정한 것이라야 진정한 용기입니다.
둘째,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라고 했습니다. 이 기약이라고 하는 것, 타이밍(timing)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이 틀리면 안됩니다. 개인의 일이건 나라 일이건,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싯점(時點)을 바로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스케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큰 시간---이것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오늘 어떠한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가, 그것을 알고 그 시간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부터 오래오래 예언해 내려온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역사가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그 많은 예언들이, 오늘에 와서 예수 안에서 실현됩니다. 성취되는 시간입니다. 그런고로, 마땅히 하나님의 그 귀한 뜻, 하나님의 큰 경륜의 시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그 경륜 안에서 나에게 향한 시간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그 짧은 시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계십니까?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건강이 얼마나 남았으며 정력이 얼마나 남았으며, 내가 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이며, 내게 지혜가 얼마이며, 내게 주어진 급박한 시간이 얼마나 있습니까? 흔히들 내 나이를 내가 바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얼마의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현재, 이 싯점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젊은 사람들을 가만히 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데 빈둥거리고 노는 것을 봅니다. 공부 아닌 다른 짓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 것을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나이가 많아지고 다 아시는대로 돋보기안경을 쓰기 시작하면 정신이 가물가물해집니다. 돋보기안경을 끼고 본 책은 기억되는 것이 없습니다. 노인들 가운데도 기억력 좋은 분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사람 이름이며 때나 장소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옛날에 기억해둔 것이지 나이든 다음에 기억해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를 해도 경험을 해도 젊었을 때에 해두어야 합니다. 지나간 다음에는 도리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후회해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젊은 싯점, 준비하는 기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여러분, 내게 향한 시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싯점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봉사를 요구하는 분들의 필요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도와야 할 사람들이 항상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제해야 할 사람들이 언제나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저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저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 시간(타이밍)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더라도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돕다가는 내가 어떻게 될까부터 생각했지만, 사마리아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기약이 차가매"-----하나님의 시간과 내게 향한 시간과 구원받아야 할 많은 심령들의 시간을 합쳐서 단호히 시간을 정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굳게 결심하십니다. 결코 선택적이요 불가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굳게 결심하십니다. 여러분, 결심이란 하나를 얻는 결심인 동시에 아홉을 버리는 결심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시간인 동시에 인간의 뜻을 버리는 결심입니다. 반드시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밖의 것은 버려야 합니다.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굳게 결심한 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조금도 굽힘 없이, 조금도 수정 없이 끝까지 관철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운명을 맡기고, 십자가에 목표를 두고, 그리고 매진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두 가지를 다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옛 중국의 한 여인이 재물이 많고 음식이 훌륭한 동쪽 집에서 먹고, 아름다운 사내가 있는 서쪽 집에서 잠자기를 원했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선택할 생각은 품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아버지께 배운 재미있는 유머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술에 밥 말아 떡을 안주해서 먹겠다고 했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만 선택해야 됩니다. 우리의 결심은 얻는 결심인 동시에 버리는 결심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심을 관철할 때에는 상황이라든가 오해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오해를 무릅쓰기로 결정하십니다.
여러분, 오해 없이 되는 일이 있습디까? 어떤 사람들은 오해 없이 하겠다고 하다가 아무 일도 못합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이 깨끗합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 정치가들에게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좀더 꿋꿋하게 밀고 나가지를 못하고 백성에게 아첨하는 정치가들은 볼장 다 본 사람들입니다. 누구 눈치를 보자는 것입니까? 진리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도 좋고 저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오해가 많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오늘도 오해 투성이올시다. 사마리아를 거쳐가시려고 했더니 사마리아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메시야가 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왕이 된다고 하는 여론이 있으니까, 사마리아 사람들로서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서로 시기 질투하는 사이인 만큼 '우리 구역은 못 지나간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과 야곱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했겠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그런 오해, 이 시간에는 풀 수도 없고 설명할 길도 없는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해를 무릅쓰기로 합시다. 경제적인 오해, 정치적인 오해, 명예의 손해,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다 각오하고 그냥 밀어붙이십시오.
그것이 십자가로 통하는 길입니다. 이것저것 다 생각하고 나면 십자가 질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생명을 위탁했고, 방법도 위탁했습니다. 어떠한 방법이 어떻게 전개되든 그 프로세스(process)에 대해서 이의가 없으십니다. 또한 그 결과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로 향해 가십니다. 이제 여기 따르는 사람도 비상한 결심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상징적으로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감상적이요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습니다, 절대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일시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또 하나는 갈등형입니다. 따르긴 하겠는데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니 아버지 장례식 치른 다음에 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어느 쪽을 택할까, 언제나 저울질하다가 끝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재미있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노처녀 시집 못가는 이유 열 가지를 들었는데, 다 잊어버렸습니다마는 하나는 기억납니다. 세상에 없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니 못간다는 것입니다.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신앙 좋고 뭐 좋고…… 다 좋은 사람이 세상에 있나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중요한 것 한두 가지만 맞으면 나머지는 다 덮어놓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데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밖의 부분은 전부 희생해야 됩니다. 주저하는 사람도 안됩니다. 집에 돌아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람은 집에 돌아가면 못돌아 올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로사끼 고기찌(黑崎辛吉)라고 하는 일본 목사님이 교인을 열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놓았는데 재미있어서 한번 소개합니다. 찬송가 신자---찬송만 좋아하지 신자는 아닌 사람입니다. 유전 신자---아버지 어머니가 믿으니까 따라다닐 뿐입니다. 의리상의 신자---목사님이 한번 심방하면 한번 나와주는 신자입니다. 기분파 신자---기분에 따라 어떤 날은 나가고 어떤 날은 나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비오는 날이면 더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갈 데가 없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만년 구도자(求道者)---밤낮 공부한다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떠돌이---이 교회 저 교회 순례자로, 이를테면 서울장안에 가보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다. 감격 도취형---늘 굉장한 감격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때에 보면 싸늘하게 식어 있어요. 추앙 추대형---집사니 장로니 하는 직분은 밝히고 교인 되기는 싫어합니다. 집사 노릇, 장로 노릇은 극성스러운데 교인 노릇은 없는 사람입니다. 유명형(有名型)---이름만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복형(祈福型)---복 받자고 교회 나오는 교인입니다. 한편, 오스월드 스미스라고 하는 캐나다의 목사님은 참 기독교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몇몇 유형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목적이 하나만 있는 사람---교회에 나올 때도 참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마음, 죄 사함 받고 구원 얻겠다고 하는 오직 하나의 기본적인 목적만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저런 소원이 많으면 신앙생활 바로 할 수 없습니다. 그밖에 장애물을 극복하는 사람,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 기도의 체험이 있는 사람, 말씀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 그리고 간증과 메시지가 있는 사람,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런 사람이 참된 교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갑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종 결심을 하셨습니다. 영원히 흔들릴 수 없는 마지막 결정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지막 결정을 하고 주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목적을 물어보십시다. 그리고 결심을 다시 하십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에라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결심(누가복음 9장 51절~62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사람은 어떤 때에 강하고 어떤 때에 약한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적인 약세(弱勢), 경제 적인 빈곤, 육체의 질병, 지식의 빈약, 경험의 부족……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드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병듦으로 오히려 의지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억압당함으로 더욱 강건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함으로 믿음이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역경(逆境)에서 내적(內的) 존재가 더 탄탄해질 수 있고, 난관(難關) 앞에서 더 큰 용기가 생겨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사람의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원인은 네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양심의 가책(呵責)입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그 평판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내부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으면 속사람이 나약해져서, 이를테면 목소리도 거칠고 행동도 마치 강한 것처럼 하게 됩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에 인간은 비굴할 정도로 약해집니다.
둘째는 확실한 목적이 없을 때에 약해집니다. 사람이란 내 인생을 다 걸만큼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여기 머물러야 하는지 모를 때, 다시 말하면 삶의 목적을 분명히 알 수 없을 때에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라고 하는 물음의 해답이 없는 생을 사는 것처럼 인생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자녀들한테 소망을 걸어 그들을 잘 키워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데 목적을 두고 살다가, 아이들이 자라면서 사춘기도 되고 대학생이 되고, 더 자라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부모님을 거역하게 되면, 그때에 가서 허탈상태에 빠져 가지고 '내가 이런 자식을 위해 일생을 바쳐왔던가. 나는 인생을 헛살았구나!'하고 탄식하는 부모님을 많이 만납니다. 처음부터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러한 탄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그 목적에 대하여 의심이 생겨서도 안됩니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한결같은 목적, 가면 갈수록 잘했다 싶은 그런 목적을 두고 사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이 목적이 흔들릴 때에 사람은 약해집니다.
셋째는 이기적(利己的)인 생각을 할 때에 약해집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게 이익이 돌아온다고 여겨져 잠시잠깐 힘이 생기는 것 같아도 이런 힘은 순간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기심은 양심의 성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도 나를 성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심의 노예가 되고 정욕에 사로잡히게 되어 인간이 약해집니다. 인간은 워낙 도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다소라도 남을 위하고, 그래도 나딴에는 사회를 위하고 세계를 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고,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섬기고 봉사한다고 할 때에 강해지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위주로 산다면 약해지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을 위해서 강한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넷째로, 뚜렷한 결단이 있을 때에 강합니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이것이 목적일까 저것이 뜻일까?---이같이 결단 없는 시간을 살아가느라면 별수 없이 비굴하고 약해지는 법입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는 마음, 결정이 없는 삶이면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결정이 있고, 그리고 그 결정이 불변하여 소위 외곬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 일생을 통해서 초지일관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행위를 한번 진단해보십시다. 생각이 먼저 갑니까 행동이 먼저 갑니까? 행동을 먼저 하고 뒤에 생각하는 것입니까? 생각하고 뛰는 것입니까 뛰면서 생각하는 것입니까?---어떤 욕구와 욕망에 끌려서, 혹은 불가피성에 끌려서, 행동부터 먼저 해놓고 그 뒤에 생각하는 사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다운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정이 먼저 가고 지식이 뒤에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 불쑥 기분 나쁜 말을 다 토해버리고, 욕할 것 다 해버리고, 화낼 것 다 내어버리고, 그리고 나서 생각해보니 잘못되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을 변명하느라고 진땀을 흘립니다. 구차한 변명, 억지로 억지로 합리화하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참 비굴한 사람입니다. 많이 생각하고, 나중 일까지 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성이 필요한데 그렇지 않고 감정주도적으로 산다면 약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사건이 먼저 있고 결단이 있는 것인지, 결정이 있고 사건이 있는 것인지---이것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먼저 생각을 하고 계획하고, 그리고 행동한다면 사건을 내가 만드는 것이요 창조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말려들어서 행동을 해버리고 뒤늦게 이 사건을 수습해야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 됩니다.
결단이 있고 행동할 때에 강함이 있고, 이것을 인간다운 행위라 하겠습니다. 유대사람 가운데에 힐렐이라고 하는 훌륭한 랍비가 있습니다. 이분이 쓴 책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 일을 하지 아니한다면 누가 이 일을 할 것인가? 만일 지금 하지 않는다면 언제 할 것인가? 만일 나 자신만을 위하여 이 일을 한다면 내 존재는 어떤 것인가?' 이 세 가지 질문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가 해야 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목적을 바로 세워야 한다---이런 해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결심도 없고, 결심을 실천하는 능력도 없는, 말하자면 의미 없는 세월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재산도 많고 인격적으로 높이 존경받는 어느 성공한 사람에게 후배들이 물어보았습니다.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서슴지 않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세 계명을 지니고 다녔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술 마시고 하는 일은 다 잘못된 일이기 때문이다. 술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입에 댈 것이 못된다. 둘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 것---이 세상에 고통이 따르지 않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고통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셋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것---운명도 결과도 근심도 다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러자 "그것이 어렵다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하고 후배들은 쉽게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후배들을 보고 그 사람은 일침을 놓았습니다. "알기는 다 알면서도 실천하는 사람이 없다."
여러분, 성공의 비결이 별난 것이 아닙니다. 요사이는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라느니, 어떻게 해야 경영에 성공한다느니, 어떻게 하면 백만장자가 된다느니 하는 책들도 많이 쏟아져나옵니다 마는 그런 것 읽어서 뾰족한 결과를 얻은 사람 있습디까? 문제는 '실천'입니다. 미국에 백화점을 처음으로 열었던 대실업가 와너메이커(Wanamaker, John)은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인격이 훌륭해서 장관까지 지낸 사람입니다. 나라 일에 사업에 숨돌릴 새 없이 바삐 돌아가는데도 그는 주일날만 되면 교회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바쁜데도 어떻게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가르치기까지 할 수 있는가?" 그는 대답했습니다. "이 일은 45년 전에 하나님과 약속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들 가르치는 이 일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참된 직무다. 그 밖의 다른 일들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대수롭잖은 것들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약속을 며칠이나 지켜보았습니까? '다른 일은 다 몰라도 이것 한 가지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그래서 지켜 나오고 있는 '약속'이 있습니까? 만일에 그런 일이 없이 되는대로 살아왔다면, 도대체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약속 있는 생을 살아야 합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는 삶---분명한 '결정'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결정이 있고, 굳게 결심을 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51절)"----오늘의 본문 말씀은 이처럼 예수께서 '결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은 우연사가 아닌 것입니다. 어쩌다가, 일이 어떻게 잘못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셨습니다. 결심하셨습니다. 그리고 끝내 관철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의 결정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첫째, 예수님은 아시고 결정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 회의를 마치고 기다리는 중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핍박받을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도 하시고 예언도 하시고, 그러면서 올라가십니다. 빌라도 법정의 모순도 아십니다. 골고다 언덕의 고통도 아십니다.
수욕(羞辱)을 다 아십니다. 다 아시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올라가고 계십니다. 사건 자체를 확실하게 아셨고, 사건의 의미를 아셨고, 사건의 결말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이 파이널 데스티네이션(final destination)--마지막 운명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운명이 종국에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실, 이 종말을 아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셨습니다. 무지할 때에 오히려 용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용기는 만용이지 참된 용기가 아닙니다. 확실하게 알고 결정한 것이라야 진정한 용기입니다.
둘째,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라고 했습니다. 이 기약이라고 하는 것, 타이밍(timing)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시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이 틀리면 안됩니다. 개인의 일이건 나라 일이건,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싯점(時點)을 바로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시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스케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큰 시간---이것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오늘 어떠한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가, 그것을 알고 그 시간에 나를 맞춰야 합니다. 특별히 구약성경에서부터 오래오래 예언해 내려온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역사가 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그 많은 예언들이, 오늘에 와서 예수 안에서 실현됩니다. 성취되는 시간입니다. 그런고로, 마땅히 하나님의 그 귀한 뜻, 하나님의 큰 경륜의 시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알아야 할 것은 그 경륜 안에서 나에게 향한 시간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그 짧은 시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시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계십니까? 육체의 남은 때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건강이 얼마나 남았으며 정력이 얼마나 남았으며, 내가 내 마음대로 돈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이며, 내게 지혜가 얼마이며, 내게 주어진 급박한 시간이 얼마나 있습니까? 흔히들 내 나이를 내가 바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얼마의 시간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현재, 이 싯점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젊은 사람들을 가만히 봅니다.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데 빈둥거리고 노는 것을 봅니다. 공부 아닌 다른 짓 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 것을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나이가 많아지고 다 아시는대로 돋보기안경을 쓰기 시작하면 정신이 가물가물해집니다. 돋보기안경을 끼고 본 책은 기억되는 것이 없습니다. 노인들 가운데도 기억력 좋은 분들이 있어요. 이를테면 사람 이름이며 때나 장소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옛날에 기억해둔 것이지 나이든 다음에 기억해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를 해도 경험을 해도 젊었을 때에 해두어야 합니다. 지나간 다음에는 도리가 없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고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후회해본들 소용이 없습니다. 젊은 싯점, 준비하는 기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여러분, 내게 향한 시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싯점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봉사를 요구하는 분들의 필요를 생각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도와야 할 사람들이 항상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구제해야 할 사람들이 언제나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저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저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 시간(타이밍)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더라도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돕다가는 내가 어떻게 될까부터 생각했지만, 사마리아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저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될까,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있습니다.
"기약이 차가매"-----하나님의 시간과 내게 향한 시간과 구원받아야 할 많은 심령들의 시간을 합쳐서 단호히 시간을 정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굳게 결심하십니다. 결코 선택적이요 불가피적인 것이 아닙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굳게 결심하십니다. 여러분, 결심이란 하나를 얻는 결심인 동시에 아홉을 버리는 결심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는 시간인 동시에 인간의 뜻을 버리는 결심입니다. 반드시 하나를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밖의 것은 버려야 합니다. 다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굳게 결심한 다음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조금도 굽힘 없이, 조금도 수정 없이 끝까지 관철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운명을 맡기고, 십자가에 목표를 두고, 그리고 매진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두 가지를 다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옛 중국의 한 여인이 재물이 많고 음식이 훌륭한 동쪽 집에서 먹고, 아름다운 사내가 있는 서쪽 집에서 잠자기를 원했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렇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선택할 생각은 품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아버지께 배운 재미있는 유머입니다. 어떤 사람이 술을 먹겠느냐, 밥을 먹겠느냐, 떡을 먹겠느냐 하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술에 밥 말아 떡을 안주해서 먹겠다고 했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만 선택해야 됩니다. 우리의 결심은 얻는 결심인 동시에 버리는 결심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심을 관철할 때에는 상황이라든가 오해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오해를 무릅쓰기로 결정하십니다.
여러분, 오해 없이 되는 일이 있습디까? 어떤 사람들은 오해 없이 하겠다고 하다가 아무 일도 못합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이 깨끗합니다.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 정치가들에게 한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좀더 꿋꿋하게 밀고 나가지를 못하고 백성에게 아첨하는 정치가들은 볼장 다 본 사람들입니다. 누구 눈치를 보자는 것입니까? 진리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여야 합니다. 이 사람에게도 좋고 저 사람에게도 좋은 일이 있습니까?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오해가 많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오늘도 오해 투성이올시다. 사마리아를 거쳐가시려고 했더니 사마리아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못 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오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서 메시야가 된다고 하는 것 때문에, 왕이 된다고 하는 여론이 있으니까, 사마리아 사람들로서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서로 시기 질투하는 사이인 만큼 '우리 구역은 못 지나간다'고 한 것입니다. 요한과 야곱이 얼마나 화가 났으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했겠어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그런 오해, 이 시간에는 풀 수도 없고 설명할 길도 없는 것이다,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오해를 무릅쓰기로 합시다. 경제적인 오해, 정치적인 오해, 명예의 손해, 어찌 한둘이겠습니까? 다 각오하고 그냥 밀어붙이십시오.
그것이 십자가로 통하는 길입니다. 이것저것 다 생각하고 나면 십자가 질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 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생명을 위탁했고, 방법도 위탁했습니다. 어떠한 방법이 어떻게 전개되든 그 프로세스(process)에 대해서 이의가 없으십니다. 또한 그 결과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로 향해 가십니다. 이제 여기 따르는 사람도 비상한 결심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상징적으로 세 사람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감상적이요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어디로 가든지 따르겠습니다, 절대 충성하겠습니다, 하고 일시적인 감정을 드러냅니다. 또 하나는 갈등형입니다. 따르긴 하겠는데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니 아버지 장례식 치른 다음에 가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어느 쪽을 택할까, 언제나 저울질하다가 끝나는 사람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재미있는 책을 하나 읽었습니다. 노처녀 시집 못가는 이유 열 가지를 들었는데, 다 잊어버렸습니다마는 하나는 기억납니다. 세상에 없는 남자와 결혼하려고 하니 못간다는 것입니다.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신앙 좋고 뭐 좋고…… 다 좋은 사람이 세상에 있나요?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중요한 것 한두 가지만 맞으면 나머지는 다 덮어놓을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데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그밖의 부분은 전부 희생해야 됩니다. 주저하는 사람도 안됩니다. 집에 돌아가서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제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람은 집에 돌아가면 못돌아 올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유부단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구로사끼 고기찌(黑崎辛吉)라고 하는 일본 목사님이 교인을 열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놓았는데 재미있어서 한번 소개합니다. 찬송가 신자---찬송만 좋아하지 신자는 아닌 사람입니다. 유전 신자---아버지 어머니가 믿으니까 따라다닐 뿐입니다. 의리상의 신자---목사님이 한번 심방하면 한번 나와주는 신자입니다. 기분파 신자---기분에 따라 어떤 날은 나가고 어떤 날은 나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비오는 날이면 더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갈 데가 없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만년 구도자(求道者)---밤낮 공부한다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떠돌이---이 교회 저 교회 순례자로, 이를테면 서울장안에 가보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다. 감격 도취형---늘 굉장한 감격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때에 보면 싸늘하게 식어 있어요. 추앙 추대형---집사니 장로니 하는 직분은 밝히고 교인 되기는 싫어합니다. 집사 노릇, 장로 노릇은 극성스러운데 교인 노릇은 없는 사람입니다. 유명형(有名型)---이름만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복형(祈福型)---복 받자고 교회 나오는 교인입니다. 한편, 오스월드 스미스라고 하는 캐나다의 목사님은 참 기독교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를 몇몇 유형으로 나누어 말합니다. 목적이 하나만 있는 사람---교회에 나올 때도 참으로 영생을 얻고자 하는 마음, 죄 사함 받고 구원 얻겠다고 하는 오직 하나의 기본적인 목적만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저런 소원이 많으면 신앙생활 바로 할 수 없습니다. 그밖에 장애물을 극복하는 사람,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 기도의 체험이 있는 사람, 말씀의 은사를 체험한 사람, 그리고 간증과 메시지가 있는 사람,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런 사람이 참된 교인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예수께서 가신 길을 우리도 갑니다. 결단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종 결심을 하셨습니다. 영원히 흔들릴 수 없는 마지막 결정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지막 결정을 하고 주를 따라야 하겠습니다. 목적을 물어보십시다. 그리고 결심을 다시 하십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에라야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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