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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담력(빌립보서 1장 12절~21절)

by 【고동엽】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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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의 담력(빌립보서 1장 12절~21절)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예로부터 우리는 세 가지의 덕을 배우고 가르치고 힘써왔습니다. 지(知)․인(仁)․용(勇)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배우는 것이 이것이요 또 끊임없이 추구해가고 있는 인간형이 그러한 덕을 다 갖춘 인격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인자한 사람,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이것이 군자형(君子刑)의 인간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지식은 높아졌는데 지혜가 없습니다.
지식으로 말하면 상당한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부족한 탓에 시행 착오가 많습니다.
얕은 지식은 많아도 자기 문제 하나를 바로볼 줄 아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에게도, 사회에도, 국가에도 엄청난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이다지도 지혜가 부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능력은 있는데 인자함이 없습니다. 판단력도 있고 비판력도 있습니다.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에는 아주 뛰어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습니다. 덕스러움과 인자함이 결여되어갑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심지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도 비판의 눈은 어떻게나 밝은지 말을 시켜보면 청산유수(靑山流水)입니다. 그러나 덕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인자함을 배우지 못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상당한 기술이 있으나 용기가 없습니다. 능력과 기술로 보아서는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만하면 용기를 가질 만도 한데 그렇게 비참할 수가 없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용기가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용기는 어떤 여건이 갖추어져야 생기는 것인 줄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용기를 어떤 여건의 결과로, 환경의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마는 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용기는 환경의 동기입니다. 모든 여건보다 먼저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습니다. 용기는 상대적이라기 보다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여건에서 용기가 생길 수 있다고. 돈이 있으면 자신감이 생기고 돈이 없으면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옛말에 '장사도 무일푼이면 무안색(無顔色)'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하없는 장사라도 돈 한푼이 없으면 용기가 없다, 안색이 변한다-맞는 말입니다. 우연히 가까운 친구를 만났을 때에 점심이라도 함께 할 돈이 주머니에 있으면 반갑게 인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심 한끼 사겠다고 할 수도 없는 형편에서는 잔뜩 주눅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돈이 용기를 주는 듯이 보입니다마는 돈이 있다고 용기가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돈이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주는 용기란 그저 친구 만나서 점심 한끼 나누는 정도일 뿐, 그 이상으로는 근본적인 용기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용기를 준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또 하나는 지식입니다. 많이 알면 용기가 생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착각입니다. 알면 알수록 더 비겁해집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내가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구나'하고 깨닫게 되기 때문에 지식이 많아질수록 점점 더 근심만 많아지고 용기는 줄어듭니다. 이것 또한 사실입니다.
때로는 사회적인 여건이 용기를 준다고도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지지를 받으면 용기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성원, 칭찬, 존경 따위가 내게 용기를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 또한 잠시의 일일뿐입니다. 그것으로부터 진정한 용기를 얻지는 못합니다.
이제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남습니다. 하나는 도덕적인 용기입니다. 이것은 내적인 용기요, 양심으로부터 성원을 받고 의와 선과 진리 편에 설 때에 가질 수 있는 용기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해도 내 양심이 나를 지지해주기에 용기가 있습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가난해도 선하게 사는 사람에게 용기가 있습니다. 못할 짓 해서 부자가 되면 이 사람은 끝까지 비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도덕적 용기는 중요한 것입니다. 진실이 주는 용기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는 용기는 종교적인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마음에 근거한 용기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참된 용기를 의미합니다. 종교개혁 당시 미르틴 루터에게는 많은 적수가 있었습니다. 교황청으로부터 시작해서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수많은 벽에 부딪혔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것이 그렇게 외롭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것보다 더 문제되는 것은 내적인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이 더욱 그를 괴롭혔습니다. 루터의 책을 읽어보면 유달리 마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마귀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것이 그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마귀가 루터 앞에 나타나서 긴 두루마리를 펼쳐 보입니다. 그 두루마리에는 루터의 죄가 낱낱이 적혀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루터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합니다. 의기양양해진 마귀가 말합니다. "네가 종교개혁을 하겠다고? 이렇게 죄많은 네가 감히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마귀는 루터의 죄의식을 부추겨서 종교개혁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루터의 허물과 죄를 세상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처음에는 루터도 마귀의 계산에 말려듭니다.
그러나 그 순간 불현듯 떠오르는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 말씀이었습니다. 마침내 루터는 그 말씀에 근거해서 마귀에게 당당히 말합니다. "그렇다, 나는 죄인이다. 네가 말하듯이 나는 악하고 부끄러운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그 피가 나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셨다!" 이리하여 루터는 마귀를 이기고 종교개혁을 이룩할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이 용기는 자기 의(義)에 근거한 용기도 아니고 도덕적인 용기도 아닙니다. 물론 경제, 지식, 사회적인 용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것이요, 특별히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심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구속사적 은총적 용기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은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의 용기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를 외치면서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참된 용기는 믿음에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진정한 용기를 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20절)." 여기에서 담대하다는 것은 헬라어로 '파레시아'입니다. 이 말은 '담력'이라고 할 수 있고 '용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담대함과 용기를 같은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용기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영어로는 이것을 'full courage'라고 번역합니다. 충만한 용기, 아주 튼튼한 용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참된 용기는 참사랑에서 비롯됩니다. 용기와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에게는 용기가 없습니다. 사랑받을 때에 용기가 생기고, 사랑할 때에 담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담력입니다. 두려움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죽음과 죄가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죽음을 이기는, 죽음을 넘어서는 생의 뚜렷한 목적 의식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큰 생의 목적! 죽고 사는 문제보다 훨씬 귀하고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에 그는 용기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기를 바란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이처럼 생사를 문제시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죽을까봐 벌벌 떠는 사람처럼 볼품없는 것도 없습니다. '살아도 죽어도 문제되지 않는다'하고 믿는 가운데에 진정한 용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비겁한 사람입니까?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것이 언제 닥칠지 알 도리가 있습니까? 오늘 저녁에 죽을지, 내일 저녁에 죽을지, 죽음은 언제나 현재적인 것으로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니 답답한 사람입니다. 죽으면 끝난다는 사람, 죽으면 내 모든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간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비겁한 사람이요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용기 있는 사람입니까? 뚜렷한 목적이 있기에 그것을 위해서라면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뚜렷한 생의 목적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이 너무 소중해서 살아도 그만, 죽어도 그만입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살아도 좋고 죽어도 좋습니다. 이러한 사랑, 이러한 믿음, 이러한 목적, 그리고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담력 있는 사람입니다.
죽는 것은 언제고 좋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용기였습니다. 또한 그는 현실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볼 줄 아는, 그러한 영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입니까, 없는 일입니까? 지금 힘쓰고 있는 이 일이 헛된 것으로 돌아간다면 참으로 실망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고맙게도 우리들의 수고는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 하나가 모두 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크신 사역에서 그러합니다. 이렇게 영적인 안목으로 사물을 볼 때에 내 수고 내 고난이 참으로 의미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피곤하게 만들고 가장 비겁하게 만드는 것은 허무주의-즉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기를 가진 여인들은 분만 날짜가 가까워오면서 무척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마는 막상 아이가 태어날 때에는 지난날의 고통을 다 잊어버립니다. 왜입니까?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과 수고는 가치로 따져볼 때에 과연 할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 지금 당한 이 현실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을 믿기에 사도 바울은 담대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너무 민감합니다. 당장 손해인가 아닌가, 당장 칭찬을 받나 비난을 받나 하고, 내가 지금 당하는 사건 하나하나에 너무 민감합니다. 그래서 금방 감사했다가 금방 원망하고, 금방 웃었다가 금방 울음을 터뜨립니다. 변덕이 죽끓듯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 모든 현상, 그 깊은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큰 사역을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 신비로운 뜻을 아는 사람은 언제나 담대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의 당한 일, 나의 매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재판도 받아 보지 못하고 그대로 몇 년 동안 억울하게 처박혀 있습니다. 바깥 세상에 나가 마음껏 전도하고 싶으나 길이 막혔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감옥살이를 합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깊이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보니 너무나도 놀랍고 신비로운 일들이 그의 주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시위대 안에 있는 로마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시위대 안에 있는 사람이란 요샛말로 VIP입니다.
바울이 지금 갇혀 있는 곳은 로마 황실의 감옥입니다. 그렇기에 로마 황실에 있는 귀족들 중에서 생각 깊은 사람들이 밤을 타고 하나 둘 그 감옥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전도의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그 로마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사람들이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되어서 마침내 3백 년 뒤 로마는 드디어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감옥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선포될 그 때에 로마의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겨우 9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고관들이 먼저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런 역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이 황실 감옥에 갇혔기 때문이요, 그로 인하여 바울과 시위대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그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겁없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바울 선생님이 감옥에 갇히셨는데 우리가 이렇게 게으름을 피워서야 되겠는가, 바울 선생님은 지금 순교할 날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가 이렇게 벌벌 떨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하고 이 사람들이 더욱 열심을 내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 하나 갇힘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감사했습니다. 또 이것 뿐만도 아닙니다.
선한 일에도 경쟁이 있고 질투가 있습니다. 전도하는 일을 놓고 바울을 경쟁자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快哉)를 불렀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가 열심히 전도해서 사람들을 모으면 바울이 얼마나 배가 아플까?'하고 시기와 질투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을 가리켜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전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현실을 오히려 기뻐하고 있습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
여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충만한 기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기쁨은 인간적인 평판에, 혹은 인기와 칭찬과 존경에 뿌리를 두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평판에 근거를 두고 사는 삶은 참으로 피곤합니다. 변덕스러운 평판, 물거품같은 인기-----다 소용없고 부질없습니다. 이런 것들에 신경쓰다 보면 마침내는 낙심하게 되고 절망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감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명예에 대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요샛말로 인기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만 전파되면 그만이다,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아지면 그만이다'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과 사랑이 그를 기쁘게 했습니다. 그 기쁨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용기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리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라고 말한 세례 요한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떠한 희생, 어떠한 불명예가 온다 해도 그리스도만 영화롭게 되면 그만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기뻐합니다. 그리고 감상적인 판단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감상에 치우쳐서 사실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분에 따라 왔다갔다 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건이 중요하고 사실이 중요하지 기분이 중요합니까? 누구 기분 하나가 문제를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도 지금 기분으로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 사실만을 생각합니다. '나 한 사람의 기분이야 좋든 말든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는 기뻐합니다.
또 더 나아가서는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다'고 말합니다. 이것 또한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우디에 가서 번 돈을 꼬박꼬박 아내에게 부쳐주면서 다른 데에 쓰지 말고 반드시 적금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남편한테서 보내온 돈을 가지고 그 아내는 이자놀이다 뭐다 해서 좀 크게 불어나니까 그것으로 또 흥청망청하다가 그만 다 날려버렸습니다. 이제 남편 돌아오는 날이 되었습니다.
일구월심(日久月深) 기다리고 반갑게 맞이하여야 할 남편이건만, 남편이 돌아오는 날 그 아내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소망도 있고 기대도 있는데 거기에 합당한 현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이 부끄럽고 창피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습니까? 합당한 현실이 있어야 합니다. 기대가 있습니까?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로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고 앞에 있는 소망을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담대했습니다. 소망에 합당한 현실과 생활이 있기에 담대했습니다.
나의 담력이 어디로서 옵니까? 돈 몇푼에서 옵니까? 내 건강, 내 젊음, 내 자녀들에게서 옵니까? 무슨 일이 좀 잘되면 용기가 있고, 또 잘못되면 이내 부끄러워할 것입니까? 그럴 것 없습니다.
큰일은 하지 못한다 해도 오직 믿음으로 부끄러움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능력이 없어도 신앙 가운데에서 담대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이렇다할 칭찬은 받지 못하더라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진실한 용기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확실한 섭리와 경륜을 봅시다.
분명한 최종 승리, 최종 영광,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을 영광을 바라봅시다. 그리할 때에 믿음 안에서 절대적 용기, 절대적 담력으로 살아가는 복된 나날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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