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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하나님(로마서 15장 7절~13절)

by 【고동엽】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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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의 하나님(로마서 15장 7절~13절)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내가 말하노니 그리스도께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위하여 할례의 수종자가 되셨으니 이는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들을 견고케 하시고 이방인으로 그 긍휼하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바, 이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함과 같으니라, 또 가로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저를 찬송하라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가로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르시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하였느니라.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독일 쾰른지방의 어느 건물 지하실 벽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낙서로 남아 있습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 햇빛을 볼 수 없을 때에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는다. 비록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 때에라도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엄연히 계심을 믿는다'-이것은 제2차세계대전 때에 그 지하실에 갇혀 있었던 어느 전쟁 포로가 하나님께 고백한 기도의 말을 새겨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위대한 신앙고백이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그렇게 믿을 수 있습니다. 내 눈에 햇빛이 보이지 않는다 해서 태양이 없는 게 아닙니다. 내가 느끼고 깨닫지 못해도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히 나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저 전쟁포로의 신앙고백을 진지하게 한 번 음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긴한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심지어 교육과 도덕에서까지도 이제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어느 정치가 선했으며, 그 어떤 제도가 사랑의 소망을 만족시켜 주었습니까? 경제가 세상을 편안하게 해준 때가 있었던가요? 어떤 교육이 인간을 인간 되게 제구실했습니까? 오늘 이 세대는 갈수록 캄캄하고 암담합니다. 끝내 절망하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을 것만 같습니다.
의학이 발달한다고 해서 죽지 않고 오래 살 것 같습니까?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기대하지 마십시오. 조금 더 오래 살 수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좀더 잘 먹고, 좀더 좋은 집에서 살 수 있을는지는 모릅니다. 그렇다 해도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발달이 인간에게 참다운 행복과 평화를 줄 수는 없습니다.
배고플 때 먹고 싶은 욕망,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사람한테는 굉장한 생존력이 발동합니다. 배고파서 굶어죽을 정도가 되면 사람이 쥐까지 잡아먹습니다. 그것도 굽거나 요리를 하지 않고 날것으로 마구 먹어치웁니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이토록 먹고 싶은 욕망이 대단합니다. 뭐든지 먹습니다. 그런데 먹고 싶은 욕망이 어느 정도 채워지고 나면 이제 입고 싶은 욕망, 가지고 싶은 욕망이 생깁니다. 집 없는 사람은 자기 집 한칸 마련하려고 지독히도 고생을 합니다. 또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느라고 무던히도 노력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 나름으로, 정치인은 정치인 나름으로, 각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갖은 애를 다 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어지간히 채워지고 나면 이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허영과 사치, 방종과 타락, 마약, 살인, 강도, 무질서, 공허함…… 남는 것이라곤 고작 이런 것들뿐입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절망의 구렁텅이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허무라고 하는 절망의 심연(深淵)으로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흔히 잘산다고 하는 나라, 복지 국가다, GNP가 높다느니 하는 나라들-이것 기대할 바가 못됩니다. 소망할 것도 없습니다. 이 현실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어느 날 한 신문 기자가 윈스턴 처칠 경에게 기자 회견을 청하고 물었습니다. "정치가가 되기 위하여 가장 바람직한 자질을 무엇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대하여 윈스턴 처칠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일 내주 내달 내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언할 수 있는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보통사람들보다 좀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시각이 없으면 남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물론, 내 예언이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내 추측이 맞지 아니한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분석하며, 그것을 사과할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지닌 사람-이런 사람이라야 참다운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윈스턴 처칠을 말했습니다. 결국 정치에 있어서도 앞날을 내다보는 것, 곧 소망이 문제인 것입니다.
프랭클 박사가 쓴 「의미를 찾는 인간의 탐색(Man's search for meaning)」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나치하의 유대인 포로수용소에 대한 것을 자세하게 관찰하여 기록한 책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당시 6백만에 이르는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수용소에서 죽어갔습니다. 끔찍한 생체 실험과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 가스실로 옮겨져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나치 독일의 그 죄악상과, 유대인들이 그 핍박과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는가를 고발하고 연구하면서 프랭클 박사는 그의 저서를 이렇게 끝맺습니다. '마음으로 포기한 사람은 몸도 쇠약해졌다.
그러나 끝까지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은 살아남았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절망 속에 있는 동료들에게도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하던 사람은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한 상태에 있었다.' 똑같이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도 소망을 지킨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망이 문제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좀더 생각을 모아 이 귀한 진리를 함께 이해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소망은 역설적(paradoxical)입니다. 돈이 많을 때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사가 형통한 때에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하고 안이한 사람들이 소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남달리 모진 역경 속에 있을 때에, 남달리 어려운 고난을 겪고 있을 때에 그 현실을 딛고 일어서서 더 강한 소망의 사람이 되는 것을 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이 귀한 말씀을 뒤로부터 거꾸로 풀이하면 '연단 없이 소망이 없고, 인내 없이 연단이 없고, 환난 없이 인내가 없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그대로 연결하면 환난 없이 소망이 없으며, 소망 없이는 기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에는 모든 일이 척척 잘되어야 소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자살은 배부른 사람들이 더 많이 합니다. 좋은 여건에 있는 사람들이 더 쉽게 절망합니다. 사랑만 해도 그렇습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은 함께 고생하며 어렵게 사는 중에서 깊어갑니다. 여유 있고 편안하기만 하다보면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싸우게 됩니다. 따분해서 문제를 일으키고 이혼을 생각합니다. 여러분, 소망의 문제란 역설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환난 속에서 강한 소망을 얻고, 역경 속에서 소망이 순수해집니다. 믿을 가치가 없는 것 다 털어 버리고, 기대할 가치가 없는 것 다 부정해버리고, 소망할만하지 못한 것들 모두 치워버립시다. 끊어야 될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버려야 될 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미련이 있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서 끊게 하실 것입니다.
환난은 소망을 이룬다-하나님께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망을 이루게 하시는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을 바르게 하십니다. 이제 그 소망의 근거해서 기쁨이 넘칩니다. 거기에 새 의욕이 있고, 영광이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산업사회의 급속한 발달과 함께 거기서 생기는 여러 가지 사회병리 현상을 여러 각도에서 예측 대비해 나가려는 학문으로서 '미래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끔 보면 이 '미래학'과 기독교의 '종말론'을 혼동하는 분들이 있기에 여기에서 잠깐 비교해볼까 합니다. '미래'라는 말은 '소망'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제 전공이 '종말론'이고 학위논문도 '종말론'이었던 터라 저는 미래학과 종말론에 관한 책을 비교적 두루두루 섭렵(涉獵)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시간에 감히 전문가로서 한말씀 드리겠습니다. 미래학을 깊이 연구해 들어갈 때 나오는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미래가 없다는 것입니다. 생태학적으로 보나 심리학적으로 보나, 정치적으로 보나 경제적으로 보나, 무엇으로 미루어보든지 미래가 없다-이것이 미래학입니다.
그렇다면 종말론은 어떻습니까? 종말론은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소망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소망의 대상이란, 언제나 능력이 있어야 하고 초월적인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진실하고 변함이 없으며, 나를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인격자라야 합니다. 어떤 자연법칙이라든가 이론, 혹은 단순한 법칙, 능력만 가지고는 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내가 그를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내가 그를 모를 때에도 그는 나를 알고, 내가 나를 모를 때에도 그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때, 마치 부모가 철없는 어린아이를 돌보고 사랑해주는 것과 같은 인격적 사랑이 성립됩니다. 그 속에서만이 진정으로 참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소망의 대상은 능력과 지혜가 충만할 뿐만 아니라 나를 개인적으로 사랑해주는 인격자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을 생각해봅시다. 소망의 하나님-그분은 창조주이시며 당신의 뜻과 섭리와 경륜에 따라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능력과 지혜가 충만하며 성실하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변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어느 백성과 약속하셨을 때에 저들은 약속을 어기더라도 그분은 약속을 어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일방적으로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 가셨고, 또 지키도록 역사 하십니다.
말씀하시고 약속하시고 성실히 지키시는 하나님, 그리고 성취하시는 하나님, 긍휼과 사랑이 넘치는 분이시기에 그분은 우리 소망의 대상이십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내게 소망을 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겁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능력과 경륜 속에 붙들려 있는 까닭에 우리가 형제도 이웃도 믿을 수 있는 것이올시다.
여러분, 역사를 보십니까? 역사의 맥락을 이해하십니까? 영적인 눈으로 믿음의 역사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지금의 10년이 옛날의 천 년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장구한 세월, 서서히 변화되어 온 역사가 요즘은 얼마나 급하게 돌아가는지, 역사 공부를 따로 하지 않아도 매일매일 그것을 배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 나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닙니다마는 제 짧은 생애를 놓고 보더라도 인류 역사가 다 여기에서 뒤바뀐 것 같습니다.
온 역사를 간단하게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왜정 말년에 태어나서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가 핍박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학교에서는 일본말을 해야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우리말을 해야 했습니다. 학교에 가서 한국말을 하면 한국말 했다고 매맞고, 집에서 어쩌다가 일본말이 한마디라도 튀어나오면 아버지한테서 또 매를 맞았습니다. 말 한마디하는 것부터 이렇듯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이번에는 공산당 치하에서 토지개혁이라는 것과 모든 것이 사회주의로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붙들려 가서 노동도 해보았고, 강제 수용소에서 몇 달 동안 있어 보기도 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매맞은 것은 고사하고, 제 앞에서 가친의 총살당하시는 모습까지 보아야 했습니다. 또 남한으로 넘어와서는 국군의 신분으로 전쟁도 치르고, 공부도 했습니다. 해외 유학도 다녀왔습니다. 그럭저럭 구경도 많이 했고 경험한 것도 많습니다.
며칠 전, 중국 북경의 천안문 앞에 섰을 때에는 참으로 감개무량했습니다. 저는 6․25 당시 중공군과 맞서 싸운 사람입니다.
잘 쏘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저들을 향하여 총을 쏜 사람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불과 몇십 년이 지난 오늘, 그 북경은 저를 영접해주었습니다. 천안문 앞에 서 있는 소위 해방군을 볼 때에 '역사가 이렇게 바뀔 수 있는가'하고 만감(萬感)이 서렸습니다. 자유화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저 짧은 역사 속에서 누가 이런 것을 기대했습니까? 누가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6․25의 와중에서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고 기대했겠습니까?
저들이 대한민국을 어찌나 부러워하는지, 한번 다녀온 분들이 가만히 귀에 대고 말합니다. "지상낙원이더군요"라고요. 그러나 여러분은 과연 그것을 느낍니까? 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이 역사를 운행했습니까? 누가 이 일을 이루었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다 볼 것 없습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근본도 하나님이요, 지금 역사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그 끝을 주장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한분께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어 이 역사를 운행하고 계심을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십니다. 여기에만 우리가 소망을 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이 넘치게 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깨끗이 지난날과의 관계를 끊고 있습니까? 학생들이 공부할 때에 잘된다 안 된다 하는데, 머리 좋은 학생 나쁜 학생이 따로 없다고 합니다. 알고 보면 IQ가 높다고 공부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통계학적으로 보면 IQ가 약간 낮은 아이들이 더 잘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IQ와 학업 성적은 거의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구는 공부를 잘하고 누구는 못하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아주 간단합니다. 공부할 때에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집중(concentration)하지 못하는 학생은 공부를 못합니다. 공부한다고 책을 마주놓고 앉기는 했는데 생각이 딴데 가 있으니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캠프 갔다온 생각, 애인하고 놀러 다닌 생각, 과거에 있었던 일, 실수한 일…… 이렇게 몽유병 환자처럼 생각이 빙빙 돌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결국 과거에 잘했든 못했든 그 모든 것과의 인연을 깨끗이 끊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려는 마음과 깨끗이 이별한 사람이라야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력을 얻습니다. 후회스러운 것도 많고 복잡한 것도 많으면 이것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의 끄나풀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동안은 소망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세계관을 부정하며 지난날로부터 깨끗이 벗어나야 새로운 소망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소망의 길은 이렇습니다.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을 믿고, 그 역사를 믿을 때에 비로소 소망이 넘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며, 과학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아닙니다.
오직 눈을 들어 위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엄청난 역사를 이해할 때에, 거기에 믿음의 근거를 두고 비로소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본문은 "성령의 능력으로……"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고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 받을 때에 비로소 내가 나에 대하여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이웃에 대해서도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의 하나님, 오직 그분께만 소망을 둘 때에 참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참소망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소원과 소망은 같지 않습니다. 소원이란 내 필요에 근거하는 것이요, 소망은 하나님의 마음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소원은 현재에서 출발하고,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출발합니다. 소원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에 머무르는 것이요,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뜻에 내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소원은 언제나 실망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소망은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잘했구나 싶고, 더욱더 영광된 미래를 약속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은 실업가가 복잡한 사업에 시달리다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앞으로 얼마 못 산다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사업에 대한 생각, 가정에 대한 생각, 명예에 대한 생각 등으로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오만가지 미련을 끊어버리지 못해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다가 그는 어차피 떠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순간 아직 못다 이룬 소원, 그 온갖 욕망을 다 포기하고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음이 이토록 깨끗할 수 없습니다. 이토록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소원'을 끊어버리는 순간에 그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온 세상이 다 파라다이스가 되고 아름다운 낙원이 된다 해도 죄인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죄인에게는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소망의 문제란 세계 문제도 아니요 유토피아니즘(Utopianism)도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신문지상에서 보셨을 것입니다. 한 남자가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중동으로 돈을 벌러 갔습니다. 그는 피땀흘려 번 돈을 꼬박꼬박 아내한테 부쳐주면서 반드시 은행에 저금을 하라고, 몇 년만 참고 고생해서 잘살아 보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아내는 그 돈을 가지고 이자놀이도 하고 증권투자도 하고 해서 꽤 많은 돈을 번 모양입니다. 돈이 생기니까 이번에는 중동에 있는 남편 몰래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사기를 당했습니다.
돈을 몽땅 날리고 말았습니다.
자, 이제 남편이 돌아오는 날입니다. 얼마나 즐겁고 반가운 날입니까? 그러나 남편이 돌아오는 날, 이 여인은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세계가 내 앞에 있다 한들 내가 죄인이고 그것을 받을만한 자가 되지 못한다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소망의 문제는 나 자신의 문제로 귀결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영혼의 문제요, 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소망을 순수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고, 바르게 하고, 온전하게 하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그를 위하여 때로는 우리에게 환난이 있고, 역경이 있고, 어려운 일들이 따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소망의 하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 소망을 넘치게 하실 때에 기쁨과 지혜와 인내의 사람이 됩니다. 관용의 사람이 되고, 화평의 사람도 됩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여러분에게 이 넘치는 소망의 은혜가 늘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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