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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마태복음 5장 17절~20절)

by 【고동엽】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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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마태복음 5장 17절~20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의 신앙 구조를 분석해보면 두 유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도하시고 우리는 그 역사에 응답하는 것이다.'라는 신앙 구조요, 또하나는 '인간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하나님은 그 인간의 행위에 보상(補償)하고 계시는 것이다'라는 신앙 구조입니다.
전자(前者)처럼 은총 중심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에서 나머지 일들을 생각합니다. 내 존재, 내 현실…… 그 모든 것을 은혜 안에서 생각합니다. 잠깐동안은 더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일들도 근본적으로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종말론적으로 볼 때에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는 세계관입니다. 이에 비하여 후자(後者)는 모든 것을 보상으로 봅니다. '내가 진실하게 사니까 복받고, 내가 선한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로서 은혜를 입고, 내가 거룩하게 사니까 주님의 영접을 받는다.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으므로 벌받고,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했으므로 심판을 받는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은총 중심으로 생각할 때에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은총과 그 사랑에 있습니다.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이라고 이해합니다. 혹 내가 병들었다 해도 생각합니다.
'이것도 다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은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실패를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늘 하나님의 뜻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늘 감사하고 늘 찬송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합니다.
그 은혜 안에 있는 나를 확인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상으로 보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데 있습니다. 그 사람의 관심은 언제나 보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주실까, 내가 이만큼 선한 일을 했으니까 또 무엇을 주시려나, 이만큼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벌을 내리시려나…… 언제나 보상에 관심이 있고 심판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인간중심적 인본주의적인 신앙이올시다. 이러한 신앙은 마침내 자기 의에 빠지고 맙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원망하며, 끝내 절망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동기에 마음을 두고 사는 신앙 구조가 있는가 하면, 오로지 결과에만 신경을 쓰며 살아가는 신앙 구조도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선행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 각자 마음에 정해놓으십시오. 위로든, 구제든, 봉사든, 혹은 교회를 위한 헌금이든, 무엇이든지 다 좋습니다. 여러분 나름대로 '이것이 선한 일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꼽으면 됩니다. 그리고 선행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선한 일을 하면 일단 먼저 마음이 기쁩니다. 선한 일을 해놓고 나면 우선 내 마음이 기쁘고 명랑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도 받습니다. 때때로 오해도 받고 남이 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선한 일을 꾸준히 행하다보면 명예도 얻고 존경도 얻고 신임도 받는 그러한 결과가 옵니다.
실제로 선행에는 축복도 따릅니다. 선하게 살 때에 자녀도 잘 되고 사업도 잘되고 명예와 지위를 얻는 등, 모든 면에 분명 복이 임하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이 결과에, 그 주어진 보상에 대하여 마음이 쏠리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이야기가 좀 틀려집니다. 칭찬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하게 됩니다.
선행하고 칭찬 받는 것과 칭찬 받기 위해 선행하는 것은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완전히 정반대의 결과가 됩니다. 이제는 보상받기 위해서 선행합니다.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선행합니다. 내 선행에 비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너무 작고 인색하다,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해서 무의식중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선행을 가장하게 되고, 피아르(PR)하게 되고, 위선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자 애씁니다.
남들 눈에 행복하게 보이려고 애씁니다. 선행 자체를 위해 힘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행한다고 하는 것을 남에게 알리기 위하여, 선행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마음을 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느 사이에 위선자가 되고, 가소로운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특히 지성인들, 인격을 갖추고 산다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허수아비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을 많이 봅니다. 철저한 위선자-참으로 문제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들, 그들도 그렇습니다. 그실 처음에는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헬라어 '바리사이오스'에는 '구별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바리새파-처음 발상은 좋았습니다.
남보다 더 깨끗하게, 성결하게, 구별되게 살아보겠다고 해서 결심하고 모였고, 또 깨끗하게 살도록 힘썼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형식주의, 율법주의로 흘러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 큰 책망을 듣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그 근처에 사는 교인댁 한 곳이 생각났습니다. 그 목사님은 내가 여기까지 왔으니 그 댁을 심방하고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예고도 없이 목사님의 방문을 받으니 심방 받는 집에서는 반갑게 목사님을 맞이했습니다. 목사님은 자리에 앉자 말했습니다.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어서 한 말씀 드리고 가겠습니다. 성경책을 좀 가져오십시오." 그때에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기회에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잘 믿는지 목사님께 보여드려야지.' 그래서 아이를 불러 말했습니다. "얘, 너 안방에 가서 엄마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책을 가져다주겠니?" 목사님 들으시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꼬마가 쏜살같이 달려가서 들고 나오는 책은 성경이 아니라 백화점 물품 구입 목록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망신이니까? 여러분, 잘 믿는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까? 여러분 가정의 어린아이에게 물어보십시오. 아이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추어졌는가를 보십시오. 그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이야기하십시오.
위선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진실을 떠나 허세에 빠집니다. 마침내는 자기 모순에 빠져들고 맙니다. 점점 더 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위선이 체질화되면 결국 자기 존재가 없어집니다. 이렇게 되면 OTHER-ORIENTED--타인 주도적인 생을 살게 됩니다. 나는 간 데 없고, 타인의 눈치만 보고 삽니다. 문제가 많으면서도 없는 듯이, 남들 눈에 잘 보이려고 합니다. 계속되어 심해지면 정신병이 되기도 합니다.
존 더넌은 '위선자는 밖에서는 성인이요 집에서는 악마'라고 말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밖에서 좋은 사람들이 집에서는 문제가 많은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이를테면 밖에서 호탕하고 이해심 많기로 소문난 사람이 집에 들어가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 말입니다. 왜 이렇게 겉과 속이 다릅니까? 왜 이렇게 인간성이 치사하게 썩은 것입니까? 내 인격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나 자신도 모릅니다. 물량적이요, 질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형식 뿐이요 내용이 없습니다. 외식(外飾)뿐이요 진실이 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노자의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발돋움하는 사람은 오래 서 있지 못한다. 걸음을 크게 떼어놓은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한다. 스스로 나타나고자 하는 사람은 나타나지지 않는다. 스스로 옳다고 하는 사람은 들리우지 못한다. 스스로 뽐내는 사람은 공(功)이 없으며, 스스로 자랑하는 사람은 오래가지 못한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없이 발돋움을 하다면 그것이 몇 시간이나 가겠습니까? 모르고 아는 체했다면, 마음에 악이 가득하면서 선한 체했다면 과연 그것이 몇 시간이나 가겠습니까? 미구에 본색이 드러나고 맙니다.
『탈무드』에 따르면 바리새인에도 일곱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풍자적으로 말하는 이 일곱 가지 바리새인들, 한번 생각해봅시다.
첫째, '잠시 대기형'-항상 선한 기회가 왔을 때 '이것을 꼭 내가 해야 하나, 누군가 다른 사람이 하겠지'하고 기다리는 형입니다. 선행을 기피하려 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듭니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기다립니다. 선행이란, 기회가 왔을 때 직감적으로 즉각적으로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대기형'은 언제나 미루고 기피하며 구실을 찾습니다.
둘째, '사람은 자꾸 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니까 음욕을 품게 되고, 물질을 보니까 소유욕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러므로 죄짓지 않으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다니다가 이마가 터지는 형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타입을 '이마에 피가 흐르는 바리새인'이라거나 '이마에 늘 멍이 들어 있는 바리새인'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소극적입니다. 죄지을까봐 아무 일도 못합니다. 밖에 나가지도 못합니다 항상 뒤로 물러서다가 더 큰 죄를 짓고마는, 지극히 소극적인 사람들입니다.
셋째, '어깨 으쓱형'이 있습니다. 기회가 오면 선한 일을 하기는 하는데 꼭 나발을 불고 다니는 유형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기는 하는데 꼭 '내가 이 일을 합니다.'하고 사람들한테 알리고 다닙니다. 좋은 일 하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알아줄 텐데 본인 스스로 "여러분, 내가 좋은 일 했습니다!"하고 자랑한다면 지나고 난 뒤에 그 얼마나 쑥스러운 노릇입니까? 꼭 나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 언제나 그렇게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것도 참 못 고칠 병입니다.
넷째, '곱사등형'이 있습니다. 외식적으로 겸손을 가장하고 늘 굽실굽실하면서 다니기 때문에 그만 허리가 굽어져버린 형입니다.
다섯째, '계산형'이 있습니다. 만사를 더하기 빼기 식으로 계산합니다 내가 악한 일을 했으면 그것을 용서받을 만큼, 악한 일이 상쇄(相殺)될 만큼의 선한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다섯 가지 죄를 지었으면 선한 일 여섯 가지 해서 그저 가까스로 구원받을 정도로만 하자 하는 유형입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에도 내게 돌아올 이익이 어느 정도인가 먼저 계산합니다. 될 수만 있으면 조금 선행하고 많이 칭찬 받자, 손해는 조금 보고 상은 많이 받아보자고 계산하는 사람입니다. 되도록 사람들 눈에 많이 띄는 곳에서 효과적으로 선행하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평소 유대인들로부터 개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만일 그것이 인적 드문 산길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복잡한 거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이 앞을 다투어, 어쩌면 싸우면서까지 도와주었을 것이라고요.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산골짜기였기에 도와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 보는 데에서 도와줘야 칭찬을 많이 받을 수 있지,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도와주어 봐야 무슨 소용 있나-이렇게 계산이 빨리 돌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계산형'입니다.
여섯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바리새인입니다. 저주가 두렵고 형벌이 무서워서 벌벌 떱니다. 십일조 안 바치면 내 사업이 망하지 않을까, 주일 안 지키면 병들지 않을까, 모든 일에 그저 하나님의 저주를 생각하며 긴장된 신앙 생활을 하는 유형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야말로 '천생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앞의 여섯 가지 유형과는 달리 마치 아브라함의 후손과 같은 바리새인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복받으려고 선한 일을 합니까, 벌받을까봐서입니까, 아니면 참으로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어느 목사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십일조를 바치면 창고가 넘치도록 복을 받는다면서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집이 요즘 이렇게 장사가 안될까요?" 여러분, 이러한 계산형, 철저하게 계산해서 보상을 받아야겠다고 덤비는 사람-여기에 문제가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중시했고, 율법주의자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자기 윤리에 빠졌습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갖은 애를 다 쓰다가 율법을 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다가 아예 가르치기만 하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이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서 큰 책망을 들었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23:13)." '아나테마 에스토'-천벌을 받으라고 심판하십니다. 저들을 구제 불능의 인간으로 단죄하십니다.
바리새적 신앙이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형식주의와 외식주의에 빠진 신앙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든지 금식하든지 선행을 하든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모든 행동을 경계하십니다. 금식, 기도, 선행, 모두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금식할 때에 초췌한 얼굴로 다니면 사람들이 '아, 저 사람 금식하는구나' 할까봐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마 6:17)." 또 기도할 때에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하라, 거리에서 손을 들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발 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형식주의, 외식주의에 빠지지 말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할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받는 칭찬에는 관심을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둘째, 바리새적 신앙은 사람의 교훈과 합리성과 인도주의에 치우친 나머지,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와 그 깊은 뜻을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것을 지켜라 저것을 지켜라 열심히 말만 했을 뿐, 율법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막 2:27)." 사람이 율법을 위해 있습니까, 율법이 사람을 위해 있습니까? 하나님이 율법을 주실 때에 사람을 위해 주신 것이니 우리가 율법을 지킬 때에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생각이나 계산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바리새적인 신앙은 이 근본정신을 잊어버렸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바리새적 신앙은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를 가르치지 못합니다. 말만 하고 행함이 없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한테 늘 공부 잘하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한 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너만할 때 부모가 도와주지 못해서 혼자 고학을 했단다." 그러니까 아들이 대꾸하더랍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아버지 만할 때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에게 무슨 말을 하든지 먼저 자기를 살펴보십시오. 모든 본을 보였는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도 가르치는 입장에만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30대의 젊은 남자가 어린 딸을 데리고 슈퍼마켓에 갔습니다. 손수레를 밀면서 물건을 골라 넣는데 딸아이는 마구 내던집니다. 던지고, 때려부수고, 깨뜨리고, 야단났습니다. 장난이 너무 심해서 책망을 해야 하겠는데 사람들 앞에서 그럴 수도 없고 해서 젊은 아버지는 참고 참습니다. 야단은 치지 못하고 아이를 말리면서 말합니다. "지미야, 참아라. 참아야 하지 않겠니? 참아야 착한 사람이다. 참을 수밖에 없지 않니? 지미야 참아라 참아라……" 마침내 아이가 조용해지자 수레를 끌고 계산대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돈을 치르려는데 아이 달래는 것을 보고 있었던 카운터 아가씨가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참 좋은 아버지이십니다. 지미를 달래는 것을 보니 참 훌륭하십니다, 우러러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젊은 아버지가 대답하더랍니다.
"말조심하세요. 지미는 내 이름입니다." 어린아이가 장난을 치니까 때려주고 싶고 혼내주고 싶은 자기보고 "참아라 참아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보고 말하십시다. 남 비판하지 말고 내가 먼저 반성하십시다. 남편도 아니요, 아내도 아니요, 자식도 아닙니다. 말하려거든 여러분 자신, 나 자신에게 해야 합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아무개야 참아라, 아무개야 네가 죽어라…… 남 가르치려 들지 말고 나를 가르치십시오. 내가 어느 사이에 나는 잊어버리고 남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주의입니다. 남에게 강요하기 전에 내가 먼저 행해야 합니다. 내 자랑에 치우치게 될 때 다른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면 곧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성전에 가서 기도하는 모양을 보십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형식을 논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세리와 창기를 크게 환영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두 주 전, 제가 중국 연길(延吉)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설교하러 간 교회에서 "아침 잡수러 오십시오"하고 7시까지 오라 합니다. 저는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옛날에는 아침에 잔치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까? 아침에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까지 청하곤 했었지요. 저는 고맙고 흐뭇한 마음에 그들의 아침식사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아침 메뉴로 개를 잡았지 뭡니까? 저는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식탁 위에 그것이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한 뒤에 또 점심을 함께 하자고 합니다. 가보니 또 개를 잡았습니다. 자, 이거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뒤에 회개하기로 하고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저 개고기 좋아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에서 무슨 형식을 논하겠습니까? 예절이 잘됐다 못됐다, 음식 맛이 있다 없다 논하게 생겼습니까? 제게 식사를 준비해주신 장로님이 손수 개를 잡으셨다고 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말입니다. 이제 그 중심을 알았으면 그만이지 더 무엇을 따지겠습니까? 외식주의자가 되지 말 것입니다. 저들은 자기 의에 빠진 나머지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의를 더 중요시한 나머지 교만해서 회개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개의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구원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를 영접하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어서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무리들, 곧 가야바, 제사장 무리들과 야합하고 맙니다. 본래는 철천지원수 사이였던 양자(兩者)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서만은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이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내가 선한 일을 하는 것, 오늘까지 이 믿음을 지키는 것은 더 큰 은혜입니다. 앞으로 남은 생도 오직 은혜로 살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겸손한 진실, 자기 충실에 관심을 둡시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도 말고 오직 긍휼, 오직 은혜로 살 것입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물리치시고 세리와 죄인을 맞아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가 바리새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여러분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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