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그네의 회고(창세기 47 : 5-12)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되 "네 아비와 형들이 네게 왔은즉 애굽 땅이 네 앞에 있으니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와 형들로 거하게 하되 고센 땅에 그들로 거하게 하고 그들 중에 능한 자가 있는 줄을 알거든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게 하라." 요셉이 자기 아비 야곱을 인도하여 바로 앞에 서게 하니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나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기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냈나이다." 하고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요셉이 바로의 명대로 그 아비와 형들에게 거할 곳을 주되 애굽의 좋은 땅 라암세스를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고 또 그 아비와 형들과 아비의 온 집에 그 식구를 따라 식물을 주어 공궤하였더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에서 한 나그네를 보게 됩니다. 일 백 삼십 년간 피곤하게 살아온, 참으로 불쌍한 한 늙은 나그네의 모습을 봅니다. 애굽 땅으로 얻어 먹으로 갔고 빌어먹으러 간, 한 슬픈 나그네 노인을 봅니다.
야곱은 무서운 인간이요 노력하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는 복을 받기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 뛰고, 싸우고, 빼앗고, 속이며, 참고, 견디고, 애쓰며 무던히 눈물도 많이 흘려야 했던 노인입니다.
그토록 애써서 자기와 가정을 이루어 나갔지만 대 흉년이 한번 들고 보니 그 모든 수고가 다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수포로 돌아간 시간에, 그는 완전히 손을 들고, 72명이나 되는 식솔을 거느린 채 버려졌던 아들 요셉을 찾아 애굽을 향해 사실상의 피난길을 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그는 애굽 왕 바로의 앞에 서서 고백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 백 삼십 년이 나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며 허탈한 자기 인생을 이야기합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이것이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고백하는 야곱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는 진정 축복을 빼앗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으로서 형의 축복을 받아 내었습니다. 그는 복 받지 못할 사람으로서 장자의 축복을 얻어내고야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운명을 바꾸는 엄청난 노력의 인간상입니다. 주어진 운명대로 순응하며 사는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인생, 다른 운명을 살아가고자 하는 피나는 노력의 개척적인 인간이었습니다. 도전과 쟁취 욕으로 점철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에게 하나의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단점이 많고 허물도 많았지만 그는 이 장점으로 인해 끝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장점은 다름 아닌 그의 축복관입니다. 그는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하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노력, 내 지혜, 내 수고,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 할지라도 그 위에 플러스 알파(plus alpha),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야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분명 내 수고, 내 노력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그저 벌고, 그저 빼앗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사람의 축복관은 기어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야 말겠다는 생각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내어야 되겠다고 하는 이런 생각!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축복관은 좋았는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좋은 것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는 분수 이상의 것을 추구했습니다. 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복을 향해서 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것을 빼앗는 위인이었습니다. 때로는 좌․우를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야 말겠다는 끈질긴 노력형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복은 받아낸 것 같았지만 그는 집을 떠나야 했고 쫓겨나야 했으며 평생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긴 세월을 쫓기는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형제도 아니요, 쌍둥이로 태어난 하나밖에 없는 형님인데 어쩌자고 그 형님의 원한을 사서 형님은 동생을 죽이려 들고, 마침내는 분노하는 형의 손길을 피하여 어두운 그림자를 안은 채 쫓기어 사는, 그런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참으로 슬프고 피곤한 생활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간사했고 비열했으며 때로는 정당하지 못했습니다. 감히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형님의 약점, 그 배고파하는 본능적인 약한 기회를 포착하여 한 그릇의 팥죽을 내어 주고는 기어이 장자의 기업을 사 내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간교했으며 간계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복을 받았고 일단 성공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을 속였더니 훗날 알고 보니 그는 아들들로부터 속게 됩니다. 아버지를 속일 때에는 잠깐 속였을 뿐 몇 시간 후에는 사실대로 드러나고 말았으나 아들들에게 속을 때에는 20여년을 넘게 속았습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들을 죽은 줄로만 알고 20여 년을 눈물로 살아야 했습니다. 속이고, 속았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하여 7년간을 애써 수고한 후 결혼을 하였는데 하룻밤 자고 나서 보니 신부가 바뀌었습니다. 삼촌으로부터 속았습니다. 그는 속이면서 출발하였으나 알고 보면 그 자신이 일생동안 속았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고독한 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화목을 무시한 채 복을 받으려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 화목이건만 화평과는 아랑곳없이 부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그가 얍복 강변에 이르렀을 때, 그는 형 에서가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두려워하며 모든 소유, 재산과 가족을 먼저 건너 보낸 후 홀로 남아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의 천사를 붙들고 환도뼈가 으스러지기까지 복을 달라며 빕니다. 이제 홀로 남았을 뿐 가정도, 재산도 그 무엇도 그를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단 혼자 남아, 하나님과 일대 일로 만나 씨름을 하는 고독한 나그네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피나는 노력으로 재물을 벌었습니다. 지혜도 있었습니다. 열정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과 진실을 떠났습니다. 그의 계획과, 생각과는 달리 있는 재산 다 없애고 여러 번, 여러 번 거지 신세가 되어야 하는 피곤한 나그네 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장자의 축복을 받은 다음 형의 낯을 피하여 하란으로 가는 중에 홀로 광야에서 돌 베개하고 누워 무덤과 같은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복은 받았다는데 어쩌면 이대로 죽는 것이나 아닌가 하고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꿈속에 보이기를 땅에서부터 하늘에 이어지는 사닥다리가 서 있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 위를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리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때 그는 그 말씀이 너무도 감사한 나머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오히려 그 본성을 약간 드러내 보이는 맹세를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만 해 주시면 내가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고 모든 것에서 10의 1조를 반드시 바치겠나이다" 하는 것입니다. 누가 바치라고 강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급한 마음에서 하나님께서 무사히 돌아오게만 해 주시면 10에 1조를 드리겠다고 스스로 맹세를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사히 돌아온 후에도 무려 10여년 동안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채근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는 세겜에서 여러 가지 부끄러운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벧엘에서의 사건, 그 맹세를 기억케 하십니다. 이제사 정신이 들은 그는 비로소 손에 쥐고 있던 모든 우상과 장신구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은 후에 벧엘로 올라 가자며 어슬렁어슬렁 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서원 했던 약속을 저버린 관계로 다시 한번 실패의 고비를 맞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 실패를 몰아서 그로 하여금 원점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는 많은 자녀를 두었습니다. 요즈음 시대에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만 열 두 형제나 되는 많은 자식을 두고 가장과 족장이 되어 행복한 인생을 살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과 진실을 떠나 편애한 까닭에 때로는 자식들로부터도 미움을 받아야 했고, 자식들로부터 속아야 했습니다. 자식들의 질투와 분쟁 등, 이런 저런 것으로 인해서 어지간히 마음이 상했습니다. 자식이 저를 위로한 것이 아니라 자식 때문에 울었고, 자식 때문에 남다른 고생을 해야 하는 서글픈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의 가정과 사랑의 이야기는 더욱 드라마틱 (dramatic)한 데가 있습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의 대단한 연애를 하였습니다. 원 세상에 장가가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그마치 14년 동안을 머슴살이를 하고야 장가를 갔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사랑의 시금석은 바로 인내라고 합니다. 값비싼 다이아몬드나 굉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기다린다"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느냐? 그런데 단 한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였으니 그 운명이랴 처음부터 알 만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1년이건, 10년이건 기다려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얼마나 기다릴 수 있느냐는 것이 곧 사랑의 진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야곱은 정말로 열렬히, 요즈음 표현으로 화끈하게 사랑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년을 수일 같이 여겼더라"(창 29 : 20)고 하였습니다. 7년을 불과 몇 날처럼, 7년 동안 기다리는 것을 수일 같이 기다렸다면 이 연애, 이 사랑은 그야말로 끝내주는 열애가 아니겠습니까? 이는 보통 말하는 연애가 아닙니다. 피곤을 모르는 인내로써 이토록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그 미모에 끌렸고, 그 매력에 취했습니다. 정신없이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외모만 추구했을 뿐 이 여인의 불같은 질투와 채울 수 없는 욕망, 그리고 불신앙과 우상을 섬기는 마음 같은 것은 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저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는 그로 인해 큰 가시를 만났다고도 생각이 됩니다. 어쨌든 사랑하는 여인을 아내로 맞기 위하여 7년을 봉사한 후 이제 그토록 기다려온 결혼식을 올리고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입니까? 신부가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결혼식은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데 그것도 전깃불이 없는 옛날이고 보면 있을 법도 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부가 바뀐 것도 모른 채 하룻밤을 지낸 신랑 야곱! 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그 순간 야곱은 외삼촌 라반을 향하여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고 따지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의 대답은 간단하게, 언니를 보내지 않고 동생부터 보내는 것은 우리 지방의 풍속이 아니니 정 그렇다면 다시 7년을 더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에 야곱은 다시 7년간을 머슴살이와 같은 봉사를 하게 됩니다. 결국 한 여인을 아내로 맞기 위해 14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로지 봉사로서 남의 살림을 돌보며 지내야만 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나마 제대로 생각하자면 신부가 바뀐 것을 발견한 그날 아침에 그는 한번쯤 기도를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랬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놈아 너는 아버지를 속이지 않았느냐? 그러면서까지 형의 축복을 빼앗았으니 이제 신부쯤 바뀌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금의 처지를 하나님의 뜻으로 알아 겸손히 레아와 함께 평생을 살았더라면 야곱의 생애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매력에 끌린 사랑 하나만을 생각하며 욕정만을 따라 기어이 7년을 더 일해서라도 라헬을 얻어 보겠다는 일심에서 얻었는데 역시 장미에는 가시가 있더라는 겁니다. 이 여자는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상고해 보면 야곱의 모든 불행은 이 여자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화근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질투가 불같은 여자였습니다. 언니는 자식을 낳았으나 자기는 낳지 못하자 스스로 견디다 못해 남편에게까지 화를 내며죽겠다고 까지 합니다. 이럴 때에 여기에서 단 한번 야곱이 라헬을 책망합니다. 창세기 30장 2절에 의하면 "야곱이 라헬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그대로 성대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며 화를 냅니다. 뿐만 아니라 라헬은 우상을 섬기는 여자였습니다. 그는 우상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계속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첫 아들을 낳았을 때에도 그것으로 "감사합니다" 하지 않고 더할 것이라 하여 그 이름을 요셉이라 지었습니다. 욕심과 질투와 불만으로 채워진 그는 결코 원만한 여자, 원만한 아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토록 야곱이 사랑했던 이 여인 라헬은 알고 보면 저도 참으로 괴로운 생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야곱에게도 많은 피해를 주었으며 그의 마지막 운명은 비참해집니다. 그는 결국 더하기를 바라던 아들 하나를 다시 얻어 난산으로 해산하고는 그 길고 숨을 거두게 되고 그 묘지는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어 홀로 묻히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 49장 30-31절에 보면 이제 야곱도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유언을 하게 되는데 그 때에 아들들에게 부탁하는 말이 "내가 조상의 무덤이 있는 막벨라 굴에 레아를 장사했다. 그러니 나도 죽거든 그 옆에 묻어 다오"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야곱 역시 레아가 좋은 아내였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야곱이 평생동안 라헬을 따라 다녔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많은 고생을 해야 했고, 이제 최후의 순간에는 레아 곁으로 갑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마땅히 중심과 신앙을 보아야 할 것이어늘 그는 외모만 보며 좇다가 불가불 그의 평생은 이로 인해 무던히도 고생스럽게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 앞에 완전히 굴복 당하고 맙니다.
야곱이 돌베개 하고 벧엘에 누워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창 28 : 15)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성실히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많은 고생을 하여야 했습니다. 약속은 약속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그 약속을 지키시고 이루셨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바로 지키며 따르지 못한 야곱은 갈 지자 걸음의 인생을 살면서 많은 실패를 하여야 했고, 많은 매를 맞아야 했으며, 이미 인생의 마지막 장에 이른 오늘에 와서는 완전한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며,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야곱이야 어찌하였든 간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시면서 매로 치시고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계속 이끌어 나가십니다. 그가 정신이 없을 때에도 그를 도우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마침내 약속의 아들 요셉을 통하여 그와 온 가족 72명이 함께 복을 누리는 가운데 야곱은 생을 아름답게 끝납니다. 특별히 그가 열 두 아들을 앞에 놓고 하나하나 축복하는 장면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만을 생각하고 기다리며, 그리고 감사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완전히 손을 들었습니다. 남은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 감사할 뿐 더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또 1년을 지냈습니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습니까? 지난 1년의 생은 어떻게, 무엇을 따라 다니며 살았다고 하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후회되는 것도 많고 그릇된 것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 깊이 반성하십시다.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실히 따르지 못한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당신의 역사를 어김없이 이루어 오셨고 앞으로도 반드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새로운 마음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중에 원점으로 돌아가서, 다시 새롭게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귀한 결산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오늘, 여기, 실패한 한 나그네를 봅니다. 이 야곱의 모습에서 이제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의 약속을 성실히 따르지 못하고 살았기에 당한 그 모든 실패와 상처의 아픔을 이제 주님 앞에 내어놓습니다. 치료하여 주시고 완전케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더는 후회하는데 머무르지 않게 하시고 남은 생을 수습하여 주의 약속을 성실히 준행하며 그 약속을 받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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