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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주자의 최후(디모데후서 4:1-8)

by 【고동엽】 2024. 4. 13.
목차

한 경주자의 최후(디모데후서 4:1-8)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이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인간은 죽는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을 알고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생각합니다. 지혜자 솔로몬도 전도서 7장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2,4절)고 했습니다.

철학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며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바로 그 사람의 사람됨이 있습니다. 즉 죽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는 전쟁 없이도 자연적으로 일 초에 3명, 한 시간에 약 3만 명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언젠가는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평등하고 공의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말론적인 가치관에 우리 생의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의하면 장례식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나 차별 없이 같은 관, 같은 옷, 같은 예식으로 장례를 한다고 합니다. 결혼식에는 신분과 처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장례식에서는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꼭같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과연 누가 누구에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누가 누구를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살면서 가장 무시하고 초연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혹 성욕일 수 있습니다. 혹은 물질에 대한 욕심, 자기 교만, 증오심 등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좀더 깊은 곳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습니다. 만약 죽는다는 사실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삶입니다. 철학자 까뮤는 죽음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은 35세부터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35세 이전의 생은 어떠한 생이었습니까? 인생이 무엇인가를 전혀 의식치 않고 그저 무엇엔가 끌려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이테카는 죽음을 인간 실존의 한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비슷한 이야기들입니다. 죽음은 항상 현재적이며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Elizabath Kubler Ross라는 사람이 「Death and Dying」이라는 저서에서 죽음의 심리에 대해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환자가 의사들로부터 죽는 날을 선고받고 죽기까지의 심리 변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6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죽는다는 선고를 받는 순간부터 죽기까지 심리적인 단계 반응을 그는 5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째, 죽음을 부정합니다(denial stage). 그럴 수 없다고 강력히 부정을 합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람이 죽는다는 것보다 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일단 '아니다'라고 부정을 하면서 속으로는 고독을 갖게 됩니다. 모든 가치가 한 순간에 부정되는 단계입니다.

둘째로는 분노합니다(anger stage). 왜 내가 죽느냐(Why me)? 죽어야 할 사람이 많은데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 왜 이런 모양으로 가야 하느냐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타협을 하게 됩니다(bargaining stage). 시간이 지날수록 신(神)이 나를 부르신다면 그의 뜻대로 따를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잘 죽는 것이 좋겠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타협을 하게 됩니다. 과연 나는 어디로 가게 되며,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찾아보며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낙심을 합니다(depress stage). 죽음이란 것을 앞에 두고 보니 너무나 허망한 생을 살았습니다. 너무나 의미 없는 삶이었습니다.

가서는 안 되는 길을 갔기에 잘못 살았다는 자기 실망, 자기 불신, 자기 허무에 빠집니다.

다섯째는 죽음이라는 사실을 수락하는 마지막 단계입니다(acceptance stage). 무서워도 부끄러워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 되었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받아들이고 죽어야 하기에 체념 내지 수락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너무나 끔직한 죽음을 보았고 또 그 반응도 보았습니다. 여기에 무엇인가 잘못됨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자연스러운 사실 앞에,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난 것처럼 우리는 크게 놀라워하고 있습니다. 있어야 할 일들이 일어났을 뿐입니다. 죽음을 미리 생각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죽음을 놓고 애걸복걸하는 것을 볼 때에 인생 실존을 무엇으로 알고 있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죽어야 사람이 됩니다. 사람답게 죽음으로 사람됨을 알 수 있고 성도처럼 죽어야 성도가 되며 순교자로 죽어야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몇 가지를 더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먼저 죽음의 보편성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의 보편성을 받아들여라, 믿으라, 이해하라가 아니고 죽음의 보편성을 계속적으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사건마다 시간마다 새롭게 고백해야 합니다.

'왜 내가 죽어야 하느냐?' '왜 이 모양으로 죽어야 하느냐' 하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시간에 이의를 제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죽기를 기도했습니까? 2죽음에 대해 스스로 구체적인 기도가 없었다면 하나님이 택한 방법에 따라야 합니다. '나에게 이러한 죽음을 주옵소서'. 중요한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는 영원을 생각한다고 하면서 전혀 준비가 없습니다. 더욱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겨난 것처럼 답답하게 행동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죽음을 원하고 있습니까? 죽음에 대한 고통의 절반은 '왜 내가 죽느냐'(Why me)에 있습니다. 사실은 'Why me'가 아니라 'me too'이어야만 합니다.

두 번째는 죽음 앞에서의 죄책감입니다. 너무 많이 죄를 범했고 너무 잘못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죄책감이 죽음의 공포를 더 가중케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깨끗하고 선명한 일생이었습니다. 두려움이나 공포, 어두움이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약 마라톤 선수에게 골인 지점이 없다면 어떻게 뛰겠습니까?

생을 살았으면 결론을 맺어야 합니다. 피곤하게 사는 자에게 밤의 휴식이 있듯이 죽음은 고달픈 생을 살고 난 후에 오는 평안한 안식입니다. 모든 생의 자기 완성이 죽음이요, 자기 신앙과 생활의 결론입니다. 믿는 자라고 죽지 않거나 죽음의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두려움 없이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갈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생리학적인 죽음은 불가피한 것이고 보편적입니다. 우리는 기다리고 인정하고 살아가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신앙을 시간시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도덕성을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 우리 조상 아담을 원망합니다. 만약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인간에게 생리학적인 죽음이 있었겠느냐, 아니냐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과 변론이 있습니다만 이것은 수수께끼입니다. 분명한 것은 죽음이 죄 때문이 아님을 알아야겠습니다. 더욱이 믿는 자의 죽음은 결코 죄 때문이 아니고 안식이요, 상급이기도 합니다. 죽음이 죄로 인한 저주라면 오래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는 죽음의 다른 성격을 찾아야 합니다. 죽음에는 영적인 죽음과 육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짐으로써 그 영은 두려워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으로 본래적인 것이며 근본적인 것입니다. 생리적인 죽음은 그 다음에 따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1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천막을 치고 낡아버리면 벗어버리는 것으로서 죽음은 자유를 의미하며 참 생명을 말하며 다른 차원의 생명으로 향하는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유형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아담의 죽음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죽었으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사랑하사 희생하시고 죽으신 자원적인 의로운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구속의 죽음, 구원받은 죽임입니다. 부활 이전에 필요한 생명의 단계로서의 죽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죽음은 부활이 있기에 생명의 죽음, 영생의 죽음이며 선택적인 죽음으로써 일반적인 죽음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영생 중심의 세계관, 그리스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가져야겠습니다. 영생을 중심으로 이 세상을 보면 허무뿐입니다. 소유를 중심으로 가치관을 평가하면 죽음은 허무하고 무상하지만 존재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죽음은 완성이요 성공입니다. 순교자는 소유로 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장례식마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가 되었다는 존재적인 의미가 있기에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즉 핍박받는다는 것은 소유로서의 무를 의미하지만 '핍박받는 자'가 되었다고 하는 그 존재는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순교자에게 내리신 축복입니다.

고 김활란 박사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은 뒤에는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승리의 할렐루야를 불러라." 그분의 장례식에는 승리의 합창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것이 성도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무슨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저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저들이 모르기 때문이옵니다", "다 이루었다" 얼마나 장엄한 한 마디 한 마디입니까? 여기에 죽음의 승리가 있었고 그리스도를 그리스도 되게 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죽은 순간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임이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 에게니라"고 고백합니다.

한 경기자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간 후에 엄청난 감격을 안고 있는 부러운 모습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생의 의미입니다.

 

기도 : 사랑의 주님, 무상한 생을 사는 저희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헛된 생을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좋은 소망으로 일깨워주심을 감사합니다. 믿음을 온전케 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온전케 하사 항상 새 소망에 살며 저 영광의 앞길을 바라보며 오늘의 승리의 생활로 이끌어 나아가는 한 경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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