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K자료 1,910편

한 경주자의 모습(히브리서 12장 1절~3절)

by 【고동엽】 2024. 4. 13.
목차

한 경주자의 모습(히브리서 12장 1절~3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인생을 무엇에 비유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생관 내지 세계관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인생을 나그네로 비유했고, 안개라고도 했으며, 속담에는 담배 연기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나의 들풀과 같다고도 비유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무엇으로 비유하고 있습니까? 여러 가지로 비유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것을 들어보면, 우선 "인생은 농부와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가꾸고 가을에 가서 추수하는 것처럼, 인생에도 봄이 있고 겨울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비유는 "인생은 군인과 같다"는 것입니다. 군인은 전쟁터에 나가서 생명의 위험을 안고 싸우는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은 죄와 불의와 더불어 싸우며 정욕과 더불어 싸우는 하나의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즉 영생을 위한 싸움으로 생각하여 군인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생을 의를 위한 싸움으로 여러 번 암시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인생을 하나의 스포츠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올림픽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특별히 인생을 경기자로 비유해서 쓴 내용들이 많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대부분이 올림픽을 구경한 사람들이고, 반드시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운동 경기를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인생을 스포츠로 비유함은 가장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쓴 히브리 저자도 그리스도인을 경기자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기자가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목적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 경기를 해야 하는지 목적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목적과 목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목적은 추상적이요 목표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상적인 목적을 위하여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지난 뮌헨 올림픽 때에 한국 선수와 북한 선수가 동시에 참가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 한국 선수들은 금메달을 하나도 얻지 못했는데 북한 선수가 사격에서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외국의 많은 기자들이 그 선수에게 사격을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그는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 '김일성 수령님께서 교시하신 대로 원수의 심장을 쏘는 마음으로 쏘았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자들과 스포츠맨들이 저런 사람들과는 함께 스포츠를 할 수 없다고 보이콧을 하자 부득이 북한 선수들이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북한의 교육 제도와 그 사회가 만든 파괴적인 인간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의 목적은 건강에 있고, 경기의 목적은 화목에 있습니다. 올림픽의 목적도 평화가 아닙니까? 주전 776년 고대 그리이스는 나라가 방대했지만 교통 수단이 좋지 못해 다스리기가 곤란했습니다. 그래서 도시국가 형태로 다스리면서 4년마다 한번씩 모든 도시가 모여 큰 잔치를 하며 올림픽 경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경기의 목적은 평화와 일치로, 민족의 행복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치렀던 것입니다. 그것이 기원이 되어 오늘에까지 올림픽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의 올림픽의 목적도 화해와 평화입니다. 경기 도중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서로 싸우는 것 같아도 목적은 여전히 화해와 평화입니다.
그리고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이것은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목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트 경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돛단배가 바람 부는 대로 갈지자로 움직이나 목표는 분명합니다. 직선 코스로 달리지 않는다고 해서 최종 목표를 잃어버린 것은 아닙니다. 등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정을 향하여 직선적으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둘러서 돌아가기도 하고 오히려 때로는 내려가기도 하지만 최종 목표(final goal)인 산정으로 가는 목표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목표를 잃어버린다면 조난 당하기가 십상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한 젊은 재상이 나이 많은 임금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의 유혹을 피하고 많은 시험을 이겨서 나라를 위한 깨끗한 충신으로 일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임금님은 젊은이의 그 뜻이 기특하여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재상으로 하여금 컵에다가 물을 가득 채워서, 이 컵을 들고 제한된 시간 안에 시내를 한 바퀴 돌되, 물을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큰 벌을 내리겠다고 하명했습니다. 그리고 창과 칼을 든 군사들을 재상 뒤로 따르게 했습니다. 젊은 재상은 질문 한번 했다가 큰 곤욕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임금님이 명하신 대로 제시간에 물컵을 들고 궁전으로 돌아왔습니다. 임금님은 크게 칭찬하시며 그의 수고를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자네가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여자를 보았나?" "못 보았습니다." "그럼 술집은 보았나?" "못 보았습니다." "그러면 길거리에 사람들이 얼마나 나왔던가?" "임금님, 못 보았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본 것이 없습니다." 이 때 임금님은 "바로 그것이야. 내가 할 일을 열심히 하노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시시한 일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법이야"라고 말씀하시며, 왜 그런 일을 시켰는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노라면 하지 말아야 될 일은 자연히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이 나를 유혹하고 시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초점을 똑바로 하고 그리로만 달려가는 자에게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둘째로, 경기자는 장애물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본문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즉 과거에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를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벗는다는 말은 옷을 완전히 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약 90년 전에 저의 장모님이 이화학당 농구 선수였다고 합니다. 빛이 다 바랜 그 당시 사진을 보면 운동복이 손목과 발목까지 내려와서 펄럭이지 않게 꼭 붙들어맨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런 복장으로 어떻게 농구를 했을까 싶을 정도로 몸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부끄러운 것은 고사하고 그 운동에 장애 되는 모든 요소는 거의 다 제거하고 가장 가볍고 산뜻한 차림으로 나서지 않습니까? 만약 상투 틀고 축구를 한다든가 갓 쓰고 도포 입고 사이클 경기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은 경기하기에 가장 적합하도록 가뿐하게 몸차림을 단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 생활에 방해되는 요소가 많으면 안 됩니다. 그저 간단하게 앞으로 전진하는 데 필요한 것만 있으면 족합니다. 어떤 분은 이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좋은 집을 마련하느라고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인생의 종반전인데 어떻게 장식해야 할 것입니까? 후반전이 아니고 종반전입니다. 우선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자유로와야 합니다. 지난날의 패배와 경험, 지난날의 죄악을 다 털어 버리고 자유로움으로 나가자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아픔과 죄에 매여 있는 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깨끗이 과거를 청산하느냐에 의해 추진력이 생깁니다. 이제 내 앞에는 현재와 미래만 있을 뿐입니다. 자기 문제, 자기 핸디캡은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압니다. 강한 자존심, 게으름, 지나친 욕심, 위선 등을 왜 붙들고 있습니까? 정욕과 안일주의와 수치심과 나약함과 의심, 이 모든 것들을 깨끗이 끊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손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고, 네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버려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리면, 내가 범죄한 눈을 빼지 못하면 하나님이 처리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범죄한 내 손을 내가 처단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해서라도 바른 길에 설 수 있다면 바로 이 방법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경기자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인내입니다. 마지막 승리는 스테미나에 달렸습니다. 얼마나 견디느냐에 성패가 좌우되지 않습니까? 특히 마라톤을 보면 달리는 약 두어 시간 동안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순간들입니까? 완주할 때까지 스테미나를 잘 안배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가 가진 스테미나를 다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말입니다. 만약 처음에 잘 뛰다가 뒤에 가서 지치거나 또는 너무 아껴 뛰어서 골인한 다음에도 힘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라톤 전 거리에 힘을 잘 안배했다가 골인 지점에서는 남아 있는 자기의 모든 정력, 힘을 집중시켜 골인하고 그러고는 푹 쓰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내는 계속적인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인내는 감상적인 것이거나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결심이 아닙니다. 긴 시간 동안 자기와의 싸움에서 얻어지는 생명력이 바로 인내입니다. 평안한 환경에서 어려움을 잘 모르는 젊은 사람들이 해외 선교사로 파송되었다가 일 년도 못 되어 되돌아온 분들이 많습니다. 고생도 갑자기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권투선수들은 때리는 연습도 많이 하겠지만 맞는 훈련도 상당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경기를 볼 때마다 느끼게 됩니다.
만일에 매맞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그와 같은 주먹을 한 대라도 맞게 된다면 기절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 생활에서도 여러 가지 훈련이 필요합니다. 비난도 받아 보고 시련도 당하며 끊임없는 유혹과 자기와의 싸움에서 지구력을 길러야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운동선수들도 오랜 시간 동안 훈련을 하나 막상 시합하는 순간은 몇 초에서 길어야 2시간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깐 동안의 그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자기와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까? 그러기에 그들의 승리에는 높은 영광이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많은 유혹과 정욕을 물리치고 얼마나 피땀 흘리는 수고를 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나 하는 경외감마저 느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간단하게 쉽게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시련과 오랫동안의 시간이 오늘의 인내를 얻어내는 것임을 알아야겠습니다.
넷째, 경기자에게 영감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즉 나 혼자가 아니라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습니까? 경기장에 나선 선수들도 보이지는 않지만 자신을 성원하는 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별로 생각하지 못합니다만 강단에 올라와서 설교하기 직전에는 저를 위하여 기도하신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그래서 평생동안 저를 위해 기도하신 그 기도가 오늘 여기서 응답되게 해주십사고 기도하게 됩니다. 이 한마디의 기도를 하고 나면 저의 마음은 편안해집니다. 어느 어머니가 아들이 입학 시험을 치르는데 따라 갔다가 너무 추워서 자동차 속에서 초조하게 한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들은 첫 시간 시험을 보고 쉬는 시간에 담너머로 잠깐 만났는데 시험을 못 봤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래, 미안하다. 지금부터는 내가 저 솔밭에 가서 기도할 터이니 최선을 다하여라"하고 당부하고선 추운 땅에 꿇어앉아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시험을 마치고 나온 아들은, 시험 보는 동안 줄곧 어머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이 떠올라 큰 힘이 되어 시험에 집중할 수 있어 잘치르었다고 어머님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 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정성을 쏟고 기도하는 분이 많습니다.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 먼저 가신 믿음의 조상들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힘있게 경주할 수 있었고, 스데반도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까지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 문이 열리고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기에 그 처참한 사형장에서도 천사와 같은 밝은 얼굴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경기에도 이런 영적인 환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감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다섯째, 경기자는 앞에 표본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가셨습니다. 그는 고난을 참으셨고 끝까지 인내하셨습니다. 그는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저 부활의 영광을 누리셨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길을 알고 그의 부활의 영광을 압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내가 지는 이 작은 십자가는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의 부활의 능력을 보았기에 내가 지는 십자가의 종말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먼저 가신 주님을 바라보며 따라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신앙적 경주는 이미 출발되었습니다. 목표를 바로 세우고 잘 출발되었습니까? 그리고 오늘까지 정코스로 바로 달려왔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니면 너무 자주 옆길로 빠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경기에 장애 되는 요소들을 어느 정도 과감하게 끊어 버렸습니까? 그리고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그 영감을 보았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7-8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 종반전에 이르렀을 때에 골대 앞에 서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들고 서 계시는 주님을 보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 감옥에서 순교하여 종반전을 잘 장식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인생 경주 종반전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영광스럽게 골인하는 은혜가 있어지길 기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