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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가인의 갈등 (창 4:1-10)

by 【고동엽】 2024. 4. 13.
목차

가인의 갈등

창세기 4:1-10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의 대 학생들 사이에 있는 유행하는 풍 자가 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교육감이 모 초등학교를 방문했 는데 교실을 둘러보다가 창가에 놓여있는 지구본을 발견했습니 다. 그리고 지나가는 학생에게 물었습니다.

"이 지구본의 축이 왜 이렇게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 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 학생 이 대답하는 말이

"그거 내가 한 거 아닙니다."

이렇게 책임을 회 피하더랍니다. 자기 잘못이 아 니라고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서 있는데 선생님이 지나갑니다. 선생님에게

"김 선생, 이 지구 본이 왜 이렇게 기울어져 있지?"

하고 물었더니 선생님 대답하는 말이

"그거 본래부터 그랬어요."

그러더랍니다. 아주 타성적 무 기력, 무관심입니다. 언제 한번 그걸 생각해 본일 없는 무책임한 대답입니다. 너무 기가 막혀서 교장선생님을 만나 가지고

"이 지구본이 왜 이렇게 삐딱하죠?"

하고 물었더니 교장선생님 말씀

"그거 모르십니까? 그거 국산이 에요."

그러더랍니다. 이건 기가 막힌 얘기입니다. 학생이던 선 생이던 교장이던 뭐 하나 진지하 게 생각할 줄 모르는데 대한 풍 자입니다. 이래 가지고 나라꼴 이 되겠습니까? 이게 교육입니 까? 여기서 무슨 세계 경쟁얘기 가 나옵니까? 뭐 경쟁력 같은 것은 아주 먼 얘기입니다. 이렇 게 멍청하고야 무슨 일이 되겠습 니까? 그래 구약성경 잠언에 보 면 '깨달음이 없는 자는 멸망하 는 짐승과 같다.'그랬어요. 깨달 아야 됩니다.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해야 될 그런 단계에 있습니 다. 사건은 문제가 안됩니다. 문제는 사건에 대한 자세입니다. 어떤 일을 당했느냐고 묻지 마십 시다.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태 도가 문제올시다. 지능이다 지 식이다 기술이다 무슨 얘기를 해 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에 대 한 구체화 능력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자, 실수와 실패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실 수란 하나의 과정이요, 실패는 바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실 패라는 것은 끝났다는 얘기입니 다. 그러나 실수란 수없이 반복 되면서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창 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올시다. 우리는 과정으로써의 실패는 있 지만 결론적인 실패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올시다. 실패가 되느 냐 실수가 되느냐 하는 것은 그 사건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에 달 린 것이올시다. 가끔

"우리가 당한 경제적 한파가 언제 끝날까 요?"

라고 하는 질문을 종종 받 습니다. 제가 계시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점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때마다 저는 대답합니다.

"우 리가 할 나름이지요."

자연히 자동적으로 우연히 그렇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지요. 지금 이 시 간에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하느 냐? 이 사건이 있게 된 원인을 깨끗이 깨닫고 그로부터 돌이키 면 길이 있는 것이고요. 그대로 앉아 기다린다면 그것은 주저앉 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냐고 묻지 마십시다. 우리가 깨닫고 돌이키는 그날, 그때가 다시 일 어나는 시작일 것입니다.

여러분, 실패했다고 곧 실패 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 는 사건이요. 실패자라는 것은 인성 자체의 문제입니다. 실패 라고 하는 사건은 있으나 실패자 는 될 수 없습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하는 사람 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실패하 는 인격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오히려 실패라고 하는 사건들을 통하여 더 건전하고 더 건강하고 더 바르게 더 생동력 넘치는 그 런 인격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생명이 지닌 역설적 관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가인이라 고 하는 대표적 인간이 나옵니 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입니다. 저들이 각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물 리쳤습니다. 사건은 이러합니다. 이제 가인이 여기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그가 어떤 태도로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그 운명이 좌우됩니다. 이 순간 그가 무엇을 생각했느냐 는 겁니다. 여기에 따라서 그의 운명은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 보면은 '아 벨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 를 드렸다.'라고 말합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고 가인은 믿음없이 드렸다.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흔히 말하는 가인 콤플렉 스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 보 는데로 심히 분해했다. 분노합 니다. 이 사건 앞에서 이 분노 가 이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또 안색이 변했어요. 얼굴색이 달 라졌다. 그 마음에 갈등, 고민을 말하는것이에요. Complications 그 갈등을 여기서 말해주는 것이 에요. 몹시 괴로워 한 것이에요.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이게 지금 괴로워 할 일입니까?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야 하는 거죠. 내가 아무리 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아니라면 아 닌 거죠.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인데 내 속마음 내 진실을 아시 는 분은 그분이지요. 그가 아니 라면 아닌 거지 왜 안색이 변하 는 것입니까? 왜 분노해 하는 것입니까? 왜 통곡하는 것입니 까? 하나님의 판단에 대하여 공 손하게 수락하지 못 했다는 말이 에요. 하나님의 심판 앞에 겸손 하지 못 했어요. 혹은 진실하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원인을 생 각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십니 까? 납니까? 어느 쪽이 옳은 겁니까? 또 이웃의 판단 뭐 그 게 중요합니까? 남들이야 뭐라 고 하든 말든 내 자신은 내가 압 니다. 내가 아는 내가 또 그게 온전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 를 아십니다. 그의 판단, 그의 말씀 그것이 옳은 겁니다. 그의 처사가 옳았던 겁니다. 하나님 의 공의에 대해서 우리는 그대로 받아 드려야 됩니다. 북한식으 로 말하면 전폭적으로 접수해야 됩니다. 이 접수가 잘못된 것이 에요. 그대로 받아 들였으면 이 제부터 좋은 생각이 났을텐데 받 아들이지 못하고, 안색이 변하고, 분하고, 속에서 들끓습니다. 갈 등과 고민 번뇌가 일어납니다. 이 결과가 다른 방향으로 분출됩 니다. 그래 오늘 성경말씀에 하 나님은 미리 경고했습니다.

"네 가 선을 행했으면 왜 낯을 들지 못하느냐? 네 선함을 점검하 라."

경고합니다. 또

"죄의 소원 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 릴지니라. 지금이 위기다."

위기 요 왜? 고민하니까... 갈등과 고 민, 위기란 말이에요. 이 순간에 이것이 어느 쪽으로 분출되느냐 에 따라서 운명이 곤두박질하는 거니까 위기입니다. 자, 그가 고민하게 된 이유가 뭡니까? 저 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하나 님께서 두 사람의 재물을 다 받 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 사람이 안색은 안 변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한 사람 것은 받고 자기는 받지 않으시니까 이 건 질투요. 시기와 질투,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은 죄가 아니라 고 생각할 때가 많아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속에 깊 이 뿌리박은 원죄, 그 원죄 중에 가장 뿌리깊은 죄가 시기 질투입 니다. 그건 무서운 겁니다. 가 만히 보세요. 전부가 이 시기 질투 때문에 잘못되는 것이에요. 내가 못 살아서가 아니요. 다른 사람 잘 사는 게 배가 아파서 그 래요. 가만히 보면 모든 문제가 여기 걸려요. 그런데 시기 질투 때문에 마지막에 신앙까지 잊어 버려요. 이성도 병들어 버려요. 판단이 흐려지기 시작합니다. 시기와 질투란 참 무서운 겁니 다. 그 인성을 사람의 마음을 아주 썩게 만듭니다. 정신 못 차립니다. 여기서 위기에 돌입 하게 됩니다. 결국은 하나님 앞 에 다시 돌아오고 하나님과의 관 계를 생각하게 되는데 하나님과 의 관계에서 잘못된 것을 사람에 게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 서 책임전가를 합니다. 아벨을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웃 지향 적, 타인 지향적 속성이 문제입 니다. 내 문제는 내 문제예요.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그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해 보셨습니까? 오 로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지 그 누구와의 관계도 아닙니다. 이 것이 성경이요. 이것이 신앙입 니다. 가인은 지금 바로 이 시 간에 뻔한 얘기 아닙니까? 하나 님이 안 받으셨으면 다시 하나님 께 바로 나와야지. 왜? 아벨은 생각하는 거요. 아벨의 제사를 받았던 안 받았던 왜 기분 나빠 하는 것입니까? 이 타인 지향적 판단, 아주 위험한 것이올시다.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뭡니까? 그 50년 혹 은 70년 동안에 많은 혁명을 일 으켰습니다. 그 혁명이라고 하 는 것의 기본 철학은 뭐냐하면 내가 못사는 이유가 다른 사람에 게 있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거예요. 내가 가난한 것이 저 부자 때문이요. 우리 프롤레타리아의 어려움이 저 부 르조아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 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사회문제라고 합니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다. 이렇 게 돌려 놉니다. 결국은 내 책 임은 없다는 거예요. 공산주의 40년 50년 하는 동안에 그런 인 간을 만들었어요. 지금 동서독 도 보니까 서독이 얼마나 고민하 는지 모릅니다. 그저 경제문제 만 해결되면 정치문제만 해결되 면 될 줄 알았는데 딱 통일해 놓 고 보니까 아니요. 안 되는 거 예요. 인간이 아주 달라졌어요. 공산주의 속에서 불평, 원망 불 평 모든 것을 사회로 돌리고 모 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그런 인간이 되어 버렸어요. 다 시 말하면, 무책임하고 불성실하 고 게으르고 이런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얼마나 고민하는 지 모릅니다. 우리가 북한에서도 저분들을 위 해 다 함께 일을 해봅니다. 일 을 시켜보는데 안됩니다. 일 할 생각 안 합니다. 참으로 일 시 키기 어렵습니다. 안됩니다. 우 리가 하는 일의 1/10도 안됩니 다. 그렇게 돼버렸어요. 그리고 속에는 원망과 불평이에요. 꽉 차 있습니다. 여러분 믿거나 말 거나 북한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북한이 저렇게 못사 는 이유는 남한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 서 무서운 거예요. 이 마음을 깨뜨리기 전에는 바꾸기 전에는 아무 일도 소용없는 거예요. 자 기들이 못사는 이유는 철저하게 남한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 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 까? 우리가 당한 이 어려움이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남의 얘기 할 게 아닙니다. 내 가 어려워진 이유가 누구 때문이 냐고요. 가끔 보면은 쉽게 말합 니다. 무슨 사건이 하나 터졌을 때 총체적 위기입니다. 사회적 인 문제입니다. 국가의 문제입 니다. 그 말하는 동안에 그 뒤 에 있는 비밀한 말 한마디가 있 습니다. 너 자신의 책임은 아니 라고 내 책임은 아니라는 말로 들려지는 거예요. 여기는 해결 이 없어요. 이걸 알아야 합니다. 모든 책임은 내 자신에게 있습니 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 어머니가 훌륭한데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해 요. 걸핏하면 집을 나가고 속 썩혀요. 만날 때마다 그저 뭐

"우리는 다 좋은데 아이들 때문 에 고민입니다. 고민입니다."

그 러더라고요. 그래 언젠가 아이 들하고 같이 이렇게 부모님들하 고 같이 얘기가 됐어요. 내가 딱 한 마디 했습니다.

"이걸 해 결해 줄 테니까 내 말을 따르겠 소?"

 

"아, 그러믄요."

 

"그래요. 간단합니다. 공부 못하는 책임 이 부모 당신들에게 있다고 생각 해 본 일이 있느냐?"고

"그게 말 이나 되느냐? 밥을 안 줬어? 돈을 안 줬어?"

 

"아니요. 겸손 해 지세요. 이 사건의 책임이 내게 있다고..."

가만히 있더니

"사실은요. 저도 학교 다닐 때 어지간히 공부 안 했거든요. 속 썩이고요."

그 말을 한 마디 하 니까 그 옆에 있던 아들이 당장 한 마디 하대요.

"아 그 비밀을 진작 말했더라면 내가 나빠지지 않을 건데."

그러더라고요.

여러분, 겸손하세요. 스스로 낮추시고 아이들 앞에도 그저

"미안하다."

그러세요.

"다 너희 들이 이렇게 잘못된 것도 다 내 탓이다."

그 한 마디만 하면 다 해결될걸.

"나는 할 일 다 했다. 너는 뭘 하는 거냐? 나는 고학 하면서 공부했다. 이놈아! 너는 이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그게 뭐냐?"

될 것 같습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제나 사건 앞에서 우리는 그 책임을 내가 질 줄 아는 주도적 성격을 가져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은요. 자, 이 사건의 원인은 오늘 제사 드린 이 사건 이전에 있었던 겁 니다. 도대체 가인이라는 이 사 람은 믿음이 없었어요. 믿음 없 는 행위 속에 오늘 와서 제사만 드린 거예요. 모름지기 그런고 로 그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은 거죠. 오늘 제사를 안 받 으셨다고 하는 이 사건만이 중요 한 게 아니에요. 또 하나는 오 늘은 이 사건으로 나타났지만 벌 써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에 대 한 결과가 여기에 있을 뿐이에 요.

 

여러분, 우리가 당한 지금 현 실, 자꾸 지금 오늘 된 것처럼 잘 나가다가 뭐 잘못된 것처럼 하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 요. 뭘 잘 나갔습니까? 처음부 터 잘못되었던 거예요. 그것이 오늘의 이 결과를 낳은 것이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에요. 벌 써부터 누적되었던 것이 오늘 와 서 분출된 것뿐이에요. 어느 하 나 새로운 게 없어요. 있던 사 건이 나타난 것뿐이지요. 잔치 를 했다면 남의 돈 가지고 한 잔 치죠. 그 동안 잘살았다면 빚 내가지고 흥청거린 거예요. 그 런데 오늘 이것이 오늘에 와서 뭔가 잘못된 것처럼, 그건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이건 벌써 고 질적이에요. 수 십년 전부터 쌓 이고 쌓여서 있을 일이 있은 것 뿐이요.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누구 책임도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 앞 에서 Self examination 자기 자 신을 살펴야 됩니다. 그리고 자 기성찰 자기반성이 필요합니다. 우리 마음 마음속에 벌써 오래 전부터 있었던 타성화 된 것 그 것에 대해서 깊이 관찰해야 됩니 다.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요 오히려 고맙게 여겨야 합니다. 내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 셨지만 다른 사람의 제사 받으셨 으니까 거기서 좋은 모범을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1954 년 미국에서 오하이오주에서 열 렸던 골프 세계적인 대회가 있었 습니다. 여기에 아놀드 파머라 고 하는 25세 청년이 나가서 1등 을 했습니다. 1등을 해 가지고 환호가 올라갈 때에 모든 사람이 박수를 치는데 거기에 14살 난 잭 니콜라우스라는 소년이 저 뒷 전에 서서 그 환호를 보면서 마 음에 다짐을 했습니다. '나도 빨 리 커서 저렇게 골프계의 왕자가 되리라.' 굳게 결심했습니다. 정 말로 1960년에 가서 미국에 오픈 대회가 있을 때 파머가 1등을 하 고 니콜라우스가 2등을 했습니 다. 그 후로 계속 둘이 경쟁을 한 나머지 결국은 니콜라우스가 파머를 이겼습니다. 어떤  는 또 파머가 이기고 어떤 때는 니 콜라우스가 이기고 두 사람이 그 대로 경쟁을 10년 동안 합니다. 이제 한 세월이 다 갔습니다. 1992년 62세의 파머와 52세의 니 콜라우스가 대결을 합니다. 모 든 사람들은 지켜보면서 걱정이 었어요. '저 분들이 한 평생 저 렇게 경쟁을 했으니까 저거 어디 서 터지면 어떻게 하나?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한 사람이 죽기 를 바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 두 사람의 사이에 대해서 걱정을 했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사이가 좋아요. 그리고 파머가 니콜라 우스에게 귓속말로 하는 말이

"자, 우리도 나이는 이제 많이 먹었지? 참으로 고마우이. 아놀드."그랬습니다. 참으로 고맙 다고....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들은 이렇게 둘이 경쟁을 한 평생 했는데 사이가 좋으냐?"고. 그들은 대답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없어야 할 적 수라고 생각지 않고 오히려 Helper 조력자가 된다고 생각했 습니다. 저가 있으므로 내가 열 심히 하고, 내가 있으므로 저가 열심히 하고 서로서로 우리는 도 우면서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오 늘에 이른 겁니다."

 

얼마나 아름 다운 얘기입니까?

여러분, 만일에 가인이 이렇게 생각을 해서 동생을 찾아가서

"나의 재산은 하나님이 안 받으 셨는데 너는 어떻게 해서 하나님 이 받으셨냐? 그 좋은 길을 좀 가르쳐 주라."

둘이 화목하면서

"형님, 이렇게 해야 됩니다. 이 렇게 해야 될 것 같습니다."

협력해서 제사를 드렸더라면 하나님이 받았을 것이고, 두 사람 다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왜 가인은 아벨이 죽어야 된다고 생 각했습니까? 세상에 죽어야 되 고 죽여서 해결된다고 하는 것처 럼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아시는대로 히틀러는 유대인 600만을 죽여서 해결하려고 하다가 끝났 고요. 아시는바와 같이 캄보디아 의 폴 포트는 지성인 300만 명을 죽였습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지성인만 죽였습니다. 화이트칼라가 문제다. 이걸 놔두고는 정치 할 수가 없다고 모조리 죽이는데 안경 쓴 사람 다 죽었답니다. 조심하세요. 손이 깨끗한 사람은 모조리 죽였답니다. 손끝 에 붓을 잡은 흔적이 있는 사람 은 모조리 잡아다가 좌우간 300 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러고 사회주의국가를 세우려고 했으나 역사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여러분 죽여서 해결하고 제거해서 해 결하는 이 방법은 근본적으로 잘 못된 방법입니다. 가인 콤플렉스는 혼자 해결 할 수 있는 게 아 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다 시 서야됩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 다. 많은 모순과 부조리한 사건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그는 기도 하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 님께 위탁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 느냐 아주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그리고 조용히 그 어려운 십자가를 집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이 상 누구도 원망하지 맙시다. 누 구를 비판하고 저주하지도 맙시 다. 누가 없어야 된다고 생각도 맙시다. 다 있어야 됩니다. 다함께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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