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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를 본받으라(빌립보서 3:17-21)

by 【고동엽】 2024. 4. 13.
목차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립보서 3:17-21)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사람은 한평생을 계속적으로 공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됩니다. 부모로부터 배우고 친구로부터 배우고, 그리고 학교라는 기관에 들어가 선생님으로부터 배웁니다. 좀더 나이가 든 다음에는 사실상 자녀들로부터 배웁니다.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요, 받아들인 지식에 따라 낡은 생각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배워서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지식을 몸에 익히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귀로 들어서 배우고 눈으로 보아서 배우고 몸으로 체험하면서 배웁니다. 학교의 교과서만이 교과과정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 자체가, 그 전부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는 귀한 교재라고 생각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위인(偉人)에 세 가지의 유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날 때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천혜적(天惠的)으로 위인형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노력해서 위대해지는 사람입니다. 공부도 하고 훈련도 쌓고, 많은 수고 끝에 위대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인격을 우리는 흔히 봅니다. 중요한 것은 세 번째 유형입니다. 위대한 인간이 될 것을 강요당한 위인이 그것입니다. 여러분,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된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집안 살이가 재미없다보니 인생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철학자가 되더라는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케이스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거니와 그밖에도 한다하는 철학자들의 면면을 보아하면 아닌게 아니라 장가는 별로들 잘 가지 못했습니다. 우연인지는 모르나 실제로 악처를 만났기 때문에 철학자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가운데 성춘향(成春香) 못지 않은 열녀가 많습니다. 춘향이 그 춘향된 것은 감옥에 갔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춘향이 그렇듯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열녀인 줄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하는 '강제성' 그 속에서 위인이 되는 인격이 되고 신앙인이 되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Burger, P.)나 루크만(Luckman) 같은 사람은 사람의 자기형성 과정을 가리켜 사회화(社會化)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회화의 과정을 그들은 외적표현(externalization) 내지는 객관화(objectization), 그리고 내면화(internalization)라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늘 밖으로부터의 도전을 받습니다. 많은 사물에 접하고 많은 인격에 접합니다. 집단의 기대에 부응하고 적응하기 위하여 스스로 노력하게 됩니다. '나'라고 하는 세계로부터 필경은 뛰쳐나오는 수밖에 없어서 외부세계에 적응해나갑니다. 이것을 externalization이라 합니다 객관화입니다.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회라는 권위, 체계, 이런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객관성을 인정하고 따를 수밖에 없다는 수용적 자세가 됩니다. 이것을 객관화(objectization)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객관화된 문화와 사회라고 하는 주어진 상황에 그대로 동화되고 생각 없이 끌려만 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바탕으로 자아정체감을 형성해갑니다. 이것을 internalization이라고 합니다. 대단히 잘된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다른 많은 영향을 받아가면서 자기형성을 이루는 데에는 특별히 significant others가 있습니다. '중요한 타자(他者)'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다면 부모님일 것이다, 또는 자기를 가르쳐주신 선생님일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중요한 자가 누구냐 하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누구건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려면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 만나야 한다고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세상을 살아나가다보면 굉장한 성자가 아니더라도, '꼭 내가 저분만 같았으면 좋겠다' '저분은 누구일까?'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거기에 감동을 받고 바른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존경하고 가장 따라야 할 이 '중요한 타자'가 실은 가짜 교인이요, 위선자요, 믿음과 생활이 영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한번이라도 보고 나면 그 충격 때문에 어쩌면 일생동안 예수를 안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 '중요한 타자'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 운명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슬픈 것은, 요새 와서 보니 더더욱 본받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지도자라고 하는 분들이 문제입니다. 높이 존경하고 우러러볼 수 있는 지도자가 없다는 것에 우리는 너무나 큰 실망을 합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논어」에 보면, 동양의 성현이라고 하는 공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윗사람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따른다. 그러나 윗사람의 몸가짐이 부정하면 아무리 호령을 해도 백성은 따르지 아니한다.' 그렇습니다. 법을 만든다고 될 일이 아니요, 감옥을 많이 짓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윗사람이 아무리 큰소리로 호령하고 협박한다 해도 그 윗사람이 몸가짐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백성은 따를 수 없습니다. 작게는 여러분의 가정을 보십시오. 부모가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살면, 구태여 이래라 저래라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아이들이 잘 따릅니다. 그러나 부모가 몸가짐을 바로 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큰소리를 쳐도 자녀교육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소리를 해도 들어먹지 않습니다.

본받을만한 사람, 나에게 본을 보여주는 사람--이 '중요한 타자'가 나에게는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 생애와 운명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은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상의 문제요 목적의 문제입니다. 현실적 불행이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적 실패입니다. 그러나 목적과 이상의 상실은 미래적 실패입니다. 목적이 잘못되고 이상이 빗나갔을 때에, 그 미래는 보나마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좀 지나친 말을 한 듯싶습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그 놈 교만하다. 어떻게 감히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함께 나를 본받으라"----문맥적으로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고 또한 당위입니다. 결코 교만이 아닙니다. 바울의 진실 고백이요 정열 고백입니다. 여러분,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도 이것을 같이 먹었으면 싶지요? 맛있는 것이 있으면 내 아들에게 주고 싶고 내 딸에게 주고 싶지요? 그리고 나와 함께 먹어주었으면 싶지요? 심지어 제게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요새 그 많은 음식점 가운데서 아주 맛있고도 싼 곳에서 먹고 와서는 "목사님, 거기 가니까 참 좋은 것이 있던데요……"하고 '전도'를 합니다. 내가 좋다고 여겼을 때에 '다른 사람도 이래보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습니까? 이것이 교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9절에 보면,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채 재판장인 아그립바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그 중요한 시간에,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이것이 전도인의 마음입니다. '내가 믿어보니 너무 좋습니다. 같이 믿읍시다. 내가 예수 믿어보니 이렇게 행복합니다. 제발 우리 같이 행복하십시다'--이런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말로 표현한 것이 '나를 본받으라'입니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 아닙니까? 어찌 이 말씀이 없을 수 있습니까?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찾았을 때에 너무너무 기뻐하는 것 같이, 마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돌아오면서 함께 즐기자 하는 것 같이 말입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본디 그는 '강요당한 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門下)에서 공부한 학자요, 헬라파 유대인이요, 바리새인이요, 더우기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사람입니다.

다메섹으로 피난 가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몽땅 잡아다 죽이려고 작정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던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 해서 사람이 정반대로 달라집니다. 완전히 달라져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만족합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께 포로가 된 것입니다. 잡힌 바 되었습니다. 포로된 사람, 강요된 사람이지만 이제는 이것이 행복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예성(奴隸性)에서 자원성(自願性)으로, 강제성(强制性)에서 자발성(自發性)으로 생을 바꾼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본디 포로된 사람이요, 붙들린 사람이요, 강요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만족하고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있습니다. 목적과 현실에 다 만족합니다. 비록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빌 3:13)……"라고 고백할 만큼 미완의 상태이지만 그래도 앞을 향해 온몸을 기울이고 달려갑니다. 그는 조금도 후회가 없습니다. 만족합니다. 이제 성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만족하고 있습니까? 예수로 인하여 어느 만큼 만족하십니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의 직업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이 선택한 직업에 대하여 자녀들한테 "내 직업을 계승해다오"라고 권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훌륭하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실패하였다. 너무도 후회가 많구나. 제발 나처럼 살지는 말아다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입니까? 자식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여기에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정에 성공하셨습니까? 가만히 보면, 간혹 어떤 계기에 이르러서는 숨어 있던 진실이 폭로될 때가 있습니다. 남편이 없을 때에 아이들이 사고를 치고 못되게 굴자, 엄마는 아이들을 꾸중하면서 이렇게 말한답니다. "용케도 니 애비를 닮았구나." 여러분, 이러고야 무슨 교육이 되겠습니까? 그런가하면 아이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어 혼사 얘기가 오고갈 때면 아버지가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하든 그것은 다 네 자유다만, 아무쪼록 네 엄마 같은 여자하고만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 망조(亡兆)입니다. 어머니된 사람은 딸을 앞에 앉혀놓고 "노처녀로 늙어 죽더라도 니 애비 같은 사람하고는 절대로 결혼하지 말아라"합니다. 이 가문이 제대로 된 가문입니까?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아이들이 크면서 보고들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그저 한마디만 보태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어머니(아버지)같은 여자(남자)라면 이 아비(어미)는 무조건 찬성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기꺼이 결혼하여라." 이렇게 되어야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함께 나를 본받으라." 유감없습니다. 이야말로 행복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 1)."

의사이면서 가난하게 사는 분이 있습니다. 여러 자녀들과 함께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 딸이 시집가는 날 아침에 예배를 드리러 그 집에 갔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모두 앞에 앉혀놓고 그 시집가는 딸을 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의사다. 나도 남들처럼 이래저래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을 사양치 않았더라면 돈도 많이 벌었을 것이고 너희들을 이렇게 고생시키지도 않았을 테지 내딴에는 진실하게 살려고 하다보니 나도 고생이고 너희들도 고생을 많이 했구나. 나 나름으로는 믿음으로 살고자 애를 썼단다. 내가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만, 부디 너희는 지금까지 보고 들은 대로 나같이 살아다오." 여러분, 이런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진정 만족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추상적 이론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이미 몸을 바쳐 행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빌 2:17)……"라고 말씀합니다. 관제라는 말은 피를 쏟아 붓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고 있다. 내가 달려가는 길은 확실하다. 나는 이만큼 행복하다. 피를 쏟아 부어도 나는 기뻐할 것이다. 그러니 나를 본받으라'----얼마나 권위 있는 말씀입니까?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 족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학문이라든지 전통이라든지, 옛날에는 그토록 좋아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다 해(害)로 여길 뿐더러 다 분토와 같이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이요,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요,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벅찬 감격이어서 '그 밖의 모든 것은 다 버렸다, 그런고로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가치관의 완성을 본 것입니다. 여러분, 돈 몇푼 번 것 가지고 자랑하겠습니까? 남보다 공부 좀 더했다고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적어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정열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부디 나처럼 살아다오. 내가 가진 가치관을 가지고, 내가 버린 것을 버리고, 내가 취한 것을 취하고, 내가 자랑하는 것을 자랑하여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은 다시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라고 말씀합니다. 번역이 조금 어려우므로 「공동번역성서」와 대조하겠습니다. 「공동번역성서」에는 "그리고 여러분과 갈이 우리를 모범으로 삼고 따르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표준번역'에는 '우리를 본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을 익히 보십시오'라고 표현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를 본받을 뿐만 아니라 나를 본받으며 사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지켜보고 사랑하십시오'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자를 존경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예수님을 본받게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간절히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을 본받으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겸손해야 본받게 됩니다. 교만하면 스스로 우상이 됩니다. 교만에는 3대 교만이 있다고 합니다. 지적 교만, 물적 교만, 미적 교만이 그것입니다. 남보다 좀더 많이 아는 것처럼, 남보다 좀더 많이 가진 것처럼, 좀더 아름답고 잘난 것처럼 여기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생명의 성장이 끝난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구주 예수를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교사가 셋 있다고 합니다. 최상의 교사는 현자(賢者)요, 제2의 교사는 학자요, 제3의 교사는 선생이라고 합니다. 말만 하는 사람, 지식을 가지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지식에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의 지식에 충만한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을 현자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를 내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는, 정성어린 사람들을 존경하는 분위기가 이루어질 때에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은퇴식에 참석했었습니다. 그분의 마지막 인사말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을 홀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 교단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딴에는 가르친다고 애써보았지만 남은 것은 부끄러움뿐입니다. 언젠가라도 반드시 나를 닮으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하였는데, 이제는 본받으라는 말 한번 제대로 못한 채, 혹여라도 나를 본받을까봐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정든 교단을 떠납니다"하고 눈물로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함께 나를 본받으라"하는 사도 바울의 이 위대함을 보십시오. 그실 강요된 사건이었으나 이제는 자원하게 되었고, 스스로 만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귀한 일, 생명의 길이기에 강요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함께 나를 본받으라"----여러분,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이렇듯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렇게 죽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이르려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다함께 본받고, 그리고 만족하십시다. 나아가서는 당당하게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그 크고 자랑스럽고 영광된 행복 속에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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