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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팍케 됨을 면하라(히브리서 3:12-19)

by 【고동엽】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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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팍케 됨을 면하라(히브리서 3:12-19)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팍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려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언제나 누구에게든 기회는 주어집니다. 우리가 깊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도 기회는 다시 주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기회를 놓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쳤다'라는 말 대신 '기회를 버렸다'라는 말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계속 주어지는 기회를 알게 모르게 흘려 버립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다 버린 후에 기회를 놓쳤다고 말을 합니다. 잡지 못하여 놓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회를 버린 것입니다. 일단 놓친 기회, 버린 기회는 다시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워하며 후회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현실 상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가끔 우리 주위에 뒤늦게 공부하느라고 고생하는 분을 봅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분들이 대학에 출석하여 공부하는 모습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애처롭게 보입니다. 그 분들은 결석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제일 먼저 출석하여 늦게 귀가합니다. 그 분들의 학습 태도나 시험 치르는 자세는 매우 성실한 모범 학생들입니다. 그 분들을 볼 때마다 "진작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간혹 떠오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성장에도 때가 있습니다. 이솝 우화의 "늑대와 양치기 소년"에 나오는 소년같이 진실할 때 진실하지 못하면, 진실이 필요할 때 그 진실은 아무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게 됩니다.

성실과 의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로워야 할 때 의롭지 못하면 다시 의로워지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에 "강팍하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많은 의문을 주며 또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나 혹은 높은 신앙의 성장을 위하여 이 구절은 반드시 상고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간혹 "몰라서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구분하여, 알고 지은 죄가 모르고 지은 죄보다 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르고 지은 죄 역시 죄임에는 틀림없으며 또한 신학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알 수 있을 때에 알기를 계속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 죄 의식이 둔화되어 모르게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르고 죄를 범했다는 것으로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으며, 더욱이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공부해야 할 때에 하지 않고 성장한 사람의 지식과 교양이 어린 아이 정도의 수준이라 해도 배운 바가 없어서, 혹은 몰라서라고 변명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 수준의 지식과 교양만을 지녔다 하여도 어른의 판단 기준에 맞추어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몰랐다는 것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건강을 해치는 것은 아니며 오랜 기간에 서서히 나빠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당뇨병과 고혈압이 있습니다.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런 병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손발이 저린다든지 하는 조기 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건강의 적신호를 무시하고 먹지 말아야 될 음식을 먹거나 자꾸 무리하여 어느 한계점에 도달하게 되면 결국 쓰러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 때에는 약도 의사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그가 쓰러진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까?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닙니까?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양심에 가끔 희미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쓰면 그 소리는 점점 크게 들리지만 만일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시해 버린다면 그 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마침내는 전혀 들려오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생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삶이란 매우 조용한 삶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죽은 시체의 평온입니다. 교회도 한 두 주일 빠질 때 괴로운 것이지 여러 주일을 계속해서 빠지다 보면 무감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이 마비되어 버린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어느 한계점을 벗어나게 되면 그 때부터 무의식 상태, 마치 시체의 고요함 같은 상태가 오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령의 감화에 대하여서도 같은 말씀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를 계속 거역하거나 반항하고 소멸하는 자에게는 마침내 성령도 탄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좀더 극단적으로 "내버렸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4)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계속 외면하고 그 말씀에 거역하는 자들을 마침내는 "포기했다", "내버렸다"(give up)는 것입니다.

그 무섭고 비참한 상태에 빠졌던 성경 속의 두 인물을 찾아 살펴보기로 합시다.

먼저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를 말할 수 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며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겨우 은 30에 스승을 배반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을 적어도 다섯 번이나 예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네가 나를 팔 것이다"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끝까지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마지막 말을 듣자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네가 하고자 하는 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행하고자 하는 대로"라는 말은 자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미 회개의 기회를 놓쳐 버렸음을 의미합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가 죽으신 후에 분수처럼 내뿜는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결국에는 자살하고 맙니다. 그러나 그의 교사(絞死)는 그의 죄를 사할 수 있는 회개가 결코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예로 바리새인을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많은 책망을 하시면서 회개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많은 지식을 가졌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도전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놀라운 기적과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그의 행하시는 일로 미루어볼 때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알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부정하기 위해 귀신의 두목인 바알세불의 도움을 받아 이적을 행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마 12:22-32). 그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망령된 소리입니까? 결국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그릇된 견해로 인하여 "내버림을 받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심판 이전에 회개할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마침내 버림을 받은 자가 되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본문 중의 "강팍하게 됨"은 바로 이러한 심판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거나 거부할 때 심판을 받으며, 그러한 심판의 결과로 "강팍하게 됨"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이 "강팍하게 됨"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 3장을 살펴보면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히 3:13)이란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을 구분합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는 현재가 지나온 발자취요, 미래는 현재가 앞으로 나갈 시간이다"라고도 설명합니다. 시간의 개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 오늘이라는 공간입니다. 성경에서도 "오늘의 염려는 오늘로 족하다. 내일의 염려는 내일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지금'이라는 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 혹은 지금 있는 이곳에서 성령의 감화를 받는다는 것, 이러한 것들은 벌써 여러분이 회개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갈등이나 고민으로 밤을 새워가며 괴로워하십니까? 아니면 두려워하거나 의심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여러분에게는 회개의 가능성이 있음을, 버림받은 존재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이미 버려진 사람이 되면, 그에게는 아무런 양심 의 가책도 없으며 오히려 죽은 시체의 평온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로지 이런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의식과 고집뿐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 속에서 가끔 '저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할 수 없는 말까지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차원과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무의식과 고집으로 굳어진 마음이 바로 멸망의 앞잡이인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피차 권면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로 그리스도가 지시한 윤리를 권면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여 죄의 유혹으로 강팍하게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죄의 유혹을 의식하십니까?

상대방이 죄의 유혹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서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하며, 상대방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만일 죄의 유혹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죄인이 죄인으로 보이지 않고 영웅으로 보이며, 불의가 불의로 보이지 아니하고 화려하게 보일 때, 여러분은 그 순간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십시오. 비록 희미하지만 죄를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깨닫는 그 순간이 바로 돌이킬 수 있는 시간, 회개해야 하는 시간임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출애굽 당시를 회고하여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행하는 많은 기적 속에서 생활합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의 생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바로 왕에게 행한 열 가지 이적의 재앙과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샘물이 솟으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줍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이 그들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말씀들을 듣고 부딪치고 경험하면서도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다가 결국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며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본문 16절에서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란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을 격노하게 만든 자는 다른 이방인이 아니라 모세의 인도로 애굽 땅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애국 땅에서 탈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방종으로 인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이야기입니까?

얼마 전에 우리 나라 비행기가 항로를 잃어버려 소련 땅에 불시착하였다가 다행이 다시 돌아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고 원인은 비행기에 있는 나침반의 고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방향을 지시해 주는 나침반이 일단 고장이 나면 아무리 비행기가 좋고 비행사의 기술이 훌륭해도 모두가 소용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나침반이 고장나면 우리의 재산, 명예, 정열 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 문을 오늘도 두드리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40년 동안 하나님의 끊임없는 은총 속에서도 원망하고 거부하고 반항만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심판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어리석음을 또 다시 범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고자 하는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강퍅하게 되었다는 것은 심판 후에 이루어지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하십니다.

바로 왕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 한번의 이적에 회개하였거나 그를 죽여 버렸다면 그가 왜 심판을 받았는지 알 사람이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적을 보고 뉘우쳤다가 다시 고약해지는 반복되는 거부로 인하여 결국 강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벌을 받음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열 번씩이나 뉘우칠 수 있는 기회를 베풀었는데도 회개하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바로 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를 비웃을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심판을 통하여 오직 이스라엘 백성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벌백계(一罰百戒)라는 말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 길로 가지 않도록 산 교훈을 주려고 강팍하게 하는 역사를 계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치밀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심판의 대행자로 쓰시기도 합니다. 느부갓네살이라는 악한 왕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심판하신 뒤에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그를 이용합니다. 실로 하나님의 오묘한 역사요 섭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강팍하게 됨을 면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날에 서로 권면하여 스스로 진단해서 강팍하게 됨을 면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를 항상 알아야 하며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왕의 어리석음과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을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시작할 때에 확실하게 믿고 견고히 지키면 예수님이 동행하사 천국에 참예하는 자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위탁하고 그의 뜻에 맡기는 믿음으로 출발하였다면 구원의 날이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 아버지, 거듭거듭 주의 말씀을 외면하고 성령의 역사를 소멸하고 많은 은사를 남용하며 살아온 어리석고 미련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사 붙들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희 마음 문을 두드려 주시고 말씀으로 일깨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바라옵기는 저희를 온전히 사로잡아 주시사 오늘 이 시간에 우리로 새롭게 설 수 있도록 하여 주시고 강팍하게 됨을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다시는 주의 말씀을 외면하거나 거역하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순종하면서 주를 따라가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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