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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내게 상관없다(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by 【고동엽】 2024. 4. 13.
목차

저는 내게 상관없다(요한복음 14장 25절~31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유명한 정신의학자 칼 융(Carl G. Jung)은 "인간이 권위의 한계를 느낄 때 그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의 심리적 현상이 일어난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 벽에 부딪히거나 혹은 '이것이 한계다'하고, 지능의 한계, 능력의 한계, 그리고 인생이라는 길에서 이것이 한계다, 하고 느끼는 순간에 이러한 심리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첫째는 '불안함'입니다. 이 한계 다음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한계 밖의 일에 대해서는 예측도 불허합니다. 그러므로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앞에 어떤 일이 있을까 하며 그야말로 망망한 대해에 던져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둘째는 '억압감정'입니다. 아주 꽉 눌려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보다 더 무겁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는 아주 사라진 것같이 용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고독감'입니다. 실패와 함께 느껴지는 심리 현상은 고독입니다. 실패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업에 실패한 것으로 인하여 이제는 친구도 가고, 사랑하는 사람도 가고, 모든 사람이 나에게서 떠나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잃어버린 것은 사업뿐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내가 잃어버린 것은 건강 하나뿐입니다 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과 함께 모든 기대감을 잃습니다.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다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가장 무서운 심리 현상은 고독입니다. 그야말로 '나 혼자'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알게 모르게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가 '어디서 왔는가'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어디서 왔습니까? 끝없는 수수께끼이지만 우리는 이 질문에서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철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이것은 반드시 물어야 하고, 해답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본질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어디로 가는가'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데 이것이 정말 끝이냐 하는 것입니다. 죽어서 매장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냐, 인간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궁극적 관심, 이 종말론적인 의문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정말로 죽어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아무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언젠가 이렇게 끝나고 말면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다시금 어디로 가느냐,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하고 계속적으로 묻게 됩니다. 끈질기게 우리 마음에 부딪쳐오는 질문입니다. 이에 따라서, 오늘 내가 할 일의 뜻은 무엇이냐 하는, 목적 달성과 목적 관리에 대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정말 나는 바른 목적을 세우고 사는 것이냐, 그리고 그 목적에 합당한 오늘을 살고 있느냐 하는, 목적 관리의 재진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우리는 이 목적과 함께 평가를 다시 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증거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께 대한 모든 증거가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주는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 보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특별하게 우리 눈앞에 나타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크고 가장 밝게 보이는 예수님의 얼굴은 분명하게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명쾌한 답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아주 분명합니다. 구구절절이 이것을 설명합니다.
성경 전체가 이것을 설명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간다--아주 분명합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다시 아버지께로 간다 하십니다. 얼마나 분명합니까? 요한복음 3장이라든가 14장이라든가 16장이라든가, 어느 복음서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이 문제에 대해 조그마한 그림자도 없습니다. 분명합니다. 오시는 것이 분명하고 가시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의 오늘의 생이라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사시는 생이었습니다. '호 로고스 사륵스 에게네토'---임시로, 잠깐, 육신이라고 하는 천막을 입고 이 땅에 계신 것이었습니다. 아주 잠깐---그런 '순간'으로 그의 생애가 설명되고 있습니다. 본래성과 종말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현재의 사건의 의미도 분명합니다. 이런 일이든 저런 일이든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그 노정의 사건이 있을 뿐입니다. 엄청난 우주적 사건 속에 현실이라고 하는 작은 점이 있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엄연한 현실적 문제입니다.
그런고로 본훼퍼 같은 신학자는「제자의 길과 그 개체」라고 하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 가지 결단이 있어야 한다. 첫째, 단독 결정이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 물을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실존적인 문제이니까. 아내고 남편이고 자식이고, 아무와도 관계없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생명의 문제이니까 단독으로 결정해야 한다. 둘째, 단독으로 나서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혼자 나서야 한다. 셋째, 세상과의 관련성을 청산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끊어버려라. 툭툭 잘라버려라. 그러지 않고는 결코 사람의 바른 모습, 그리스도인 된 바른 제자가 될 수 없다'---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현대적인 용어로 각색한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나와 상관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단독결정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아직도 끊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너절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정말로 명쾌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영의 길을, 생명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되더라는 말입니다. 명예니 지식이니 지위니…… 별것이 아니거든요. 거추장스러운 것밖에는 안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질문 속에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 있습니까? 어차피 갈 것인데요.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십자가 전야에 주신 말씀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지금 몇 시간 앞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면서 마지막으로 길게 설교를 하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일명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다락방 설교'---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주신 유언 같은 소중한 말씀입니다. 그 일생과 그 모든 사역을 정리하시는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이 설교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로마군인들에게 체포되십니다. 그리고 갖은 굴욕과 함께 재판을 당하시고, 골고다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시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 하십니다.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30절)"---세상 임금이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입니다. 여기에는 가야바가 있고, 빌라도가 있고, 로마군인이 있고, 그 앞잡이로 나선 가룟 유다의 사건도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이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음모가 지금 진행되고 있습니다. 환하게 눈에 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보입니다. 이것을 보시면서 세상 임금이 가까이 오고 있다 하십니다. 뒤이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30절)"---나와 상관이 없다 하심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이것이 보통사건입니까? 그 엄청난 십자가의 사건이 다가오는데도 이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시다니요.
이 말씀 원문의 뜻이 재미있기에 한번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헬라어로 '엔 에모이 욱 엑케이 우덴'이라고 간단하게 표현되는데 '엔 에모이'라는 말은 '내 안에서'라는 뜻이고, '욱 에케이'라는 말은 '가지지 않았다' 하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I have not'입니다. 그대로 직역을 하면 'He has nothing in me.'--'그는 내 안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공동번역성서」에서는 "그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없다"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표준번역에서는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 권한도 없다"라고 의역하였습니다. 뜻은 이것입니다. '그는 내 안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보세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관계가 없을 것이라고 해서 정말로 관계가 없었습니까? 여러분도 분명히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셨습니다. 그 갖은 굴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러나 십자가를 지든, 때리든, 욕하든, 나와 상관이 없다시는 것입니다. 초연하십니다. 아주 초연하셔요. 참으로 자유 하십니다. 체포와 굴욕과 태형과 심판과, 그리고 제자들의 배신과 그 밖의 얽히고 설킨 복잡한 일들이 있지만 예수님의 영혼은, 예수님의 마음은 평안하십니다. 초연하십니다. 태연하십니다. 참으로 자유하십니다. 넉넉한 승리, 놀라운 권세를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저들이 나를 욕할 때에 나도 욕하고, 저들이 나를 치면 내가 멸하고, 이렇게 돼야 할 것 같지마는 예수님의 자세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때리든 욕하든 죽이든,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이렇듯 명쾌하게 살아본 적 있습니까? 남이야 욕하든 말든,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습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적 자세입니까?
더욱이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지 아니하니라"---나는 평안하다, 너희들 다 도망가겠지마는 아버지는 나와 함께 하시느니라,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고로 나는 평안하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나는 평안하다, 또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나는 본래 너희들을 위해서 대속물로 세상에 왔다, 생명을 주려고 왔다, 주려고 온 것이니 끝까지 줄 것이다, 네가 배신을 하든 말든 상관이 없다, 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요한복음 13장의 말씀처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사랑하기로 했으니 끝까지 사랑할 것이다 하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로 하고, 평생 함께 하기로 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마는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아요. 사랑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사랑해버렸으면 좋겠는데 가끔가다 섭섭하다고,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합니다.
한번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그 엄청난 배신을 당하시고도 초연하게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오로지 그의 길을 가시고 계실 뿐입니다. 본래 목적하신 대로입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시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오늘 당한 이 현실이란 그 과정일 뿐입니다. 본래적인 목적에 충실하시고, 본래 정했던 목적대로 살아가시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 것도 상관이 없으십니다. 해야 할 일을 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고민하셨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 고민하셨을까요? 해야 할 일과 오늘 아침에 있는 이 사건이 어떤 관련이 있느냐, 그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시면서 다시 한번 확정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가야바의 사건도 아니요, 빌라도의 사건도 아니요, 그 누구의 배신도 아닙니다.
그 모든 사건이 잡다하게 눈앞에 있는 것 같아도 예수님의 뜻은 확실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잔," 사랑하는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십자가, 내가 마시겠다, 내가 지겠다 하심입니다.
이가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이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원망이 있겠습니까? 대학 다니다가 군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내가 이 3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 생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선배 되는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 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가르쳐 주십시오." 선배 되는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군인 생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오직 상관의 명령에 복종만 하면 되느니라. 명령 떨어지는 대로만 시간시간 복종하면 돼. 앞에 할 것까지 미리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아, 간단하군요." 가만있다가 이 청년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라 하고, 여러 상관이 명령을 각자 다르게 내리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사람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런 때에는 말이야,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단히 중요한 예화입니다. 최고 계급자가 누구입니까? 어느 때에든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권세 위에 권세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면 모든 것은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눈치는 볼 것이 없어요. 최고 계급자, 가장 높은 계급자에게, 지존자에게 순종하면 모든 문제는 단순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왜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약해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의 관계성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 문제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증오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이제는 예수 안에서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믿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성,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될 때에 거기에 바른 신앙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부터 전부 단절될 때에 그 인간은 어떻게 되느냐---케이치프 노이드라고 하는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관계가 단절된 인간이란 여섯 가지 감옥에서 산다. 첫째는 자기의 예쁜 면만을 볼 줄 아는 자기도취의 감옥, 둘째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만을 보는 비판의 감옥, 셋째는 오늘과 내일을 암담하게 보는 절망의 감옥, 넷째는 옛날만 황금시대로 보는 과거지향적 감옥, 다섯째는 다른 사람의 것만 부러워하는 선망의 감옥,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시기와 증오의 감옥이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오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한번 우러릅시다. 십자가 앞에 서신 예수님의 모습을 우러릅시다. 그는 말씀하십니다. 태연하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리고 더 넘치는 말씀을 하십니다. 31절에 보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비롯한 모든 사건이 결국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알게 하고, 그것을 노출시키고, 표출시키고, 또 내가 하나님의 명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게 하는 것일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람이 불어야 향기는 멀리 갑니다. 사건이 있어야 진실은 알려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여기서 증명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명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이들 사건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이 엄청난 권세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내게 상관이 없다"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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