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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의 마음(이사야 1장 2절~9절)

by 【고동엽】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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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의 마음(이사야 1장 2절~9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무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진실한 크리스찬이요 의사요 심리학자이자, 근자에는 신학자로도 불리는 저술가 폴 투니어(Paul Tournier)의 저술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저술을 통하여 연구의 결론과 경험으로 얻어낸 주제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생이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이다"---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대화에서 산출된다, 고독에서는 참된 인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독 자체가 병리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요,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적이요 정신적인 교류가 끊어질 때에 그 인격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흡수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뜻이 내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벽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앞에 내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소통되고 뜻이 흡수되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구와도 소통이 안됩니다. 이미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내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단절될 때, 이것은 죽음의 상태입니다. 정신적인 파국입니다. 투니어는 이러한 관계의 소통을 '대화'라고 표현하며 최고의 대화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수평적인 대화를 종종 내세웁니다. 수평적 관계에 서서 서로 이해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마는, 우선 되어야 할 것은 수직적 대화입니다. 그 방법에서도, 윗사람을 믿고 존경할 줄 아는, 그래서 윗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이 선행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른들을 향하여 어버이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화의 첫째 요건입니다. 네가 마음을 열고 존경과 사랑으로 마음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아랫사람에 대하여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어린아이를 보십시다. 때때로 떼를 쓰고 울면서 어머니의 등짝을 마구 두들겨대는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떼거지입니다. 어머니가 화가 나서 당장에라도 내동댕이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이에게는 적어도 어머니가 나를 내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떼를 써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한다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멋대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재롱을 부립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이 정신적 자유입니다. 내 마음이 막힘 없이 수용되고 내 믿음이 어디에라도 전달됩니다. 내 마음이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의 뜻이 나에게 받아들여지고 수용될 때에 그만큼 넓은 정신적 영역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지지 않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면 이것은 스스로 완전히 종이 되고 감옥에 갇힌 결과가 됩니다. 아무런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합니다. 그리고 응답을 듣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 바른 응답----이런 관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면서 비로소 나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를 알고야 내가 아들됨을 알게 됩니다. 칼뱅이 이에 대하여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을 알고 마음이 소통되고 뜻에 만남이 있고 지식이 서로 나누어질 때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 함은 사실상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요, 순종에서 바른 대화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요 창조주 하나님이요 율법의 하나님이시며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헬라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아주 멀리 계셔서 우리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고 손이 닿지 않으며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가르쳐주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啓示者),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하늘높은 곳에 팔짱이나 끼고 앉아서 죄인들이 구원받아 하늘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 죄 가운데에 살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위하여 몸소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비유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마는 탕자의 비유만은 예외입니다. 탕자 비유에서만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탕자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나타납니다. 그 밖의 다른 비유들은 모두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시고,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이 찾으심 속에는 용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부르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하나님을 부르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자를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종합적이고 상징적인 한마디의 표현이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지극히 동양적이고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否定的)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개념을 바로 정립하기 어렵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좋지못한 성품의 아버지 슬하에서 양육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도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 예로 마르틴 루터를 들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자식을 좀 심하게 때리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매질하는 모든 경우가 다 정당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때에는 별반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유독 매질이 심한 편이었나봅니다. 루터는 '하나님 아버지'라 하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에는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기분이 썩 좋지 않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아버지에 대한 개념은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아버지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요, 인자한 아버지요,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십니다. 특별히 이 아버지는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찾아오시려고 부탁하시는 아버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공동번역)!"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지는 소원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깊은 뜻을 깨닫는 것이 효도입니다. 동양의 사고(思考) 개념으로는 효와 신앙은 하나입니다. 부모님께 대한 효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은 수직적 관계의 맥락에서 동질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믿어주기를 바라고 순종하기를 바라고 따라주기를 바라고 닮아주기를 바라며 기업을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 효입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李)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일전에 뵈었을 때 목사가 된 동기를 들려주십디다.

목사님의 선친께서도 목사이셨답니다. 가족 모두가 월남하여 무진 고생을 할 때에 이(李)목사님은 어머니의 처지가 몹시도 측은히 여겨졌답니다. '어쩌다가 목사 부인이 되어서 저다지도 고생을 하신단 말인가! 아버지는 어째서 하필 목사가 되셔서 어머니를 고생시키시는가?' 회의와 원망이 많았답니다. 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뜨시고 어머니도 그후 나이 많아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넷을 불러놓고 유언을 남깁니다. "내 소원은 너희 아버지의 소원과 같다. 너희들 사 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어다오!" 뜻밖의 말씀에 놀란 아들이 어머니께 여쭙니다.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의 아내로서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평생 겪으시고도 이제 자식에게도 목사를 바라십니까?" "아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배고팠던 일, 어려웠던 일이 많지만, 목사의 아내로서 맛보는 이 기쁨과 행복을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제발 내 아들들은 목사가 되어다오!" 이 마지막 부탁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끝내 목사가 되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뜻을 받들어드리는 것입니다. 효도관광 몇 번으로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는 물질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봅시다. 문자 그대로 깊이 묵상해보십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2-4절)." 탄식과 책망의 말씀입니다. 저의 어렸을 때 저의 아버지는 소 먹이는 일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를 그냥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집에 크고 잘생기고 사나운 소가 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그 소를 사오십니다. 그리고 온 동리에서 가장 크고 제일 싸움 잘하는 소로 키웁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취미였습니다. 소란 본시 서로 빌려 사용하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마는, 이렇고 보니 우리집 소는 아무도 빌려가지를 못합니다. 아버지 아니고는 누구도 그 소를 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나운 소도 어머니 앞에서는 자못 얌전해집니다. 행동이 부드럽습니다. 어머니가 늘 소한테 여물을 끓여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소는 저를 먹이는 주인을 알아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무나 답답하여 한 말씀하십니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구유를 아는데 내 자식들은 나를 모른다. 패역한 자식이로다.' 서양사람들이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도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개를 대우하는 것을 보면 심사가 편치 못할 지경입니다. 사람도 받기 어려운 대접을 개한테 베풉니다. 옷을 해 입히고 침대며 베개까지 마련해주거나, 미장원이며 목욕탕이며 병원에 데려가는 것은 예사입니다. 그뿐입니까? 유산까지 개 몫으로 남겨줍니다. 묘비를 세우고 무덤을 만들어주는 일도 그렇게 새삼스런 일이 못됩니다. 음식도 특별히 따로 장만해 먹이지 않습니까? 개한테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 그보다 못한 사람도 얼마나 많으냐고 항변이라도 하면 그들의 답변은 언제나 같습니다. "개는 절대로 배신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키워보면 배신하고 원수 삼고 돌아서서 물기까지 하지만, 개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할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만도 못한 사람, 소만도 못한 사람, 스승을 배반하고 부모를 배격하는 짐승만도 못한 자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이 하나님의 말씀은 부성적(父性的) 사랑이라는 생명의 뿌리를 주고 있습니다. 부성(父性)은 보호하는 것이요, 양육하는 것이요, 기업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사랑이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깊이 읽어볼 것입니다.

호세아 6장 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공의로운 사랑에는 진노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랑이기 때문에 징계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5-6절)"---'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하느냐?' 이미 맞았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가 났습니다. 흐르는 피를 아직 싸매지도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이 상처가 낫기도 전에 또 패역한 짓을 합니다. 또 때려야 하겠는데 때릴 곳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맞을 자가 아니라 때릴 자가 눈물을 흘립니다. '어째서 더 맞을 짓을 하느냐?' 애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때로 우리도 부득이 자녀를 때려놓고 잠든 아이의 상처를 몰래 어루만지며 울지 않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공의로운 사랑이기에 징계할 수밖에 없으나 그 징계 속에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에 한배교라는 유명한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렸는데,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잘못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종아리를 쳤습니다. 어느 날, 이 어머니가 아들을 세워놓고 매를 때렸는데, 한번도 울지 않던 아들이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너는 그 동안에 한번도 울지 않더니 왜 우느냐?" "전에 어머니가 저를 때리실 때는 종아리가 아프더니 이제는 조금도 아프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력이 쇠잔해지신 탓이려니, 마음이 아픕니다." 맞는 내 다리가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때리는 어버이의 마음이 아픈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孝)의 마음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벌을 받는다,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징계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 그만큼 맞았으면 되지 않았느냐?'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 이런 부모의 마음을 잘 지적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녀에게 줄 줄 알거든……" 아이러니칼한 말씀입니다.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자식한테 향하는 마음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악하게만 살았다 할지라도 자식을 향하는 마음만은 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부모라도 자식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자식은 그 부모에 대하여 성공을 했느니 못했느니, 선하다느니 악하다느니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향한 마음만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내가 악하니 너희도 악해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패했으니 너도 실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향하는 마음, 자식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만은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시련을 주실 때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은 독수리 날개로 보호함같이 저를 보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절대적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해서 질투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동생을 칭찬하면 형이 별로 기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칭찬하면 아내가, 신부를 칭찬하면 신랑이 왠지 좋지 않은 기색을 띠는 그러한 세대입니다마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질투가 없고 시기가 없습니다. 자식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자녀의 즐거움이 내 즐거움입니다. 깨끗한 사랑입니다.

또한 부모의 사랑에는 자기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자식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다윗 왕입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왕위 찬탈을 위한 모반을 일으킵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왕궁을 떠나 피난을 합니다. 도망 다니는 아버지를 아들은 끝까지 추격합니다마는, 하나님은 다윗을 긍휼히 여기셔서 압살롬과 그 일당은 요압의 손에 죽고 맙니다. 이렇듯 천하에 몹쓸 패역한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윗 왕은 몹시도 애통해합니다.

사무엘하 18장 33절에는 다윗의 애끊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자기 희생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내게 향하신 구체적인 사랑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내게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깊은 뜻을 알고, 그 뜻으로 돌아서고,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버이를 알고 그를 공경할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어버이의 마음(이사야 1장 2절~9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 땅은 황무하였고 너희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 토지는 너희 목전에 이방인에게 삼키웠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무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같이, 원두밭의 상직막같이, 에워싸인 성읍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진실한 크리스찬이요 의사요 심리학자이자, 근자에는 신학자로도 불리는 저술가 폴 투니어(Paul Tournier)의 저술은 우리나라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저술을 통하여 연구의 결론과 경험으로 얻어낸 주제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인생이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대화가 필수적이다"---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대화에서 산출된다, 고독에서는 참된 인생을 찾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고독 자체가 병리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영적 존재요, 정신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영적이요 정신적인 교류가 끊어질 때에 그 인격은 파멸에 이르게 되며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흡수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뜻이 내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벽 없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앞에 내 마음이 열려야 하고 또 내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 소통되고 뜻이 흡수되어야 합니다.

흔히 '세상에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누구와도 소통이 안됩니다. 이미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어버렸습니다. '내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단절될 때, 이것은 죽음의 상태입니다. 정신적인 파국입니다. 투니어는 이러한 관계의 소통을 '대화'라고 표현하며 최고의 대화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정의합니다.

우리는 수평적인 대화를 종종 내세웁니다. 수평적 관계에 서서 서로 이해해보겠다는 것입니다 마는, 우선 되어야 할 것은 수직적 대화입니다. 그 방법에서도, 윗사람을 믿고 존경할 줄 아는, 그래서 윗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이 선행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른들을 향하여 어버이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 대화의 첫째 요건입니다. 네가 마음을 열고 존경과 사랑으로 마음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아랫사람에 대하여 믿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어린아이를 보십시다. 때때로 떼를 쓰고 울면서 어머니의 등짝을 마구 두들겨대는 아이를 볼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떼거지입니다. 어머니가 화가 나서 당장에라도 내동댕이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아이에게는 적어도 어머니가 나를 내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무리 떼를 써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한다는 자신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멋대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면서 재롱을 부립니다.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자유를 누립니다. 이것이 정신적 자유입니다. 내 마음이 막힘 없이 수용되고 내 믿음이 어디에라도 전달됩니다. 내 마음이 저 사람에게, 저 사람의 뜻이 나에게 받아들여지고 수용될 때에 그만큼 넓은 정신적 영역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어지지 않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면 이것은 스스로 완전히 종이 되고 감옥에 갇힌 결과가 됩니다. 아무런 자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합니다. 그리고 응답을 듣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 바른 응답----이런 관계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알면서 비로소 나를 알게 됩니다. 아버지를 알고야 내가 아들됨을 알게 됩니다. 칼뱅이 이에 대하여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야 내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상대방을 알고 마음이 소통되고 뜻에 만남이 있고 지식이 서로 나누어질 때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이라 함은 사실상 무한한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요, 순종에서 바른 대화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하나님은 계시의 하나님이십니다.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초월적인 하나님이요 창조주 하나님이요 율법의 하나님이시며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이십니다. 헬라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아주 멀리 계셔서 우리의 지식이 미치지 못하고 손이 닿지 않으며 도저히 가까이할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대하여 가르쳐주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계시자(啓示者),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분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은 하늘높은 곳에 팔짱이나 끼고 앉아서 죄인들이 구원받아 하늘로 올라오기만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는 사람, 죄 가운데에 살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사는 사람,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들을 위하여 몸소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비유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같은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마는 탕자의 비유만은 예외입니다. 탕자 비유에서만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납니다. 탕자의 돌아옴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나타납니다. 그 밖의 다른 비유들은 모두가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시고,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끝까지 찾으시는 하나님----이 찾으심 속에는 용서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들이 회개하였기 때문에 찾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부르기 때문에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감히 하나님을 부르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자를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종합적이고 상징적인 한마디의 표현이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지극히 동양적이고 히브리적인 표현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관념이 부정적(否定的)인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개념을 바로 정립하기 어렵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아주 좋지못한 성품의 아버지 슬하에서 양육된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에도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 예로 마르틴 루터를 들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는 광부였는데, 자식을 좀 심하게 때리는 편이었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매질하는 모든 경우가 다 정당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때에는 별반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때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루터의 아버지는 유독 매질이 심한 편이었나봅니다. 루터는 '하나님 아버지'라 하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할 때에는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서 기분이 썩 좋지 않다고 농담처럼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아버지에 대한 개념은 중요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전한 아버지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요, 인자한 아버지요,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십니다. 특별히 이 아버지는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심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 찾아오시려고 부탁하시는 아버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6장 6절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공동번역)!" 간절히 부탁하십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지는 소원이 있다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깊은 뜻을 깨닫는 것이 효도입니다. 동양의 사고(思考) 개념으로는 효와 신앙은 하나입니다. 부모님께 대한 효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은 수직적 관계의 맥락에서 동질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믿어주기를 바라고 순종하기를 바라고 따라주기를 바라고 닮아주기를 바라며 기업을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 효입니다.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李)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일전에 뵈었을 때 목사가 된 동기를 들려주십디다.

목사님의 선친께서도 목사이셨답니다. 가족 모두가 월남하여 무진 고생을 할 때에 이(李)목사님은 어머니의 처지가 몹시도 측은히 여겨졌답니다. '어쩌다가 목사 부인이 되어서 저다지도 고생을 하신단 말인가! 아버지는 어째서 하필 목사가 되셔서 어머니를 고생시키시는가?' 회의와 원망이 많았답니다. 아버지는 먼저 세상을 뜨시고 어머니도 그후 나이 많아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 넷을 불러놓고 유언을 남깁니다. "내 소원은 너희 아버지의 소원과 같다. 너희들 사 형제가 모두 목사가 되어다오!" 뜻밖의 말씀에 놀란 아들이 어머니께 여쭙니다. "목사의 가정에서 태어나 목사의 아내로서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평생 겪으시고도 이제 자식에게도 목사를 바라십니까?" "아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다. 배고팠던 일, 어려웠던 일이 많지만, 목사의 아내로서 맛보는 이 기쁨과 행복을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제발 내 아들들은 목사가 되어다오!" 이 마지막 부탁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아 끝내 목사가 되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효도입니다. 뜻을 받들어드리는 것입니다. 효도관광 몇 번으로 효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효는 물질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봅시다. 문자 그대로 깊이 묵상해보십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2-4절)." 탄식과 책망의 말씀입니다. 저의 어렸을 때 저의 아버지는 소 먹이는 일을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소를 그냥 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집에 크고 잘생기고 사나운 소가 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그 소를 사오십니다. 그리고 온 동리에서 가장 크고 제일 싸움 잘하는 소로 키웁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취미였습니다. 소란 본시 서로 빌려 사용하는 것이 상례(常例)입니다마는, 이렇고 보니 우리집 소는 아무도 빌려가지를 못합니다. 아버지 아니고는 누구도 그 소를 부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나운 소도 어머니 앞에서는 자못 얌전해집니다. 행동이 부드럽습니다. 어머니가 늘 소한테 여물을 끓여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소는 저를 먹이는 주인을 알아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무나 답답하여 한 말씀하십니다.

'소는 임자를 알고 나귀는 구유를 아는데 내 자식들은 나를 모른다. 패역한 자식이로다.' 서양사람들이 개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도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들이 개를 대우하는 것을 보면 심사가 편치 못할 지경입니다. 사람도 받기 어려운 대접을 개한테 베풉니다. 옷을 해 입히고 침대며 베개까지 마련해주거나, 미장원이며 목욕탕이며 병원에 데려가는 것은 예사입니다. 그뿐입니까? 유산까지 개 몫으로 남겨줍니다. 묘비를 세우고 무덤을 만들어주는 일도 그렇게 새삼스런 일이 못됩니다. 음식도 특별히 따로 장만해 먹이지 않습니까? 개한테 지나친 처사가 아니냐, 그보다 못한 사람도 얼마나 많으냐고 항변이라도 하면 그들의 답변은 언제나 같습니다. "개는 절대로 배신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키워보면 배신하고 원수 삼고 돌아서서 물기까지 하지만, 개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할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만도 못한 사람, 소만도 못한 사람, 스승을 배반하고 부모를 배격하는 짐승만도 못한 자에 대하여 탄식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이 하나님의 말씀은 부성적(父性的) 사랑이라는 생명의 뿌리를 주고 있습니다. 부성(父性)은 보호하는 것이요, 양육하는 것이요, 기업을 주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사랑이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본문을 깊이 읽어볼 것입니다.

호세아 6장 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공의로운 사랑에는 진노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랑이기 때문에 징계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5-6절)"---'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하느냐?' 이미 맞았습니다. 그로 인해 상처가 났습니다. 흐르는 피를 아직 싸매지도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그런데 이 상처가 낫기도 전에 또 패역한 짓을 합니다. 또 때려야 하겠는데 때릴 곳이 없습니다.

이로 인하여, 맞을 자가 아니라 때릴 자가 눈물을 흘립니다. '어째서 더 맞을 짓을 하느냐?' 애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때로 우리도 부득이 자녀를 때려놓고 잠든 아이의 상처를 몰래 어루만지며 울지 않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공의로운 사랑이기에 징계할 수밖에 없으나 그 징계 속에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에 한배교라는 유명한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녀들의 잘못을 매로 다스렸는데, 아들이 장성한 후에도 잘못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종아리를 쳤습니다. 어느 날, 이 어머니가 아들을 세워놓고 매를 때렸는데, 한번도 울지 않던 아들이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너는 그 동안에 한번도 울지 않더니 왜 우느냐?" "전에 어머니가 저를 때리실 때는 종아리가 아프더니 이제는 조금도 아프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 기력이 쇠잔해지신 탓이려니, 마음이 아픕니다." 맞는 내 다리가 아픈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때리는 어버이의 마음이 아픈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효(孝)의 마음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징계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벌을 받는다,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징계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매를 더 맞으려 하느냐, 그만큼 맞았으면 되지 않았느냐?'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태복음 7장 11절에서 이런 부모의 마음을 잘 지적해 주십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녀에게 줄 줄 알거든……" 아이러니칼한 말씀입니다.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자식한테 향하는 마음은 선하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악하게만 살았다 할지라도 자식을 향하는 마음만은 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부모라도 자식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합니다.

자식은 그 부모에 대하여 성공을 했느니 못했느니, 선하다느니 악하다느니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향한 마음만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내가 악하니 너희도 악해지라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패했으니 너도 실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향하는 마음, 자식에게 주고자 하는 마음만은 지극히 선한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뚜렷한 목표가 있습니다. 시련을 주실 때에도 확실한 목표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4절은 독수리 날개로 보호함같이 저를 보호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절대적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참으로 미묘해서 질투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동생을 칭찬하면 형이 별로 기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칭찬하면 아내가, 신부를 칭찬하면 신랑이 왠지 좋지 않은 기색을 띠는 그러한 세대입니다마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질투가 없고 시기가 없습니다. 자식의 기쁨이 내 기쁨이요, 자녀의 즐거움이 내 즐거움입니다. 깨끗한 사랑입니다.

또한 부모의 사랑에는 자기 희생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자식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다윗 왕입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도 전에 왕위 찬탈을 위한 모반을 일으킵니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과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왕궁을 떠나 피난을 합니다. 도망 다니는 아버지를 아들은 끝까지 추격합니다마는, 하나님은 다윗을 긍휼히 여기셔서 압살롬과 그 일당은 요압의 손에 죽고 맙니다. 이렇듯 천하에 몹쓸 패역한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윗 왕은 몹시도 애통해합니다.

사무엘하 18장 33절에는 다윗의 애끊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자기 희생의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내게 향하신 구체적인 사랑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현실 속에서 내게 진노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깊은 뜻을 알고, 그 뜻으로 돌아서고, 그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버이를 알고 그를 공경할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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