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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 심기운 나무(예레미야 17장 5절~8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고대 헬라의 철학자인 탈레스(Tales)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모든 생물은 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지구 이외의 어떤 별에 생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추적할 때에는 먼저 물의 유무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물이 있다면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 인체의 구조를 살펴보더라도 피의 90%가 물이며, 살의 80%, 뼈의 25%가 물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9개월 동안 완전히 물에 떠 있다가, 물과 함께 태어나고 물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는 그의 작품「인간의 대지」에서 '인간은 샘물의 포로다' 또는 '생수는 탯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인간 문명이 언제나 강을 끼고 이루어졌듯이 인간은 생수에 매여 있습니다. 생수는 마치 어린아기의 탯줄과 같이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물 자체가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생명 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일 뿐이지 물이 곧 생명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가 염려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물이 점점 줄어든다는 문제입니다. 세계 도처에 한발이 심해서 큰 걱정입니다. '아프리카'하면 원시림을 상상하던 것은 이제 옛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 곳의 절반이 이미 사막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브라질에 파송된 선교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곳도 북쪽에서부터 계속 사막화되어 점점 내려온다고 합니다. 어느 땅이든 3년만 완전히 비가 오지 않으면 사막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성경은 이 한발이 인간 죄악에 대한 저주임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식물의 잎은 동물의 폐와 같아서, 숨구멍으로 숨을 쉬고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려서 햇빛 에너지를 받아 영양을 만듭니다. 즉 식물의 잎은 태양과 만나서 신비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절대적으로 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은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 물이 없다면 아무리 강한 햇빛이 비쳐도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햇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잎은 마르고 타서 끝내는 죽고 맙니다. 물과 태양의 조화 속에서만 생명은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즉 태양의 생명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생수가 공급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피크(James Peak)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예수님의 자취가 있는 곳을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곳 중에서 특히 사람들이 방문하지 않은 곳을 선택하다 보니,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신 광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프차를 타고 광야에 나갔다가 불행하게도 자동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돌아올 수나 없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는 광야에서 마지막 남은 콜라 한 병을 마시고, 태양열에 타서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란 살아남을 수 없는 무서운 곳입니다. 물은 생명 유지에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생명에는 세 가지 신비가 있습니다. 누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출생의 신비, 성장의 신비, 그리고 결실의 신비로서, 아주 오묘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신비가 다 물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이집트에 가면 3천 년 된 미이라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어느 미이라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밀알 몇 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이 밀 알을 실험 삼아 땅에 심어 보았더니 놀랍게도 싹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3천 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도 물이 없이 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미이라의 손에 쥐어졌던 밀알은 그대로 있는 한 언제나 밀 알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귀한 일조(日照)도 인간의 노력도 수고도 다 허사입니다. 반드시 물이 있어야만 생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7:37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주님 자신을 스스로 생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신 말씀의 뜻은 히브리 문화권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배'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로 보면 지식의 소재가 아니고 감정의 소재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이 말씀을 보면, 육신의 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내적 충만함을 경험하여 강이 흐르듯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흘러서 충만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우리 육신이 절대적으로 물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 영적인 생명도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이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고, 그는 사막화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6).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자는 저주를 받아 황폐해져서 씨앗도 거름도 귀한 수고도 지혜도 다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사막이기 때문에 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없기 때문에 사막이 된 것입니다. 이미 사막이 된지 천 년이 지난 곳이라도 물만 주어지면 옥토가 됩니다. 그 좋은 예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이스라엘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정말 망망한 사막 지대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그랜드 캐년을 가기 위해 사막을 12시간이나 달려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사막은 생물이 살 수 없는 뜨겁고 메마른 곳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푸른 과수원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다 공급하여 사막을 옥토로 바꾼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오렌지와 사과는 맛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태양열이 강렬해서 과일의 당도가 높고 세균이 전혀 없어 소독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메마른 사막도 물만 공급하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마른땅도 개척하여 농업 국가로 만든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생수에서 끊어지면 마음이 황폐해져 인간성이 파괴되고 맙니다. 그 많은 지식, 그 많은 재주와 물질이 황폐된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게 됩니다. 또한 사막은 자신만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사막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죽습니다. 이처럼 황폐한 심령은 자신은 물론 그와 교제하는 사람도 황폐케 해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로 어떤 사람을 사귀면서 살아갑니까? 만나면 만날수록 시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날수록 마음을 답답하게 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막과 같이 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내 영혼도 사막화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17:13에 보면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내 심령은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생수를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성경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복을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가뭄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뿌리가 강변에 뻗어 있으므로 항상 푸르고 태양열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은 결실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물입니다. 내 영혼이 시원해질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환경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 길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너를 용서하느니라. 내가 너를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느니라"하는 복음만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요즘 피서철이라 모두들 바다나 산으로 떠납니다만, 돌아올 때는 휴식보다는 오히려 몸과 마음이 지쳐서 황폐한 마음으로 돌아오기 쉽습니다. 마음속이 썩어서 불타고 있는데 장소를 옮긴다고 해결될 수 있습니까? 영혼의 문제이기에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혜와 힘의 신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사람이 지혜롭게 되고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어느 때입니까? 식물은 분명히 햇빛 속에서 성장하며 뜨거워야 열매가 잘 익습니다. 최근에 우리들은 수십 년만에 겪는 불볕더위로 좀 고생을 합니다만, 저는 덥다는 말을 잘못합니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자랐으므로 이 기간 동안은 뜨거워야만 먹을 것이 풍족해짐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얼마나 더 뜨거우냐에 풍년이냐 아니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물이 있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뿌리에 물만 있다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은 결실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속에서 강해지고 고난 속에서 지혜로워지고 고난 속에서 성장합니다. 얼마 전에 젊은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를 거의 마치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전 가족이 잠깐 귀국을 해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제 한국에 나와서 일해야겠으니 무슨 일이든지 맡겨 주십사고 각오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큰 걱정이었어요. 남편은 한국에서 일해야겠는데, 아이들의 교육은 미국에서 받았으면 하는 자녀 교육 문제로 고민 중이라 했습니다.
한국의 입시 지옥에 지레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 사모님께 두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고난 속에서 강해집니까, 아니면 편안한 가운데서 강해집니까?" 그리고 둘째, "미국과 한국 가운데 어느 쪽이 공부하기가 어렵습니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대답은 간단 명료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들딸을 어느 곳에서 키워야 하는지는 명백해집니다." 어려운 시험 지옥을 뚫고 가능한 한 젊어서 고생을 하는 것이 보다 용기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어떻게 되기를 소원합니까? 안일하고 무사태평하게 그늘에서만 키우고 싶습니까?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자녀를 위한 기도」의 한 부분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겠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자녀를 주시옵소서. 바라옵건대 그를 쉬움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대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알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과연 장군다운 기도입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도 역경을 이긴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바로 며칠 전에 한 분을 만나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학창 시절에 신문팔이로 고학을 했는데, 한번도 바로 누워서 잠을 자 본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공부하다가 그냥 책상에 엎드려 두어 시간 자고 또 공부하여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어떤 가난이나 고난도 걱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살기가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에 고생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살게끔 되어 있는 이 여건에서 무엇이 어렵다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허약한 모습이 된 것입니까? 안일하게만 키워서 조그마한 역경도 이겨나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란 참으로 소중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뿌리가 생수의 공급 없이는 아무리 좋은 햇빛을 받아도 메말라 죽듯이, 귀한 고생과 역경에도 말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당하는 고생은 비참하여 마침내 자살로 연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수만 얻을 수 있다면 고난은 있을수록 좋고 햇빛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물론 물도 물 종류에 따라 사정이 달라집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생수이어야만 합니다. 생수가 아닌 끓인 물로는 식물이 살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살아 있는 깨끗한 물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오염된 물을 마셔서 걱정입니다.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간직해야만 새롭고 바르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충분히 공급받아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가 항상 푸르러 결실을 맺는 것 같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좋은 인생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렘 17:7-8).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고하라.
이룰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생수가 되어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지금 피곤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사업이 부진합니까? 아니면 인간 관계가 잘 안 되고 있습니까? 혹은 명예가 떨어졌습니까?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수(말씀)가 떨어진 것입니다. 왜 허탈감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원인은 생수의 근원이 말라가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강변에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항상 말씀의 은혜에 젖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날에 풍성하고 건강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위해 걱정하십니까? 예수님만 바로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로 되면,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걱정되십니까? 영혼만을 위해서 걱정하십시오.
내 영혼이 충분한 생수를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고난과 역경은 내게 능력을 주고 성숙함을 주고 지혜를 주고 용기를 주며 생명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생수를 마시라.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물가에 심기운 나무(예레미야 17장 5절~8절)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고대 헬라의 철학자인 탈레스(Tales)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모든 생물은 물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천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지구 이외의 어떤 별에 생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추적할 때에는 먼저 물의 유무를 조사한다고 합니다. 물이 있다면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우리 인체의 구조를 살펴보더라도 피의 90%가 물이며, 살의 80%, 뼈의 25%가 물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기 이전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9개월 동안 완전히 물에 떠 있다가, 물과 함께 태어나고 물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는 그의 작품「인간의 대지」에서 '인간은 샘물의 포로다' 또는 '생수는 탯줄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인간 문명이 언제나 강을 끼고 이루어졌듯이 인간은 생수에 매여 있습니다. 생수는 마치 어린아기의 탯줄과 같이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물 자체가 생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생명 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일 뿐이지 물이 곧 생명은 아닌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가 염려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물이 점점 줄어든다는 문제입니다. 세계 도처에 한발이 심해서 큰 걱정입니다. '아프리카'하면 원시림을 상상하던 것은 이제 옛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 곳의 절반이 이미 사막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브라질에 파송된 선교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 곳도 북쪽에서부터 계속 사막화되어 점점 내려온다고 합니다. 어느 땅이든 3년만 완전히 비가 오지 않으면 사막이 되고 맙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성경은 이 한발이 인간 죄악에 대한 저주임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식물의 잎은 동물의 폐와 같아서, 숨구멍으로 숨을 쉬고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려서 햇빛 에너지를 받아 영양을 만듭니다. 즉 식물의 잎은 태양과 만나서 신비한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절대적으로 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은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 물이 없다면 아무리 강한 햇빛이 비쳐도 생명의 역사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햇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잎은 마르고 타서 끝내는 죽고 맙니다. 물과 태양의 조화 속에서만 생명은 태어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즉 태양의 생명력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은 생수가 공급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피크(James Peak)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예수님의 자취가 있는 곳을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여러 곳 중에서 특히 사람들이 방문하지 않은 곳을 선택하다 보니,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 당하신 광야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지프차를 타고 광야에 나갔다가 불행하게도 자동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돌아올 수나 없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는 광야에서 마지막 남은 콜라 한 병을 마시고, 태양열에 타서 그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란 살아남을 수 없는 무서운 곳입니다. 물은 생명 유지에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생명에는 세 가지 신비가 있습니다. 누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출생의 신비, 성장의 신비, 그리고 결실의 신비로서, 아주 오묘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신비가 다 물이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이집트에 가면 3천 년 된 미이라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 어느 미이라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밀알 몇 개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이 밀 알을 실험 삼아 땅에 심어 보았더니 놀랍게도 싹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3천 년이란 세월이 흘러가도 물이 없이 는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미이라의 손에 쥐어졌던 밀알은 그대로 있는 한 언제나 밀 알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귀한 일조(日照)도 인간의 노력도 수고도 다 허사입니다. 반드시 물이 있어야만 생명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7:37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고 주님 자신을 스스로 생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신 말씀의 뜻은 히브리 문화권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배'는 히브리 사람들의 문화로 보면 지식의 소재가 아니고 감정의 소재입니다. 그런 개념을 가지고 이 말씀을 보면, 육신의 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내적 충만함을 경험하여 강이 흐르듯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흘러서 충만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우리 육신이 절대적으로 물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 영적인 생명도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로부터 마음이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고, 그는 사막화되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건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렘 17:5-6).
하나님께로부터 떠난 자는 저주를 받아 황폐해져서 씨앗도 거름도 귀한 수고도 지혜도 다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사막이기 때문에 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물이 없기 때문에 사막이 된 것입니다. 이미 사막이 된지 천 년이 지난 곳이라도 물만 주어지면 옥토가 됩니다. 그 좋은 예가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이스라엘입니다. 캘리포니아는 정말 망망한 사막 지대입니다. 몇 년 전에 저는 그랜드 캐년을 가기 위해 사막을 12시간이나 달려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사막은 생물이 살 수 없는 뜨겁고 메마른 곳임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푸른 과수원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물을 끌어다 공급하여 사막을 옥토로 바꾼 것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생산되는 오렌지와 사과는 맛이 좋기로 유명합니다. 태양열이 강렬해서 과일의 당도가 높고 세균이 전혀 없어 소독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메마른 사막도 물만 공급하면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마른땅도 개척하여 농업 국가로 만든 비결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한 생수에서 끊어지면 마음이 황폐해져 인간성이 파괴되고 맙니다. 그 많은 지식, 그 많은 재주와 물질이 황폐된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게 됩니다. 또한 사막은 자신만이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사막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든지 죽습니다. 이처럼 황폐한 심령은 자신은 물론 그와 교제하는 사람도 황폐케 해서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로 어떤 사람을 사귀면서 살아갑니까? 만나면 만날수록 시원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만날수록 마음을 답답하게 해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막과 같이 된 사람과 가까이 하면 내 영혼도 사막화하고 마는 것입니다.
또한 예레미야 17:13에 보면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수의 근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내 심령은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생수를 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성경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복을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가뭄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 뿌리가 강변에 뻗어 있으므로 항상 푸르고 태양열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은 결실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물입니다. 내 영혼이 시원해질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환경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 길은 오직 복음뿐입니다. "네 죄를 사했느니라. 십자가의 사랑으로 너를 용서하느니라. 내가 너를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느니라"하는 복음만이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 수 있습니다. 요즘 피서철이라 모두들 바다나 산으로 떠납니다만, 돌아올 때는 휴식보다는 오히려 몸과 마음이 지쳐서 황폐한 마음으로 돌아오기 쉽습니다. 마음속이 썩어서 불타고 있는데 장소를 옮긴다고 해결될 수 있습니까? 영혼의 문제이기에 좀더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지혜와 힘의 신비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사람이 지혜롭게 되고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어느 때입니까? 식물은 분명히 햇빛 속에서 성장하며 뜨거워야 열매가 잘 익습니다. 최근에 우리들은 수십 년만에 겪는 불볕더위로 좀 고생을 합니다만, 저는 덥다는 말을 잘못합니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자랐으므로 이 기간 동안은 뜨거워야만 먹을 것이 풍족해짐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햇빛이 얼마나 더 뜨거우냐에 풍년이냐 아니냐가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물이 있다는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뿌리에 물만 있다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좋은 결실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속에서 강해지고 고난 속에서 지혜로워지고 고난 속에서 성장합니다. 얼마 전에 젊은 목사님이 미국에서 공부를 거의 마치고 어린아이들과 함께 전 가족이 잠깐 귀국을 해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제 한국에 나와서 일해야겠으니 무슨 일이든지 맡겨 주십사고 각오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사모님은 큰 걱정이었어요. 남편은 한국에서 일해야겠는데, 아이들의 교육은 미국에서 받았으면 하는 자녀 교육 문제로 고민 중이라 했습니다.
한국의 입시 지옥에 지레 겁이 났던 모양입니다. 저는 그 사모님께 두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첫째, "사람은 고난 속에서 강해집니까, 아니면 편안한 가운데서 강해집니까?" 그리고 둘째, "미국과 한국 가운데 어느 쪽이 공부하기가 어렵습니까?"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대답은 간단 명료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아들딸을 어느 곳에서 키워야 하는지는 명백해집니다." 어려운 시험 지옥을 뚫고 가능한 한 젊어서 고생을 하는 것이 보다 용기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어떻게 되기를 소원합니까? 안일하고 무사태평하게 그늘에서만 키우고 싶습니까?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자녀를 위한 기도」의 한 부분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겠습니다. '나에게 이러한 자녀를 주시옵소서. 바라옵건대 그를 쉬움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대하여 분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를 긍휼히 여길 줄 알도록 가르쳐 주시옵소서.' 과연 장군다운 기도입니다. 우리 교우 가운데도 역경을 이긴 훌륭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바로 며칠 전에 한 분을 만나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학창 시절에 신문팔이로 고학을 했는데, 한번도 바로 누워서 잠을 자 본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공부하다가 그냥 책상에 엎드려 두어 시간 자고 또 공부하여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한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제 어떤 가난이나 고난도 걱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살기가 어렵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에 고생을 해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살게끔 되어 있는 이 여건에서 무엇이 어렵다는 것입니까? 왜 이렇게 허약한 모습이 된 것입니까? 안일하게만 키워서 조그마한 역경도 이겨나갈 힘이 없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란 참으로 소중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뿌리가 생수의 공급 없이는 아무리 좋은 햇빛을 받아도 메말라 죽듯이, 귀한 고생과 역경에도 말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 없이 당하는 고생은 비참하여 마침내 자살로 연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생수만 얻을 수 있다면 고난은 있을수록 좋고 햇빛은 강할수록 좋습니다. 물론 물도 물 종류에 따라 사정이 달라집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갈증이 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생수이어야만 합니다. 생수가 아닌 끓인 물로는 식물이 살수가 없으므로, 반드시 살아 있는 깨끗한 물이어야 한단 말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데올로기라는 오염된 물을 마셔서 걱정입니다. 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간직해야만 새롭고 바르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충분히 공급받아서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가 항상 푸르러 결실을 맺는 것 같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좋은 인생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렘 17:7-8).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고하라.
이룰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곧 생수가 되어 우리 영혼을 소생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지금 피곤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사업이 부진합니까? 아니면 인간 관계가 잘 안 되고 있습니까? 혹은 명예가 떨어졌습니까?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생수(말씀)가 떨어진 것입니다. 왜 허탈감에 빠져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원인은 생수의 근원이 말라가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강변에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항상 말씀의 은혜에 젖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는 날에 풍성하고 건강하고 훌륭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을 위해 걱정하십니까? 예수님만 바로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바로 되면, 어디서나 어떤 환경에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걱정되십니까? 영혼만을 위해서 걱정하십시오.
내 영혼이 충분한 생수를 얻을 수 있다면 모든 고난과 역경은 내게 능력을 주고 성숙함을 주고 지혜를 주고 용기를 주며 생명을 더하게 될 것입니다.
"목마른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그리고 생수를 마시라.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다시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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