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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자에게 의원을(마가복음 2장 13절~17절)

by 【고동엽】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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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자에게 의원을(마가복음 2장 13절~17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현대 의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어떤 의미에서 편리한 생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병도 또한 발달하고 있습니다. 이름 모를 병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많은 병이 현대인을 위협합니다.

최근에 와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에이즈(AIDS)만 해도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회 정치 경제 활동에 마비가 올까 하여 보도를 꺼리고 있습니다마는 실은 온 세계가 이 병의 파괴력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한 때 한 곳에서 유행하고 말 전염병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병은 점점 더 무서운 속도로, 점점 더 방대한 지역으로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름도 긴 '후천성 면역 결핍증' - 예방과 치료를 위하여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못 고치는 병이요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에이즈를 가리켜 인간의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병의 원인이 인간의 타락과 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 무서운 병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현대는 의학의 풍요를 누림과 동시에 병의 시달림을 받는 세대입니다.

사람은 원래 건강하게 태어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병균이 떠돌아다닌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면역성과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체질적으로 끊임없이 병마(病魔)와 싸우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병이라고 하면 흔히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육신의 병, 도덕적인 병, 종교적인 병이 그것입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 혹은 사상적인 병, 그리고 영적인 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로 기인됩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할 때에 정신적인 병이 생기고, 정신적인 병이 생길 배에 육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75퍼센트가 정신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하니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병뿐만 아니라 그밖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정신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을 심하게 하고 나서 차를 몰면 사고 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보면 조금 언짢은 일이 있을 때에는 운전하는 것을 삼가합니다. 어떤 분은 아무리 바빠도 진정제를 먹고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경이 산만한 상태로 가다가는 사고 나기 때문입니다. 사고를 내면 나뿐만 아니라 애꿎은 남까지 다치거나 죽게 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에 누구를 만나면 모든 인간 관계에 그만 어이없는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려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야 사람을 만나도 만난다고 합니다.

병 -눈에 보이는 것만 병인 줄 알지만 실은 남모르게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적어도 세 종류의 환자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무슨 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 의원을 찾아 헤매는 환자입니다. 눈이 아프니 안과로 가고, 배가 아프니 내과로 간다 - 여기에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내 병을 알아서 치유함을 받으려고 의사를 찾아가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둘째, 아픈 것은 아는데 찾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아픔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유형의 환자는 자기가 아픈 것조차 모릅니다.

아픈 줄 모르는 병은 그 어떤 병보다도 치명적입니다. 하루하루 죽어가지만 정작 환자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느냐 하는 사실을 모릅니다. 오히려 자기는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정신병들이 그렇습니다.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정신병 환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병자가 아니라고 우긴답니다. 자기 병을 시인하는 사람은 고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똑똑하다. 온전하다.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가' - 바로 이러한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느 정신병 환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다닙니다. 또 다른 환자는 "네가 나폴레옹이라고? 나폴레옹은 나다!" 합니다. 그러니까 제 3의 환자가 말하더랍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을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느냐!" 정신병 환자들은 하나같이 교만합니다. 그들의 대화내용을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하나같이 안하무인(眼下無人)입니다.

교만이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에게 갈등이 많습니다. 자기를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두려고 하는 마음이 병을 만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레위'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을 쓴 마태입니다. 그런데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라고 하면 죄인․창녀와 한통속으로 볼만큼 아주 천대받는 신분이었습니다. 돈은 잘 벌고 있지만 뭇 사람들로부터 매국노, 반 민족주의자, 그리고 폭행자요 탈세자요, 특히 아첨꾼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부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음에 늘 고민이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그를 예수님이 지나가다 보십니다. 그의 눈빛을 보고 예수님은 이미 그 고통과 번민을 아셨을 것입니다.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당장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너무 감사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마태가 세리였으니 그의 친구들 또한 세리입니다. 똑같은 친구들끼리 모여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못마땅합니다.

자, 보십시오. 세리 마태는 죄인이지만 자기가 병들어 있다는 그 사실을 압니다. 이와 반면,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병든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세리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어찌하여 저리도 천한 사람들과 사귀는가,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 하고 비난합니다. 바리새인 본인도 병자인데 교만한 까닭에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되레 예수님까지 비난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세리와 바리새인 말고도 또 한 부류의 환자들이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밖에 있는 환자들입니다. 저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오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지도 못합니다. 이와 같이 볼 때에 세 종류의 환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첫 번째로 주신 인상은 의사입니다. 많은 환자들을 어루만지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십니다. 의원 예수, 치유자 예수로 나타나십니다. 몸과 영과 도덕 생활을 치료하시고, 삶의 본질을 치료해 주십니다. 의사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봅니다.

의사는 언제나 환자의 현실만을 봅니다. 환자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환자 그 자체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느 환자가 수술 직전에 의사를 붙들고 말하더랍니다. "선생님, 제게 돈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습니다. 다만 없는 것이 있다면 건강뿐입니다. 건강을 주십시오. 건강 하나만 빼고는 무엇이든지 다 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 하나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한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강이 없다면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 있으며 명예와 지위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건강이 없다면 아무 것도 당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의사의 눈에는 환자의 명예나 지위, 재산 따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환자의 몸, 환자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그 사실 그대로를 볼뿐입니다. 병원에도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특실이라는 것이 있습디다마는 특실이라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사는 법 없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특실에 입원한 환자도 환자요, 입원할 돈이 없어 쩔쩔매는 환자도 환자입니다. 의사의 눈에 환자는 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리얼리티(reality), 사실 그대로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의사는 숨김이 없고, 비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보실 때에 세 가지 측면에서 보십니다.

먼저는 죄와 관련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환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병이라는 것이 죄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입니다. 병 깊은 곳에 죄가 있습니다. 죄 때문에 병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시키십니다. 요한복음 9장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경륜이 있다, 하나님의 교육적 섭리 혹은 선교적 섭리가 거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환자를 보실 때에 귀신에 사로잡힌, 악마의 종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를 측은히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악마의 사슬에 매여서 부자유한 가운데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종합해서 말하면 예수님은 병을 현상으로, 그리고 하나의 표적(sign)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표적이요. 그 속 깊고 깊은 곳에 원인이 있습니다.

의사는 어디가 아프다고 하는 현상, 그 뒤에 깊이 숨겨져 있는 아픔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수고합니다. 며칠을 두고 검사하고, 사진 찍고, 여러 가지로 애를 쓰면서 숨겨진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자는 아픈 것만 알고 원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원인을 모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병이 깊어서 가정이 파괴되어갑니다. 사회가 썩어갑니다. 몸이 병들어서 문드러집니다. 온 세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된 원인을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파괴되고 썩어가는 것입니까? 그 원인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아픈 것만은 압니다. 고통은 알고 있습니다. 쑤시고,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원인은 본인이 모릅니다. 의사가 압니다. 이러이러한 것이 원인이라고 의사가 가르쳐줍니다. 그럴 때에 환자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병의 원인을 내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깊은 심판적 원인을 시인해야 하며, 주님의 심판을 시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늘 건강한 편입니까? 가끔 아파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플 때의 생각과 건강할 때의 생각은 다릅니다. 건강할 때에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과 내가 병들어 누웠을 때에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드려도 내가 건강할 때에 드리는 기도와 병든 때에 드리는 기도 제목이 다릅니다. 어느 쪽이 진실하겠습니까? 어느 쪽이 겸손하겠습니까?

병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건강할 때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 이 일 저 일 다 해야 한다'하고 야단스럽게 살다가도 일단 병이 들면 만사가 중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이구나……' 할일 다 하고 가고 싶은 때에 가는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 :20)." 그렇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공부도 명예도 돈도 소용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의미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병들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한번씩 재촉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노크하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하던 일을 마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중단해야 할 때가 있다! 이대로 끝내게 될지도 모르는 거야!'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십니다. 나의 날을 계수(計數)하게 하시고 생을 정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면서 쉬게 하십니다. 궤도를 수정하게 하십니다. 가야 할 길을 재촉하십니다. 더 진실하게 되도록, 더 겸손하게 되도록 하십니다. 질병을 통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많은 질병을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의사는 환자를 병리적으로 봅니다. 본래부터 병자라면 논할 것이 없습니다. 날 때부터 앓아온 병이라면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의사로서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병리적으로 봅니다. 본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 잘못 배워서, 잘못 살아서, 잘못 먹어서, 어떤 악조건 때문에 이처럼 병리적인 현상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받아야 할 사랑을 충분하게 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 병적인 인간상이 나온 것이라고 우리 의원이신 예수님은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현상, 모든 죄, 모든 죄인들을 다 병리적으로 보십니다.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하시며, 치료받을 수 있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의사의 믿음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따릅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의사 자신이 병에 걸립니다. 문둥병을 치료하다가 문둥병 환자가 되기도 하고, 전염병을 치료하다가 세균에 감염되기도 합니다. 그뿐입니까? 많은 환자와 함께 살기 때문에 병리적 심리가 작용하기도 합니다. 많은 위험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치료하시다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누명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믿음입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무엇보다 먼저 믿음을 요구합니다.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으면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의사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사실을 그대로 다 내놓고 의사가 말해 주는 원인에 수긍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의사에게 생명을 바칩니다. 내 생명을 그의 손에 맡깁니다. 수술을 받기 전에 이제 이 수술을 받다가 죽더라도 환자 가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서명하고 도장을 찍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의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분의 능력을, 창조주의 능력을 수령(受領)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 하십니다. 실로암까지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이 환자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가는 것입니다.

한 2년 전, 제가 괌 섬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한창 더운 여름에 갔는데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였습니다. 가장 피곤할 시간에 내렸지만 아주 열심있는 여집사님 한 분과 목사님이 공항까지 와서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고맙기 이를 데 있겠습니까?

부흥회 첫날, 그 여집사님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찬송 부르고 은혜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저녁에는 그 집사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그밖에 낯익은 얼굴이 없는 터라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본교회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오늘은 그 집사님이 왜 안 보입니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왜요?"

감기에 걸렸는데 빨리 낫고 싶은 생각에서 한 알씩 먹으라는 감기약을 한꺼번에 세 알이나 드셨답니다." 그래서 그만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집에 있는 약 상자를 뒤져보면 먹다 남은 약봉지가 많을 것입니다.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사흘 동안 시간 맞추어 드세요" 하고 약을 주면 고작 하루 이틀 먹어보고 치워버립니다. 약이 잘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가 사흘 먹으라고 하는 약은 사흘 먹어야 효력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병원에 갔더니 환자가 하루에 250명이나 옵니다. 그래서 제가 "환자 많습니다" 했더니 담당 의사 하는 말이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한번 진찰을 하고 나서 사흘치 약을 지어 주면 환자들은 의사 말대로 사흘 동안 꼬박꼬박 약을 먹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매일 오라고 해서 매일 약을 지어 주기 때문에 환자가 많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환자가 오죽이나 의사를 믿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도무지 믿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믿읍시다.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가라고 하면 가는 것 ---- 이것이 믿음입니다. 서두르지 맙시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라고 하는 병자를 고쳐 주시되 겨우 병원서 퇴원할 정도로가 아니라 온전한 사람으로 온전케 하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료 과정을 봅시다. 먼저, 병석에 누운 환자처럼 괴로워하면서 세금을 받고 있는 마태를 그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그처럼 치료하신 뒤에 그의 집에 가서 함께 유하십니다. 인간 관계를 회복해 주시고 가정을 구원해 주십니다. 몸만 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 들어가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를 제자 삼으십니다.

마태는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병이 나았고, 예수님 모신 생활을 함으로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그 생애 전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한 존재가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봅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모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나 저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죄인인 줄 아는 죄인, 주님 앞에 나아오는 죄인, 의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죄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에 살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함으로써 온전한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건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병든 자에게 의원을(마가복음 2장 13절~17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무리가 다 나아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가르치시니라.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저희가 많이 있어서 예수를 좇음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현대 의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어떤 의미에서 편리한 생을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병도 또한 발달하고 있습니다. 이름 모를 병과, 원인을 알 수 없는 많은 병이 현대인을 위협합니다.

최근에 와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에이즈(AIDS)만 해도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회 정치 경제 활동에 마비가 올까 하여 보도를 꺼리고 있습니다마는 실은 온 세계가 이 병의 파괴력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한 때 한 곳에서 유행하고 말 전염병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병은 점점 더 무서운 속도로, 점점 더 방대한 지역으로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이름도 긴 '후천성 면역 결핍증' - 예방과 치료를 위하여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못 고치는 병이요 속수무책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에이즈를 가리켜 인간의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병의 원인이 인간의 타락과 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이 무서운 병으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한탄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현대는 의학의 풍요를 누림과 동시에 병의 시달림을 받는 세대입니다.

사람은 원래 건강하게 태어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병균이 떠돌아다닌다 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면역성과 적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체질적으로 끊임없이 병마(病魔)와 싸우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병이라고 하면 흔히 세 가지를 생각합니다. 육신의 병, 도덕적인 병, 종교적인 병이 그것입니다. 육체적인 병, 정신적인 병 혹은 사상적인 병, 그리고 영적인 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 세 가지는 결국 하나입니다. 하나로 기인됩니다.

종교적으로 타락할 때에 정신적인 병이 생기고, 정신적인 병이 생길 배에 육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의 75퍼센트가 정신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하니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그런데 병뿐만 아니라 그밖에 일어나는 사건들도 정신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부부 싸움을 심하게 하고 나서 차를 몰면 사고 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을 보면 조금 언짢은 일이 있을 때에는 운전하는 것을 삼가합니다. 어떤 분은 아무리 바빠도 진정제를 먹고 한 시간쯤 기다렸다가 떠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경이 산만한 상태로 가다가는 사고 나기 때문입니다. 사고를 내면 나뿐만 아니라 애꿎은 남까지 다치거나 죽게 하기 십상이라는 것입니다.

또 지혜로운 사람은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에 누구를 만나면 모든 인간 관계에 그만 어이없는 결과가 온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려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은 다음에야 사람을 만나도 만난다고 합니다.

병 -눈에 보이는 것만 병인 줄 알지만 실은 남모르게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적어도 세 종류의 환자가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무슨 병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 의원을 찾아 헤매는 환자입니다. 눈이 아프니 안과로 가고, 배가 아프니 내과로 간다 - 여기에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내가 내 병을 알아서 치유함을 받으려고 의사를 찾아가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둘째, 아픈 것은 아는데 찾아갈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해결을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속수무책입니다. 아픔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세 번째 유형의 환자는 자기가 아픈 것조차 모릅니다.

아픈 줄 모르는 병은 그 어떤 병보다도 치명적입니다. 하루하루 죽어가지만 정작 환자 자신은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느냐 하는 사실을 모릅니다. 오히려 자기는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정신병들이 그렇습니다. 정신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정신병 환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병자가 아니라고 우긴답니다. 자기 병을 시인하는 사람은 고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나는 똑똑하다. 온전하다.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가' - 바로 이러한 생각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느 정신병 환자가 "나는 나폴레옹이다!"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돌아다닙니다. 또 다른 환자는 "네가 나폴레옹이라고? 나폴레옹은 나다!" 합니다. 그러니까 제 3의 환자가 말하더랍니다. "내가 언제 너희들을 나폴레옹으로 임명했느냐!" 정신병 환자들은 하나같이 교만합니다. 그들의 대화내용을 가만히 들어보십시오. 하나같이 안하무인(眼下無人)입니다.

교만이란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아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들에게 갈등이 많습니다. 자기를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 두려고 하는 마음이 병을 만듭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레위'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마태복음을 쓴 마태입니다. 그런데 마태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라고 하면 죄인․창녀와 한통속으로 볼만큼 아주 천대받는 신분이었습니다. 돈은 잘 벌고 있지만 뭇 사람들로부터 매국노, 반 민족주의자, 그리고 폭행자요 탈세자요, 특히 아첨꾼으로 손가락질 당하는 부류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음에 늘 고민이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그를 예수님이 지나가다 보십니다. 그의 눈빛을 보고 예수님은 이미 그 고통과 번민을 아셨을 것입니다.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당장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너무 감사해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잔치에 모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마태가 세리였으니 그의 친구들 또한 세리입니다. 똑같은 친구들끼리 모여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못마땅합니다.

자, 보십시오. 세리 마태는 죄인이지만 자기가 병들어 있다는 그 사실을 압니다. 이와 반면,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병든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세리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어찌하여 저리도 천한 사람들과 사귀는가,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가 하고 비난합니다. 바리새인 본인도 병자인데 교만한 까닭에 자기가 죄인인 줄 모르고 되레 예수님까지 비난을 합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세리와 바리새인 말고도 또 한 부류의 환자들이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밖에 있는 환자들입니다. 저들은 예수님 앞에 나아오지도 못하고 예수님을 부인하지도 못합니다. 이와 같이 볼 때에 세 종류의 환자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전하실 때에 첫 번째로 주신 인상은 의사입니다. 많은 환자들을 어루만지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고쳐주십니다. 의원 예수, 치유자 예수로 나타나십니다. 몸과 영과 도덕 생활을 치료하시고, 삶의 본질을 치료해 주십니다. 의사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봅니다.

의사는 언제나 환자의 현실만을 봅니다. 환자가 얼마나 많이 아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이런 것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환자 그 자체만이 있을 뿐입니다.

어느 환자가 수술 직전에 의사를 붙들고 말하더랍니다. "선생님, 제게 돈이 많습니다. 얼마든지 있습니다.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습니다. 다만 없는 것이 있다면 건강뿐입니다. 건강을 주십시오. 건강 하나만 빼고는 무엇이든지 다 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웃으면서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 하나만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한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강이 없다면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 있으며 명예와 지위가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건강이 없다면 아무 것도 당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의사의 눈에는 환자의 명예나 지위, 재산 따위가 보이지 않습니다. 환자의 몸, 환자가 어떤 병을 앓고 있는지, 그 사실 그대로를 볼뿐입니다. 병원에도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특실이라는 것이 있습디다마는 특실이라고 해서 죽을 사람이 사는 법 없습니다. 의사의 눈에는 특실에 입원한 환자도 환자요, 입원할 돈이 없어 쩔쩔매는 환자도 환자입니다. 의사의 눈에 환자는 환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리얼리티(reality), 사실 그대로를 보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의사는 숨김이 없고, 비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환자를 보실 때에 세 가지 측면에서 보십니다.

먼저는 죄와 관련해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환자를 고치실 때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병이라는 것이 죄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입니다. 병 깊은 곳에 죄가 있습니다. 죄 때문에 병이라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과 관련시키십니다. 요한복음 9장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경륜이 있다, 하나님의 교육적 섭리 혹은 선교적 섭리가 거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환자를 보실 때에 귀신에 사로잡힌, 악마의 종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자녀를 측은히 여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죄와 악마의 사슬에 매여서 부자유한 가운데 괴로워하고 있는 모습을 예수님은 보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종합해서 말하면 예수님은 병을 현상으로, 그리고 하나의 표적(sign)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은 표적이요. 그 속 깊고 깊은 곳에 원인이 있습니다.

의사는 어디가 아프다고 하는 현상, 그 뒤에 깊이 숨겨져 있는 아픔의 원인을 찾기 위해서 수고합니다. 며칠을 두고 검사하고, 사진 찍고, 여러 가지로 애를 쓰면서 숨겨진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환자는 아픈 것만 알고 원인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원인을 모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병이 깊어서 가정이 파괴되어갑니다. 사회가 썩어갑니다. 몸이 병들어서 문드러집니다. 온 세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된 원인을 모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파괴되고 썩어가는 것입니까? 그 원인을 바로 알지 못합니다. 아픈 것만은 압니다. 고통은 알고 있습니다. 쑤시고, 아프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원인은 본인이 모릅니다. 의사가 압니다. 이러이러한 것이 원인이라고 의사가 가르쳐줍니다. 그럴 때에 환자는 의사의 진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병의 원인을 내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치료가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깊은 심판적 원인을 시인해야 하며, 주님의 심판을 시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늘 건강한 편입니까? 가끔 아파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플 때의 생각과 건강할 때의 생각은 다릅니다. 건강할 때에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과 내가 병들어 누웠을 때에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드려도 내가 건강할 때에 드리는 기도와 병든 때에 드리는 기도 제목이 다릅니다. 어느 쪽이 진실하겠습니까? 어느 쪽이 겸손하겠습니까?

병은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건강할 때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 이 일 저 일 다 해야 한다'하고 야단스럽게 살다가도 일단 병이 들면 만사가 중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이렇게 끝나고 말 것이구나……' 할일 다 하고 가고 싶은 때에 가는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 :20)." 그렇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공부도 명예도 돈도 소용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의미를 잃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병들 때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한번씩 재촉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노크하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하던 일을 마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니요 반드시 중단해야 할 때가 있다! 이대로 끝내게 될지도 모르는 거야!'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깊이 생각하게 하십니다. 나의 날을 계수(計數)하게 하시고 생을 정비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깊이 생각하면서 쉬게 하십니다. 궤도를 수정하게 하십니다. 가야 할 길을 재촉하십니다. 더 진실하게 되도록, 더 겸손하게 되도록 하십니다. 질병을 통하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많은 질병을 통하여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문을 두드리십니다.

의사는 환자를 병리적으로 봅니다. 본래부터 병자라면 논할 것이 없습니다. 날 때부터 앓아온 병이라면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의사로서는 다릅니다. 모든 것을 병리적으로 봅니다. 본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무엇인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 잘못 배워서, 잘못 살아서, 잘못 먹어서, 어떤 악조건 때문에 이처럼 병리적인 현상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받아야 할 사랑을 충분하게 받지 못했기 때문이요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이 병적인 인간상이 나온 것이라고 우리 의원이신 예수님은 생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현상, 모든 죄, 모든 죄인들을 다 병리적으로 보십니다.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하시며, 치료받을 수 있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의사의 믿음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는 많은 위험이 따릅니다. 환자를 치료하다가 의사 자신이 병에 걸립니다. 문둥병을 치료하다가 문둥병 환자가 되기도 하고, 전염병을 치료하다가 세균에 감염되기도 합니다. 그뿐입니까? 많은 환자와 함께 살기 때문에 병리적 심리가 작용하기도 합니다. 많은 위험이 따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치료하시다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죄인이라는 누명을 쓰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치료하시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믿음입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무엇보다 먼저 믿음을 요구합니다.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으면 치료할 길이 없습니다. 의사 앞에서 솔직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비밀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있는 사실을 그대로 다 내놓고 의사가 말해 주는 원인에 수긍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의사에게 생명을 바칩니다. 내 생명을 그의 손에 맡깁니다. 수술을 받기 전에 이제 이 수술을 받다가 죽더라도 환자 가족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서명하고 도장을 찍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의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그분의 능력을, 창조주의 능력을 수령(受領)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곧 순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 9:7)" 하십니다. 실로암까지 지팡이로 더듬거리며 걸어가는 이 환자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가는 것입니다.

한 2년 전, 제가 괌 섬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었습니다. 한창 더운 여름에 갔는데 그곳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였습니다. 가장 피곤할 시간에 내렸지만 아주 열심있는 여집사님 한 분과 목사님이 공항까지 와서 저를 맞아주었습니다. 고맙기 이를 데 있겠습니까?

부흥회 첫날, 그 여집사님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찬송 부르고 은혜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 저녁에는 그 집사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그밖에 낯익은 얼굴이 없는 터라 몹시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본교회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오늘은 그 집사님이 왜 안 보입니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왜요?"

감기에 걸렸는데 빨리 낫고 싶은 생각에서 한 알씩 먹으라는 감기약을 한꺼번에 세 알이나 드셨답니다." 그래서 그만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도 집에 있는 약 상자를 뒤져보면 먹다 남은 약봉지가 많을 것입니다. 의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합니다. "사흘 동안 시간 맞추어 드세요" 하고 약을 주면 고작 하루 이틀 먹어보고 치워버립니다. 약이 잘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사가 사흘 먹으라고 하는 약은 사흘 먹어야 효력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병원에 갔더니 환자가 하루에 250명이나 옵니다. 그래서 제가 "환자 많습니다" 했더니 담당 의사 하는 말이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한번 진찰을 하고 나서 사흘치 약을 지어 주면 환자들은 의사 말대로 사흘 동안 꼬박꼬박 약을 먹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매일 오라고 해서 매일 약을 지어 주기 때문에 환자가 많은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환자가 오죽이나 의사를 믿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도무지 믿음이 없습니다. 여러분, 믿읍시다. 기다리라면 기다리고, 가라고 하면 가는 것 ---- 이것이 믿음입니다. 서두르지 맙시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라고 하는 병자를 고쳐 주시되 겨우 병원서 퇴원할 정도로가 아니라 온전한 사람으로 온전케 하십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치료 과정을 봅시다. 먼저, 병석에 누운 환자처럼 괴로워하면서 세금을 받고 있는 마태를 그 현장에서 부르십니다. 그처럼 치료하신 뒤에 그의 집에 가서 함께 유하십니다. 인간 관계를 회복해 주시고 가정을 구원해 주십니다. 몸만 산다고 다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 들어가시고 함께 식사를 나누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를 제자 삼으십니다.

마태는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병이 나았고, 예수님 모신 생활을 함으로 모든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그 생애 전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 한 존재가 온전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들어봅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모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나 저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인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죄인인 줄 아는 죄인, 주님 앞에 나아오는 죄인, 의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죄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은혜에 살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 온전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일함으로써 온전한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건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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