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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 말고 먹으라(고린도전서 10:23-3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사람은 본래 합리적인 이론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알고 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르고 행하기도 합니다. 비교해 말하면 알고 행하는 일은 불과 몇 가지뿐이고 모르고 하는 일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지만 그 때 일을 지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해도 4살 전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하시니 그런 줄 알고 있는 것이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어머니 젖을 먹은 일이 기억나신 분은 아마 4살 이후까지 젖을 먹은 사람일 것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인격 형성이 어느 정도 되어진다는 4살 이전의 일을 우리는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위에서 그 때 일에 관해 듣고서 깨닫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서 좋은 것이 있고 몰라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많이 알아도 걱정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보지 않고, 몰랐으면 훨씬 더 행복한 것입니다. 안 보아도 좋은 것을 보았기에 일생을 불행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이 어렵고도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분이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닭을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일생동안 닭고기를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지 않아도 좋은 장면을 본 것입니다. 보지 않은 음식이 맛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위생시설이 좋다고 해도 그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음식 맛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가 좋아하는 고기의 경우 그 짐승을 죽이는 장면을 보게 되면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르고 안 보아야 맛있게 먹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좋은 일이 있고 몰라서 좋은 일이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죽을 날은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르게 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은 모든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알려고 합니다만 예수님은 "이것은 너희가 알 바가 아니오" 하셨습니다. 아니오 했으면 모든 대로 있어야지 이것을 알아내려고 많은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몰라야 할 것은 모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옛 관습이나 문화권에 매여 있고 혹은 자기가 살아온 경험, 옛 관념에 묶여 있습니다. 이것을 의지나 이론에 의해서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치로 따지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도 과거의 관념 때문에 왠지 꺼림직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론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누가 돼지머리를 삶아 놓고 여기에 저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부터 그렇게 해 왔으니까 하는 것이고, 또 안 하면 꺼림직하니까 하는 것이지 여기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모를 것은 모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서가 기록된 당시에 있었던 사회가 교회 안에서의 문제된 바를 하나의 사례로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 옛날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길 때는 특별히 많은 음식을 진열해 놓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음식은 우상이 먹는 것이 아니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나눠 먹습니다. 그리고도 남아서 시장에 가져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는 먹는 음식의 거의가 제사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우상의 제사에 참예한다는 것은 순서마다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는 사제가 드리는 것이며 일반 사람들은 구경을 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제사 음식을 같이 먹으면 제사에 참예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종교의식에 참여한 것이 되고 그 우상을 숭배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로, 이론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우상은 그 이름대로 거짓 없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렸다고 귀신이 먹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 흔적을 내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차려 놓고 절한 것뿐이지 단순한 음식 그 외에 어떤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먹을 것도 없는 것이지요. 신앙적인 이론으로는 그냥 깨끗한 마음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식은 분명한 음식이고 또 우상은 없는 것으로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 음식을 먹는데 우리가 꺼려해야 합니까? 음식과 제물은 분명히 구별이 있습니다. 단순한 음식과 제물로서의 음식은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믿음이 좋아서 그냥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을 수 있지만 문제는 나와 함께 있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우상을 섬겨온 경험이 있고 바로 며칠 전까지 우상의 제물을 믿고 먹은 이방 종교의 배경을 가졌던 사람으로 이제 돌아온 새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나처럼 쉽게 이 음식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먹을 수가 있는 음식이지만 그는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15:1에 우리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할 수가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모순, 충돌,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여기서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를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의 신학을 상고해 보면 그는 윤리에 대해서 세 가지의 특징 있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비계율적입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가 아니고 먹을 수 있으면 먹고, 먹지 못하겠으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묻지 말고 먹고 만일에 저 사람이 제물이라고 하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먹어야 한다, 먹지 말아야 한다라고 계율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세가 가까이 왔는데 딸들을 시집보내야 하느냐, 아니냐 에도 계율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비의식적입니다. 종교 의식을 초월하고 늘 깊은 내용을 설명하면서 의식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세 번째로 비금욕주의입니다. 금욕주의를 배제하면서, 금욕을 통하여 의를 이루겠다는 것도 잘못이며 나아가서 금욕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축복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금욕주의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이상 세 가지가 바울의 윤리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명제가 나옵니다. 31절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는 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지 않는 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은 계율적으로는 정반대이지만 목적은 분명한 것입니다. 어떤 행위든지 현상은 다양하겠지만 목적과 의미는 꼭 같아야 합니다. 목적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고, 방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말합니다.
"그를 기쁘게 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높이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진실 되이 사랑하면 너는 무엇이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나면 꺼릴 것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위트가 있으면서 시원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중요한 원리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묻지 말고 먹으란 것입니다.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직선적 관계입니다. 때문에 무슨 일이 판단하고 결정할 때에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의논도 하지만 그러나 이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나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한다면 주저할 것 없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누구에게 물을 것도 아니고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면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문제를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직선적인 관계, 종말론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일대일의 관계에서 문제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이 때만이 가장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 힘은 직선 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웃에 대하여 덕을 끼치도록 하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23절).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할 수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말해야 하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이 길을 가야 하느냐 가지 말아야 하느냐 의무의 문제가 가능성의 문제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어서 못하고 할 수 있으면 다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해서는 안될 일이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유함이 다른 사람에게 거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고기를 먹어서 누구의 믿음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 했습니다. 안 먹어서 덕이 될 수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믿음을 위해서 그만 두어야 할 것이면 그만 둔다라는 귀한 마음씨입니다. 즉 이웃의 약함을 이해하고, 이웃이 성장함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비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에 앞서 이웃의 처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9:19에서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또 23절에서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각각 말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자유를 제한해서 종이 되고, 스스로 여러 형태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고 약한 자를 위하여 약하게 되고, 강한 자를 위해서는 강하게 되고 유대 사람을 위해서 유대 사람으로, 헬라 사람을 위해서 헬라 사람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아무쪼록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희생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고귀한 형제를 하찮은 식물로 망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자유를 제한해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내 고집 정도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묻지 말고 먹으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 사람이 나를 초대해 음식을 차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좀 꺼림칙해도 이것은 제사 음식이냐고 묻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저쪽에서 먼저 제물이라고 말하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묘한 것입니다. 이 원리가 우리 모든 생활에 관계가 됩니다. 스스로의 양심을 어지럽게 하지 말로 오직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23에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믿음으로 하라, 오직 믿음으로, 그렇지 아니하면 다 죄라고 단정지어 말했습니다.
자, 우리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묻지 말고 먹읍시다.
이제 그가 인도하는 대로 믿음으로 따라갈 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그 분의 뒤만 따라갈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를 거닐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고만을 했습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어 계속 고민하며 걸어가는데 자기 앞에 어느 어린 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앉아 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자기 앞에 파놓은 조그마한 구멍에 붓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물었습니다. "너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니?" 어린이가 대답하기를 "바닷물을 다 퍼서 여기 넣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구나! 다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에서 본 것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했느냐 이것이 문제지 합리적이냐, 이치에 맞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 사실이냐 그것만 문제가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으면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것이 가능하냐 아니냐,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이치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무슨 상관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묻지 말고 먹을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격언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라,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라, 할까 말까 하는 일은 하지 말라, 죽을까 말까 할 때는 죽으라"입니다.
우리에게 좀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판단이 다 충족된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맙시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결정하기를 이 이상 더 판단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이상 더 비판하지 아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중지령'을 내렸습니다. 여기까지 판단하고 그 이상은 판단하지 않기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묻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오직 덕을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오직 덕을 위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신앙적인 결단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의심 많고 생각이 많기 때문에 갈등이 심한 사람들이 주 앞에 모였습니다. 기도하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며, 주께만 순종하며, 주께만 사랑을 고백하며 새로운 신앙적 결단을 감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이상 묻지 않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오직 주의 주시는 바 대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주의 뒤를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묻지 말고 먹으라(고린도전서 10:23-3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사람은 본래 합리적인 이론으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알고 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르고 행하기도 합니다. 비교해 말하면 알고 행하는 일은 불과 몇 가지뿐이고 모르고 하는 일은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지만 그 때 일을 지금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 해도 4살 전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하시니 그런 줄 알고 있는 것이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어머니 젖을 먹은 일이 기억나신 분은 아마 4살 이후까지 젖을 먹은 사람일 것입니다.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어린 시절, 어머니로부터 가장 많은 영향을 받고 인격 형성이 어느 정도 되어진다는 4살 이전의 일을 우리는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단지 주위에서 그 때 일에 관해 듣고서 깨닫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서 좋은 것이 있고 몰라서 좋은 일이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을 많이 알아도 걱정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보지 않고, 몰랐으면 훨씬 더 행복한 것입니다. 안 보아도 좋은 것을 보았기에 일생을 불행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이 어렵고도 힘이 드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분이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닭을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끔찍한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일생동안 닭고기를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지 않아도 좋은 장면을 본 것입니다. 보지 않은 음식이 맛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리 위생시설이 좋다고 해도 그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하면 음식 맛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가 좋아하는 고기의 경우 그 짐승을 죽이는 장면을 보게 되면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르고 안 보아야 맛있게 먹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좋은 일이 있고 몰라서 좋은 일이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죽을 날은 모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르게 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은 모든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알려고 합니다만 예수님은 "이것은 너희가 알 바가 아니오" 하셨습니다. 아니오 했으면 모든 대로 있어야지 이것을 알아내려고 많은 시험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몰라야 할 것은 모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옛 관습이나 문화권에 매여 있고 혹은 자기가 살아온 경험, 옛 관념에 묶여 있습니다. 이것을 의지나 이론에 의해서 완전히 극복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이치로 따지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라도 과거의 관념 때문에 왠지 꺼림직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론대로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금 누가 돼지머리를 삶아 놓고 여기에 저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부터 그렇게 해 왔으니까 하는 것이고, 또 안 하면 꺼림직하니까 하는 것이지 여기에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모를 것은 모르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서가 기록된 당시에 있었던 사회가 교회 안에서의 문제된 바를 하나의 사례로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 옛날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길 때는 특별히 많은 음식을 진열해 놓고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음식은 우상이 먹는 것이 아니고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나눠 먹습니다. 그리고도 남아서 시장에 가져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당시에는 먹는 음식의 거의가 제사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우상의 제사에 참예한다는 것은 순서마다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제사는 사제가 드리는 것이며 일반 사람들은 구경을 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제사 음식을 같이 먹으면 제사에 참예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종교의식에 참여한 것이 되고 그 우상을 숭배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치로, 이론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우상은 그 이름대로 거짓 없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렸다고 귀신이 먹는 것도 아니고 귀신이 흔적을 내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차려 놓고 절한 것뿐이지 단순한 음식 그 외에 어떤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까 못 먹을 것도 없는 것이지요. 신앙적인 이론으로는 그냥 깨끗한 마음으로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음식은 분명한 음식이고 또 우상은 없는 것으로 아무 것도 아닌데 왜 그 음식을 먹는데 우리가 꺼려해야 합니까? 음식과 제물은 분명히 구별이 있습니다. 단순한 음식과 제물로서의 음식은 관념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나대로 믿음이 좋아서 그냥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을 수 있지만 문제는 나와 함께 있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우상을 섬겨온 경험이 있고 바로 며칠 전까지 우상의 제물을 믿고 먹은 이방 종교의 배경을 가졌던 사람으로 이제 돌아온 새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나처럼 쉽게 이 음식을 대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먹을 수가 있는 음식이지만 그는 먹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를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로마서 15:1에 우리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는 할 수가 없고,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모순, 충돌, 갈등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여기서 기독교인의 생활 윤리를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바울의 신학을 상고해 보면 그는 윤리에 대해서 세 가지의 특징 있는 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비계율적입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가 아니고 먹을 수 있으면 먹고, 먹지 못하겠으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묻지 말고 먹고 만일에 저 사람이 제물이라고 하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먹어야 한다, 먹지 말아야 한다라고 계율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말세가 가까이 왔는데 딸들을 시집보내야 하느냐, 아니냐 에도 계율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비의식적입니다. 종교 의식을 초월하고 늘 깊은 내용을 설명하면서 의식 자체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세 번째로 비금욕주의입니다. 금욕주의를 배제하면서, 금욕을 통하여 의를 이루겠다는 것도 잘못이며 나아가서 금욕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축복의 질서를 부정하는 것으로 금욕주의를 허락치 않았습니다.
이상 세 가지가 바울의 윤리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명제가 나옵니다. 31절에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먹는 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먹지 않는 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것은 계율적으로는 정반대이지만 목적은 분명한 것입니다. 어떤 행위든지 현상은 다양하겠지만 목적과 의미는 꼭 같아야 합니다. 목적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고, 방법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말합니다.
"그를 기쁘게 하고, 그를 사랑하며, 그를 높이라." 이것이 사도 바울의 주장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진실 되이 사랑하면 너는 무엇이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사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나면 꺼릴 것이 없습니다. 마음대로 하는 것입니다. 위트가 있으면서 시원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중요한 원리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음식을 묻지 말고 먹으란 것입니다. 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직선적 관계입니다. 때문에 무슨 일이 판단하고 결정할 때에 사람들에게 묻기도 하고 의논도 하지만 그러나 이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나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한다면 주저할 것 없습니다. 마지막 결정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누구에게 물을 것도 아니고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믿어지면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에서 문제를 결단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직선적인 관계, 종말론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 일대일의 관계에서 문제 해결을 보아야 합니다. 이 때만이 가장 강한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 힘은 직선 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웃에 대하여 덕을 끼치도록 하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23절).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할 수 있다, 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할 수 있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는 말해야 하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이 길을 가야 하느냐 가지 말아야 하느냐 의무의 문제가 가능성의 문제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어서 못하고 할 수 있으면 다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해서는 안될 일이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유함이 다른 사람에게 거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고기를 먹어서 누구의 믿음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노라" 했습니다. 안 먹어서 덕이 될 수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의 믿음을 위해서 그만 두어야 할 것이면 그만 둔다라는 귀한 마음씨입니다. 즉 이웃의 약함을 이해하고, 이웃이 성장함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관용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시간을 잘 지키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비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다른 사람의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판에 앞서 이웃의 처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9:19에서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또 23절에서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각각 말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자유를 제한해서 종이 되고, 스스로 여러 형태의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모양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고 약한 자를 위하여 약하게 되고, 강한 자를 위해서는 강하게 되고 유대 사람을 위해서 유대 사람으로, 헬라 사람을 위해서 헬라 사람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 사람을 아무쪼록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필요한 희생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감수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고귀한 형제를 하찮은 식물로 망하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내 자유를 제한해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내 고집 정도는 버려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묻지 말고 먹으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방 사람이 나를 초대해 음식을 차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좀 꺼림칙해도 이것은 제사 음식이냐고 묻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저쪽에서 먼저 제물이라고 말하면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오묘한 것입니다. 이 원리가 우리 모든 생활에 관계가 됩니다. 스스로의 양심을 어지럽게 하지 말로 오직 믿음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4:23에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믿음으로 하라, 오직 믿음으로, 그렇지 아니하면 다 죄라고 단정지어 말했습니다.
자, 우리는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묻지 말고 먹읍시다.
이제 그가 인도하는 대로 믿음으로 따라갈 뿐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찬송함으로 그 분의 뒤만 따라갈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를 거닐면서 삼위일체에 대해 고만을 했습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어 계속 고민하며 걸어가는데 자기 앞에 어느 어린 아이 하나가 바닷가에 앉아 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퍼서 자기 앞에 파놓은 조그마한 구멍에 붓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물었습니다. "너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니?" 어린이가 대답하기를 "바닷물을 다 퍼서 여기 넣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때 어거스틴은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리석은 생각을 했구나! 다시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에서 본 것은 환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계시했느냐 이것이 문제지 합리적이냐, 이치에 맞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느 쪽이 사실이냐 그것만 문제가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으면 오신 것으로 끝난 것이지 이것이 가능하냐 아니냐, 내 마음에 드느냐 안 드느냐, 이치에 맞느냐 안 맞느냐가 무슨 상관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묻지 말고 먹을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격언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갈까 말까 하는 길은 가지 말라, 먹을까 말까 하는 음식은 먹지 말라, 할까 말까 하는 일은 하지 말라, 죽을까 말까 할 때는 죽으라"입니다.
우리에게 좀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지성, 우리의 판단이 다 충족된 다음에 무엇을 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맙시다. 어거스틴은 여기서 결정하기를 이 이상 더 판단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이 이상 더 비판하지 아니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중지령'을 내렸습니다. 여기까지 판단하고 그 이상은 판단하지 않기로 결단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묻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오직 덕을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오직 덕을 위하여,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신앙적인 결단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기도 : 아버지 하나님, 의심 많고 생각이 많기 때문에 갈등이 심한 사람들이 주 앞에 모였습니다. 기도하오니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며, 주께만 순종하며, 주께만 사랑을 고백하며 새로운 신앙적 결단을 감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 이상 묻지 않고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오직 주의 주시는 바 대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주의 뒤를 따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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