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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질문(마가복음 9장 23절~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 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 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장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산 위에서 일어난 일이고, 또 하나는 변화산 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은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본래의 모습이요, 또한 앞으로 영원히 계실 모습입니다. 이 때에 동행했던 제자 세 사람은 그 모습에 두려움도 있었습니다만 깊은 감격과 행복의 극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으니 오래오래 여기서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이 즉흥적인 말속에서 얼핏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처자식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이 너무 좋으니까 가족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그저 여기가 좋으니까 이대로가 좋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천당 가면 가족 생각을 안 하는가보다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장막을 세 개만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 개는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위한 것으로, 제자들 자신들을 위한 장막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은혜스럽고 행복의 절정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산밑에서는 남은 제자 아홉 명이 비난을 받고 있는 비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제자들은 좀더 신중하게 해서 예수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환자를 대기시켰어도 좋았을 터인데 아마도 서로 먼저 자기가 고치겠다고 나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들은 마가복음 6:7이나 6:30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둘씩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귀신을 내쫓았으며 병도 고치는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의 경험이었기에 오늘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덤벼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은 두 사람씩 파송할 때와는 달리 아홉 명이나 되니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누가 먼저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마, 안드레, 빌립 등 차례차례로 다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고 호령을 했을 때 귀신이 나가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자들은 열심히 소리를 질렀지만 결과는 형편없이 실패했습니다. 주위에 섰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그들은 스스로 놀라며 초조해졌고 초라해지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난처하고 실의에 빠진 순간이었겠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듣고 저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면서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귀신이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것입니까? 또 하나는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입니다. 지난날과 꼭 같은 방법으로 시도했는데 그 때는 되었던 일이 오늘은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왜 안 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서 그들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조용한 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심각하게 물어 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때로는 조용함이 정말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격동하는 마음이나 급한 생각이나 자기 명예만을 앞세우거나 또는 남의 평판에 신경을 쓰다 보면 무슨 일이든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체면이나 욕심을 챙기거나 초조하게 굴면 바른 능력을 행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자들은 조용히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오늘은 이 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벌써 하나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지를 때에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그 믿음을 도와서 어린아이를 고치시지 않습니까? 문제는 믿음입니다. 또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신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믿음이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신 무서운 선언을 그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믿음의 문제임을 알았으므로 이제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첫째, 그들은 믿음을 지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별개의 것입니다. 추상적인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나 수긍이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특별히 오래 믿었던 사람들이 이런 타성과 착각에 빠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좀 알고 상식적인 신학적 지식을 가진 것이 곧 믿음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별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능력이며 권세입니다. 둘째, 신앙 경력과 믿음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믿은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믿은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입니다. 때로는 처음 믿는 사람들이 아주 순수해서 오히려 깨끗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종교 의식에 젖은 사람들은 타성화되어 알맹이가 없는 형식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이 있는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어느 신학대학 학장 아들이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친구가 그에게 "당신 예수 믿소?"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고 어리둥절하다가 대뜸 "나의 아버지가 신학대학 학장이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친구는 당신 믿음과 아버지가 무슨 상관이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과 나의 믿음과 무슨 상관입니까? 또한 나의 직분과 믿음이 무슨 상관입니까? 나의 신앙적인 경험이나 실적과 신앙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서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은 구원 얻게 하고서, 나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내가 남을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믿음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선행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업의 실적이 곧 믿음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의 경력과 오늘의 내 믿음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셋째, 믿음은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제자들이 분명히 알았어야 했습니다. 에베소서 2:8에서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이 믿음을 우리는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선물은 잘 관리하고 소중히 간직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한번 받았으니 있으려니 하고 무관심하다 보면 잃어버린 지가 벌써 옛날입니다. 그리고 껍데기인 형식만 남았고 의식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되면 언제 믿었는가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흔들려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실수를 오늘 제자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믿음과 은사는 잘 관리해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열심히 봉사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든지 소홀하게 하면 은사는 잃어버리거나 빼앗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잘 보관하지도 않는 필요없는 은사를 왜 계속적으로 주시겠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주어졌고, 또한 성령의 역사로 믿음을 새롭게 하여 이 은혜의 선물을 잘 관리하고 지키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감사요 순종입니다. 예수 믿게 된 사실에 감사하고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리고 순종해 나갈 때에 이 은사를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역사하여 오늘 나의 나됨이 있는 것이지 나의 경건이나 나의 능력이 이 역사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성전 미문(美門)에서 일으켰을 때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의 경건이 이 병자를 고친 것처럼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행한 기적에 놀라서 경이롭게 그를 바라보자, 베드로는 조금도 놀랄 것이 없다는 태도로 자기의 능력이 아님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 관리를 잘 하는 자에게 은사는 계속 주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믿음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에 믿음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9-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알고 있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능력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섯째, 믿음이 어떤 여건에 의해서 스스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면 믿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이지 결코 환경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로 믿음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 때문입니다. 간혹 자녀들 중에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걱정이 되어서 왜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지 상담을 하러 오기도 합니다. 저는 그 부모님들께 되묻습니다. "그 아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실수에 대해 어머니가 지나치게 책망을 했거나 너무 엄하게 매질을 했을 때 아이들은 무섭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두 번 거짓이 반복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체질화되고, 부모님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의 거짓말은 누구 때문입니까? 마찬가지로 남편이나 아내로 하여금 거짓말하도록 만드는 자는 누구입니까? 불충분한 사랑이 바로 그 원흉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상대가 편안하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그의 말이면 다 신뢰해 주는데 왜 남편이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이 세대가 불신하는 사회로 전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서로 속이고 속으며 살아야 합니까? 환영을 탓하기 이전에 불신의 모든 원인의 깊은 곳에는 내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믿음이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없었고 귀신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귀신을 이야기하면 믿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요즘은 귀신도 둔갑을 해서 고급 귀신이 많습니다. 돈 귀신, 증권 귀신, 명예 귀신, 권력 귀신, 지성 귀신, 학벌 귀신 등으로, 귀신이란 본래 말 그대로 거짓입니다.
또한 여기에다 교만까지 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간시키고 나의 믿음을 빼앗아 가며 어느 사이에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헛된 교만을 가지게 되면 헛된 절망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오직 믿음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정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나를 알고 기도함으로 믿음을 알아서 믿음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루를 시작할 때, 아침에 두 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마귀가 이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기도 시간을 줄일 생각은 마시기 바랍니다. 잠을 줄이더라도 기도만은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어느 아이가 배가 너무 고파서 기도하는 것을 생략하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왜 기도하지 않았느냐고 걱정했더니 아이는 기도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그렇게 빨리 하느냐고 물었더니 배가 너무 고파서 "하나님, 어제와 같습니다"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기도 시간을 단축해서는 안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바쁠 때일수록 더 많이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왜입니까? 바쁠수록 실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께 이 마이크를 통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전기가 끊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넓은 교회에서 육성으로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마이크도 전기가 연결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30년 전 처음 목회할 때에 전기가 자주 끊어져서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기에 제 마음 가운데 소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을 지을 때는 지하실에 발전기부터 설치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기 제품일지라도 전기가 끊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기도의 선이 끊어진다면 그 성도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는데, 그 중에는 눈먼 아이가 함께 연을 날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이 신통해서 "너는 연을 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연을 날리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기를 연줄을 잡아당겨 보면 연이 잘 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육안으로 뵙지는 못하지만 기도의 줄을 한 번 당겨 보십시오. 끊어진 지 오랜 것도 모르고 착각 속에서 살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젊은 목사 한 분이 개척 교회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도중에 한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귀신들린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당황한 목사님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더 큰 소리를 질렀는데, 이 귀신은 도리어 "너는 누구냐, 이놈아!"하고 대꾸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 앞에서 어떻게 망신을 당했는지 다시는 단 위에 서지 못하겠다고 고민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 외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기도했다고 오늘은 기도 없이 될 것 같습니까? 어제 능력을 행사했다고 그 능력이 오늘도 그대로 있을 것 같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 관계는 기도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 없이 듣고 기도 없이 생각하고 기도 없이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실수가 연발되는 것입니다.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먼저 기도가 있었는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이유는 바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무능은 불신 때문이요, 불신은 기도가 없어서입니다. 또한 기도를 했으나 능력이 없음은 기도의 바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쉬지 않고 기도해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마귀를 쫓으며 귀신을 이기고 능력을 행사하는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조용한 질문(마가복음 9장 23절~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 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무리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가라사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 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9장은 전혀 성격이 다른 두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산 위에서 일어난 일이고, 또 하나는 변화산 밑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은 변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데, 이것은 주님의 본래의 모습이요, 또한 앞으로 영원히 계실 모습입니다. 이 때에 동행했던 제자 세 사람은 그 모습에 두려움도 있었습니다만 깊은 감격과 행복의 극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으니 오래오래 여기서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이 즉흥적인 말속에서 얼핏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는 처자식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이 너무 좋으니까 가족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그저 여기가 좋으니까 이대로가 좋다고 말하는 것을 보니 천당 가면 가족 생각을 안 하는가보다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장막을 세 개만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세 개는 예수님, 모세, 엘리야를 위한 것으로, 제자들 자신들을 위한 장막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은혜스럽고 행복의 절정에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 산밑에서는 남은 제자 아홉 명이 비난을 받고 있는 비참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 아버지가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제자들은 좀더 신중하게 해서 예수님이 내려오실 때까지 환자를 대기시켰어도 좋았을 터인데 아마도 서로 먼저 자기가 고치겠다고 나서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들은 마가복음 6:7이나 6:30에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둘씩 파송되어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귀신을 내쫓았으며 병도 고치는 능력을 행사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의 경험이었기에 오늘도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가볍게 덤벼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지금은 두 사람씩 파송할 때와는 달리 아홉 명이나 되니 서로 경쟁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무튼 누가 먼저 시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마, 안드레, 빌립 등 차례차례로 다 시도해 보았을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고 호령을 했을 때 귀신이 나가주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자들은 열심히 소리를 질렀지만 결과는 형편없이 실패했습니다. 주위에 섰던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었고 그들은 스스로 놀라며 초조해졌고 초라해지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난처하고 실의에 빠진 순간이었겠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그간의 사정을 듣고 저들의 불신앙을 책망하시면서 귀신을 내쫓으십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만 부르면 귀신이 나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주님의 이름으로 안 되는 것입니까? 또 하나는 자기들의 경험과 지식입니다. 지난날과 꼭 같은 방법으로 시도했는데 그 때는 되었던 일이 오늘은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왜 안 되는 것입니까? 바로 여기서 그들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 보면 조용한 시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심각하게 물어 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때로는 조용함이 정말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용하여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격동하는 마음이나 급한 생각이나 자기 명예만을 앞세우거나 또는 남의 평판에 신경을 쓰다 보면 무슨 일이든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 체면이나 욕심을 챙기거나 초조하게 굴면 바른 능력을 행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자들은 조용히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유로 오늘은 이 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그들은 벌써 하나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지를 때에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그 믿음을 도와서 어린아이를 고치시지 않습니까? 문제는 믿음입니다. 또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신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믿음이 문제인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막 9:23)고 하신 무서운 선언을 그들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믿음의 문제임을 알았으므로 이제 방향을 바꾸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첫째, 그들은 믿음을 지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나 성경에 대한 지식과 믿음은 별개의 것입니다. 추상적인 지식이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나 수긍이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특별히 오래 믿었던 사람들이 이런 타성과 착각에 빠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좀 알고 상식적인 신학적 지식을 가진 것이 곧 믿음인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는 별도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능력이며 권세입니다. 둘째, 신앙 경력과 믿음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먼저 믿은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믿은 자가 먼저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실입니다. 때로는 처음 믿는 사람들이 아주 순수해서 오히려 깨끗한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종교 의식에 젖은 사람들은 타성화되어 알맹이가 없는 형식만을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이 있는 줄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어느 신학대학 학장 아들이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친구가 그에게 "당신 예수 믿소?"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인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고 어리둥절하다가 대뜸 "나의 아버지가 신학대학 학장이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미국 친구는 당신 믿음과 아버지가 무슨 상관이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과 나의 믿음과 무슨 상관입니까? 또한 나의 직분과 믿음이 무슨 상관입니까? 나의 신앙적인 경험이나 실적과 신앙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서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들은 구원 얻게 하고서, 나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고 했습니다.
내가 남을 인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믿음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이루어 놓은 선행이나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업의 실적이 곧 믿음과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의 경력과 오늘의 내 믿음을 동일시하지 말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셋째, 믿음은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선물임을 제자들이 분명히 알았어야 했습니다. 에베소서 2:8에서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선물로 주신 이 믿음을 우리는 잘 관리해야 합니다. 선물은 잘 관리하고 소중히 간직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한번 받았으니 있으려니 하고 무관심하다 보면 잃어버린 지가 벌써 옛날입니다. 그리고 껍데기인 형식만 남았고 의식만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청난 사건을 만나게 되면 언제 믿었는가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을 정도로 흔들려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실수를 오늘 제자들에게서 보게 됩니다. 믿음과 은사는 잘 관리해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로 열심히 봉사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든지 소홀하게 하면 은사는 잃어버리거나 빼앗긴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잘 보관하지도 않는 필요없는 은사를 왜 계속적으로 주시겠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주어졌고, 또한 성령의 역사로 믿음을 새롭게 하여 이 은혜의 선물을 잘 관리하고 지키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감사요 순종입니다. 예수 믿게 된 사실에 감사하고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에 감사하며, 그리고 순종해 나갈 때에 이 은사를 지켜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역사하여 오늘 나의 나됨이 있는 것이지 나의 경건이나 나의 능력이 이 역사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성전 미문(美門)에서 일으켰을 때 분명히 말했습니다. "나의 경건이 이 병자를 고친 것처럼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행한 기적에 놀라서 경이롭게 그를 바라보자, 베드로는 조금도 놀랄 것이 없다는 태도로 자기의 능력이 아님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은사 관리를 잘 하는 자에게 은사는 계속 주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믿음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에 믿음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19-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알고 있는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능력에 있다는 뜻입니다.
다섯째, 믿음이 어떤 여건에 의해서 스스로 주어진 것처럼 생각하면 믿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이지 결코 환경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로 믿음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나 자신 때문입니다. 간혹 자녀들 중에 거짓말을 잘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은 걱정이 되어서 왜 아이가 거짓말을 하는지 상담을 하러 오기도 합니다. 저는 그 부모님들께 되묻습니다. "그 아이가 거짓말을 하게 된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실수에 대해 어머니가 지나치게 책망을 했거나 너무 엄하게 매질을 했을 때 아이들은 무섭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번 두 번 거짓이 반복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체질화되고, 부모님들은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의 거짓말은 누구 때문입니까? 마찬가지로 남편이나 아내로 하여금 거짓말하도록 만드는 자는 누구입니까? 불충분한 사랑이 바로 그 원흉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상대가 편안하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고 그의 말이면 다 신뢰해 주는데 왜 남편이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이 세대가 불신하는 사회로 전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서로 속이고 속으며 살아야 합니까? 환영을 탓하기 이전에 불신의 모든 원인의 깊은 곳에는 내가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믿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믿음이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없었고 귀신을 이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귀신을 이야기하면 믿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요즘은 귀신도 둔갑을 해서 고급 귀신이 많습니다. 돈 귀신, 증권 귀신, 명예 귀신, 권력 귀신, 지성 귀신, 학벌 귀신 등으로, 귀신이란 본래 말 그대로 거짓입니다.
또한 여기에다 교만까지 더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간시키고 나의 믿음을 빼앗아 가며 어느 사이에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헛된 교만을 가지게 되면 헛된 절망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오직 믿음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믿음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정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나를 알고 기도함으로 믿음을 알아서 믿음을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루를 시작할 때, 아침에 두 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은 마귀가 이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바빠도 기도 시간을 줄일 생각은 마시기 바랍니다. 잠을 줄이더라도 기도만은 제대로 지켜야 합니다. 어느 아이가 배가 너무 고파서 기도하는 것을 생략하고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왜 기도하지 않았느냐고 걱정했더니 아이는 기도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슨 기도를 그렇게 빨리 하느냐고 물었더니 배가 너무 고파서 "하나님, 어제와 같습니다"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기도 시간을 단축해서는 안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바쁠 때일수록 더 많이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왜입니까? 바쁠수록 실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께 이 마이크를 통해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만 만약 전기가 끊어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넓은 교회에서 육성으로 전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이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마이크도 전기가 연결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30년 전 처음 목회할 때에 전기가 자주 끊어져서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기에 제 마음 가운데 소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배당을 지을 때는 지하실에 발전기부터 설치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전기 제품일지라도 전기가 끊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기도의 선이 끊어진다면 그 성도의 생명은 끝난 것입니다.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는데, 그 중에는 눈먼 아이가 함께 연을 날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람이 신통해서 "너는 연을 보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연을 날리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아이는 대답하기를 연줄을 잡아당겨 보면 연이 잘 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육안으로 뵙지는 못하지만 기도의 줄을 한 번 당겨 보십시오. 끊어진 지 오랜 것도 모르고 착각 속에서 살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젊은 목사 한 분이 개척 교회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드리고 있는 도중에 한 아주머니가 벌떡 일어나더니 귀신들린 소리를 질렀다는 것입니다. 당황한 목사님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더 큰 소리를 질렀는데, 이 귀신은 도리어 "너는 누구냐, 이놈아!"하고 대꾸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 앞에서 어떻게 망신을 당했는지 다시는 단 위에 서지 못하겠다고 고민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 외에는 능력이 없습니다. 어제까지 기도했다고 오늘은 기도 없이 될 것 같습니까? 어제 능력을 행사했다고 그 능력이 오늘도 그대로 있을 것 같습니까?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절대적 관계는 기도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기도 없이 듣고 기도 없이 생각하고 기도 없이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실수가 연발되는 것입니다. 실패한 일이 있습니까? 먼저 기도가 있었는가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이유는 바로 기도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무능은 불신 때문이요, 불신은 기도가 없어서입니다. 또한 기도를 했으나 능력이 없음은 기도의 바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른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쉬지 않고 기도해서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마귀를 쫓으며 귀신을 이기고 능력을 행사하는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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