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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성숙한 교회의 모습(사도행전 9장 26절~31절)

by 【고동엽】 2023.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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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한 교회의 모습(사도행전 9장 26절~31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 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우리 성도들은 때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입니까?"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면서 묻는 사람들에게 교회란 이런 곳이다 하고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대체적으로 교회가 무엇인가고 질문하는 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의도가 깔려 있기 쉽습니다. 그 의도는 "도대체 교회가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하는 교회를 향한 개인적인 욕망에 대한 불평입니다. 물론 "교회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계속 있어야만 하는 필요한 물음입니다. 교회는 늘 새로운 의미로 교회의 본질을 찾아야만 하고 계속적인 개혁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를 세속적인 어떤 열매에 의해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는 뿔이 있습니다. 그러나 뿔이 났다고 다 소가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가 봉사도 하고 구제도하고 친교도 하지만, 봉사하고 구제하고 친교 한다고 해서 다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결과에 의해서나 외형적으로 나타난 모양에 의해서 교회됨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좀더 근본적인 깊은 뿌리에 의해서 그 본질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많은 불쌍한 자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불쌍한 사람을 위해 오셨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런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만백성의 구원을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되게 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몇 가지로 큰 오해가 있습니다. 에밀 브루너의「교회의 오해」라는 책에서도 여러 번 지적하고 있듯이, 우선 교회를 학교(institute)로 오해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룹별로 여러 가지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배웁니다만 그것 자체를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공부와 교회는 별개입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해서 교회를 학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헬라식의 판단입니다. 둘째, 친교(koinonia, fellowship)하는 곳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며 친교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물론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만, 이것이 결코 교회의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셋째, 교회를 자선사업 단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를 향하여 "도대체 교회가 무엇하고 있느냐?"고, 교회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야단을 합니다. 자신들은 한푼도 내지 않으면서 교회가 돈을 쓰지 않고 무엇 하느냐고 원망인 것입니다.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는 구제할 뿐이지 구제를 위한 기관은 아닙니다. 넷째, 불의에 항거하는 어떤 저항 단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에게 어느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교회의 위험과 시련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교회가 중생 없는 용서를 전하는 철학적 기독교가 될 것을 가장 염려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대자대비를 논하자는 곳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중생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철학적 기독교, 즉 진리를 지성화하고 지식화해서 추상화해 버리는 함정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전도할 때에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이가 있습니다. 가령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면서 "교회 가서 좋은 이야기나 들읍시다," 또는 "교양 강좌 듣는 셈치고 한번 나가 봅시다"라고 접근을 합니다. 물론 전도하는 한 방법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도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같아 그럴듯하지만 철학적 기독교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식을 낙농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추상적 진리에 머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듣고 많이 배우기만 한 사람들은 쉽게 기독교인이 되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부스는 성령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 없는 천국을 선포하는 교회가 될 것을 미리 걱정했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현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확실하고 그 고백이 분명해야 하며, 예수의 부활과 재림 신앙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공동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으며, 이제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여기에 교회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이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 하시는 그 증거가 분명할 때에 그 곳에 교회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외적인 박해도 교회 되게 하는 데 무서운 것이지만, 더욱 더 조심해야 할 것은 인본주의, 인문주의, 진리에 대한 왜곡과 그리고 진리를 과거의 유산물로 돌리려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중요성을 희석시켜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도록 시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숙한 교회됨의 본질적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중생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으면 반드시 중생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담배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거나 술 먹던 사람이 술을 끊으면 중생 했다, 즉,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렇게 변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장한 일로 봐 줄 수는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중생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중생 했다고는 볼 수 없단 말입니다. 중생은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중생이 무엇이냐고 확실하게 설명하자면 사도행전 9장에서 보는 사도 바울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인 강도이거나 간음했던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신봉한 사람으로, 자기가 아는 율법적 지식에 의해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에 의하면 기독교인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때려죽였고, 또 잡아들이기 위하여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까지 내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히 극성스런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의 삶이 통째로 바뀝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키가 작았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래서 그런지 대단히 야무진 데가 있었습니다. 길 한복판에서 대단히 충격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이 경황 중에서도 그는 "주여, 뉘시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한마디 하셨고, 여기에서 그의 생각과 마음은 완전히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가진 율법 지식으로 예수를 보았는데, 이제는 예수에 의해서 율법을 보고 예수에 의해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 중심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극적인 변화로 그의 생각과 생활이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지금까지 먹던 것을 안 먹게 되었다든지 직업이 바뀌었다든지 또는 생활이 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생명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D쵹TXT툟지금까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라간 중생의 표본이 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선 사도 바울을 들고 싶고, 그 다음은 성 어거스틴, 성 프란시스 등을 말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지만 휘청거릴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 본래의 성격을 바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근본적으로 그의 삶 전체를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남으로 박해자가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영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끔 "나는 모태 신앙입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태 적부터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 다녔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방탕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한 번은 뒤집힐 때가 있습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신앙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물에 물탄 듯해서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때에라도 중생의 체험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무감각 상태에서 수십 년을 교회 다니며 직분을 맡아 일했어도 그를 꼭 크리스찬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한 번은 부딪혀야 합니다. 아니, 꼭 이런 순간을 체험해야 합니다. 물론 다메섹에서 일어났던 사도 바울의 체험과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주님과의 만남의 관계는 있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을 체험해서 중생한 사람은 지난날의 생을 끊어 버리고 새 생활을 살아갑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고, 율법 앞에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옛 사람을 쳐서 복종케 하며 살고, 옛 사람을 끊어 버리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한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거룩하게 살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깨끗하게 평생을 살려고 했습니다만, 진정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내 죄, 내 죄"하며 고민을 했습니다. 그는 28개의 성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죄사함을 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마지막에는 계단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의해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중생의 시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있고 그 간증이 있는 바로 거기에 의가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 하시는 곳이 교회입니다. 흔히 어떤 교회가 부흥되느냐고 자주 질문들을 합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교회는 언제나 부흥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란, 찾아 나왔을 때에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설사 내가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 교회에 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느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어찌 교회를 나올 수 있습니까? 교회가 교회 됨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을 하며, 동행하는 역사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셋째, 전도가 있어야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그가 예수를 만나자마자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전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문제가 여러 가지로 발생했습니다. 주로 똑똑한 사람들은 바울이 아무래도 스파이나 간첩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믿자고 유도하고서는 믿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죽이지 않겠느냐는 상상까지 해서 바울을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사도 바울은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든 외면하든 내가 만난 예수를 몰래 간직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중생한 이 체험을 그대로 지니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남이야 미쳤다고 하든 변절자라고 하든 상관없이 그저 붙들고 전도했습니다. 담대하게 용기 있게 전했습니다. 그는 바로 엊그제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난 뒤로는 가지고 있던 공문서를 찢어 버리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전도한다고 해서 성경을 다 잘 알고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만나고 체험한 바를 전할뿐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누구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로 믿고서는 벙어리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께서는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하는 목사는 목사답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교인들에게 잘 믿도록만 인도하면 그들이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라는 말처럼 불필요한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를 만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자연히 선교가 있고 증거가 있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도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전할 수밖에 없도록 담력이 생기게 됩니다. 아니 확실하기 때문에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어떤 핍박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교제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박해자였던 그가 하루아침에 변해서 복음을 전하자 그를 영접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서 만나지 않겠다고 피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증거해도 위험한 인물로만 취급당했습니다. 이 때에 바나바가 나타나서 그를 영접하고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줍니다. 그리고 그의 변화된 상태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온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킨 자는 바울이고, 바울을 변화시킨 자는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확실히 바울은 위대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뒤에 숨은 공로자가 있습니다.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해 준 바나바입니다. 그는 바울을 수용해 주었고 믿어 주었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도 해주었습니다. 바나바가 그를 고향으로 보내기도 했고, 단시 다메섹에서 그를 데려오기도 했으며, 다소에 가서 불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여행 때에는 동행까지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을 돕고 높여 주어 그로 하여금 큰 역사를 이루게 했지만, 바나바의 이름은 뒤에 숨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바나바의 인간성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성 때문이 아닙니다. 바나바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청년의 과거를 묻지 않고 단지 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박해자를 변하게 해서 전도자로 만드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저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중생을 믿습니까? 다른 사람의 중생도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친교요 교회인 것입니다.

그의 과거의 도덕 생활이나 가치관을 묻지 마십시다. 예수를 믿기 이전의 것은 상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변화된 것처럼 그의 변화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변화된 것이 없으니 남의 변화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만나면 제삼자의 과거를 들추어내면서 흉을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묻지 않는 과거를 우리가 왜 묻습니까?" 자신에게나 남에 대해서나 과거는 과거로 깨끗이 잊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옛날에 나는 이런저런 죄인이었다고 옛날에 매여서 변화된 오늘의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변화된 오늘의 모습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가 사울이라는 청년을 영접한 것은 예수 때문이요, 또 믿고 따른 것도 예수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동향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동창이기 때문입니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것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이 친교만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라는 세계적인 교회 성장 학자가 이야기하기를 10년 동안 교인이 20% 이상 성장했으면 열등한 교회요, 50% 이상 성장했으면 평범한 교회요 100% 성장했으면 훌륭한 교회요, 200% 이상 성장했으면 우수한 교회요, 300% 이상 성장했으면 탁월한 교회요, 500% 이상 성장했으면 엄청난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부터 11년 전에 11명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엄청난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많은 교인 중의 65%가 소망교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이 교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이 4,800명이며,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분들이 1,300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교회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체험으로 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으로 이웃을 영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인간적인 친분으로 교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고 예수 때문에 내가 저를 사랑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되어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더욱 더 부흥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큰 역사가 우리 교회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숙한 교회의 모습(사도행전 9장 26절~31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 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우리 성도들은 때때로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입니까?"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모르면서 묻는 사람들에게 교회란 이런 곳이다 하고 한마디로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대체적으로 교회가 무엇인가고 질문하는 자의 마음속에는 어떤 의도가 깔려 있기 쉽습니다. 그 의도는 "도대체 교회가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느냐"고 하는 교회를 향한 개인적인 욕망에 대한 불평입니다. 물론 "교회가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계속 있어야만 하는 필요한 물음입니다. 교회는 늘 새로운 의미로 교회의 본질을 찾아야만 하고 계속적인 개혁을 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교회를 세속적인 어떤 열매에 의해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는 뿔이 있습니다. 그러나 뿔이 났다고 다 소가 아닙니다. 교회가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다 교회는 아닙니다. 교회가 봉사도 하고 구제도하고 친교도 하지만, 봉사하고 구제하고 친교 한다고 해서 다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결과에 의해서나 외형적으로 나타난 모양에 의해서 교회됨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좀더 근본적인 깊은 뿌리에 의해서 그 본질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많은 불쌍한 자들을 도우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불쌍한 사람을 위해 오셨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런 목적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면 그는 완전한 실패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만백성의 구원을 목적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하나님 자녀되게 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몇 가지로 큰 오해가 있습니다. 에밀 브루너의「교회의 오해」라는 책에서도 여러 번 지적하고 있듯이, 우선 교회를 학교(institute)로 오해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그룹별로 여러 가지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배웁니다만 그것 자체를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공부와 교회는 별개입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해서 교회를 학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헬라식의 판단입니다. 둘째, 친교(koinonia, fellowship)하는 곳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며 친교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은 망상입니다. 물론 성도의 교제가 있습니다만, 이것이 결코 교회의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셋째, 교회를 자선사업 단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를 향하여 "도대체 교회가 무엇하고 있느냐?"고, 교회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야단을 합니다. 자신들은 한푼도 내지 않으면서 교회가 돈을 쓰지 않고 무엇 하느냐고 원망인 것입니다.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는 구제할 뿐이지 구제를 위한 기관은 아닙니다. 넷째, 불의에 항거하는 어떤 저항 단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W. Booth)에게 어느 기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교회의 위험과 시련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교회가 중생 없는 용서를 전하는 철학적 기독교가 될 것을 가장 염려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대자대비를 논하자는 곳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중생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철학적 기독교, 즉 진리를 지성화하고 지식화해서 추상화해 버리는 함정에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도 전도할 때에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이가 있습니다. 가령 교회에 가자고 권유하면서 "교회 가서 좋은 이야기나 들읍시다," 또는 "교양 강좌 듣는 셈치고 한번 나가 봅시다"라고 접근을 합니다. 물론 전도하는 한 방법이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전도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 같아 그럴듯하지만 철학적 기독교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식을 낙농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추상적 진리에 머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많이 듣고 많이 배우기만 한 사람들은 쉽게 기독교인이 되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부스는 성령 없는 교회,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 없는 천국을 선포하는 교회가 될 것을 미리 걱정했던 것입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현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확실하고 그 고백이 분명해야 하며, 예수의 부활과 재림 신앙에 근거한 종말론적인 공동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셨으며, 이제 다시 오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며 서로 사랑을 나누는 여기에 교회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이 함께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 하시는 그 증거가 분명할 때에 그 곳에 교회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외적인 박해도 교회 되게 하는 데 무서운 것이지만, 더욱 더 조심해야 할 것은 인본주의, 인문주의, 진리에 대한 왜곡과 그리고 진리를 과거의 유산물로 돌리려는 생각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의 중요성을 희석시켜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도록 시험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숙한 교회됨의 본질적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중생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있으면 반드시 중생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담배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거나 술 먹던 사람이 술을 끊으면 중생 했다, 즉,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렇게 변하기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장한 일로 봐 줄 수는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중생은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던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중생 했다고는 볼 수 없단 말입니다. 중생은 신비로운 역사입니다. 중생이 무엇이냐고 확실하게 설명하자면 사도행전 9장에서 보는 사도 바울의 변화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인 강도이거나 간음했던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신봉한 사람으로, 자기가 아는 율법적 지식에 의해서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자기가 아는 지식에 의하면 기독교인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법을 어기면서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때려죽였고, 또 잡아들이기 위하여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까지 내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대단히 극성스런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의 삶이 통째로 바뀝니다.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키가 작았다고 전해집니다만 그래서 그런지 대단히 야무진 데가 있었습니다. 길 한복판에서 대단히 충격적으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이 경황 중에서도 그는 "주여, 뉘시옵니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때에 주님은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한마디 하셨고, 여기에서 그의 생각과 마음은 완전히 바뀝니다. 지금까지는 자기가 가진 율법 지식으로 예수를 보았는데, 이제는 예수에 의해서 율법을 보고 예수에 의해서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 중심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극적인 변화로 그의 생각과 생활이 완전히 바뀌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입니다. 지금까지 먹던 것을 안 먹게 되었다든지 직업이 바뀌었다든지 또는 생활이 좀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생명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D쵹TXT툟지금까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따라간 중생의 표본이 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우선 사도 바울을 들고 싶고, 그 다음은 성 어거스틴, 성 프란시스 등을 말하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랐지만 휘청거릴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그는 자기 본래의 성격을 바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근본적으로 그의 삶 전체를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남으로 박해자가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영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끔 "나는 모태 신앙입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모태 적부터 무엇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그냥 끌려 다녔을 뿐입니다. 세상에서 방탕하다가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한 번은 뒤집힐 때가 있습니다만 어렸을 때부터 신앙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은 물에 물탄 듯해서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때에라도 중생의 체험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무감각 상태에서 수십 년을 교회 다니며 직분을 맡아 일했어도 그를 꼭 크리스찬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한 번은 부딪혀야 합니다. 아니, 꼭 이런 순간을 체험해야 합니다. 물론 다메섹에서 일어났던 사도 바울의 체험과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주님과의 만남의 관계는 있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생을 체험해서 중생한 사람은 지난날의 생을 끊어 버리고 새 생활을 살아갑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고, 율법 앞에 죽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옛 사람을 쳐서 복종케 하며 살고, 옛 사람을 끊어 버리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느니라" 하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한 사도 바울의 삶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거룩하게 살며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깨끗하게 평생을 살려고 했습니다만, 진정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내 죄, 내 죄"하며 고민을 했습니다. 그는 28개의 성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오르내리면서 죄사함을 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만 마지막에는 계단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의로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의해 벌떡 일어난 것입니다. 중생의 시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 하시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고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있고 그 간증이 있는 바로 거기에 의가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살아 역사 하시는 곳이 교회입니다. 흔히 어떤 교회가 부흥되느냐고 자주 질문들을 합니다. 그리스도가 살아 계신 교회는 언제나 부흥될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있는 교회란, 찾아 나왔을 때에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설사 내가 만나지 못했더라도 그 교회에 가면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느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 없이 어찌 교회를 나올 수 있습니까? 교회가 교회 됨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체험이 있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중심적인 생활을 하며, 동행하는 역사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셋째, 전도가 있어야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그가 예수를 만나자마자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전도를 합니다. 그랬더니 문제가 여러 가지로 발생했습니다. 주로 똑똑한 사람들은 바울이 아무래도 스파이나 간첩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이렇게 예수 믿자고 유도하고서는 믿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서 죽이지 않겠느냐는 상상까지 해서 바울을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사도 바울은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이 알아주든 외면하든 내가 만난 예수를 몰래 간직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중생한 이 체험을 그대로 지니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남이야 미쳤다고 하든 변절자라고 하든 상관없이 그저 붙들고 전도했습니다. 담대하게 용기 있게 전했습니다. 그는 바로 엊그제만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난 뒤로는 가지고 있던 공문서를 찢어 버리고 복음을 전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가 있습니다. 전도한다고 해서 성경을 다 잘 알고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내가 만나고 체험한 바를 전할뿐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누구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한 사람은 교인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로 믿고서는 벙어리로 있을 수 없으니까요. 유명한 척 스미스 목사께서는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하는 목사는 목사답지 못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교인들에게 잘 믿도록만 인도하면 그들이 전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라는 말처럼 불필요한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를 만나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자연히 선교가 있고 증거가 있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도 벙어리였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전할 수밖에 없도록 담력이 생기게 됩니다. 아니 확실하기 때문에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어떤 핍박도 그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사람을 이해하고 교제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박해자였던 그가 하루아침에 변해서 복음을 전하자 그를 영접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서 만나지 않겠다고 피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증거해도 위험한 인물로만 취급당했습니다. 이 때에 바나바가 나타나서 그를 영접하고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줍니다. 그리고 그의 변화된 상태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온 세계의 역사를 변화시킨 자는 바울이고, 바울을 변화시킨 자는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확실히 바울은 위대했습니다. 실제로 역사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뒤에 숨은 공로자가 있습니다. 바울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해 준 바나바입니다. 그는 바울을 수용해 주었고 믿어 주었습니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도 해주었습니다. 바나바가 그를 고향으로 보내기도 했고, 단시 다메섹에서 그를 데려오기도 했으며, 다소에 가서 불러 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여행 때에는 동행까지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을 돕고 높여 주어 그로 하여금 큰 역사를 이루게 했지만, 바나바의 이름은 뒤에 숨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바나바의 인간성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성 때문이 아닙니다. 바나바의 믿음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울이라는 청년의 과거를 묻지 않고 단지 신앙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박해자를 변하게 해서 전도자로 만드신 예수님의 능력을 믿은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능력이라면 저 사람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중생을 믿습니까? 다른 사람의 중생도 믿어야 합니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친교요 교회인 것입니다.

그의 과거의 도덕 생활이나 가치관을 묻지 마십시다. 예수를 믿기 이전의 것은 상관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변화된 것처럼 그의 변화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래서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변화된 것이 없으니 남의 변화도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 만나면 제삼자의 과거를 들추어내면서 흉을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묻지 않는 과거를 우리가 왜 묻습니까?" 자신에게나 남에 대해서나 과거는 과거로 깨끗이 잊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옛날에 나는 이런저런 죄인이었다고 옛날에 매여서 변화된 오늘의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변화된 오늘의 모습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나바가 사울이라는 청년을 영접한 것은 예수 때문이요, 또 믿고 따른 것도 예수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도의 교제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동향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동창이기 때문입니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된 것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이 친교만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피터 와그너(Peter Wagner)라는 세계적인 교회 성장 학자가 이야기하기를 10년 동안 교인이 20% 이상 성장했으면 열등한 교회요, 50% 이상 성장했으면 평범한 교회요 100% 성장했으면 훌륭한 교회요, 200% 이상 성장했으면 우수한 교회요, 300% 이상 성장했으면 탁월한 교회요, 500% 이상 성장했으면 엄청난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부터 11년 전에 11명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엄청난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많은 교인 중의 65%가 소망교회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이 교회에서 세례 받은 사람이 4,800명이며,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분들이 1,300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교회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체험으로 살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사람으로 이웃을 영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인간적인 친분으로 교회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고 예수 때문에 내가 저를 사랑하여 우리 모두가 하나되어 형제 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31절에 보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더욱 더 부흥하더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큰 역사가 우리 교회와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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