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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전에(디모데후서 4장 9절~18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 오라.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겨울이 오기 전에
겨울에는 어서 여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여름에는 어서 겨울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겨울은 겨울대로 좋고 여름은 여름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추우면 추운 대로 좋고 더우면 더운 대로 좋아서 사철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좋지만 가난하다 해도 가난한대로 그 생활에서 행복을 창조하면서 사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드시 부해야 한다든지 반드시 가난해야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돈이 있고 보니 가난했던 지난날이 좋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가난해서 돈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인생입니다.
한 걸음 나아가 겨울에는 여름을 준비할 줄 알고 여름에는 겨울을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행복에 지혜까지 더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름이 되어도 걱정할 것 없고 겨울이 되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 계절의 맛을 만끽하고 삽니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계절만큼 엄격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옵니다. 겨울이 가면 다시 봄 여름이 오지 않습니까? 이런 뻔한 현실 앞에서 여름이면 겨울을 걱정하고 겨울이면 여름을 걱정하다니요.
이제 또다시 겨울 걱정들을 많이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요사이 문명의 이기(利器)를 써서 겨울을 여름처럼, 여름을 겨울처럼 살려고 하다가 병드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병원 원장님 부인도 허리며 다리며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데가 없어서 자주 치료를 받는데 난치병이라고 합니다. 병명인즉 소위 '에어콘 병'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부인은 처녀 시절에 에어콘 틀어놓은 병원에서 수년 동안 간호원으로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부인의 경우는 그런 곳에 근무한 탓으로 애꿎게 고생하게 된 경우이지만 요즘 세상에는 스스로가 에어콘을 즐기다가 사서 병을 얻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여름에는 땀을 흘리고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름을 겨울처럼 살려고 하다가는 나이 들어 고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겨울에는 추위에 떨며 사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정상 궤도를 벗어나 겨울을 여름처럼 따뜻하게 만들어 사는 사람을 볼라치면 겨우 내 감기에 걸려 고생을 합니다. 겨울에 따뜻하게 산다고 자랑할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절대로 추위 속에 사는 사람만큼 건강하게 살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리 앞에, 자연의 섭리 앞에 저항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섭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역하면 탈이 납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어떻게 대처하든, 사실은 사실로서 엄연히 존재합니다.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아랑곳없이 겨울은 옵니다. 이 엄연한 사실, 이 엄연한 진리를 그대로 순순히 받아들이는 데에 행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 태도가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두 번째로 투옥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석방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시는 바깥세상을 구경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미 그는 순교를 예감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나이도 일흔이 넘었습니다. 고생을 많이 한 노부(老父)입니다.
"관제(灌祭)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4장 6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마라톤과도 같은 긴 경주입니다. 출발점도 있고 종점도 있습니다. 저 만치에 파이널 골(final goal)이 바라다 보입니다.
그는 이 편지를 그런 순간에 쓰고 있습니다. 순례의 길과도 같은 일생이었습니다. 비록 땅 위에 살지라도 하늘의 진리를 추구합니다. 비록 임시적인 생을 살지만 언제나 신령한 것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 일생이었습니다. 이제 순례의 여정이 끝나고 종점에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죽음의 시각을 바라보면서 그는 겨울을 느끼고 있습니다.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라고 2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중해(地中海)바다는 한겨울이 되면 얼어붙어서 항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기 전에 오라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정이 없었습니다. 혈육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훌륭한 믿음의 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디모데 같은 믿음의 아들을 한번 생각해보시렵니까? 디모데는 평생토록 사도 바울을 도왔고 사도 바울을 본받아 복음을 전하기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 성당이나 바티칸 궁전이나 바티칸 박물관 등을 구경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데가 한군데 있습니다. 바로 바울 성당입니다.
바울 성당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합니다. 제가 거기에 갔을 때에도 보니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울 성당은 비록 규모야 작지만 베드로 성전과 모양이 거의 같습니다. 그 성전에는 예배당 한가운데에 사도 바울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에 바울의 시신을 모신 관이 있고, 그 관 밑에 디모데의 관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얼마나 철저한 믿음의 아들이었나 하는 것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평생을 바울과 함께 일했으면서 죽어서도 바울의 관 밑에 묻힌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같은 믿음의 아들이 있습니까?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만큼 철저한 믿음의 아들 구실을 하고 있습니까? 이제 겨울이 가까웠고 죽음을 맞이할 때입니다.
이런 때에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부르면 올 사람이 있습니까? 나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지켜보아 줄 믿음의 아들이 있느냐 그 말입니다.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습니다. 봄과 같이 꽃피고 희망에 부푼 때가 있는가 하면 여름과 같이 더위와 싸우며 성장해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또한 가을과 같이 냉엄하게도 심은 대로 거두어들이는 심판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겨울과 같이, 활동이 동결되며 손을 놓고 안식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절적으로도 겨울을 맞이했고 인생의 겨울도 동시에 맞이했습니다. 기회를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끝이요 활동이 중지, 종식되는 마지막 시각 앞에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겨울을, 그가 맞은 그 시각을 다시 한번 음미해보십시다. 먼저는 육체적인 겨울이었습니다 몹시 추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사람이란 나이가 많을수록 추위를 많이 탑니다. 입어도 춥고 덮어도 춥습니다.
바울도 겨울을 맞이하면서 추위 때문에 어느 집에 맡겨놓은 겉옷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그 옛날에는 옷이 귀했습니다. 그러나 옷이 짐이 되기 때문에 전도여행 다닐 때에는 여기저기에다 맡겨 놓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이제 감옥에서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부르면서 드로아 가보의 집에 맡겨놓은 겉옷을 가지고 오라 합니다. 몹시도 추위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 감옥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마는 거기서 어떻게 몇 번씩이나 지낼 수 있었는지 모를 만큼 답답한 감옥입니다. 지하에 있는 감옥인지라 햇빛이 들지 않습니다. 창문조차 없습니다.
사방이 차고 딱딱한 돌로 되어 있습니다. 온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하 석실에서 바울은 그 모진 겨울을 맞이한 것입니다.
육체의 겨울입니다. 동시에 정신적인 외로움의 겨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죽 읽어나가노라면 형언할 수 없이 처량해 집니다. "테마는 이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10절)"-다 떠나갔습니다.
이 데마라는 사람은 성경에 세 번 나타납니다. 빌레몬서 1장 24절에 보면 바울이 "나의 동역자"라 했고, 골로새서 4장 14절에는 데마라는 이름만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는 '나를 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바울의 동역자였으나 무엇인가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능력도 있고 권세도 있고 지혜도 있는 분이니 그를 통해 입신출세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끝내 바울을 떠나고 맙니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을 박차고 나올 때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보일 때에는 따를 마음이 있었으나 오늘은 로마 감옥에서 그대로 죽어갈 모양입니다.
데마의 생각에는 바울이 왜 이 모양인가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배교하고 배신하여 세상으로 달려나가고 맙니다. 세상 욕망을 끊지 못하여,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하여 세상으로 뛰쳐나가 버립니다.
그레스게와 디도는 볼일이 있어서 부득이 바울의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12절)." 교회 일을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에베소로 보내어야 했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스스로 나를 떠난 사람, 일이 있어서 나를 떠난 사람, 일을 위해 부득이 보낸 사람-어차피 다 떠났습니다. 이래서 고독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11절)"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골로새서 4장 14절에 보면 "사랑하는 의사"입니다.
바울은 능력의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정작 그 자신에게는 병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누가라고 하는 의사를 동행하게 해주셨습니다. 누가는 평생을 바울과 동행합니다. 평생토록 바울의 건강을 돌보는 충실한 의사였습니다. 그가 바울과 동행했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아무튼 겨울이 가까워오면, 나이가 들면, 주위 사람들이 다 내곁을 떠납니다. 아들도 딸도 떠나고 가까운 친구도 떠납니다.
이래서 떠나고 저래서 떠납니다. 마침내 홀로 남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홀로 남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7절에 보면 그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치고서 말입니다. 이번의 감옥에서 그는 이제 미련을 버렸습니다. 이제 석방되어 나가서 복음 전할 생각이며 이런 계획 저런 꿈, 세상에 대한 욕망도 이미 다 끊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내 앞에 면류관이 있다'며 주님만 사모합니다. 저번처럼 또다시 무슨 기적이 일어나 감옥 밖으로 나가게 되고, 그래서 다시금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이런 생각마저 버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욕망을 버리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돈에 대한 미련도, 명예에 대한 아쉬움도, 사업에 대한 집착도, 그리고 이런저런 인정사정을 끊어버려야 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다 끊어버렸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주실 면류관만 바라보면서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11절)" 합니다.
이 마가와 사도 바울의 관계는 색다른 사연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12절이나 13장 13절에 보면 알 수 있는 사연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와 함께 가게 됩니다. 여기에 마가가 따라나섭니다. 우리가 '마가의 다락방'이라고 일컫는 그 집의 아들이 이 마가입니다. 부잣집 외아들이지요. 이들 일행이 밤빌리아에 갔을 때, 전설에 따르면 이 마가가 말라리아에 걸립니다. 한두 주일이나 앓고 있을 때, 바울은 전도 여행을 떠나지도 못한 채 이 아들을 간호하며 기도했습니다. 정성을 들여 간병한 결과 마가가 쾌유되었습니다. 이제야 떨치고 일어나 전도여행을 떠나자 하니 뜻밖에도 마가는 못 가겠다고 합니다.
예나 오늘이나 부잣집 아들은 마음도 체질도 약한 것인지 마가는 거기서 끝내 '도중 하차'하여 예루살렘으로 혼자 가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섭섭한 대로 한바퀴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고를 하게 됩니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전도를 했으며 어떤 핍박이 있었고 어디에 교회를 세웠고 어떠한 기적이 나타났고…… 죽 이야기를 하는데, 마가가 가만히 들어보니 흥미진진하거든요? 따라가지 못했던 게 은근히 후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고 나설 때에는 따라가려고 합니다. 이 때 바울은 냉랭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마가와 함께 딴 길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따로 떠나서 각각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본래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마가를 거부한 그 결단은 결과를 놓고 보면 의로운 결단이었습니다. 두 대(隊)로 나뉘어 전도를 했기 때문에 복음을 더 많이 전할 수 있었음은 물론, 마가는 마가대로 그 충격 때문에 열심을 냄으로써 보다 충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합동하여 선을 이룬 셈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겨울의 죽음을 앞둔 시각에 마가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릅니다. "그때에는 마음이 아팠지? 미안하다." 이런 한 마디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겠지요. 따지고 보면 잘못은 어디까지나 마가한테 있습니다. 결과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것가지고 끝낼 일이 아닙니다. "그때 얼마나 섭섭했겠느냐? 무척 마음이 아팠지? 미안하다." 이렇게 마가를 위로한 다음에야 주님 앞에 가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당시 구약성경은 양가죽에 기록되어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피가 크고 무거웠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기에는 벅차므로 주로 회당에 놓아두고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사사로이 따로 성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어느 집에 맡겨두고 다녔거든요. 이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이 겨울, 그는 그 성경을 다시 보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나이 많은 목사님 한 분이 강단에서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나는 30대부터 성경을 하루에 5장씩 보았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5장씩은 꼭 보고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60대부터는 7장씩 보았습니다. 이제 내 나이 일흔을 넘었으므로 하루 10장씩 봅니다. 반드시 10장 이상은 읽고야 하루를 마감합니다." 여러분, 겨울이 가까웠습니까?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책이 무엇이겠습니까? 잡동사니 책이나 복잡한 신문 따위나 보아 가지고 공연히 근심을 쌓지 마십시오. 성경 좀 읽으십시다. 나이가 들었거든 더 많이 읽으십시오. 열중해서 읽으십시오. 이런 책 저런 책 다 밀어두고 오직 성경을 읽으십시오. "가죽에 쓴 것을 가져 오라"하고 사도 바울이 성경을 찾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더 보아야겠다고 합니다. 원수에 대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알렉산더라는 사람, 나를 비난하고 나를 끝까지 괴롭히고 전도를 방해한 사람, 나의 목회를 방해한 이 사람에 대해서 바울은 말합니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하고 하나님께 맡기면서 "너도 저를 주의하라"하고 믿음의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어서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16절)"라고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따지자면 할말도 많습니다. 내가 옳고 저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얼마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허물을 저희에게 돌리지 마라." 내게도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나이 쉰을 넘었거든 어느 누구와도 시비를 벌이지 말 것이요, 예순을 넘었으면 허물을 남에게 묻지 마십시오. 모든 허물은 내게 있지 다른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자식이 잘못되어도 자식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내게 잘못이 있습니다. 남편이 잘못 된 것도 그 탓이 아내인 내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락은 당신이 했지만 그 원인은 내가 제공했을 것' 이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겨울을 맞는 사람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마라"-이것이 죽음을 앞둔 자의 경건한 자기 성찰입니다. 1555년, 니콜라스가 예수의 복음을 증거 했다는 죄목으로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는 집행 당하기 하루 전날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동생 되는 분이 찾아와 말합니다. "형님, 마지막이 되는 밤인데 제가 형님을 위로하고 싶습니다. 함께 하룻밤을 지낼까 합니다." 그러자 내일 아침이면 죽게 될 니콜라스는 말합니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나는 평소와 하나도 다름없이 오늘밤에도 편히 잘 것이다. 푹 자고 나면 내일 아침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돌아가거라."
여러분, 내일 죽는다 해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는,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일 무슨 일이 있든 오늘이 별다를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사랑하고 용서하고 여느 때나 다름없이 성경보고 기도하고 살아갈 일입니다.
겨울을 맞는 마음-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자신을 겸허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허물을 나에게 돌리며 화목을 점검해야 됩니다. 혹시라도 내가 누구를 섭섭하게 만들지는 않았는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내 눈이 흐려지기 전에, 내 기억이 쇠하기 전에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용서할 자는 용서하고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을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기다리는 자세로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너는 겨울 전에 속히 내게로 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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