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이 시기를 알라(로마서 13장 11절~14절)

by 【고동엽】 2023. 5. 8.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이 시기를 알라(로마서 13장 11절~14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시력은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의사는 당황해서 재수술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억은 돌아왔으나 또다시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의사는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양자택일을 해야겠는데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시력입니까, 과거에 대한 기억입니까?" 그 환자는 깊이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잊어버려도 괜찮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회복시켜 주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귀중한 지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거에 대한 것을 너무 많이 압니다. 쓸데없는 기억들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현재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압니다. 이것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괴로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지식 ----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나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나를 모를 때에 남도 모르고 세상도 모릅니다. 먼저 나를 똑바로 볼 수 있을 때에라야 비로소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알되 나의 과거가 아니요 미래를 알아야 합니다. 내 앞에 어떤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에 있는지, 나의 생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끝내실 것인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소유의 현주소, 능력의 현주소, 지식의 한계 등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 변변치 않았던 것 지난날 많이 가졌던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지금 내 손에 있는 것 ---- 내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 내가 쓸 수 있는 재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생활의 영역이 얼마나 되는지, 그 현실적인 한계와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한 3년 전에 처음으로 돋보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눈앞이 침침하다 싶더니 갑자기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안과의사 말이 지금도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돋보기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돋보기 안경을 맞추어 쓰니 과연 잘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돋보기를 쓰는 분들은 아마 한번쯤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나도 돋보기 쓸 나이가 되었구나'하는 감회랄까요?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그리고 돋보기를 쓴 채로 먼 곳을 보면 어른어른한 것이 참 불편합니다. 게다가 또하나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돋보기 쓰고 읽은 책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진작 많이 읽어둘 것을……' 여러분, 그 밝은 눈이 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좋은 기억력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지금 여러분 수중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으며 얼마만큼의 가능성이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인생의 현주소, 이것을 똑바로 알아야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 시기'를 알라고 가르칩니다. '이 시기'란 헬라어로 '톤 카이론'인데 대단히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로 직역하면 the present time, 곧 바로 현재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시간은 모든 공식에 적용되는 인수입니다. 가치의 기본입니다.

자본, 지식, 경험, 노력, 능력 이런 것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가치가 시간 안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시간, '이 시기'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에 그 가치를 옳게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수직적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안다는 것은 수직적인 지식입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나 넓게 알고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생각해야 합니다.

편지 쓰는 절차만 보아도 우리는 받을 사람부터 시작합니다.

'부모님 전 상서,' 혹은 '아무개 앞' 하는 식으로 말머리를 잡고 문안과 함께 사연을 죽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나서 날짜와 시간은 맨 마지막에 씁니다. 편지를 모아뒀다가 언제 온 편지인가를 찾으려면 맨 끝을 꺼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한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시간과 날짜가 가장 위에 있습니다. 어느 쪽 풍습이 더 옳으냐를 떠나서 저는 이 문제만큼은 서양사람들의 방식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시간이 우선입니다. 시간만이 수직적이요 그 밖의 문제는 모두 수평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이해하느니 마느니, 양보하느니 마느니 왈가왈부 해보아야 다 소용 없고 다른 차원, 곧 수직적인 차원에서 판단하여야 바른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결정적인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바로 역사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현재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신앙적 역사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의견이 맞서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파국을 맞을지 모르는 위기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화평을 말하고 타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네 말이 옳으냐 내 말이 옳으냐 하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타협이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좀더 높은 수직적 차원에서 새로운 안목으로 이 역사를 볼 줄 아는 신앙적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하여 아주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에 대해서도 아주 좁디좁은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 주관적인 자기 의견에 얽혀서 좀처럼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현재의 노예가 되고, 협소한 자기 주관에 완전히 묶여진 비참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기도 하고, 그래서 방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절망하기도 합니다.

현재에 노예된 비참한 자기 존재를 바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지식이란 많든 적든 과거를 알 수도 있고 미래를 알 수도 있게 되어 있으나, 그 기준은 언제나 현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현재에 사는 지극히 협소한 인간들의 생각을 재촉하십니다. 그리하여 먼 미래를 바로 보고 바로 알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첫째, 경험으로부터 미래를 추리합니다. 우리가 반복되는 경험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었었지' 하고 미래를 점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라고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으로부터 미래를 추리하는 것을 이른바 '미래학'이라고 합니다. 지난날의 역사, 지난날의 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공식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바로 이것이 미래를 바로 볼 수 없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과거의 경험에 대한 집착이 나의 시야와 판단력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상적으로 미래를 내다봅니다. 과거 역사를 논리적으로 연구하고 합리적으로 추리해서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러한 전망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헤겔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소위 '변증법적 역사관' 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다. 그런고로 미래의 일은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이성적으로 추리합니다. 그러나 대전제가 불합리하므로 결론도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이제 남은 것은 믿음으로 보는 길뿐입니다. 과거의 경험도, 이성적 비판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에 비추어서 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믿고 압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남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고, 다른 사람이 걱정하는 것을 똑같이 걱정하는 사람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싸울 때에 함께 싸우고 다른 사람이 비판할 때에 함께 비판하고 함께 절망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보통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면을 생각합니다. 남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압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멀리 보고, 깊이 보고, 결정적인 미래를 압니다.

언젠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보았던 것으로 늘 마음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히로시마는 원자탄이 떨어져서 일시에 40만 명이 죽었고 그 여파로 100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 무서운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본은 그 뼈저린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원폭 자료관을 만들었습니다. 폭탄이 떨어져서 사람이 앉았던 자리, 그 그림자만 남은 것을 고스란히 떠다 놓았습니다. 그밖에도 사진 자료다 뭐다 끔찍한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도 저로 하여금 한곳에 머물러 서서 30분 동안을 깊이 생각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노오란 쇠붙이로 만든 종인데 '불가사의한 일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원자탄으로 인하여 불바다가 되었던 그 현장에 성당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종은 바로 그 성당에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쇠붙이고 뭐고 다 녹아버린 현장에서 이 종만은 깨끗이 보존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함께 갔던 친구가 그만 가자고 잡아끄는 것을 뿌리치고 저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지만 원자탄이 떨어져서 40만 명이 죽어 가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계셨다. 하나님이 살아 계셨고,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이 종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태양은 하루종일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밤에는 세상이 온통 캄캄합니다. 태양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딘가에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이 허무합니다.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합니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너무나도 암담합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밤의 개념을 살펴봅시다. 가장 깊은 밤은 의인의 고난입니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의인은 짓밟혀야 합니까? 왜 의인은 이렇듯 무참하게 죽어가야 합니까? 왜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 이것이 깊은 밤입니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公義)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밤, 이 깊은 밤에도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믿습니다. 그 아침을 믿습니다.

위대한 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아실 것입니다. 그가 아프리카대륙에서 선교사업에 성공하고, 뭇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한창 명성이 높아져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를 찬양하고 칭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인생의 항로를 항해하는 우리의 배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 짐 때문입니다."

'바닥 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전문 용어로 '밸러스트(ballast)'라고 하는데, 배가 전복(顚覆)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뱃바닥에 채워 넣은 돌, 물 따위를 가리킵니다. 배가 가벼우면 깊은 바다를 항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짐을 다 부리고 나서 빈배로 항해할 때에는 뱃바닥에 바닷물을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균형을 잡아야 배가 뒤집히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배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순풍에 돛단 듯이 평화스러워 보여도 그럴 수 있는 까닭은 모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의 무거운 바닥 짐 때문입니다.

리빙스턴은 이 이야기와 함께 자기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바닥 짐이 된 것은 집을 나가버린 방탕한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있었기에 그는 기도해야 했고, 겸손해야 했고, 그래서 뭇 사람이 치하하는 그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리빙스턴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어두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무서운 희생과 무서운 고통, 그리고 뼈를 깎는 아픔이 바닥 짐으로 깔려 있을 때에 우리가 탄 배는 무사할 것입니다.

'이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 present time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폭력, 헐뜯고 수군수군하는 입, 질투와 시기, 떳떳치 못한 부끄러운 일들이 난무하고 있어 앞이 캄캄합니다. 이처럼 어두운 세대가 이대로 흘러가야 합니까? 모략과 중상 ---- 이 세대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밤은 밤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밤은 반드시 아침을 부릅니다. 밤의 끝은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에 있습니다. 새벽으로 연결됩니다. 극단과 끝이라고 하는 이 시간은 다시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 인생의 궁극에서 하나님의 아침,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인생의 깊은 밤과 하나님의 구원의 아침이 현시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점점 어두워지기만 하는 세대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 아침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6․25때 군에 있으면서 여러 번 보초를 서보았습니다. 밤이 깊어간다는 말의 뜻을 그때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아무리 달빛이 없는 때에라도 초저녁은 그런 대로 훤합니다. 그러나 점점 어두워지다가 새벽 직전인 서너 시가 되면 별빛도 보이지 않게 캄캄한 때가 있습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지나면 동쪽 하늘이 다시 훤히 밝아오면서 새벽 별이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하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감나게 느껴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어두움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깨어야 합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꿈에서 깨어야 하고, 몽유병환자 같은 몽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그런 빛의 자녀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매이지 맙시다. 이미 지나갔습니다. 현재에 깊이 빠져들지 맙시다. 곧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삽니다.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아직은 어둠이 깊은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벽을 깨우고 밤을 낮같이 살아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방탕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펴보라" 하는 말씀을 듣고서 펴본 말씀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읽고서 한 사람이 구원 얻었고, 그의 역사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저 아침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이 시기를 알라(로마서 13장 11절~14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서 앞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시력은 다시 회복하게 되었으나 이상하게도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난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의사는 당황해서 재수술을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기억은 돌아왔으나 또다시 시력을 잃게 되었습니다.

할 수 없이 의사는 환자에게 물었습니다. "양자택일을 해야겠는데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시력입니까, 과거에 대한 기억입니까?" 그 환자는 깊이 생각하고 대답하기를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잊어버려도 괜찮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회복시켜 주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귀중한 지식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과거에 대한 것을 너무 많이 압니다. 쓸데없는 기억들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합니다. 현재에 대해서도 지나칠 정도로 많이 압니다. 이것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괴로움이 많습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것은 미래에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지식 ----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은 나 자신을 아는 지식입니다. 나를 모를 때에 남도 모르고 세상도 모릅니다. 먼저 나를 똑바로 볼 수 있을 때에라야 비로소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알되 나의 과거가 아니요 미래를 알아야 합니다. 내 앞에 어떤 미래가 전개될 것인지를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고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는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에 있는지, 나의 생을 어떻게 인도하시고 어떻게 끝내실 것인지, 그것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소유의 현주소, 능력의 현주소, 지식의 한계 등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날 변변치 않았던 것 지난날 많이 가졌던 것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지금 내 손에 있는 것 ---- 내가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 내가 쓸 수 있는 재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생활의 영역이 얼마나 되는지, 그 현실적인 한계와 현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한 3년 전에 처음으로 돋보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눈앞이 침침하다 싶더니 갑자기 시력이 떨어졌습니다.

안과의사 말이 지금도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돋보기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돋보기 안경을 맞추어 쓰니 과연 잘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돋보기를 쓰는 분들은 아마 한번쯤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이제 나도 돋보기 쓸 나이가 되었구나'하는 감회랄까요? 마음이 싱숭생숭합니다.

그리고 돋보기를 쓴 채로 먼 곳을 보면 어른어른한 것이 참 불편합니다. 게다가 또하나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돋보기 쓰고 읽은 책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진작 많이 읽어둘 것을……' 여러분, 그 밝은 눈이 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좋은 기억력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지금 여러분 수중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으며 얼마만큼의 가능성이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인생의 현주소, 이것을 똑바로 알아야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이 시기'를 알라고 가르칩니다. '이 시기'란 헬라어로 '톤 카이론'인데 대단히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어로 직역하면 the present time, 곧 바로 현재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시간은 모든 공식에 적용되는 인수입니다. 가치의 기본입니다.

자본, 지식, 경험, 노력, 능력 이런 것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가치가 시간 안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이 시간, '이 시기'라는 점에서 생각할 때에 그 가치를 옳게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수직적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안다는 것은 수직적인 지식입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나 넓게 알고 얼마나 많이 아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생각해야 합니다.

편지 쓰는 절차만 보아도 우리는 받을 사람부터 시작합니다.

'부모님 전 상서,' 혹은 '아무개 앞' 하는 식으로 말머리를 잡고 문안과 함께 사연을 죽 써 내려갑니다. 그리고 나서 날짜와 시간은 맨 마지막에 씁니다. 편지를 모아뒀다가 언제 온 편지인가를 찾으려면 맨 끝을 꺼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서양사람들한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시간과 날짜가 가장 위에 있습니다. 어느 쪽 풍습이 더 옳으냐를 떠나서 저는 이 문제만큼은 서양사람들의 방식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시간이 우선입니다. 시간만이 수직적이요 그 밖의 문제는 모두 수평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이해하느니 마느니, 양보하느니 마느니 왈가왈부 해보아야 다 소용 없고 다른 차원, 곧 수직적인 차원에서 판단하여야 바른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결정적인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바로 역사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현재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서 신앙적 역사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극단적인 의견이 맞서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파국을 맞을지 모르는 위기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화평을 말하고 타협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네 말이 옳으냐 내 말이 옳으냐 하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타협이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문제는 좀더 높은 수직적 차원에서 새로운 안목으로 이 역사를 볼 줄 아는 신앙적 역사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대하여 아주 적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에 대해서도 아주 좁디좁은 의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 주관적인 자기 의견에 얽혀서 좀처럼 헤어날 줄을 모릅니다. 현재의 노예가 되고, 협소한 자기 주관에 완전히 묶여진 비참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만하기도 하고, 그래서 방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절망하기도 합니다.

현재에 노예된 비참한 자기 존재를 바로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지식이란 많든 적든 과거를 알 수도 있고 미래를 알 수도 있게 되어 있으나, 그 기준은 언제나 현재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미래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현재에 사는 지극히 협소한 인간들의 생각을 재촉하십니다. 그리하여 먼 미래를 바로 보고 바로 알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첫째, 경험으로부터 미래를 추리합니다. 우리가 반복되는 경험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었었지' 하고 미래를 점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추측이라고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으로부터 미래를 추리하는 것을 이른바 '미래학'이라고 합니다. 지난날의 역사, 지난날의 내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에 공식을 적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바로 이것이 미래를 바로 볼 수 없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과거의 경험에 대한 집착이 나의 시야와 판단력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상적으로 미래를 내다봅니다. 과거 역사를 논리적으로 연구하고 합리적으로 추리해서 미래를 전망합니다. 이러한 전망의 방법 가운데 하나가 헤겔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소위 '변증법적 역사관' 이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이렇게 흘러간다. 그런고로 미래의 일은 이렇게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이성적으로 추리합니다. 그러나 대전제가 불합리하므로 결론도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이제 남은 것은 믿음으로 보는 길뿐입니다. 과거의 경험도, 이성적 비판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에 비추어서 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압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을 우리가 믿고 압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사람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남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고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똑같이 보고, 다른 사람이 걱정하는 것을 똑같이 걱정하는 사람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싸울 때에 함께 싸우고 다른 사람이 비판할 때에 함께 비판하고 함께 절망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보통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남이 생각지 못하는 면을 생각합니다. 남이 듣지 못하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압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멀리 보고, 깊이 보고, 결정적인 미래를 압니다.

언젠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 보았던 것으로 늘 마음속에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히로시마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히로시마는 원자탄이 떨어져서 일시에 40만 명이 죽었고 그 여파로 100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 무서운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본은 그 뼈저린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원폭 자료관을 만들었습니다. 폭탄이 떨어져서 사람이 앉았던 자리, 그 그림자만 남은 것을 고스란히 떠다 놓았습니다. 그밖에도 사진 자료다 뭐다 끔찍한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도 저로 하여금 한곳에 머물러 서서 30분 동안을 깊이 생각하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노오란 쇠붙이로 만든 종인데 '불가사의한 일이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원자탄으로 인하여 불바다가 되었던 그 현장에 성당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종은 바로 그 성당에 매달려 있었던 것으로, 쇠붙이고 뭐고 다 녹아버린 현장에서 이 종만은 깨끗이 보존되어 있었더라는 것입니다.

함께 갔던 친구가 그만 가자고 잡아끄는 것을 뿌리치고 저는 그 앞에 가만히 서서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그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 마지막으로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지만 원자탄이 떨어져서 40만 명이 죽어 가는 그 현장에도 하나님은 계셨다. 하나님이 살아 계셨고, 하나님의 역사가 거기에 있었다는 것을 이 종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태양은 하루종일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깊은 밤에는 세상이 온통 캄캄합니다. 태양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딘가에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이 허무합니다.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합니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너무나도 암담합니다. 그래도 어딘가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밤의 개념을 살펴봅시다. 가장 깊은 밤은 의인의 고난입니다. 왜 악인은 형통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의인은 짓밟혀야 합니까? 왜 의인은 이렇듯 무참하게 죽어가야 합니까? 왜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까? 이것이 깊은 밤입니다. 빛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公義)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밤, 이 깊은 밤에도 하나님의 질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믿습니다. 그 아침을 믿습니다.

위대한 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아실 것입니다. 그가 아프리카대륙에서 선교사업에 성공하고, 뭇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한창 명성이 높아져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기를 찬양하고 칭찬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했습니다. "인생의 항로를 항해하는 우리의 배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배 밑에 있는 바닥 짐 때문입니다."

'바닥 짐'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전문 용어로 '밸러스트(ballast)'라고 하는데, 배가 전복(顚覆)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뱃바닥에 채워 넣은 돌, 물 따위를 가리킵니다. 배가 가벼우면 깊은 바다를 항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짐을 다 부리고 나서 빈배로 항해할 때에는 뱃바닥에 바닷물을 집어넣습니다. 그렇게 해서 균형을 잡아야 배가 뒤집히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배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순풍에 돛단 듯이 평화스러워 보여도 그럴 수 있는 까닭은 모두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의 무거운 바닥 짐 때문입니다.

리빙스턴은 이 이야기와 함께 자기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인생에 바닥 짐이 된 것은 집을 나가버린 방탕한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있었기에 그는 기도해야 했고, 겸손해야 했고, 그래서 뭇 사람이 치하하는 그 엄청난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리빙스턴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어두운 시대를 살아갑니다. 무서운 희생과 무서운 고통, 그리고 뼈를 깎는 아픔이 바닥 짐으로 깔려 있을 때에 우리가 탄 배는 무사할 것입니다.

'이 시기'를 알아야 합니다. 이 present time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폭력, 헐뜯고 수군수군하는 입, 질투와 시기, 떳떳치 못한 부끄러운 일들이 난무하고 있어 앞이 캄캄합니다. 이처럼 어두운 세대가 이대로 흘러가야 합니까? 모략과 중상 ---- 이 세대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밤은 밤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밤은 반드시 아침을 부릅니다. 밤의 끝은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에 있습니다. 새벽으로 연결됩니다. 극단과 끝이라고 하는 이 시간은 다시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인생의 깊은 밤, 인생의 궁극에서 하나님의 아침,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됩니다. 인생의 깊은 밤과 하나님의 구원의 아침이 현시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점점 어두워지기만 하는 세대에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 아침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6․25때 군에 있으면서 여러 번 보초를 서보았습니다. 밤이 깊어간다는 말의 뜻을 그때 피부로 실감했습니다. 아무리 달빛이 없는 때에라도 초저녁은 그런 대로 훤합니다. 그러나 점점 어두워지다가 새벽 직전인 서너 시가 되면 별빛도 보이지 않게 캄캄한 때가 있습니다.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그런 때가 지나면 동쪽 하늘이 다시 훤히 밝아오면서 새벽 별이 떠오르는 것을 봅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하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감나게 느껴보았습니다.

여러분, 이 어두움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깨어야 합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꿈에서 깨어야 하고, 몽유병환자 같은 몽상을 버려야 합니다. 이제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는 하나님의 빛 앞에 떳떳이 설 수 있는 그런 빛의 자녀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매이지 맙시다. 이미 지나갔습니다. 현재에 깊이 빠져들지 맙시다. 곧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삽니다.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아직은 어둠이 깊은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구원의 아침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새벽을 깨우고 밤을 낮같이 살아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방탕했던 아우구스티누스를 회개하게 한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가 "펴보라" 하는 말씀을 듣고서 펴본 말씀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이 본문을 읽고서 한 사람이 구원 얻었고, 그의 역사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저 아침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