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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영원한 승리의 노래(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by 【고동엽】 2023.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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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승리의 노래(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은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중일전쟁 때에 중국군은 일본군에 쫓겨서 중경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에 어떤 분이 말하기를 중국의 조상인 공자의 무덤이 무엇인가 잘못되었기에 패전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하였었는데 이런 생각이 모여서 마침내 옛 공자의 무덤을 파헤치게 되었답니다. 큰 무덤을 다 헤치고 보니 쪽박 만한 두개골 밖에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끝나고 만다면 군자이면 무엇하고 성현이면 무엇할 것입니까?

죽음 앞에 인생의 모습이란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사망은 모든 것의 의미를 다 빼앗아 갑니다. 모든 자랑을 다 헛된 것으로 돌립니다.

모든 아름다움도 다 빼앗고 맙니다. 다른 동물보다 인간이 나은 것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동물입니다. 이 때문에 공포에 떨며 불안해합니다. 동물은 이것을 모르기에 죽을 때 죽더라도 그저 평안합니다. 죽음을 아는 것뿐이고 하등의 해결이 없다면 인생은 차라리 이를 모르는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못한 존재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알기만 하고 해결이 없다면 모르는 편이 더욱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망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망은 모든 것을 굴복시킵니다. 큰 위력을 가지고 호령합니다. 누구나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사망은 모든 활동을 정지시키고 모든 가치를 소멸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문맥대로 본다면 먼저는 죽음을 비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죽음에서는 주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욥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정지이고 끝이 된다고 곳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은 귀한 것이며 장수를 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살만큼 살고 늙어서 죽는 것을 결코 불행으로 설명하지 아니하였고 저주도 간주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늙어서 죽는 것은 자연한 일이며 마땅한 일로 설명하고 젊어서 죽는 일은 크게 불행한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저주로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65장 20절에는 100세에 죽는 자가 아이 같겠다고 복된 날에는 모두가 장수하게 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38장 12절에 의하면 젊어서 죽게 되는 일을 목자가 장막을 걷음같이 또는 직공이 베를 다 짜기 전에 틀에서 끊어 버리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임무를 다 끝내고 장막을 걷는 일은 매우 흐뭇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을 다 끝내기 전에 장막을 걷고 베를 다 짜기 전에 틀을 끊는다는 사실은 대단히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수의 복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신비의 역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이며 끝내 시원한 해답을 들을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안식, 즉 휴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쉬게 하신다고 합니다. 힘들게 일한 사람에게 있어서 휴식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히브리서는 영원한 안식을 거듭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도 그 영원한 휴식의 그림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옮기심"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타계로 옮기신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으로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생명을 내신 자는 하나님이시요, 생명을 거두시는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결코 우연하던가 자연한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셔서 이루어지는 일로 증거 합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바라는 시간에 내가 생각하는 모양대로 죽는 것은 아니며 죽음에는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는 듯이 극히 모순되고 부조리하게 가는 일도 있는 듯이 보일 때도 있으나 우리가 성경적 진리에 의하여 반드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은 죄와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죄와 죽음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성경은 계속 증거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죄와 사망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로서 사망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죄의 댓가로 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자체를 형벌처럼 저주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죽음이란 현상은 자연한 것입니다. 다만 이 죽음이 죽음 되게 된 것이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죽음이란, 현상 자체가 죄의 댓가는 결코 아닙니다. 의인도 죄인도 다 같이 죽으며 신불신간에 죽고 영생 얻을 자나 지옥으로 떨어질 자에게도 죽음은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는 죄도 형벌도 저주도 아니고 그 죽음에 대한 공포한 저주 의식 그 자체 불 신앙과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사람에게는 죽음은 참된 안식이며 더 높은 차원의 생명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도 생명에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에게 내려지는 죽음은 형벌보다도 악 정지의 성격이 있다고 봅니다. 죄의 성장을 막으며 악한 세력의 확장을 정지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요 대가라면 영원한 죽음인 지옥은 그에게는 필요치 않을 것이 아닙니까? 또 의인에게는 죽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죄인에게도 어떤 형태로든지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사람에게 죽음이 없다면 큰 일입니다. 네로나 히틀러 같은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무서운 일을 하게 될 것입니까? 악을 정지시키는 죽음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감옥이란 엄격한 뜻에서 죄의 댓가로 주어지는 고통의 처소는 아닙니다. 먼저는 죄를 제지시키어 한편으로는 일벌백계 주의로서 표본으로 몇 사람을 투옥시켜 다른 사람으로 경계를 삼을 수 있도록 하는데 뜻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다 투옥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 역시 악을 정지시키는 뜻이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실현하시는 방편의 하나로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더욱 중요한 교리는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고 사망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내다보며 이를 증거하고 있는 점입니다. 구약에서도 비록 막연하나마 죽음 다음의 세계를 믿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욥은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구속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참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욥 19 : 25; 시 73 : 24; 사 26 : 14 - 19……).

더러는 구약은 개인의 영생에 대하여서는 아는 바 없고 공동체 즉 민족의 영생을 말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구약 성경에도 개인의 생명이 영원한 것과 죽음 다음의 세계를 설명한 내용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성경 고린도전서 15장은 유명한 부활장입니다. 전장에 걸쳐서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없다면"이라고 하는 말이 8회나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또한 복음서가 증거 하는 내용에도 계속하여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믿었다고 쓰여있지 않고 그 확실한 증거 앞에서도 오히려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 경배하면서도 계속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을 증거함에 있어서 이 얼마나 사실적인 증거입니까? 그처럼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 어찌 자연스럽게 믿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의심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믿음을 줍니다.

본문대로 부활은 믿어도 되고 믿지 아니해도 되는 여유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또 먼 이야기도 아닙니다. 곧 나의 생명과 관련된 일입니다.

부활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어야만 나 자신의 부활도 있을 수 있으며 그의 부활에 연합되는 사건이 있고서야 나 자신의 생명도 뜻이 있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곧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먼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진실한 오늘날의 문제라는 점 그리고 가장 긴박한 문제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질문대로 부활이 없다면 "먹고 마시자 하리라", "우리가 제일 불쌍한 자니라" 부활이 없다면 하루 하루 먹는 음식은 독약을 먹는 셈이 됩니다. 사자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먹는 음식이 곧 사자밥입니다. 시한부 자살의 길을 가고 있는 셈입니다. 선한 일, 의로운 일, 고난의 감수, 겸손과 인내 그리고 순교 등은 참으로 헛된 일이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진실로 부활이 없다면 모든 가치관은 다 무너지며 의롭다, 진리다, 선이다, 하는 일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도덕이니 종교니 하는 것은 본문대로 큰 거짓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며 부활은 모든 의와 진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앙 즉 케르그마는 철저하게 부활에 근거합니다. 이것을 뺀다면 모두 허무하게 되며 다만 사회복음주의에 빠지고 실상은 큰 사기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핵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생명의 신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앗은 죽어야 살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신학자 샤르뎅은 진화론적인 방법을 신학에 도입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시도하였던 것을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있으며 지질권(Cosmosphere)에서 생명권(Biosphere), 정신권(noosphere) 그리고 그리스도권(Christosphere)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발전은 무한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권에까지 도달하면 완성된다고 말하면서 이를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무한의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신비로운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일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활 사건은 신비중 신비요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한 일이며 기적도 이상한 일도 아닌 마땅한 일일 뿐 입니다. 언젠가는 이 부활의 사건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부활사건이 사실인 이상 그 언젠가는 과학적으로도 만족할 만큼 증명할 때가 올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부활은 희생이 아닙니다. 옛 생명의 최선도 아닙니다. 다만 옛 생명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새 생명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몸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회복이나 희생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변화라고 기술한 곳도 많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차원이 다른 생명, 그리고 구체적인 몸과 신령한 현실적인 형체 이것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부활에 들어갈 때까지는 여전히 신비로운 사건이며 최소한 우리가 육체를 벗을 때까지는 의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진리입니다.

부활을 증명하는 성서적인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곧 사건을 사건대로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의 증거입니다. 눈으로 본 바요, 귀로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된 사건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건에 직접 접했던 사람들의 목격적인 증거요 사건대로의 경험적인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나타났던 주위에 있었던 실제의 반응입니다. 로마 나라를 비롯한 당시 여러 나라에까지 미친 영향이 산 증거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 성경적 증거입니다. 예언된 말씀 한구절 한구절이 응하여, 그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서 부활 사건은 있어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뺄 수 없는 증거는 부활의 증인들이 산 증거입니다. 가롯유다를 제외한 11제자가 다 순교하였으며 이 부활 사건을 본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초월했고 즐겨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 즉 순교적인 생과 순교적인 죽음, 이보다 중요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이기에 전 생명을 위탁하며 확실하기에 목숨을 걸고 전하며 그 사실을 위하여 죽은 것입니다. 살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확실한 믿음을 바로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카타콤에서 순교한 수십만 명의 기독교인의 죽음이 큰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중요한 증거를 뒤에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 사건으로의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나온 날이지만 신앙사건으로서의 부활절은 오순절이었다는 귀중한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으나 이 같은 육체적인 체험이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전 인격과 전 운명을 거는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보고도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이 수제자 베드로의 취한 태도였습니다. 결국은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그 속에서 심령의 부활이 될 때에 비로소 증인이 됩니다. 그간의 육체적인 체험들도 효력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내가 부활할 때까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내 몸이 죽고 부활할 때까지는 의심이 있을 것이며 내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 부활하는 체험을 하기까지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사건일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부활의 증거를 증거로 받게 되고 사실을 사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은 모든 부활 사건의 증인이요 부활내용의 증인은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증거 해줄 따름이요, 그 내용은 내가 체험하기까지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에 속한 신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세 가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서로 다른 부활사건을 혼돈하지 말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이것이 근본이요 기초가 됩니다. 둘째는 종말에 있을 결정적인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소망이 곧 실제적으로 신앙의 지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셋째는 현재 오늘 있는 현실적인 신령한 부활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첫째 부활만 주장하면 이성주의자가 되고, 둘째 부활만을 주장한다면 타계(他界) 주의자가 되며 셋째 부활만 주장하면 실존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부활을 다 알고 믿을 뿐 아니라 혼돈치 말고 또 치우치지 말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가르치며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인과 중심은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아담과 나의 관계는 유전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붙은 자에게 부활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실질적으로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빌 3 : 10) 고백했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까지 고백합니다. 이는 계속해서 오늘 부활의 능력을 힘입기 위함입니다. 루터는 이 때문에 신앙생활을 매일 세례(Daily Baptism)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믿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망에서 부활을, 죄인에 사죄와 용서를, 고통 중에서 영원한 약속을 믿는데 있는 것입니다. 매일 부활하기 위하여 매일 죽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 뿐인 생명은 인간이 아닙니다. 육체뿐일 때 그것을 동물이라고 부릅니다. 영 뿐일 때 천사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종합된 존재요,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육체가 된 인간 즉 동물화된 인간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는 죄 뿐인 사탄화된 인간입니다. 참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화된 인간으로 재창조된 인간을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참 인간이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종말적 부활이라고 합니다. 장차 있을 이 진실한 구체적인 부활을 소망하고 믿으면서 오늘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현실적으로 영적인 부활이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생명을 체험하면서 계속 부활의 능력 안에 살아갑니다.

승리의 노래를 들어보십시다. 영원한 승리의 노래를 부릅시다. 사망아! 너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이 영원한 승리의 노래가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승리의 노래(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은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중일전쟁 때에 중국군은 일본군에 쫓겨서 중경까지 들어가게 되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 때에 어떤 분이 말하기를 중국의 조상인 공자의 무덤이 무엇인가 잘못되었기에 패전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하였었는데 이런 생각이 모여서 마침내 옛 공자의 무덤을 파헤치게 되었답니다. 큰 무덤을 다 헤치고 보니 쪽박 만한 두개골 밖에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끝나고 만다면 군자이면 무엇하고 성현이면 무엇할 것입니까?

죽음 앞에 인생의 모습이란 참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사망은 모든 것의 의미를 다 빼앗아 갑니다. 모든 자랑을 다 헛된 것으로 돌립니다.

모든 아름다움도 다 빼앗고 맙니다. 다른 동물보다 인간이 나은 것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동물입니다. 이 때문에 공포에 떨며 불안해합니다. 동물은 이것을 모르기에 죽을 때 죽더라도 그저 평안합니다. 죽음을 아는 것뿐이고 하등의 해결이 없다면 인생은 차라리 이를 모르는 동물보다 나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못한 존재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알기만 하고 해결이 없다면 모르는 편이 더욱 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망은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망은 모든 것을 굴복시킵니다. 큰 위력을 가지고 호령합니다. 누구나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사망은 모든 활동을 정지시키고 모든 가치를 소멸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문맥대로 본다면 먼저는 죽음을 비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음부가 주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한다"고 말하며 죽음에서는 주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욥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정지이고 끝이 된다고 곳곳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은 귀한 것이며 장수를 복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살만큼 살고 늙어서 죽는 것을 결코 불행으로 설명하지 아니하였고 저주도 간주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늙어서 죽는 것은 자연한 일이며 마땅한 일로 설명하고 젊어서 죽는 일은 크게 불행한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저주로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사야 65장 20절에는 100세에 죽는 자가 아이 같겠다고 복된 날에는 모두가 장수하게 될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38장 12절에 의하면 젊어서 죽게 되는 일을 목자가 장막을 걷음같이 또는 직공이 베를 다 짜기 전에 틀에서 끊어 버리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임무를 다 끝내고 장막을 걷는 일은 매우 흐뭇한 일입니다. 그러나 일을 다 끝내기 전에 장막을 걷고 베를 다 짜기 전에 틀을 끊는다는 사실은 대단히 불행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수의 복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신비의 역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미지의 세계이며 끝내 시원한 해답을 들을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을 안식, 즉 휴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쉬게 하신다고 합니다. 힘들게 일한 사람에게 있어서 휴식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히브리서는 영원한 안식을 거듭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키는 안식일도 그 영원한 휴식의 그림자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옮기심"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타계로 옮기신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를 오직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으로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생명을 내신 자는 하나님이시요, 생명을 거두시는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결코 우연하던가 자연한 현상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셔서 이루어지는 일로 증거 합니다.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바라는 시간에 내가 생각하는 모양대로 죽는 것은 아니며 죽음에는 순서도 없고 질서도 없는 듯이 극히 모순되고 부조리하게 가는 일도 있는 듯이 보일 때도 있으나 우리가 성경적 진리에 의하여 반드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은 죄와의 관계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죄와 죽음이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음을 성경은 계속 증거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사망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본질적으로 죄와 사망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형벌로서 사망이 내려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죄의 댓가로 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자체를 형벌처럼 저주처럼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죽음이란 현상은 자연한 것입니다. 다만 이 죽음이 죽음 되게 된 것이 죄로 인한 것입니다. 죽음이란, 현상 자체가 죄의 댓가는 결코 아닙니다. 의인도 죄인도 다 같이 죽으며 신불신간에 죽고 영생 얻을 자나 지옥으로 떨어질 자에게도 죽음은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는 죄도 형벌도 저주도 아니고 그 죽음에 대한 공포한 저주 의식 그 자체 불 신앙과 죄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 믿음의 사람에게는 죽음은 참된 안식이며 더 높은 차원의 생명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도 생명에의 과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죄인에게 내려지는 죽음은 형벌보다도 악 정지의 성격이 있다고 봅니다. 죄의 성장을 막으며 악한 세력의 확장을 정지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죽음이 죄에 대한 형벌이요 대가라면 영원한 죽음인 지옥은 그에게는 필요치 않을 것이 아닙니까? 또 의인에게는 죽음이 없어야 할 것이며 죄인에게도 어떤 형태로든지 구별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한 사람에게 죽음이 없다면 큰 일입니다. 네로나 히틀러 같은 사람이 죽지 않는다면 얼마나 더 무서운 일을 하게 될 것입니까? 악을 정지시키는 죽음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감옥이란 엄격한 뜻에서 죄의 댓가로 주어지는 고통의 처소는 아닙니다. 먼저는 죄를 제지시키어 한편으로는 일벌백계 주의로서 표본으로 몇 사람을 투옥시켜 다른 사람으로 경계를 삼을 수 있도록 하는데 뜻이 있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다 투옥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 역시 악을 정지시키는 뜻이 있으며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고 실현하시는 방편의 하나로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더욱 중요한 교리는 죽음을 종말로 보지 않고 사망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의 세계를 내다보며 이를 증거하고 있는 점입니다. 구약에서도 비록 막연하나마 죽음 다음의 세계를 믿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욥은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구속자를 기다리고 있었고 참 생명의 세계가 있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욥 19 : 25; 시 73 : 24; 사 26 : 14 - 19……).

더러는 구약은 개인의 영생에 대하여서는 아는 바 없고 공동체 즉 민족의 영생을 말할 뿐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구약 성경에도 개인의 생명이 영원한 것과 죽음 다음의 세계를 설명한 내용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성경 고린도전서 15장은 유명한 부활장입니다. 전장에 걸쳐서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없다면"이라고 하는 말이 8회나 나타나고 있음을 봅니다. 또한 복음서가 증거 하는 내용에도 계속하여 "오히려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믿었다고 쓰여있지 않고 그 확실한 증거 앞에서도 오히려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뵙고 경배하면서도 계속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건을 증거함에 있어서 이 얼마나 사실적인 증거입니까? 그처럼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 어찌 자연스럽게 믿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의심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믿음을 줍니다.

본문대로 부활은 믿어도 되고 믿지 아니해도 되는 여유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또 먼 이야기도 아닙니다. 곧 나의 생명과 관련된 일입니다.

부활은 절대적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어야만 나 자신의 부활도 있을 수 있으며 그의 부활에 연합되는 사건이 있고서야 나 자신의 생명도 뜻이 있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먼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곧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추상적인 진리가 아니라 구체적이며 먼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진실한 오늘날의 문제라는 점 그리고 가장 긴박한 문제라는 점을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질문대로 부활이 없다면 "먹고 마시자 하리라", "우리가 제일 불쌍한 자니라" 부활이 없다면 하루 하루 먹는 음식은 독약을 먹는 셈이 됩니다. 사자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먹는 음식이 곧 사자밥입니다. 시한부 자살의 길을 가고 있는 셈입니다. 선한 일, 의로운 일, 고난의 감수, 겸손과 인내 그리고 순교 등은 참으로 헛된 일이며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진실로 부활이 없다면 모든 가치관은 다 무너지며 의롭다, 진리다, 선이다, 하는 일들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도덕이니 종교니 하는 것은 본문대로 큰 거짓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이며 부활은 모든 의와 진리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앙 즉 케르그마는 철저하게 부활에 근거합니다. 이것을 뺀다면 모두 허무하게 되며 다만 사회복음주의에 빠지고 실상은 큰 사기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은 신앙의 핵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신비로운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생명의 신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앗은 죽어야 살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합니다. 프랑스 신학자 샤르뎅은 진화론적인 방법을 신학에 도입하여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려고 시도하였던 것을 기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을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있으며 지질권(Cosmosphere)에서 생명권(Biosphere), 정신권(noosphere) 그리고 그리스도권(Christosphere)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발전은 무한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권에까지 도달하면 완성된다고 말하면서 이를 오메가 포인트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무한의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신비로운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당연한 일이며 자연스러운 일일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부활 사건은 신비중 신비요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연한 일이며 기적도 이상한 일도 아닌 마땅한 일일 뿐 입니다. 언젠가는 이 부활의 사건도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 때가 올 것입니다. 부활사건이 사실인 이상 그 언젠가는 과학적으로도 만족할 만큼 증명할 때가 올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부활은 희생이 아닙니다. 옛 생명의 최선도 아닙니다. 다만 옛 생명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새 생명입니다. 이것은 신령한 몸이라고 부릅니다. 단순한 회복이나 희생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변화라고 기술한 곳도 많습니다. 빌립보서 3장 21절에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차원이 다른 생명, 그리고 구체적인 몸과 신령한 현실적인 형체 이것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 부활에 들어갈 때까지는 여전히 신비로운 사건이며 최소한 우리가 육체를 벗을 때까지는 의심이 있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진리입니다.

부활을 증명하는 성서적인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곧 사건을 사건대로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들의 증거입니다. 눈으로 본 바요, 귀로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된 사건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건에 직접 접했던 사람들의 목격적인 증거요 사건대로의 경험적인 증거를 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이 사건으로 인하여 나타났던 주위에 있었던 실제의 반응입니다. 로마 나라를 비롯한 당시 여러 나라에까지 미친 영향이 산 증거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이 성경적 증거입니다. 예언된 말씀 한구절 한구절이 응하여, 그 예언된 말씀의 성취로서 부활 사건은 있어진 것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뺄 수 없는 증거는 부활의 증인들이 산 증거입니다. 가롯유다를 제외한 11제자가 다 순교하였으며 이 부활 사건을 본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초월했고 즐겨 순교하게 된 것입니다. 이 죽음, 즉 순교적인 생과 순교적인 죽음, 이보다 중요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이기에 전 생명을 위탁하며 확실하기에 목숨을 걸고 전하며 그 사실을 위하여 죽은 것입니다. 살기 위하여 죽음을 택하는 확실한 믿음을 바로 이해해야할 것입니다. 카타콤에서 순교한 수십만 명의 기독교인의 죽음이 큰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중요한 증거를 뒤에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 사건으로의 부활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나온 날이지만 신앙사건으로서의 부활절은 오순절이었다는 귀중한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으나 이 같은 육체적인 체험이 확실한 믿음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전 인격과 전 운명을 거는 증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보고도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간 것이 수제자 베드로의 취한 태도였습니다. 결국은 오순절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그 속에서 심령의 부활이 될 때에 비로소 증인이 됩니다. 그간의 육체적인 체험들도 효력을 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내가 부활할 때까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입니다. 내 몸이 죽고 부활할 때까지는 의심이 있을 것이며 내 심령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오늘 부활하는 체험을 하기까지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사건일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부활의 증거를 증거로 받게 되고 사실을 사실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들은 모든 부활 사건의 증인이요 부활내용의 증인은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이라고 증거 해줄 따름이요, 그 내용은 내가 체험하기까지는 여전히 미지의 세계에 속한 신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세 가지 차원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세 가지 서로 다른 부활사건을 혼돈하지 말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이것이 근본이요 기초가 됩니다. 둘째는 종말에 있을 결정적인 부활입니다. 이 부활에 대한 소망이 곧 실제적으로 신앙의 지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셋째는 현재 오늘 있는 현실적인 신령한 부활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첫째 부활만 주장하면 이성주의자가 되고, 둘째 부활만을 주장한다면 타계(他界) 주의자가 되며 셋째 부활만 주장하면 실존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부활을 다 알고 믿을 뿐 아니라 혼돈치 말고 또 치우치지 말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 가지를 모두 가르치며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인과 중심은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합니다. 아담과 나의 관계는 유전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붙은 자에게 부활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실질적으로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자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빌 3 : 10) 고백했으며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까지 고백합니다. 이는 계속해서 오늘 부활의 능력을 힘입기 위함입니다. 루터는 이 때문에 신앙생활을 매일 세례(Daily Baptism)라고 정의하였습니다. 믿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망에서 부활을, 죄인에 사죄와 용서를, 고통 중에서 영원한 약속을 믿는데 있는 것입니다. 매일 부활하기 위하여 매일 죽는 것이 신앙입니다.

영 뿐인 생명은 인간이 아닙니다. 육체뿐일 때 그것을 동물이라고 부릅니다. 영 뿐일 때 천사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영과 육이 종합된 존재요, 구체적인 존재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육체가 된 인간 즉 동물화된 인간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이는 죄 뿐인 사탄화된 인간입니다. 참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이제 그리스도화된 인간으로 재창조된 인간을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참 인간이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종말적 부활이라고 합니다. 장차 있을 이 진실한 구체적인 부활을 소망하고 믿으면서 오늘의 모든 역경을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현실적으로 영적인 부활이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생명을 체험하면서 계속 부활의 능력 안에 살아갑니다.

승리의 노래를 들어보십시다. 영원한 승리의 노래를 부릅시다. 사망아! 너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우리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이 영원한 승리의 노래가 그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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