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누가복음 2장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기독교의 믿음을 가르쳐서 몇 가지의 말로 특징지어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상 신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도 신앙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나 역사의 흐름과 그 변화의 원리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하나의 큰 신앙인 것입니다. 역사는 반드시 변증법적으로 변하고 발전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봉건주의 사회는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로, 자본주의 사회는 반드시 사회주의 사회로 변한다고 믿고 있으며 다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로 변하고야 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발전 과정을 알고서 이를 위해서 투쟁하는 자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들은 그들대로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돈이 있는 자는 돈을,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을, 힘이 있는 자는 힘을, 젊음이 있는 자는 젊음을 믿고 있으며 지혜가 있는 자는 지혜를,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신앙은 그러한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을 특징 지울 수 있는 몇 가지 용어를 살펴보면 첫째로 공동체적인 신앙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이나 미련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백하여 온 교회적인 신앙 고백을 나도 같이 고백하는 공동체적인 신앙이며 그 내용이 성서적인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이를 응답적인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바른 응답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신앙 자체를 하나님께로서의 선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이요 동일한 고백적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순교적 신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뜻은 기독교의 신앙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기독교적 신앙은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적 신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부활을 믿기에 웃으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은 현재 살아 있다고 해도 역시 순교적으로 사는 것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에 매이지 않고, 결코 사망에 굴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순교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기독교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이는 종말적인 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영원히 소망적이요 무한히 미래적이며 절대화된 신앙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문제 아니며 삶과 죽음도 문제가 안됩니다. 다만 영원한 생명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로써 기다림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결코 단순한 기대나 감상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관적 감정이나 소원이나 욕망을 뜻하지 않고 막연한 이상이나 무지개의 꿈도 아니며 컴퓨터의 예언도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의 기다림의 신앙은 세 가지에 근거한 것입니다. 먼저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Reality). 특히 성서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진리는 언제나 역사적이며 사건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인간의 심리나 특히 종교심, 혹은 종교적 본능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깨끗한 사실에 근거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둘째로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욕망이나 본능적 필요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인 약속, 즉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고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또한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그것을 기다리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약속의 성취(Fulfilmemt)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무지개처럼 항상 앞에 있고 무한히 미래적인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이며 현재적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확실한 구체적 체험에 근거하여 다시 보다 높고 보다 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취됨이 없는 약속, 실현성 없는 기대, 사실이 없는 기다림은 헛된 것으로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벌써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를 체험하면서 다시 주시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곧 참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것을 증거 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확실함과 정확함을 구구 절절히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예언들, 그 모든 약속들이 그처럼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면서 또한 우리의 현실 생활 안에서 또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그 말씀들이 분명하게 성취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이를 근거로 하여서 다시 멀리 보여 주시는 약속도 확실하게 믿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두 용어를 찾게 됩니다. 그 하나는 25절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라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줄이어 "기다림"과 "보았다"는 두 글입니다. 기다림은 미래적인 뜻이요 보았다는 것은 현재적인 뜻입니다. 전자는 소망적이요, 후자는 현실적인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가령 기다림에 봄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약속에 성취가 없다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은 그 약속을 기다렸고 그 약속이 성취됨을 봄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을 가졌습니다. 기다리던 바가 성취되어서 그것을 현재에서 누릴 수 있을 때 바로 행복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편 그 보았다는 현재적 사건 속에 다시 미래적 약속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이겠습니까? 약속의 성취는 다시 새로운 미래적 약속을 포함하고 있으며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이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기뻐합니다.
동시에 이 아기 예수 안에 감추인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의 빛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영원히 소망적이요 미래적인 귀한 진리의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문맥대로는 그는 너무나 감격하여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극치의 행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적 기다림의 신앙의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를 믿고 다시 그 성취에 근거한 보다 높고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며 새롭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신적인 세계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적이요 미래적인 것만 아니라 현실적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이란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은 수 없이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속박에서 자유를 꿈꾸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며, 굶주리면서 먹을 것을 막연하게나마 기다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즉 시련 속에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기다린다고 그에게 다 "보는"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시므온에게 이 같은 영광이 주어진 이유는 간단한 말로 기록되었으나, 여기에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셉이 의인이라고 증거된 것같이 본문의 시므온도 역시 경건하고 의인이었다고 증거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그 경건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사도행전 10장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종교생활을 종합한 한마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경건이요, 그의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계가 곧 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곧 경건한 의인 것입니다. 즉 시므온은 경건과 의를 가지고 위로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수 있는 참 경건과 의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데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다림의 신앙을 성령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에 머물지 않도록 그리고 성취됨을 알도록 현재성을 믿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의 영이 되셔서 그리스도와 생명적 관련을 맺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다림의 방향을 지시하여 주십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고 바른 길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며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도록 인도하시며 현실적, 구체적,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 주십니다. 낙심되지 아니하며 지치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쓰러지지 않도록 도우시며 꼭 만나도록 힘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를 듣게 되고 만나게 되고 그때까지 견디게 되었습니다. 약속이 성취되어 자기 안에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기독교의 기다림의 믿음은 그 내용에 있어서 세가지였다고 봅니다. 먼저는 초림입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하였고 온 이스라엘이 기다렸듯이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시는 그 임함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심 교리입니다. 오시리라 예언하셨고 예언대로 오신 것입니다. 이점에서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그 성취가 있었습니다.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본대로 오리라고"하셨는데 그 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이 초대교회의 신앙의 중심을 이룬 것이 사실입니다. 즉 종말적인 그리스도, 심판주로써 역사의 끝에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초조하고 긴박하게 기다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역사의 종말과 종말적 구원을 기다리는 신앙이 오늘도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환난과 재난과 전쟁의 소식을 들을 때 이때가 아닌가고 그 재림의 그리스도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의 현실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약속과 성령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눅 24:49, 행 1:4). 성령의 임함과 그의 인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시가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며 말씀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며 모여서 주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 기다리는 교회가 먼저 있고서 성령의 임함과 지시를 받은 후 비로소 흩어지는 교회로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리고 계속적으로 성령과 말씀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진 현실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길을 분명히 안 후에는 그것을 위하여 순교적인 희생을 지불해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초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으나 사실상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는 이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는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요 1:10, 11). 기다렸건만 어찌하여 영접할 수 없었습니까? 그 원인은 요한복음 5장 42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신 것 같이 그들의 의와 경건이 거짓이었고 의식과 형식 뿐이요, 진정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으며 정욕에 쌓여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부함과 교만에 차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도저히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보좌가 무너지지 않는 동안에는 설사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해도 따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젊은 율법사와 같이). 자기를 완전히 부정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따를 수도 없으며 만일 자기를 부정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자가 있다면 그 그리스도는 자기 환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뜻에서 참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은 기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과부된 여인과 술주정뱅이 남편을 둔 여인이 앉아서 서로 자기 신세 타령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기 자기가 더욱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과부된 분의 말이 "나는 기다려 볼 것이 없는 불행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술주정뱅이라고 해도 행여나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또한 그 기다림에 합당한 오늘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곧 미래를 현재로 사는 생이며 오늘에서 내일을 사는 생활입니다. 그 기다림의 내용에 오늘의 나를 비추어 보며 사는 준비의 생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기다리면서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증거하였으며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고 긍지에 찬 앞날을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수치를 감당하셨고 그날의 큰 자유를 위하여 오늘의 자유를 스스로 버렸으며 그 날의 자랑을 위하여 오늘의 괴로움을 기쁨으로 참아 이긴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며 그날의 의로운 심판을 믿고 오늘의 어떤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도 비굴해지거나 낙심됨이 없이 굳게 서서 싸워야 하겠습니다. 그 날이 결코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과 말씀의 인도를 기다리며 현실에서도 부르시는 음성과 지시를 받아서 현재적 성취를 확실히 믿고 여기에서 썩어지는 밀 알이 되어지며 다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추수를 확실하게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믿음을 새롭게 하십시다. 현실 안에서 성취를 보면서 다시 새 약속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앉아서가 아니라 서서 일하며 싸우면서 기다리십시다. 주께서 반드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 안에서 위로해 주시며 그리고 종말적인 위로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를 믿습니다. ------아멘------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누가복음 2장 22~23절)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기독교의 믿음을 가르쳐서 몇 가지의 말로 특징지어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상 신앙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무신론자나, 공산주의자도 신앙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고 하나 역사의 흐름과 그 변화의 원리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유물론적 역사관은 하나의 큰 신앙인 것입니다. 역사는 반드시 변증법적으로 변하고 발전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봉건주의 사회는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로, 자본주의 사회는 반드시 사회주의 사회로 변한다고 믿고 있으며 다시 사회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로 변하고야 만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발전 과정을 알고서 이를 위해서 투쟁하는 자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들은 그들대로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돈이 있는 자는 돈을,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을, 힘이 있는 자는 힘을, 젊음이 있는 자는 젊음을 믿고 있으며 지혜가 있는 자는 지혜를,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한 의미에서 믿음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신앙은 그러한 신앙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을 특징 지울 수 있는 몇 가지 용어를 살펴보면 첫째로 공동체적인 신앙입니다. 개인적인 신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이나 미련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고백하여 온 교회적인 신앙 고백을 나도 같이 고백하는 공동체적인 신앙이며 그 내용이 성서적인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이를 응답적인 신앙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바른 응답을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 신앙 자체를 하나님께로서의 선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동체적이요 동일한 고백적 신앙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순교적 신앙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뜻은 기독교의 신앙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부터 기독교적 신앙은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기독교적 신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증인은 곧 순교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부활을 믿기에 웃으면서 죽어 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은 현재 살아 있다고 해도 역시 순교적으로 사는 것에 그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에 매이지 않고, 결코 사망에 굴하지 않습니다. 이래서 순교적인 신앙이라고 합니다. 셋째로 기독교의 신앙은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이는 종말적인 신앙에 기초한 것입니다. 영원히 소망적이요 무한히 미래적이며 절대화된 신앙입니다. 성공과 실패가 문제 아니며 삶과 죽음도 문제가 안됩니다. 다만 영원한 생명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로써 기다림의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림은 결코 단순한 기대나 감상만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관적 감정이나 소원이나 욕망을 뜻하지 않고 막연한 이상이나 무지개의 꿈도 아니며 컴퓨터의 예언도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의 기다림의 신앙은 세 가지에 근거한 것입니다. 먼저는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Reality). 특히 성서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진리는 언제나 역사적이며 사건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인간의 심리나 특히 종교심, 혹은 종교적 본능에 근거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깨끗한 사실에 근거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둘째로는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관적인 욕망이나 본능적 필요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객관적 사실인 약속, 즉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구원의 약속에 근거하고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적인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모세에게, 또한 다윗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그것을 기다리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셋째는 약속의 성취(Fulfilmemt)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 약속은 무지개처럼 항상 앞에 있고 무한히 미래적인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입니다. 현실적이며 현재적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역사 안에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확실한 구체적 체험에 근거하여 다시 보다 높고 보다 먼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성취됨이 없는 약속, 실현성 없는 기대, 사실이 없는 기다림은 헛된 것으로 결코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벌써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이를 체험하면서 다시 주시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 곧 참 믿음인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로 이것을 증거 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과 성취의 확실함과 정확함을 구구 절절히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예언들, 그 모든 약속들이 그처럼 정확하게 성취된 것을 보면서 또한 우리의 현실 생활 안에서 또는 우리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우리의 매일의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그 말씀들이 분명하게 성취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이를 근거로 하여서 다시 멀리 보여 주시는 약속도 확실하게 믿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중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두 용어를 찾게 됩니다. 그 하나는 25절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아오니"라고 하는 말입니다. 다시 줄이어 "기다림"과 "보았다"는 두 글입니다. 기다림은 미래적인 뜻이요 보았다는 것은 현재적인 뜻입니다. 전자는 소망적이요, 후자는 현실적인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가령 기다림에 봄이 없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약속에 성취가 없다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은 그 약속을 기다렸고 그 약속이 성취됨을 봄으로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을 가졌습니다. 기다리던 바가 성취되어서 그것을 현재에서 누릴 수 있을 때 바로 행복의 극치가 이루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편 그 보았다는 현재적 사건 속에 다시 미래적 약속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 얼마나 절망적인 일이겠습니까? 약속의 성취는 다시 새로운 미래적 약속을 포함하고 있으며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기다림이 이루어져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기뻐합니다.
동시에 이 아기 예수 안에 감추인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의 빛을 바라볼 수 있었으며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영원히 소망적이요 미래적인 귀한 진리의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문맥대로는 그는 너무나 감격하여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극치의 행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기독교적 기다림의 신앙의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를 믿고 다시 그 성취에 근거한 보다 높고 영원한 약속을 바라보며 새롭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정신적인 세계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적이요 미래적인 것만 아니라 현실적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이란 사람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과 그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은 수 없이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속박에서 자유를 꿈꾸지 않는 자가 어디 있으며, 굶주리면서 먹을 것을 막연하게나마 기다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즉 시련 속에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기다린다고 그에게 다 "보는"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직 시므온에게 이 같은 영광이 주어진 이유는 간단한 말로 기록되었으나, 여기에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셉이 의인이라고 증거된 것같이 본문의 시므온도 역시 경건하고 의인이었다고 증거 되었습니다. 고넬료는 그 경건이 하나님의 기억하신 바 되었다고 사도행전 10장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종교생활을 종합한 한마디 용어가 있다면 그것은 곧 경건이요, 그의 사회생활과 종교생활을 연결하는 중요한 관계가 곧 의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가 곧 경건한 의인 것입니다. 즉 시므온은 경건과 의를 가지고 위로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수 있는 참 경건과 의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는데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기다림의 신앙을 성령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그의 기다림에 머물지 않도록 그리고 성취됨을 알도록 현재성을 믿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시며 그리스도의 영이 되셔서 그리스도와 생명적 관련을 맺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기다림의 방향을 지시하여 주십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시고 바른 길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며 좀더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알도록 인도하시며 현실적, 구체적, 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채워 주십니다. 낙심되지 아니하며 지치지 않도록 우리를 격려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쓰러지지 않도록 도우시며 꼭 만나도록 힘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인도로 그리스도를 듣게 되고 만나게 되고 그때까지 견디게 되었습니다. 약속이 성취되어 자기 안에서 영광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기독교의 기다림의 믿음은 그 내용에 있어서 세가지였다고 봅니다. 먼저는 초림입니다. 구약성경이 예언하였고 온 이스라엘이 기다렸듯이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시는 그 임함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심 교리입니다. 오시리라 예언하셨고 예언대로 오신 것입니다. 이점에서 기다림이 있는가 하면 그 성취가 있었습니다.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또한 중요한 것입니다. 둘째는 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본대로 오리라고"하셨는데 그 재림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이 초대교회의 신앙의 중심을 이룬 것이 사실입니다. 즉 종말적인 그리스도, 심판주로써 역사의 끝에 권능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초조하고 긴박하게 기다렸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 역사의 종말과 종말적 구원을 기다리는 신앙이 오늘도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환난과 재난과 전쟁의 소식을 들을 때 이때가 아닌가고 그 재림의 그리스도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의 현실을 이기는 힘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약속과 성령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눅 24:49, 행 1:4). 성령의 임함과 그의 인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시가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으며 말씀의 허락 없이는 아무 일도 시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며 모여서 주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이는 교회, 기다리는 교회가 먼저 있고서 성령의 임함과 지시를 받은 후 비로소 흩어지는 교회로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리고 계속적으로 성령과 말씀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어진 현실을 통하여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그리스도의 길을 분명히 안 후에는 그것을 위하여 순교적인 희생을 지불해 나아가는 것이 기독교인입니다.
초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으나 사실상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에는 이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못했으며 심지어는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요 1:10, 11). 기다렸건만 어찌하여 영접할 수 없었습니까? 그 원인은 요한복음 5장 42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신 것 같이 그들의 의와 경건이 거짓이었고 의식과 형식 뿐이요, 진정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으며 정욕에 쌓여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볼 수 없고 부함과 교만에 차 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도저히 알아볼 수는 없습니다. 자기라고 하는 보좌가 무너지지 않는 동안에는 설사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해도 따를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젊은 율법사와 같이). 자기를 완전히 부정함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알 수도 따를 수도 없으며 만일 자기를 부정함이 없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자가 있다면 그 그리스도는 자기 환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지 진정한 뜻에서 참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것은 기다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과부된 여인과 술주정뱅이 남편을 둔 여인이 앉아서 서로 자기 신세 타령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각기 자기가 더욱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과부된 분의 말이 "나는 기다려 볼 것이 없는 불행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술주정뱅이라고 해도 행여나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큰 행복입니다. 또한 그 기다림에 합당한 오늘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곧 미래를 현재로 사는 생이며 오늘에서 내일을 사는 생활입니다. 그 기다림의 내용에 오늘의 나를 비추어 보며 사는 준비의 생은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기다리면서 "내 앞에 생명의 면류관"이 있다고 증거하였으며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 자랑이 되리라"고 긍지에 찬 앞날을 바라보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의 수치를 감당하셨고 그날의 큰 자유를 위하여 오늘의 자유를 스스로 버렸으며 그 날의 자랑을 위하여 오늘의 괴로움을 기쁨으로 참아 이긴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재림의 주를 기다리며 그날의 의로운 심판을 믿고 오늘의 어떤 부조리와 모순 속에서도 비굴해지거나 낙심됨이 없이 굳게 서서 싸워야 하겠습니다. 그 날이 결코 부끄러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성령과 말씀의 인도를 기다리며 현실에서도 부르시는 음성과 지시를 받아서 현재적 성취를 확실히 믿고 여기에서 썩어지는 밀 알이 되어지며 다시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추수를 확실하게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의 믿음을 새롭게 하십시다. 현실 안에서 성취를 보면서 다시 새 약속을 믿고 기다리십시다. 앉아서가 아니라 서서 일하며 싸우면서 기다리십시다. 주께서 반드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역사 안에서 위로해 주시며 그리고 종말적인 위로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를 믿습니다. ------아멘------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았다는 죽은 자(요한계시록 3장 1~6절) (0) | 2024.06.24 |
---|---|
멀찍이 쫓아가는 사람(마태복음 26장 57~58절, 69~75절) (0) | 2024.06.24 |
이 사람을 보라(요한복음 19장 1~12절) (0) | 2024.06.24 |
요나의 고민(요나 4:1, 9-11) (0) | 2024.06.24 |
모든 것을 다스리라(창세기 1:26-31) (0) | 2024.06.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