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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요한복음 19장 1~12절)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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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요한복음 19장 1~12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가 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현대에 와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하나는 인간부재(人間不在)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옛 글에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다만 사람 인(人)자 다섯만 써서 보내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글을 받은 친구는 그 뜻을 해석할 수 없어서 훌륭한 스승에게 가서 물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해석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같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고.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사람은 동물과 신(神)사이의 존재로 생각해 왔고 이 위치에 따라서 인간 가치와 도덕을 세워갔습니다.

사람은 동물 중 포유류 동물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동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이 될 수는 없으면서도 인간은 계속 인간 이상의 신이고자 하는 이상을 바라며 사는 정신적 동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언어를 가진 동물이라고도 했으며 파스칼은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 하여 인간의 생각하는 면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였습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경제동물 또는 섹스에니멀(Sex animal)이란 말도 들립니다. 이성을 무던히 좋아하는 동물이라고까지 말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모처럼 만들어 놓은 문화를 다 짓밟고서 동물이 되었고 또 동물을 부러워하며 스스로 가치 절하를 시켜서 마침내 동물 중에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추잡하고 불쌍한 동물로 타락해 버린 감이 있습니다. 요즈음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질주하는 남녀 청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스트리킹의 기사를 신기하기라도 한 듯이 심심지 않게 신문에 내고 있으며 이를 보고 웃기도 하고 이마살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너무나 세상사가 답답하니 그렇게라도 해 보자는 것입니까? 어떤 스트리커에게 물었더니 "신문에 한번 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쩌자는 것입니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디까지 인간이 인간됨을 평가해야 합니까?

사실상 이처럼 타락되고 변질된 인간을 추리해서는 도저히 인간의 본래성을 알 길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참 인간의 모델을 찾을 길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비로소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지러지고 이질화된 오늘날의 인간을 보고서는 인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다른 길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 형상을 가지셨습니다(Double image). 또한 이중 계시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이며 동시에 이 천년동안 기독교 교회가 고백하여 온 신앙의 내용이요 중심입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의 계시이며 참 인간의 계시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심으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고 능력도 지혜도 알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알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의 본래성,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사는 길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인가를 분명하게 또한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참 인간의 모습이며 이상적 인간의 표본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로마 총독 빌라도가 생사의 재판권을 가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군중 앞에 내세워 소개하기를 "보라 이 사람이로다"(Behold this Man)이 사람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현대는 그 사람이 가진 바의 그 무엇과 그 사람 자체를 동일시(Identify)하는 큰 잘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자는 높은 가치로 평가되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는 싸구려 인간으로 보아 버리려는 모순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시세로의 철학으로 볼 때는 승리만이 진리입니다. 강자가 의인이었습니다. 이제 죄인 아닌 죄인으로, 그리고 약자 아닌 약자로 끌려와서 초라하게 서 있는 그리스도를 빌라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눈에 보여진 예수는 가진 바 없는 가난한 사람이요, 더구나 그의 손에 큰 검이 들려진 용사도 아니며 그의 가슴에 훈장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외형적 위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수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예수는 악한 일을 한 것이 없이 오히려 전생을 기울여서 수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쳤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며 봉사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이처럼 끌려와서 고역을 당하며 재판장에서야 한다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며 더욱 더 알 수 없는 것은 빌라도가 듣고 알기로는 그리스도는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쳤고, 갖가지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는 분이며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강론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이 재판장에서는 그 간사한 제사장들의 음모와 거짓된 고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분명히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는 침묵만을 지키실 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이대로 말이 없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임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빌라도가 예수께서 무슨 말이라도 하면 이를 참작해서 놓아 주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이 점을 빌라도는 알 수 없었습니다. 분하여 하고 억울해 하며 슬퍼하면서 갖은 말로서 자기의 결백을 변명해야할 사람이 묵묵히 침묵을 지킬 때 그 뜻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사실에 있어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존경할 수 밖에 없었고 기이히 여겼으며 또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그는 외쳤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바리새 교인들과 서기관들은 공모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이미 결정을 보았던 것입니다. 왜 그들은 죄 없는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하였습니까? 모름지기 그 이유는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해 주는 대로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죄 중에서 시기란 가장 더러운 죄라고 생각합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그 마음 전부를 흐리게 합니다. 시기하는 마음 그 밑바닥에는 반드시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단 시기에 붙잡히게 되면 무슨 판단이나 바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때에 시간을 놓쳐서 좀 늦게 들어서게 되면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에 나보다 더 늦은 사람이 뒤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반갑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죄인 앞에서는 죄인인 나도 의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 앞에서의 죄인은 더욱 더 악한 죄인으로 노출되게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동안에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큰 죄인이며 외식자이며 위선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기 위치를 고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를 죽이되 그들은 로마 군인의 손을 빌어서 죽이려 했습니다. 물론 로마 나라가 유대 나라를 침략하고 그 나라의 자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사형 권만은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이유가 있었으나 그런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저들 유대인들은 저들이 죽여야할 사람이라고 판단되는 자는 저희들끼리 죽여버리고 총독에게는 보고하지 않고 숨겨 버리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바로 그 예가 됩니다.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긴 것은 그 속에 또 다른 간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의인이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심사며 또한 예수를 메시아로 알고 따르는 군중들의 원망을 직접 듣지 않으려는 속셈이였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리스도를 넘겨서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미워했고, 시기한 나머지 그들 자신도 이미 율법을 스스로 범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에 이방인의 법정에 들어간 것이 잘못이며 유대 법으로는 증인을 세우고 증인이 먼저 돌을 들어 치면 온 군중이 뒤이어 돌로 쳐죽이는 사형법은 있으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율법의 법도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이 십자가의 사형법을 주장한 것은 그들대로도 잘못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노라"고 외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죄요, 간악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 이처럼 잔인하고 간사하고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인 고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빌라도의 형편은 더욱 가증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무죄함을 알고 있었고 제사장이 시기하여 체포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가지고 정정당당하게 정의를 행사하지 못하고 자기의 지위가 흔들릴세라 이 일에만 신경을 쓰다가 마침내 불의의 재판을 하게 됩니다. 그는 쓸데없는 정치적 타협안을 내세워 봅니다. "너희 법이 있으니 너희 법대로 하라."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기도 하고 죄인 아닌 자를 죄인으로 일단 간주하기도 하고 유월절 명절에 있는 특사의 혜택을 그리스도께 입혀서 그리스도를 놓아 주려고도 해봅니다.

그리고 이것들 위에 그는 죄 없는 자를 흠뻑 때려 줌으로 고소자의 마음을 만족 시켜보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습니다. 가시관을 씌워서 피 흘리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임으로 동정을 사서 군중 속에서 그리스도의 무죄를 외치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실패할 때에 그는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다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 비겁한 행동을 그리스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생각컨대 더욱 섭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그리고 병고침 받은 수 많은 사람들, 또한 죽었다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베다니 나사로 같은 사람이 어찌하여 이 법정에 나와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무죄를 말해 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같은 몰인정한 세대에 홀로 서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이 없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의인의 침묵이었습니다. 원래 죄인이 말이 많은 것이며 거짓말은 설명이 길고 궤변은 그 논리가 장황한 법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리는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며 의는 언제나 담담한 것입니다. 의인의 침묵 속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의 죄와 빌라도의 비겁함을 다 아시지만 그는 의인이기에 말이 없었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이기에 변명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랑하시기에 더욱 말이 없었다고 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는 바로 그 군인들을 사랑하셨으며 예수를 파는 가롯 유다까지라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말이 없었습니다.

상황의 여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와 불쌍히 여기는 자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참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 오직 세 가지만을 생각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문제의 해결을 다 보았었다고 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즉 기도로서 문제의 해결을 하였습니다. 참 사람은 사건을 사람에게 물어 해결보지 않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밤새 기도하시어 문제 해결의 응답을 받으시고 이제 이 법정에 선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실 때 체포되시는 순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생각하셨고, 또 "이렇게 되지 아니하면 이 일이 이루리라 하신 성경 말씀이 어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오늘 여기서 나를 통하여 성취시키고저 함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이루는 생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만민을 사랑하심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참 사랑은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를 위탁하고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나를 통하여 이루고저 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대신 죽으려는 희생 안에서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인간의 삶의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초연하셨고 담대하였으며 용감 하셨습니다. 승승장구의 위세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빌라도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이기셨고 믿음으로 이겼으며 소망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로서 그 승리를 확증하신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현실, 부조리한 세대, 모순투성이의 사회 안에서 참 인간의 초연한 담력과 승리의 생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떠들며 세상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사람에게 물으며 실망하고 그 마음에 번민이 있고 그 입에 한숨이 있는 그러한 불신앙적 인간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 사람, 이 세대가 참으로 요구하는 참 사람을 바로 보십시다. 그를 믿고, 그를 따르고, 그를 배웁시다.

그를 알 때 참 사람 나를 알게 되고 그를 사랑할 때 내 안에 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그를 순종할 때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요한복음 19장 1~12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가 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현대에 와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하나는 인간부재(人間不在)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옛 글에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아무 말도 없이 다만 사람 인(人)자 다섯만 써서 보내었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글을 받은 친구는 그 뜻을 해석할 수 없어서 훌륭한 스승에게 가서 물어보았더니 다음과 같이 해석해 주었다고 합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같은 사람이라야 사람이지라고.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옛날에는 사람은 동물과 신(神)사이의 존재로 생각해 왔고 이 위치에 따라서 인간 가치와 도덕을 세워갔습니다.

사람은 동물 중 포유류 동물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결코 동물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다고 신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이 될 수는 없으면서도 인간은 계속 인간 이상의 신이고자 하는 이상을 바라며 사는 정신적 동물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언어를 가진 동물이라고도 했으며 파스칼은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라 하여 인간의 생각하는 면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였습니다. 요즈음에 와서는 경제동물 또는 섹스에니멀(Sex animal)이란 말도 들립니다. 이성을 무던히 좋아하는 동물이라고까지 말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모처럼 만들어 놓은 문화를 다 짓밟고서 동물이 되었고 또 동물을 부러워하며 스스로 가치 절하를 시켜서 마침내 동물 중에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추잡하고 불쌍한 동물로 타락해 버린 감이 있습니다. 요즈음 벌거벗은 몸으로 거리를 질주하는 남녀 청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 스트리킹의 기사를 신기하기라도 한 듯이 심심지 않게 신문에 내고 있으며 이를 보고 웃기도 하고 이마살을 찌푸리기도 합니다. 너무나 세상사가 답답하니 그렇게라도 해 보자는 것입니까? 어떤 스트리커에게 물었더니 "신문에 한번 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어쩌자는 것입니까?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디까지 인간이 인간됨을 평가해야 합니까?

사실상 이처럼 타락되고 변질된 인간을 추리해서는 도저히 인간의 본래성을 알 길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참 인간의 모델을 찾을 길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다시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성경 안에서 비로소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지러지고 이질화된 오늘날의 인간을 보고서는 인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다른 길로 인간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중 형상을 가지셨습니다(Double image). 또한 이중 계시의 존재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이며 동시에 이 천년동안 기독교 교회가 고백하여 온 신앙의 내용이요 중심입니다.

예수는 참 하나님의 계시이며 참 인간의 계시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참 하나님이심으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알게 되고 능력도 지혜도 알 수 있으며 특히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도 알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의 본래성, 인간의 가능성, 인간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어떻게 사는 길이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인가를 분명하게 또한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참 인간의 모습이며 이상적 인간의 표본입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로마 총독 빌라도가 생사의 재판권을 가진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은 군중 앞에 내세워 소개하기를 "보라 이 사람이로다"(Behold this Man)이 사람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 현대는 그 사람이 가진 바의 그 무엇과 그 사람 자체를 동일시(Identify)하는 큰 잘못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진 자는 높은 가치로 평가되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자는 싸구려 인간으로 보아 버리려는 모순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은 있었습니다. 시세로의 철학으로 볼 때는 승리만이 진리입니다. 강자가 의인이었습니다. 이제 죄인 아닌 죄인으로, 그리고 약자 아닌 약자로 끌려와서 초라하게 서 있는 그리스도를 빌라도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눈에 보여진 예수는 가진 바 없는 가난한 사람이요, 더구나 그의 손에 큰 검이 들려진 용사도 아니며 그의 가슴에 훈장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외형적 위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수 많은 사람이 그를 존경하고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으며 뿐만 아니라 예수는 악한 일을 한 것이 없이 오히려 전생을 기울여서 수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쳤고 배고픈 사람을 먹이며 봉사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이처럼 끌려와서 고역을 당하며 재판장에서야 한다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며 더욱 더 알 수 없는 것은 빌라도가 듣고 알기로는 그리스도는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쳤고, 갖가지 초자연적 능력을 행하는 분이며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리를 강론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이 재판장에서는 그 간사한 제사장들의 음모와 거짓된 고소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분명히 죄 없는 그리스도께서는 침묵만을 지키실 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이대로 말이 없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임을 알고 계십니다. 또한 빌라도가 예수께서 무슨 말이라도 하면 이를 참작해서 놓아 주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계신 것 같은데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이 점을 빌라도는 알 수 없었습니다. 분하여 하고 억울해 하며 슬퍼하면서 갖은 말로서 자기의 결백을 변명해야할 사람이 묵묵히 침묵을 지킬 때 그 뜻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사실에 있어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존경할 수 밖에 없었고 기이히 여겼으며 또 두려워했습니다. 이제 그는 외쳤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인 제사장과 바리새 교인들과 서기관들은 공모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이미 결정을 보았던 것입니다. 왜 그들은 죄 없는 그리스도를 죽여야만 하였습니까? 모름지기 그 이유는 성경이 여러 곳에서 증거해 주는 대로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죄 중에서 시기란 가장 더러운 죄라고 생각합니다. 시기하는 마음은 그 마음 전부를 흐리게 합니다. 시기하는 마음 그 밑바닥에는 반드시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일단 시기에 붙잡히게 되면 무슨 판단이나 바르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기들의 죄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모임에 참석하는 때에 시간을 놓쳐서 좀 늦게 들어서게 되면 좀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 때에 나보다 더 늦은 사람이 뒤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반갑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죄인 앞에서는 죄인인 나도 의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 앞에서의 죄인은 더욱 더 악한 죄인으로 노출되게 마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동안에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큰 죄인이며 외식자이며 위선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기 위치를 고수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를 죽이되 그들은 로마 군인의 손을 빌어서 죽이려 했습니다. 물론 로마 나라가 유대 나라를 침략하고 그 나라의 자주권을 인정하면서도 사형 권만은 그들에게 주지 않았다는 이유가 있었으나 그런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저들 유대인들은 저들이 죽여야할 사람이라고 판단되는 자는 저희들끼리 죽여버리고 총독에게는 보고하지 않고 숨겨 버리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바로 그 예가 됩니다.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를 빌라도에게 넘긴 것은 그 속에 또 다른 간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의인이 피를 흘리지 않겠다는 심사며 또한 예수를 메시아로 알고 따르는 군중들의 원망을 직접 듣지 않으려는 속셈이였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그리스도를 넘겨서 그로 하여금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미워했고, 시기한 나머지 그들 자신도 이미 율법을 스스로 범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절기에 이방인의 법정에 들어간 것이 잘못이며 유대 법으로는 증인을 세우고 증인이 먼저 돌을 들어 치면 온 군중이 뒤이어 돌로 쳐죽이는 사형법은 있으나,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은 율법의 법도가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이 십자가의 사형법을 주장한 것은 그들대로도 잘못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노라"고 외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큰 죄요, 간악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 이처럼 잔인하고 간사하고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계속적인 고소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빌라도의 형편은 더욱 가증한 데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무죄함을 알고 있었고 제사장이 시기하여 체포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가지고 정정당당하게 정의를 행사하지 못하고 자기의 지위가 흔들릴세라 이 일에만 신경을 쓰다가 마침내 불의의 재판을 하게 됩니다. 그는 쓸데없는 정치적 타협안을 내세워 봅니다. "너희 법이 있으니 너희 법대로 하라."고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기도 하고 죄인 아닌 자를 죄인으로 일단 간주하기도 하고 유월절 명절에 있는 특사의 혜택을 그리스도께 입혀서 그리스도를 놓아 주려고도 해봅니다.

그리고 이것들 위에 그는 죄 없는 자를 흠뻑 때려 줌으로 고소자의 마음을 만족 시켜보려고 시도해 보기도 했습니다. 가시관을 씌워서 피 흘리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임으로 동정을 사서 군중 속에서 그리스도의 무죄를 외치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실패할 때에 그는 손을 씻으며 나는 무죄하다고 책임을 회피합니다. 이 비겁한 행동을 그리스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생각컨대 더욱 섭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그리고 병고침 받은 수 많은 사람들, 또한 죽었다가 나흘만에 다시 살아난 베다니 나사로 같은 사람이 어찌하여 이 법정에 나와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무죄를 말해 주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이 같은 몰인정한 세대에 홀로 서신 예수 그리스도는 말이 없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의인의 침묵이었습니다. 원래 죄인이 말이 많은 것이며 거짓말은 설명이 길고 궤변은 그 논리가 장황한 법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진리는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며 의는 언제나 담담한 것입니다. 의인의 침묵 속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사장의 죄와 빌라도의 비겁함을 다 아시지만 그는 의인이기에 말이 없었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람이기에 변명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더구나 사랑하시기에 더욱 말이 없었다고 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을 박는 바로 그 군인들을 사랑하셨으며 예수를 파는 가롯 유다까지라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말이 없었습니다.

상황의 여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와 불쌍히 여기는 자가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참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순간 오직 세 가지만을 생각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동산에서 문제의 해결을 다 보았었다고 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즉 기도로서 문제의 해결을 하였습니다. 참 사람은 사건을 사람에게 물어 해결보지 않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밤새 기도하시어 문제 해결의 응답을 받으시고 이제 이 법정에 선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오실 때 체포되시는 순간,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즉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를 생각하셨고, 또 "이렇게 되지 아니하면 이 일이 이루리라 하신 성경 말씀이 어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오늘 여기서 나를 통하여 성취시키고저 함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을 이루는 생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만민을 사랑하심입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것입니다. 참 사랑은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를 위탁하고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나를 통하여 이루고저 하며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대신 죽으려는 희생 안에서 자기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인간의 삶의 길입니다. 그리스도는 초연하셨고 담대하였으며 용감 하셨습니다. 승승장구의 위세가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빌라도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이기셨고 믿음으로 이겼으며 소망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시고 부활로서 그 승리를 확증하신 것입니다.

변화무쌍한 현실, 부조리한 세대, 모순투성이의 사회 안에서 참 인간의 초연한 담력과 승리의 생활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떠들며 세상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사람에게 물으며 실망하고 그 마음에 번민이 있고 그 입에 한숨이 있는 그러한 불신앙적 인간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모든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러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참 사람, 이 세대가 참으로 요구하는 참 사람을 바로 보십시다. 그를 믿고, 그를 따르고, 그를 배웁시다.

그를 알 때 참 사람 나를 알게 되고 그를 사랑할 때 내 안에 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그를 순종할 때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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