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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다는 죽은 자(요한계시록 3장 1~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병 중에 제일 무서운 병은 역시 정신병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으로는 병든 것이 가장 불쌍한 일이고, 외모로는 건강하나 속에서 썩고 있는 병이 무서운 병이며, 더욱 더 비참한 것은 병든 사실을 자기가 모르고 있는 그러한 병 즉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병든 사실이나 또 아픈 줄도 모르는 병은 가장 비참한 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병이 불쌍한 병이고 문둥병이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즉 스스로 속고 있을 때 그 때가 가장 비참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다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가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같이 자기 속임수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았을 경우에는 원심을 불러일으키며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고, 이 정신적 힘 때문에 강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에게 속았을 경우에는 절망과 자학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사데 교회」의 형편은 현대문명과 현대인을 고발해 주는 심판적인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데 교회」의 형편과 그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과 모습을 밝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사데 교회」의 모습은 두개의 다른 모습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데 교회」교인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보시고 알고 계시는 자기 모습입니다. 사데 교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어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은 죽은 자로 알고 계셨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이란 본래성을 뜻하며 나타난 바를 가리킵니다.
본래는 살았던 것이며 지금도 다른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살았고 이름만은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 속에서의 진실한 내용으로는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형편이 가장 비참한 처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죽은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더라면 오히려 길이 있었겠는데 살았다는 교만과 살아 있다는 이름 때문에 회개의 길마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속임수에 걸린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았다는 것은 감각이 있고 생각이 있고 활동과 성장이 있음을 뜻하며 죽음은 무감각과 절망과 정지, 그리고 냄새가 나서 근접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명 문제는 곧 근본 문제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었다면 이것은 완전한 실패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한 아름다움이 있고 속에는 썩은 시체뿐인 그러한 비참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사데 교회」만이 아니라 현대 문명과 오늘의 사회 형편 그리고 교회의 모습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 상태가 이러한 처지에 있지 아니한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확실히 윤택하여진 것 같으나 그 속에 있는 정신문화는 매우 결핍되었고 통계 숫자로서는 자랑할 것이 있으나 사회 깊숙히 파고 든 죄악과 불신 그리고 불안은 날로 더하며 명예와 지위는 훌륭한 것 같으나 공허감과 좌절감은 극에 달한 것이 사실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교회의 모습과 형식과 율례에 따를 뿐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신앙생활,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이제 사실을 사실대로 속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본 내 모습이나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내 형편에 집착되어서 진실한 자기를 상실한 어리석고 미련한 처지에서 속히 떠나서 자기를 부인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내가 알고 인정하며 수락해야 할 것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에 더 이상 속지 말고 실상을 알아서 죽은 바된 자기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언을 순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서부터 다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안에서 살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살았다고 자랑하는「사데 교회」를 죽었다고 선언하신 심판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다시 살기를 촉구하시고 살길을 보여 주십니다.
실상은 죽었다고 선언하시는 그 선언 자체도 살리기 위한 선언입니다.
죽음의 선언이 있고야 삶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라는 말씀입니다. 혼미하고 몽롱한 가운데 불가피성과 필연성,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에 끌려가지 말고 생각하고 의식을 분명히 해서 지금의 자기 처지의 진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의식 없이 된 일은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확실한 자기 의식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잘 되겠거니, 살아 있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과 방관적인 생각이 멸망의 원인이 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처지에 있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앞에 어떠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식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현대문명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며 이 지구를 비롯한 온 인류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 밝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일깨워야 합니다. 잠자는 상태, 무의식, 무관심의 상태에서 일깨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 편리한가, 불편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살았는가, 죽었는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생명 문제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깨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죽는 중에도 남은 바가 있는데 그 남은 바를 굳게 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절망은 죄입니다. 어떤 죽은 처지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 것입니다.
회당장 「야히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모두들 딸이 죽었다고 울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 안에 있는 생명을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보셨고 죽은 자 중에서 부활을 믿고 계신 것입니다.
더욱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남은 바 산 것 그것을 굳게 하라고 일러주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기보다 가능한 것을 먼저 가능케 함이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런 즉 죽는 중에도 남은 바, 산것----그것을 굳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있는 가능성을 굳게 하고 남아 있는 그 생명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힘을 기울여 따라야 합니다. 없는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있는 기회 안에서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생명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까운 곳에 그리고 깊은 곳에 있습니다. 남은 바 적은 생명의 빛을 이제 되살리며 극대화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종말을 고하는 모든 외침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이제 끝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허무에 빠져서 실의와 좌절 속에서 무엇인가 참 생명의 길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는 막연한 호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질 문명에 편승한 현대 철학가들이 개중에는 성숙의 세대가 왔다고, 또는 그래서 무종교시대가 올 것이라고 떠들어 보았는데 이제는 허무에 빠졌고 종말에 온 것을 다 같이 긍정합니다. 잘사는 때가 아니라 공포의 시대 무종교 시대가 아니라 미신의 시대, 성숙의 시대가 아니라 자멸의 시대가 온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바 생명의 부르짖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또한 어디서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즉 근원으로 돌아가며 복음의 순수한 시작으로 돌아가라고 길을 보여 줍니다.
어떤 일이건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그 자리에서 그 목적과 그의 본래성을 다시 묻는 것은 지혜를 얻는 길이 됩니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본래 이 일을 시작했던가를 물어 보자는 것입니다. 도시인간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세계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인간 역사의 본래성이 무엇입니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어디서 받는 것입니까? 인간 스스로 자기 뜻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살수도 없고 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생명은 어떻게 받은 것입니까? 진노의 자녀요, 명망 받을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생명의 근원과 구속하신 자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 하나의 생명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지불된 그 귀한 대가를 잊어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과 환난을 통하여 얻어진 귀한 믿음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면서 다시 새 생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은 자의 무덤을 장식하는 것 같은 헛된 문화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생명을 진단합시다. 생명이 있을 때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서 그에게 충성함으로 생명을 다시 찾으며 생명에서 오는 생기에 넘친 산 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살았다는 죽은 자(요한계시록 3장 1~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병 중에 제일 무서운 병은 역시 정신병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속으로는 병든 것이 가장 불쌍한 일이고, 외모로는 건강하나 속에서 썩고 있는 병이 무서운 병이며, 더욱 더 비참한 것은 병든 사실을 자기가 모르고 있는 그러한 병 즉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병든 사실이나 또 아픈 줄도 모르는 병은 가장 비참한 병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병이 불쌍한 병이고 문둥병이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즉 스스로 속고 있을 때 그 때가 가장 비참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다른 사람에게 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다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는 가련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같이 자기 속임수에 빠져 있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속았을 경우에는 원심을 불러일으키며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고, 이 정신적 힘 때문에 강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자기에게 속았을 경우에는 절망과 자학 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사데 교회」의 형편은 현대문명과 현대인을 고발해 주는 심판적인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데 교회」의 형편과 그 교회에 주신 말씀에서 오늘 우리의 현실과 모습을 밝혀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사데 교회」의 모습은 두개의 다른 모습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사데 교회」교인 자신들이 생각하는 자기 모습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보시고 알고 계시는 자기 모습입니다. 사데 교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기들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어 있었고 그리스도께서도 그들은 죽은 자로 알고 계셨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름이란 본래성을 뜻하며 나타난 바를 가리킵니다.
본래는 살았던 것이며 지금도 다른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시기에는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살았고 이름만은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 속에서의 진실한 내용으로는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형편이 가장 비참한 처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죽은 자기의 모습을 바로 볼 수 있었더라면 오히려 길이 있었겠는데 살았다는 교만과 살아 있다는 이름 때문에 회개의 길마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속임수에 걸린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살았다는 것은 감각이 있고 생각이 있고 활동과 성장이 있음을 뜻하며 죽음은 무감각과 절망과 정지, 그리고 냄새가 나서 근접도 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명 문제는 곧 근본 문제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었다면 이것은 완전한 실패입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겉으로는 그럴듯한 아름다움이 있고 속에는 썩은 시체뿐인 그러한 비참한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다.
「사데 교회」만이 아니라 현대 문명과 오늘의 사회 형편 그리고 교회의 모습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 상태가 이러한 처지에 있지 아니한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확실히 윤택하여진 것 같으나 그 속에 있는 정신문화는 매우 결핍되었고 통계 숫자로서는 자랑할 것이 있으나 사회 깊숙히 파고 든 죄악과 불신 그리고 불안은 날로 더하며 명예와 지위는 훌륭한 것 같으나 공허감과 좌절감은 극에 달한 것이 사실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는 교회의 모습과 형식과 율례에 따를 뿐 아무 힘도 없는 무력한 신앙생활, 이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이제 사실을 사실대로 속히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본 내 모습이나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내 형편에 집착되어서 진실한 자기를 상실한 어리석고 미련한 처지에서 속히 떠나서 자기를 부인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나의 적나라한 모습을 내가 알고 인정하며 수락해야 할 것입니다. 살았다는 이름에 더 이상 속지 말고 실상을 알아서 죽은 바된 자기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죽었다는 그리스도의 선언을 순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여기에서부터 다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안에서 살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살았다고 자랑하는「사데 교회」를 죽었다고 선언하신 심판주가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다시 살기를 촉구하시고 살길을 보여 주십니다.
실상은 죽었다고 선언하시는 그 선언 자체도 살리기 위한 선언입니다.
죽음의 선언이 있고야 삶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깨라는 말씀입니다. 혼미하고 몽롱한 가운데 불가피성과 필연성, 그리고 본능적인 욕구에 끌려가지 말고 생각하고 의식을 분명히 해서 지금의 자기 처지의 진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의식 없이 된 일은 내가 한 일이 아닙니다. 확실한 자기 의식을 먼저 가져야 합니다. 잘 되겠거니, 살아 있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과 방관적인 생각이 멸망의 원인이 됩니다. 지금 내가 어떤 처지에 있으며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 앞에 어떠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역사의식을 바로 해야 하겠습니다.
현대문명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며 이 지구를 비롯한 온 인류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가 밝혀 알아야 되겠습니다. 일깨워야 합니다. 잠자는 상태, 무의식, 무관심의 상태에서 일깨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 편리한가, 불편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살았는가, 죽었는가,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의 생명 문제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깨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죽는 중에도 남은 바가 있는데 그 남은 바를 굳게 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절망은 죄입니다. 어떤 죽은 처지에서도 소망을 잃지 말 것입니다.
회당장 「야히로」의 딸이 죽었을 때에 모두들 딸이 죽었다고 울었습니다만 예수께서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 안에 있는 생명을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현재에서 미래를 보셨고 죽은 자 중에서 부활을 믿고 계신 것입니다.
더욱이 영원한 생명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남은 바 산 것 그것을 굳게 하라고 일러주십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기보다 가능한 것을 먼저 가능케 함이 생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런 즉 죽는 중에도 남은 바, 산것----그것을 굳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있는 가능성을 굳게 하고 남아 있는 그 생명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힘을 기울여 따라야 합니다. 없는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있는 기회 안에서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생명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가까운 곳에 그리고 깊은 곳에 있습니다. 남은 바 적은 생명의 빛을 이제 되살리며 극대화하면 살 길이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종말을 고하는 모든 외침들이 공통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이제 끝에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허무에 빠져서 실의와 좌절 속에서 무엇인가 참 생명의 길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는 막연한 호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질 문명에 편승한 현대 철학가들이 개중에는 성숙의 세대가 왔다고, 또는 그래서 무종교시대가 올 것이라고 떠들어 보았는데 이제는 허무에 빠졌고 종말에 온 것을 다 같이 긍정합니다. 잘사는 때가 아니라 공포의 시대 무종교 시대가 아니라 미신의 시대, 성숙의 시대가 아니라 자멸의 시대가 온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바 생명의 부르짖음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또한 어디서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즉 근원으로 돌아가며 복음의 순수한 시작으로 돌아가라고 길을 보여 줍니다.
어떤 일이건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그 자리에서 그 목적과 그의 본래성을 다시 묻는 것은 지혜를 얻는 길이 됩니다.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본래 이 일을 시작했던가를 물어 보자는 것입니다. 도시인간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며 세계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인간 역사의 본래성이 무엇입니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어디서 받는 것입니까? 인간 스스로 자기 뜻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살수도 없고 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은 생명은 어떻게 받은 것입니까? 진노의 자녀요, 명망 받을 죄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생명의 근원과 구속하신 자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 하나의 생명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지불된 그 귀한 대가를 잊어서도 안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과 환난을 통하여 얻어진 귀한 믿음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생명의 근원을 생각하면서 다시 새 생명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죽은 자의 무덤을 장식하는 것 같은 헛된 문화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생명을 진단합시다. 생명이 있을 때 모든 물질과 모든 환경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는 그리스도께로 돌아가서 그에게 충성함으로 생명을 다시 찾으며 생명에서 오는 생기에 넘친 산 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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