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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되게 하는 비결(창세기 11장 1절~9절)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 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 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 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탑은 오늘도 많은 고고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4천여 년 전에 이런 탑을 계획할 수 있었으며,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로움이 고고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비행기를 타고 높은 곳에서 지상을 바라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현대의 상징인 높은 건물들을 내려다보면, 왠지 바벨탑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들어 주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드릴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들이 바벨탑 쌓는 공사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를 중지시키신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수고와 지혜와 협동, 그리고 그들의 집단력을 하나님은 허락치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셨고 자연을 다스리며 집도 짓고 산업도 경영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바벨탑 공사를 중단시키신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모처럼 사람들이 합심하여 이루려는 일을 왜 가로막으시는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는 신학적 의미를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공업화 안에 있는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신 사건입니다. 바벨탑을 쌓게 된 동기는 노아 홍수로 인한 피해 의식 때문에 다시는 홍수가 있더라도 흩어짐을 면해 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정말 노아 홍수는 지구상의 큰 변혁이었습니다. 홍수가 온 지면을 뒤덮어서 그야말로 천지 개벽 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지질학자들도 이것을 사실로 시인하고 있습니다. 시베리아에는 만년설로 된 빙하가 있는데, 그 빙하를 개발하는 중에 250만 마리의 매머스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그 매머스를 해부해 보니 뜻밖에도 그 뱃속에는 열대 지방의 물고기가 있었다니,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노아 홍수 이전에는 저 시베리아도 열대 지방이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노아 홍수는 지구를 한번 크게 변화시킨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다 죽고 노아의 여덟 식구만 살아남았다가 몇백 년 지나는 동안에 상당한 인종을 이루었습니다. 이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대이동을 하다가 드디어 넓은 땅 시날 평지를 만납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다 하여 정착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넓은 평지를 보고 농사를 짓자든지 산업을 경영하자고 했으면 좋겠는데, 높은 탑을 쌓자는 발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홍수로 혼이 났기에 다시는 그런 피해를 막아 보자는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피해에 대한 잠재의식이 발동해서 튼튼하고 높은 탑을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3-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에 역청을 쓰는 새로운 가공법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견고히 굽자", "하늘에 닿게 하자"라고 말하며 그들의 계획을 시행했습니다. 이것은 자연에 순응하기보다는 대항하고 자연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또한 한계를 모르는 과학주의와 하나님께 도전하는 공업화의 교만입니다. 과학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편리한 생활을 누리며 윤택함을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선 과학주의, 즉 과학이 우상이 되고 있음은 큰 문제입니다. 얼마나 높게 쌓아서 탑을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인간의 교만의 극치로, 가소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정복」이라는 단어를 너무 헤프게 쓰는 데 다소 저항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면 에베레스트산 정복이다, 달을 정복했다는 따위의 이야기들입니다. 물론 이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희생되었기에, 생명을 걸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간 그 인간 의지에 대해서는 경탄해 마지않습니다만 그것으로 산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태양계도 얼마나 광활한 분야입니까? 그런데 우주 대기권을 조금 벗어났다가 돌아와서는 "우주를 정복했다"라고 말해도 좋으냐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인간의 오만이 들어 있는 것 같아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또한 공장 몇 개를 지어 놓고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고 큰소리치니,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이런 교만한 발상이 인간성을 파괴해 가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학생들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정말 불쌍할 정도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학을 입학하고 나서입니다. 일류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은 이제 다 이룬 것으로 착각하여 기고만장해지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인데 굉장한 것을 이루었다는 교만으로 성격까지 버리는 일이 있으니 말입니다. 마치 조그마한 일 하나 해놓고 전부를 얻은 것처럼, 아니면 작은 일에 실패하고서는 전부를 잃은 것처럼 경거 망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건강, 지식, 시간, 지혜, 기술 등은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왜 모르는가 말입니다. 어떻게 하늘까지 닿도록 탑을 쌓자는 오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둘째, "우리 이름을 내자"고 말하는 그들의 명예욕을 하나님은 허락치 않으셨습니다. 명예욕은 문명인의 잠재의식에서 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상대적 가치에 준해서 경쟁 의식에서 나온 고민입니다. 내가 못살아서가 아니라 내 이웃이 잘 살아서 고민이란 말입니다. 네가 크냐 내가 크냐 하는 경쟁 의식으로 필요 없는 고민과 절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은연중에 동양 제일이다, 세계 제일이다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 이름도 동리마다 제일교회, 중앙교회, 제일 중앙교회라는 이름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제일'이라는 단어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자기가 제일이라는 자기 자랑이 큰 문제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남자들의 욕망은 몇 단계로 발전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는 이것저것 알고 싶어하는 탐구욕이 있습니다. 여기서 좀 자라면 무엇인가 가지고 싶어하는 소유욕이 생기고 다음에는 가지고 싶은 것과는 성격이 다른 성취욕이 생긴다고 합니다. 가지지 못하고 다 쓰지도 못하지만 무엇인가 이루고 싶은 성취욕이 남자들의 한때를 좌우합니다.
그리고는 정치욕이 생깁니다. 그래서 사업을 잘 하던 분이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교직에 잘 계시던 분이 어느 날 느닷없이 정치에 들어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욕망은 다스리는 욕망으로 아주 강렬한 욕망입니다. 마지막으로 명예욕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여기저기서 감사패니 감사장이니 하는 것이 수도 없이 팔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내어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이름 석자가 뭐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쓸데없는 일로 시간과 정력을 많이 소비하고 고민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는 집단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집단화란 도시화를 말합니다. 세계가 다 그러하듯이 우리 나라 인구의 약 60%가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도시화에는 기계화, 공업화, 생산화도 함께 따라갑니다. 여기에 갖은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학자는 "도시는 마귀가 만들고 농촌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집단화에서 오는 악으로는 집단 테러리즘이 있습니다. 다수의 결정으로 정해지는 집단적인 악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독재란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단으로 다수가 결정하는 독재가 곧 의로, 진리로 통하려는 무서운 악이 있습니다. 요즘 권력형의 악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집단적인 악을 의미합니다. 그저 협동해서 힘으로 몰아붙이는 그 일에 절대 가치를 두려는 엄청난 악이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제 다시 정리해보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은 그들의 한계성을 잊어버리고, 이름을 내고, 안정을 위하여 협력해서 바벨탑을 쌓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를 가만두지 않으시고 심판하십니다. 분열이란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합치자고 아무리 손을 잡고 협상을 하고 맹서를 하고 혈서까지 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치 않으시면 분열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 불신앙적인 건설, 불의한 협동,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분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그러므로, 합치기만 하고 지지만 받으면 된다는 망상은 버려야 합니다. 집단이면 곧 힘이라는 생각은 하나님께서 허용치 않으십니다. 사실 요즘 우리들의 현실에서도 하나되어야 함은 얼마나 절실합니까? 하나되지 못함에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분열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되지 못하게 하셨단 말입니다.
바벨탑 사건에서의 분열은 언어를 혼잡케 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문화적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심판에는 유황불, 홍수, 전쟁 등을 도구로 사용하시어 내린 무서운 심판이 있고, 바벨탑에서 보는 것처럼 조용한 것 같으나 엄연한 문화적 심판이 있습니다. 언어가 소통되지 못하면 하나될 수 없는 충분한 조건이 됩니다. 그렇다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다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요즘 현대에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사람이 적습니다. 오직 자기 말만 열심히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에도 상대방의 말은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말만 계속합니다. 들을 수 있는 인내가 없기에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소리만 있고 대화가 없는 것입니다. 협상만 있고 일치가 없는 것이 오늘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러므로 그토록 하나되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박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사업을 크게 경영하는 분이었고 아내는 대학 교수였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30년 동안 별탈 없이 편안한 가정을 꾸미고 있는 부부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평생 이렇다할 정다운 대화 없이 냉전 아닌 냉전으로 30년을 힘들게 살아 왔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면서 뜻한 바 있어 그들은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면서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부부 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전에 없이 남편은 "여보, 내가 잘못했소. 미안하오" 하더랍니다. 깜짝 놀란 부인은 사흘 동안 감격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지난 30년 동안에는 한번도 양보한 적 없고 더우기 사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교만한 사람끼리 모여서는 저마다 옳고 잘났는데 무슨 화해가 있고 일치가 있겠습니까? 그저 동숙자일 뿐 가정도 사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세월이 흘러도 방법을 바꾸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계를 모르는 인간의 교만과 욕망을 심판하시며 불신앙을 심판하십니다. 그 결과로 분열은 끝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15개국 이상의 각 나라 사람들이 모여서 언어가 뒤섞여 있었는데, 베드로가 설교하자 이상하게도 방언의 은사가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 나라 말로 듣게 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아랍어로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들이 전부 자기 말로 들어서 언어가 소통된 것입니다. 혼잡한 언어, 혼잡한 문화 속에서 협소한 민족주의나 민족적 우월감 내지는 교만들이 다 무너지면서 마음과 뜻이 통하고 언어가 소통된 것이 초대교회 방언의 기적입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에서는 한 민족, 한 언어인데, 하나님이 흩어 놓으심으로 언어가 혼잡해졌습니다. 이 두 사건은 매우 대조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가정, 사회, 정당, 민족, 나아가서 세계가 하나되어야 함은 모두가 소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불신앙과 교만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하나되는 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의와 믿음과 은혜, 그리고 겸손과 온유 안에서만 하나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게 하시고 이웃과 이웃을 하나되게 만드셨습니다. 이제 십자가 앞에 내 교만과 나의 좁은 뜻을 묻어 버리고 순수한 신앙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하나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내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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