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50:4-9 롬 8:31-36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이란 이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길에 자신들의 겉옷을 펴면서 ‘호산나’ 소리를 치르며 예수님을 환영하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왕을 환영하듯이 환호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나귀를 타신 초라하고 겸손한 모습이었습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길은 겸손으로 낮아지는 길이요, 십자가를 향한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네 가지 모습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1. 인간, 예수
첫째로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성의 하나입니다. 다른 일반 종교에서 대부분의 신은 높은 곳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신들은 높은 신적 세계에서 인간의 세계를 내려다 보며 인간을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일방적으로 운명의 짐을 지워줍니다. 무신론적인 종교에서는 사람이 구도의 삶을 통해서 진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됨을 버리셨습니다.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는[예수님]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빌 2:6-7).
기독교의 구원은 우리가 위로 올라가는 구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입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3). ? 성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20). ?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6). ? 성령 하나님의 임재 약속입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중에 심한 병에 걸려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계셨던 분이 있습니까? 아파본 사람들은 느끼는 일입니다마는 성의껏 병을 고치는 의사도 고맙습니다. 하지만 가장 고마운 사람은 병의 고통을 함께 동반해 주며 함께 있어주고 손을 잡아 주고 기도해 주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이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도우시는 것입니까? 인간은 죄인입니다. 인간 중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3:10).
죄인된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기독교의 독특성입니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하나님께서 낮아지고 또 낮아지셔서 죄인과 같이 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뿐 아닙니다. 죄 없는 예수님이 스스로 죄인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인처럼 사시고, 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시고, 죄인과 함께 식사하시고, 죄인과 함께 주무시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극악 무도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죄인 중의 죄인이 되셨습니다.
2. 고난의 종, 예수
둘째로 예수님은 고난 당하는 종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이 바로 고난 당하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종은 등을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여러분, 등에 가해지는 채찍을 맞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수염을 뽑히는 수치를 당해보셨습니까? 우리 중에 한 사람도 그런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수염을 뽑히는 일은 남성의 권위와 인간됨 전체에 대한 극단적인 모독인 것입니다. 뺨을 맞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간성의 비하입니다. 침을 밷는 모독을 당할 때 우리는 무엇을 느끼게 될까요?
그런데 여호와의 종은 이렇게 모욕을 주는 적들에게 저항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이러한 폭행을 피하기 위하여 도망하지 않았습니다(6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습니다”(이사야 53:7).
왜 하나님은 그의 종을 무능하게 보일 정도로 비폭력적이며 무저항적인 태도를 가지게 하십니까? 왜 예언자들, 예수 그리스도, 사도들은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거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폭력을 폭력으로 대항하면 폭력을 절대로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 5:38-39)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종이 궁극적으로 할 일은 이 땅 위에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공동체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동해복수법적인(탈리온법) 방법으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통치하심은 폭력이 아니라 겸손과 비폭력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다스리심은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칼과 창을 들고 적대자들을 물리치고 통치하는 군왕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오히려 원수들의 칼과 창에 찔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3. 대제사장, 예수
셋째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왔습니다.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갈 길은 철저하게 막혔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중재자는 없습니다.
이렇게 중재하는 직책을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의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대제사장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며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대제사장’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연약함과, 아픔, 고통을 모두 경험하여서 우리를 아주 잘 이해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됩니다. 예수님만 계시면 우리는 아주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하나님께 더 잘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히 5:2).
오늘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제가 너무 괴로워요. 저는 너무 약해요. 나를 도와주세요. 주님도 이런 고통을 당하셨지요? 주님 내 고통을 이미 아시죠? 절 도와 주세요!
둘째, 예수님은 ‘통곡의 대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애통하시며 기도하신 분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 히브리서 5장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이 눈물은 단순히 자신의 고통을 위한 눈물, 자기 연민의 눈물이 아닙니다. 인간적 한계 속에 있는 모든 연약한 인간, 모든 인류를 위한 애통의 눈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를 위해 찢어지는 가슴으로 통곡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우리의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갈길을 몰라 헤멜 때, 실패 속에서 좌절하고 있을 때, 병 중에서 혼자 외롭게 싸우고 있을 때,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깊어 괴로워하고 있을 때, 죄악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죽음의 골짜기에 떨어져 신음하고 있을 때, 날 위해서 통곡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눈물, 그 사랑, 그 고통이 우리를 살립니다.
셋째, 예수님은 ‘순종의 대제사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 신약 본문 히브리서 5장 8-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4. 희생양, 예수
넷째, 예수님은 ‘희생양’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보통 제사장이 드리는 짐승을 잡아서 드리는 제사는 사람이 죄를 지을 때마다 반복해서 드려야 합니다. 왜 그렇게 반복해야 할까요? 한 마디로 말해서 효력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약을 먹을 때, 약효가 12시간 지속이 되면 하루에 2번 약을 먹습니다. 약효가 24시간 가면 하루에 한 알씩 매일 먹습니다. 이처럼 동물의 희생으로 드리는 제사는 반복해야 합니다.
과거에 하루에 여러 번, 그리고 오랜 기간 주사를 맞다가 보면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살이 온통 피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수십번을 계속 맞아야 하는 약의 효력을 요즘 강도 높은 단 한번의 주사로 완전한 치료의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또 맞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의 효력이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단 한번의 제사로 영원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반복되고 계속되는 제사가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왜 짐승의 제사는 반복하고, 예수님의 제사는 단 한번으로 족합니까? 어디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하는 능력이 나옵니까?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사는 죄값을 완전하게 갚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사는 죄의 값을 치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행 빚을 다 갚지 못하면 일정기간 이자까지 빚이 늘어 납니다. 얼마를 갚지만 또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빚을 완전히 갚으면 또 갚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죄의 값을 갚는 방법은 자기의 생명을 드려야 합니다. 사람을 대속할 완전한 제사는 사람의 목숨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이 생명을 대신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생명의 빚을 대신 갚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생명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남의 빚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므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므로 다른 사람의 죄값을 대신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제사가 결정적인 효력을 갖는 것은 이 한 번의 제사가 예수님 당신 자신을 드린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그리하여 누구든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드리고 예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서 약동합니다. 우리의 죄악은 죽음으로 끝나고, 이제는 예수님의 거룩한 영이 우리를 거룩하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십자가의 치욕과 고통을 도리어 영광으로 여기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우리도 잘 썩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잘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5. 고난의 능력
이처럼 예수님의 네 가지 모든 모습 ? 인간, 고난이의 종, 제사장, 희생양 - 은 고난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감당하는 능력은 어디서 나옵니까?
하나님의 종이 아무런 말 없이 고난을 받아들인 것은 자기가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이 대적자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폭력을 쓰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도우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0장 7절에 “내 얼굴을 부싯돌 같이 굳게 한다”는 말은 표준 새번역에는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고 번역했습니다. 부싯돌이 무엇입니까? 부싯돌은 서로 부딪쳐서 불을 내야 합니다. 부서지면 안됩니다. 단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 부딪치는 고통을 참아야 합니다. 얼굴이 부싯돌처럼 단단하고 부딪쳐서 불이나는 고통을 참아 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이런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1-32).
우리가 이 세상에 구원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이 고난의 종,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더 강해지기를 원하십니까? 더 부해지기를 원하십니까? 더 높은 권력을 갖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의 고난의 종의 모습을 닮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구약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난의 종의 모습을 닮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 예언을 몸소 삶 가운데 이루기 위해 배우셨습니다. 우리도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배우고 본 받아야 합니다. 오늘 이사야 50장 4절에 “학자의 혀”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학자가 무엇입니까? 제자가 되어 진리를 배우고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맘몬을 따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우리 주님이 되는 거지요. 우리는 권력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힘이지요. 우리는 편안함, 안락, 안정을 추구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은 쾌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와 권력과 쾌락과는 전혀 다른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고난의 종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기도의 언어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의 개인 기도를 녹음해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진정 바라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 땅 위에 진정한 평화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하여서는 지금의 기독교도 이러한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기독교가 서구 세계로 들어간 다음, 기독교는 이 고난의 종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예수를 정치적, 군사적 승리자로 오시는 영광의 메시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황제의 기독교’, ‘제국주의의 기독교’, ‘힘의 기독교’, ‘영광의 기독교’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승리자로 오시는 영광의 메시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왕관을 쓰고, 황금면류관을 쓰신 메시야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머리에 쓰신 것은 머리를 찔러 피를 흘리는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순절기간,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길을 걸어가시며, 십자가로 향하시는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교회는 고난의 종의 모습을 다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고 가신 고난의 종의 모습을 다시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박병욱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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